주체사상 발전과정에 있어 주체철학과 인간 중심 철학의 분화

 주체사상과 마르크스주의 2


                                                         김장민(정치학 박사, 프닉스)

 

1. 문제의 제기

 

주체사상총서에 따르면 주체사상은 주체의 사상, 주체의 혁명이론, 주체의 영도방법으로 구성돼 있다. 주체의 사상은 제1권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 2권 주체사상의 사회역사 원리, 3권 주체사상의 지도적 원칙을 내용으로 한다. 주체의 혁명이론을 보면, 4권이 혁명의 주체와 방식 등 혁명이론 일반,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을 다룬다. 5권은 공산주의 건설과 세계혁명 및 조국통일 이론, 6권은 모든 성원의 노동계급화와 인테리화 및 사상개조 등 인간 개조 이론, 7권은 사회주의경제 건설의 목표와 조건 및 토대 그리고 지도관리방법, 8권은 사회주의문화 건설의 일반이론 및 부문이론을 포함한다. 끝으로 주체의 영도방법은 제9권 영도 체계, 10권 영도 예술을 내용으로 한다.

주체철학은 주체사상 중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1권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는 마르크스주의 유물변증법과 구별되는 철학의 근본문제를 다루고 있다. 또한 제1권은 사회적 존재로서 사람의 사회적 속성인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규명하고 세계에서 사람의 지위와 역할 등을 설명한다. 2권 주체사상의 사회역사원리는 마르크스주의 유물사관의 입장과 달리 인류역사를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의 역사로 보며, 이 투쟁에서 결정적인 것은 생산력과 같은 물질적인 조건이 아니라 인민대중의 자주적인 사상이라고 주장한다.

3권 주체사상의 지도적 원칙은 당 및 국가의 활동, 혁명과 건설의 모든 분야에서 주체를 세우기 위한 지침이다. 이 지침에 따르면 사상에서 주체, 정치에서 자주, 경제에서 자립, 국방에서 자위 등 자주적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또한 인민대중에 의거하고 실정에 맞는 창조적 방법을 구현해야 한다. 사상개조를 선행한 후 정치사업을 우선에 두는 등 사상을 지도의 기본으로 틀어줘야 한다. 4권부터 제8권까지의 혁명이론은 중국과 소련의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이론을 북의 관점에서 수정 보완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9권 영도체계란 수령의 지도와 대중을 결합시키는 것으로 당과 수령의 영도를 실현하기 위한 당과 기구들의 총체를 지칭한다. 영도체계는 '수령의 유일적 영도체계''당위원회의 집체적 지도체계'로 나뉜다. 두 가지 중 중요한 것은 수령의 유일적 영도체계인데 이것은 혁명과 건설에 대한 수령의 유일적 영도를 철저히 보장하여 노동계급의 혁명위업, 사회주의, 공산주의위업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다.

10권 영도예술이란 사람들을 움직이는 방법이다. 군중 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의견을 귀담아 듣고 그들이 창발성을 내어 일하도록 적극 고무하며 군중을 발동하여 제기된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주체사상은 1980년대 후반부터 친북 이데올로기로서 학생운동권내에서 회자되었지만 국가보안법과 냉전이데올로기 때문에 학문적으로 다뤄지지 못했다. 그런데 주체사상은 황장엽의 망명 이후 남에서 학문적으로 주목받았다. 황장엽이 주체사상 특히 주체철학 그중에서도 사람 중심의 철학의 모델인 인간 중심의 철학의 창시자를 자처하면서 자신의 변질된 주체철학을 반북이데올로기의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주체철학에 드리워진 친북이라는 낙인이 일부 퇴색됐다. 마찬가지로 한때 주체사상에 몰입하였던 김영환류의 반북인사들이 자신들의 변질된 주체사상을 반북이데올로기로서 사용해왔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2000년대 들어 주체사상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다. 주체사상에 대한 연구는 단순한 소개와 연혁, 그리고 북에서의 위상변화를 검토하는 수준에서 주체철학 특히 황장엽의 인간 중심의 철학이 친북이데올로기에서 반북이데올로기로 전환되는 학문적 논거를 밝히는 수준으로 발전해왔다.

첫째 이 논문은 주체사상의 발전과정을 검토하고 주체철학이 언제 어떤 과정을 통해 주체사상에 포함되었는지를 살펴본다. 특히 주체사상총서에서 보듯이 주체사상이 주체철학을 자신의 철학적 원리로 삼은 후 그것으로부터 혁명이론과 영도이론을 체계적으로 전개하고 있는데, 이러한 서술체계에 맞게 시기적으로도 주체철학이 먼저 성립해왔는지를 살펴본다. 이 논문은 이러한 시간적 정서를 통해 주체철학이 주체사상의 형성과정에서 주체사상의 구체적인 내용을 만들어 내는 사상적 근원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였는지를 검토한다.

둘째 이 논문은 주체사상의 핵심인 사회정치적 생명체수령관이 주체철학에 의해 이론적으로 정당화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수령체제가 이런 수령관에 의해 성립되었는지, 아니면 수령체제는 1980년대 수령관과 무관하게 그전에 이미 성립되었는지를 살펴본다.

셋째 이 논문은 주체철학이 황장엽의 인간 중심의 철학과 어느 때부터 차별성을 지니게 되었는지, 그 차이가 무엇인지 살핀다. 이를 위해 주체철학의 실질적인 내용 즉 사람 중심의 철학이 자신의 인간 중심의 철학을 바탕으로 성립됐다는 황장엽의 주장을 먼저 검토한다.

넷째 이 논문은 주체사상이 김정일의 권력승계, 사회주의 붕괴, 김일성의 사망, 고난의 행군, 황장엽의 망명, 김정일의 사망, 김정은의 권력승계 등 주요한 고비에서 그 위상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살펴본다. 특히 황장엽의 망명 이후 황장엽의 인간 중심의 철학과 유사한 주체철학, 사람 중심의 철학의 위상 변화를 검토한다.

 

 

2. 주체사상의 범위와 주체철학

 

주체사상은 원래 중국과 소련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또한 그러한 노력 등으로 인해 중국과 소련의 지원이 감소하는 조건에서 주체사상은 자주와 자력갱생의 국가이념으로서 성립했다. 하지만 주체사상의 이러한 자주와 자력갱생의 가치는 과거로는 항일무장투쟁시기로 소급하였으며, 미래로는 미국의 대북봉쇄에 따른 조미대결전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북은 항일무장투쟁과 항미전쟁을 연장선에 두고 수령과 당 및 인민대중이 두 개의 전쟁을 타승했다.”고 자평하고 있다.

주체사상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들은 좁게는 주체사상총서이다. 하지만 주체사상이 국가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 주체사상의 내용을 자세히 파악하려면 주체사상의 관점에 따라 집체적으로 작성된 역사책, 김일성과 김정일의 노작(교시), 국가적 목적에 따라 창작된 문학, 예술 작품도 참고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주체사상을 정당화하고 그 내용을 대중적으로 전파하는 역할을 한다.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과거 항일운동이 주체사상의 뿌리라는 북의 주장을 김일성의 입을 통해 역사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이 책은 김일성의 자서전으로서 김일성 생전에 발간된 6권의 '항일 혁명편'(1912~1937)과 사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가 김일성의 유고들과 각종 자료들을 기초로 발간한 2권의 '계승본'(1938~1945)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자서전은 주체철학 등 주체사상의 핵심적인 내용을 다루지 않으나 항일무장투쟁 당시의 통일전선과 혁명적 군중노선의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이 자서전은 김일성 주석이 수령으로서 당과 대중을 어떻게 이끌었는가에 대한 영도예술, 그리고 수령으로서 품성과 역량을 사례를 통해 강조한다.

한편 북은 주체사상에 따라 역사를 재구성했다. 북은 중소 등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당의 국가에 대한 영도를 강조하기 위해 조선노동당의 역사를 건국 이전으로 소급한다. 김일성 주석이 14세인 19261017일에 만주 화전현에서 결성한 타도제국주의동맹이 조선노동당의 효시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821017조선로동당은 영광스러운 <. >의 전통을 계승한 주체형의 혁명적 당이다고 선언한 바 있다.

물론 남의 일부 학자들은 조선로동당의 기원이 타도제국주의동맹이 아니라 조선공산당의 북조선분국이라고 비판한다. 1945911일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이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을 재건했다. 이를 보고 받은 소련공산당은 ‘11원칙을 북반부에 적용하여 같은 해 1010일부터 13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조선공산당 서북5도 당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를 통해 친소파 공산당원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설치했다. '분국'이라는 개념은 박헌영이 주도하는 서울의 조선공산당을 '중앙'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김일성은 당연히 소련의 조치에 반발했다. 북조선분국은 1946622일 분국 제7차 회의에서 명칭을 '북조선공산당'으로 바꾸고, 서울을 연고로 한 조선공산당으로부터 독립했다. 북조선공산당은 같은 해 828일부터 830일까지 연안파가 세운 조선독립동맹 계열 중심의 조선신민당과 통합하고 '북조선로동당'으로 전환됐다. 19461123, 서울의 조선공산당. 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의 합당이 이루어져 남조선로동당이 결성됐다. 이번에는 거꾸로 남조선로동당이 1949624일 북로당에 흡수되고 630"조선로동당"으로 명칭을 바꾸고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북은 조선인민군의 창군도 항일무장투쟁시기로 앞당긴다. 김일성이 1930년 여름 만주 길림성의 장춘현 카륜에서 공청 및 반제청년동맹 지도성원 회의를 소집하여 조선혁명의 주체적 혁명노선인 항일무장투쟁노선을 내놓았다. 김일성 주석과 그 동료들은 이 노선에 따라 193076일 이통현 고유수에서 공청 및 반제청년동맹의 핵심들로써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첫 혁명무력인 조선혁명군을 결성했다. 이어 19311219일 소집된 명월구회의에서 반일인민유격대창건을 결의하고, 1932425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했다.

북에 따르면 김일성은 조선인민의 혁명군대로서 자기의 정치적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항일유격전쟁 발전의 요구에 맞게 군사적 지휘 및 관리체계와 후방보장체계를 개편하기 위한 방침을 천명하고 그 구현으로서 19343반일인민유격대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했다. 그런데 북은 2018122일 조선인민군과 조선인민혁명군의 창건일을 구분하여 1932425일을 조선인민혁명군 창건일, 194828일을 조선인민군 창건일로 다시 제정했다. 창군일을 건국 당시로 수정한 것은 김정은 시대에서 와서 유격대 국가가 아닌 사회주의 정상국가로서 지위를 정립하려는 의도로 읽혀진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즉 북의 건국 역사도 남북통일전선이라는 주체사상의 관점에서 서술된다. 194592일 소비에트 연방과 미국이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해 군정통치했다. 이때 조만식을 중추로 하는 민족주의 세력이 평남건국준비위원회를 세웠다. 194510월 한반도 북부에서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세워지고 나서 이북5도행정위원회가 설치됐다. 1946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성립되어 이 위원회의 이름으로 농지를 무상으로 몰수하여, 실제 경작민에게 배분하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원칙으로 하는 토지개혁을 시행했다.

그 뒤 19472월 최고의결기관인 북조선인민회의와 최고집행기관인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창설하고, 194828일 조선인민군이 창군됐다. 19488월 최고인민회의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김일성을 수상, 박헌영, 홍명희 등을 부수상으로 하여 194899일 인민민주주의헌법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됐다.

북에 따르면 남의 대의원도 비밀리에 선출돼 입북하여 투표에 참여했고 그 일부는 북에 남아 건국 정부에 참여했다. 이러한 주장은 남의 이승만이 미국의 분단정책에 편승하여 남 단독정부를 수립한 반면, 김일성은 끝까지 남북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남의 반대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건국에 나서 남의 대표자들도 참가한 민족통일전선에 따라 통합 정부를 구성했다는 북 건국의 정당화 논리이다.

북이 조선노동당, 조선인민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미대결전, 대남혁명의 역사를 소개하고 주체사상에 충실하게 복무하도록 선전 선동하는데 있어 북의 소설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소설은 개인의 작품이 아니라 대부분 집단 창작의 결과물이며, 당의 지도에 따라 기획되고 그 결과도 당의 승인을 받는다. 따라서 그 내용은 기본적으로 정사에 따르지만 대중적 요구에 맞게 가공의 사실을 추가하여 각색된다.

 

 

3. 주체사상의 발전과정 및 주체철학의 형성과정

 

1) 민족적 사회주의

 

이시기는 김일성 주석이 중국공산당에 편입되기 전의 청년시절까지이다. 주체사상은 1970년대 초반부터 김일성주의로 불러졌으며, 19742.19 선언에 의해 공식화됐다. 즉 김일성 주석의 사상이므로 김일성의 생애에 걸친 경험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런 측면에서 황병덕(1995)은 주체사상이 일제식민지 경험에 따른 반제국주의적 민족관, 마르크스레닌주의유교적 전통주의 등의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한다.

김일성 주석은 새로운 통치 이데올로기를 구성함에 있어서 민족의 주체성과 자주성, 그리고 조선혁명을 강조함으로써 오랜 동안 일본의 식민통치에 희생되어 온 북의 인민들에게 강렬한 민족주의적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김일성은 이러한 과정을 자신의 항일무장투쟁의 경력과 접목시켜 민족주의의 중심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체제의 정통성과 반대세력을 제거할 수 있는 명분을 갖게 됐다(최완규, 1996: 104-106).

실제로 청년 김일성은 아버지 김형직과 마찬가지로 일본 식민지 치하에서 러시아혁명의 영향 아래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함으로써 민족적 사회주의자로 성장했다. 김일성 주석이 작성했다는 1926년 타도제국주의동맹의 강령, 1930년 카륜회의 즉, ‘공청 및 반제 청년 동맹 지도간부회의에서의 연설문 조선혁명의 진로가 이 시기 대표적인 문건이다.

타도제국주의동맹은 강령에서 당면과업으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선의 해방과 독립을 이룩할 것을 내세웠다. 또한 이 강령은 최종목적으로 조선에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건설하며 나아가서 모든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세계에 공산주의를 건설할 것을 규정했다. “조선혁명의 진로에 따르면 조선의 혁명은 조선의 현실로부터 출발하여 인민 대중을 조직 동원하여 조선 자체의 힘으로 주인 된 입장에서 조선의 실정에 맞는 방식에 의해 자주적으로 달성되어야 한다. 또한 반일 민족해방은 당면한 조선혁명의 과제이며 반드시 무장투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이 혁명에서 일제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하나로 굳게 결속해야 한다.

다만 서대숙(2000), 이창하(1982)와 같은 남의 학자들은 항일무장투쟁 당시에 발표됐다는 김일성 주석의 문건에 대해 문건에 나타난 김일성 주석의 문제의식은 존재할 수 있으나 문건의 구체적인 내용은 사후에 윤색되었을 가능성을 지적한다. 이교덕(2001:17)에 따르면 북은 김일성 주석이 19458월 해방이후 발표한 문헌들만 공식문헌으로 취급하다가 1979김일성 저작집출판 때부터 항일무장투쟁 시기의 저술을 삽입했다.

항일무장투쟁 시기의 김일성이 작성했다는 문건들은 1968년 조선로동당출판사에서 출간한 항일무장투쟁시기의 김일성동지의 교시에 요약과 해설로 소개됐다. 이들 문건들은 1970년대 이후 전문이 공개됐다. 1937조선인민혁명군의 대내 기관지 서광(曙光)에 처음 발표됐다고 주장되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1971년에, 1943년의 조선혁명가들은 조선을 잘 알아야 한다.”1971년에, 1931년의 일제를 반대하는 무장투쟁을 조직·전개할 데 대하여1972년에, 그리고 1930년의 조선혁명의 진로1978년에 발간됐다.

김일성 주석은 항일무장투쟁 시절에 만주에서 우익 민족주의자들과 긴장 관계에 있었다. 김일성 주석은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장제스와 동맹관계에 있던 상해임시정부나 기타 우익 민족주의자들과 충돌하곤 했다. 김일성은 해방 직후 조만식과 같은 북의 우익 민족주의자들과 대립했고, 김구를 포함한 상해 임시정부가 우익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녔기 때문에 이들과도 긴장관계에 있었다. 김일성 주석은 1948년 남북협상 당시 김구와 화해했지만 북의 건국에 참여시키려는 노력은 실패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북은 건국 이후 사회주의 전통적 이론에 따라 민족주의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1970년까지 북은 스탈린의 민족개념을 차용하여 민족을 언어, 지역, 경제생활 그리고 문화와 심리 등에서 공통성을 가진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람들의 공고한 집단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북은 중소의 간섭을 배제하는 자주노선을 채택하면서 민족주의를 재평가하기 시작한다. 1973년 출판된 정치사전은 민족의 개념에 혈연을 추가하였으며, 1970년대 말에는 경제생활의 공통성을 삭제하는 대신 혈연적 공통성을 민족형성의 가장 중요한 징표로 삼았다. 이러한 혈통을 민족 단일성의 기준으로 보면서 조선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했다(이병수, 2010:50).

북은 198510남조선문제에 실린 논설 정론: 민족의 징표,”에서 민족주의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보인 이후 수차례 민족의 개념 등 민족주의 문제를 언급했다. 북은 이후 민족주의와 주체사상을 본격적으로 결합시켰다. 특히 소련과 동구권이 혼란에 빠지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8912조선민족제일주의 정신을 높이 발양하자라는 연설을 발표하는 등 북 체제의 우월성을 민족주의와도 연결시켰다(서재진, 2001: 97-98).

나아가 북은 1990년대 중반부터 김일성민족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북은 김일성 주석 사후 1995년부터 김정일을 주체의 태양으로 묘사하면서, 김일성으로 한정하였던 수령 형상의 개념을 백두산 3대장군(김일성, 김정일, 김정숙)으로 확대하였으며, ‘태양민족이라는 표현도 같이 사용하고 있다.

북에 따르면 주체사상은 민족의 넋을 살리고, 사대와 매국, 외세에 의존, 민족허무주의를 버리고 애국애족의 정신, 민족주체성의 정신으로 살아나가려는 사상이지, 그 어떤 민족이기주의나 민족배타주의가 아니다. 주체사상이 민족주의뿐만 아니라 국제연대를 중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억압하는 제국주의세력이 국제적으로 연합되어있는 것만큼 제국주의의 지배와 억압을 반대하고 자주성을 옹호하기 위한 각 민족들의 투쟁 역시 국제적인 것으로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김정일, 1982)).

이런 점에서 북은 민족주의와 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가 주체사상 내에서는 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권효남(2006)에 따르면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민족주의를 부르주아 사상으로 보면서 국제주의를 애국주의와 분리시켜 양자를 적대적인 것으로 파악했다. 하지만 주체의 민족관은 주체사상의 원리로부터 민족이나 인류는 자주성을 공동의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민족주의와 국제주의는 상호 결합될 수 있다(김익현, 2010:82).

 

 

2) 자주적 사회주의

 

첫째 김일성 주석은 중국의 북만주에서 활동하던 항일무쟁투쟁 시기에 중국군과 소련군에 배속되어 있는 동안 중소의 간섭에 시달렸고 경우에 따라서는 지시를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김일성 주석은 코민테른의 일국일당의 원칙 때문에 중국군 휘하의 동북항일연군 소속됐다. 김일성 주석의 부대는 비록 어느 정도 독립성을 보장받았다고 하나 민생단 사건에서 보듯이 이 시기에 중국공산당의 간섭을 받았다.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항일무장투쟁 시기부터 조선민족의 운명은 조선인이 스스로 개척해야 하며, 소련이나 중국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장해왔다. 나아가 자신은 그 당시부터 소련공산당이나 중국공산당의 부당한 간섭에 굴복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중일전쟁이 격화되자 동북항일연군의 조선인 지휘관은 김일성을 제외하고 대부분 사망하고 일부는 일본군에 귀순했다. 괴멸 위기에 직면한 김일성 부대는 동북항일연군의 지시 없이 1940년 이후 소련으로 월경했다. 소련군은 처음에는 김일성 부대를 억류하였으나 나중에 소련으로 월경한 동북항일연군의 제2로군 총사령관 저우바오중(周保中)과 중국공산당이 김일성의 신원을 보증했다.

이후 김일성은 저우바오중이 여단장이 된 극동군 88독립보병여단의 대위로 활동했다. 이후 김일성 부대는 소련으로부터 조선의 무장세력으로서 인정받았고 김일성 역시 조선의 지도자로서 인정받았다. 김일성 부대는 소련군 영내에서 소련군의 지휘 아래 군사훈련과 정치교육에 주력하였으며, 해방 전까지 소규모 국내 작전을 수행했다. 다만 미국에 의해 국내 진공이 저지된 상해임시정부와 마찬가지로 김일성 부대 역시 소련군의 조선 점령에 처음부터 공식적으로 참여한 것은 아니다.

둘째 이러한 경험을 겪은 김일성 주석은 건국과정에서 중소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이들로부터 자율성을 확보하려는 유고의 티토와 같은 자주노선의 사회주의를 지향하게 됐다. 김일성 주석은 1945103일 평양 로동정치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한 강연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하여에서 자신의 건국노선으로서 자주노선을 밝혔다.

그런데 김정일이 19901227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 앞에서 한 연설에서 우리식 사회주의는 김일성 수령의 1945년 진보적 민주주의를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고 선언함으로써 진보적 민주주의는 해방 당시에 인민민주주의를 주체적으로 적용한 것으로서 평가 받아 주체사상의 연혁에 포함됐다.

김일성은 19451010일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창립대회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지도사상으로 선언했다. 하지만 1948년 헌법은 인민민주주의헌법이기 때문에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19564 29일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에서 당 규약을 개정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지도사상으로 명시했다.

 

 

3) 주체의 사회주의

 

이 시기는 중소의 개입으로부터 벗어나 독자노선을 정립하면서 북이 자신의 독자적 정체성을 주체사상으로 정립해나가던 시기이다. 1967년 갑산파가 제거될 때까지 정치적 자주노선이 사상과 경제, 국방과 외교 등 전 분야로 확대되어 주체라는 총체적 개념이 형성됐다. 또한 수령 유일 지배체제와 혁명적 대중노선이 결합되면서 북의 수령체제는 스탈린의 일인독재와 차별성을 지니게 된다. 하지만 주체사상은 아직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체계를 완성하지 못했다.

북에서 196510월 발간된 근로자에 따르면 주체라는 의미는 19551228일 김일성 주석이 노동당 선전선동 일군들 앞에서 한 연설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에서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서술됐다(신진균, 1965: 18). 1955사상에서의 주체가 제기된 이후 경제에서의 자립’(1956.12), ‘정치에서의 자주’(1957.12), ‘국방에서의 자위’(1962.12), ‘외교에서의 자주’(1966.10)가 잇따라 제기되면서 주체, 자주, 자립, 자위의 소위 4개 노선이 1960년대에 정립됐다.

주체사상이라는 단어는 1961년 제4차 조선노동당 대회 이후 사용됐다. 정영철(2005: 104)에 의하면, ‘주체사상이라는 용어가 공식매체에 처음 등장한 것은 로동신문19621219일자이며, 󰡔김일성저작집󰡕에서는 19634월의 대학의 교육교양사업을 강화할 데 대하여가 처음이다. 19675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415차 전원회의까지 주체사상의 대강이 완성됐다. 196712월 최고인민회의 제41차 대회에서 주체사상이 '가장 정확한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지도사상'으로 규정됐다.

김일성 수상은 1955년 국내파, 소련파와 연안파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스탈린이나 모택동과 같은 수령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1956년 조선노동당 제3차 대회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당의 활동 지침으로 명시되었는데, 1961년 조선노동당 제4차 대회에선 마르크스레닌주의 이외에 '항일무장투쟁의 혁명전통이 당의 지도이념으로서 추가됐다.

196754일에서 8일까지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415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갑산파 제거를 주도하면서 김일성 유일지배체제와 김일성 유일사상체제를 확립하여 김일성 수령관을 공고히 했다. 이 회의는 중공업 우선 정책도 채택됐다. 오경숙(2004)에 따르면 북은 갑산파 숙청 직후인 1967년 김일성의 5.25교시를 통해 중공업우선정책 등 김일성의 노선을 관철하고 김일성유일사상, 김일성유일지배체제를 확립했다. 김일성의 이름으로 이러한 과정을 주도한 김정일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권력승계를 정당화하는 후계자론을 제기했다.

1974년 김정일에 의해 공식 발표되는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은 이미 1966년 제2차 노동당대표자회의 시기에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에 의해 작성됐다(통일정책연구소, 2003: 44). 196712월 최고인민회의 제41차 회의에서 공화국 10대 정강이 발표되었으며, 주체사상이 '가장 정확한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지도사상'으로 규정됐다. 김일성은 이 정강 제1조에 따라 국가 활동의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을 모든 부문에 구현할 것을 선언했다(이종석, 2011:43). 주체의 사회주의는 정치노선에 불과하였던 자주적 사회주의와 달리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 주체의 문제, 즉 수령, , 인민대중의 위상과 역할을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정립한 것이었다.

혁명적 수령관에 이어 혁명적 군중노선도 이 시기에 정립됐고 양자는 수령의 영도예술을 매개로 이론적으로 결합했다. 황장엽(2006:165.168)에 따르면 1963년경부터 주체, 자주, 자립, 자위라는 주체사상의 기본 요지가 혁명적 군중노선과 결합하여 주체사상의 기본 틀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렇듯 혁명적 군중노선을 생산력 증대와 결합시키는 북의 전략은 중국의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의 영향을 받았다. 김상후(1960)에 따르면 중국 문화혁명의 핵심은 생산력 발전을 목표로 하는 대중의 기술지식 제고, 대중의 사상의식의 개조와 공산주의교양의 강화이므로 비슷한 조건의 북에게도 응용될 수 있었다.

김일성(1955.12.28) 주석에 따르면 주체란 것은 모든 것을 우리나라 실정에 적합하게 해 나가며 마르크스-레닌주의일반원칙과 다른 나라의 경험을 우리 실정에 맞게 창조적으로 적용해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은 중소의 지원 급감에 직면하여 자립경제를 실현하고자 인민들의 노력을 동원하는 혁명적 군중노선을 주체사상의 중요 부분으로서 정립했다. 이런 점에서 김창원은 주체사상이 자력갱생원칙과 마르크스-레닌주의이론의 창조적 적용 원칙이라는 두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김후선(1959)에 따르면 사회주의 사회에서 노자간의 기본 모순은 해소되었으며, 높은 수준의 생산관계와 낮은 수준은 생산력 사이에는 비적대적 모순만이 존재한다(김종곤, 2010:16-17). 이러한 비적대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김화종(1962)에 따르면 당은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확립하고 계획경제를 실시하여 증대된 생산력을 통해 사회적 부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사회주의 사회에선 자본주의와 달리 사회적 부의 증대가 개인적 부를 가져다준다.

그 결과 개인은 자신의 부를 증대시킨 사회주의제도에 대한 확신과 당에 대해 충성심을 가진다. 이러한 정신적 자각은 노동에 대한 창발성을 발휘하도록 하는 정치 도덕적 각성이다. 이러한 정치 도덕적 자극은 다시 사회주의 생산관계와 생산력을 확대 강화시켜주므로 단순한 물질적 부의 자극보다 더 우위에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변봉석(1962)은 역사적 유물론의 견지에서 생산관계의 반작용에 따른 생산력 발전을 언급하면서 공산주의 교양과 사상의식의 역할을 강조했다. 나아가 변봉석에 따르면 사회주의 사회에서 여전히 인민대중의 의식이 존재에 뒤떨어져 있고, 인민대중이 복잡한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우월성을 쉽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당과 국가와 같은 정치적 상부구조가 마르크스레닌주의 등을 근로대중에게 교양하는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김종곤, 2010:18-19). 이러한 논리는 인간 개조에서 사상개조가 핵심이라는 주체사상의 내용이 됐다.

 

 

4) 주체철학과의 결합

 

19675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415차 전원회의까지 주체사상의 주요 내용이 형성되지만 주체사상은 아직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체계를 완성하지 못했다. 이때까지 사상에서 주체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조선의 실정에 맞게 창조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북은 1982주체사상에 대하여가 발간되는 시기 중소의 개입으로부터 벗어나 독자노선을 정립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다른 자신의 독자적 정체성을 주체사상으로 정립해나갔다. 이런 목적에서 주체철학은 주체사상의 내용 중에서 가장 늦게 정립됐다.

즉 주체철학이 먼저 성립하고 이 원칙에 따라 주체사상의 구체적인 내용이 체계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북의 객관적 조건과 주체적 요구에 따라 주체사상의 내용들이 시기마다 구체화된 후 이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전문적인 철학자들에 의해 주체철학이 추가됐다. 주체철학을 통해 주체사상은 다시 체계적으로 재정립됐다.

이병수(2010:34-35)는 김일성유일체제를 구축한 1967년부터 김정일의 주체사상에 대하여가 발표된 1982년까지를 주체사상이 확립되는 과도기로 보면서 다시 1967년까지를 보편화시기, 1982년까지를 체계화시기로 구분한다. 보편화시기에선 주체사상 즉 김일성주의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수준으로 격상됐다. 1970112일에서 13일 까지 개최된 조선로동당 제5차 당대회에서 개정된 당 규약은 조선로동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우리나라의 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한 김일성동지의 위대한 주체사상을 자기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라고 선언했다.

1972년 헌법은 4조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우리나라의 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한 조선로동당의 주체사상을 자기 활동의 지침으로 삼는다.”고 선언하면서 최초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언급했다. 이는 당규약과 헌법에서 공식적으로 주체사상이 근본적인 이념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을 의미한다(이상철, 2008: 208). 또한 이 헌법은 중앙인민위원회에 대한 주석의 직접적인 지도를 명문화함으로써 당의 총비서를 겸한 김일성의 수령체제를 법률적으로 확립했다.

1970년대 황장엽과 같은 지식인 관료에 의해 기존의 주체사상의 대강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주체철학이 정립됨으로써 주체사상이 완성됐다. 따라서 주체사상의 형성에 있어 주체철학은 나중에 결합된 것이다. 서재진(2001:125)에 따르면 19729월 황장엽에 의해 이론화된 인간 중심의 철학인민대중중심의 철학의 원리가 되었으며, 이는 다시 1974년에 이르러 사람 중심의 철학적 원리로서 주체철학의 핵심으로 구성됐다.

이 시기에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동급으로, 김일성 주석은 마르크스, 레닌과 동급으로 격상됐다. 철학사전(1970)과 양형섭(1972)에 따르면 공산주의가 세계적으로 승리하는 우리시대에서 김일성주의가 가장 정확한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된다. 이 의미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사회주의혁명의 요구가 제기된 시대(마르크스), 자본주의가 독점자본주의로 전화하여 사회주의혁명이 실천된 시대(레닌), 제국주의가 멸망하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세계적으로 승리하는 시대(김일성)의 변화에 대응하여 그에 따른 요구를 가장 잘 반영한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계보에 김일성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이병수, 2010:38).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는 김일성 주석이 19729월 일본의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이 제기한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처음 발표됐다. 이 문건 우리당의 주체사상과 공화국정부의 대내외정책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에 따르면 주체사상이란 혁명과 건설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며 혁명과 건설을 추동하는 힘도 인민대중에게 있다는 사상이며, 자기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며 자기 자신을 개척하는 힘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사상이다(김일성, 1972).

신일철(1987)에 따르면 김일성에 의해 제시된 철학적 원리에 기초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철학적 세계관을 처음으로 공표한 최초의 책자는 1973년 김일성의 61회 생일을 기념하여 1975년까지 진행된 김일성주체철학 방송 강좌의 강의록 철학 강좌이다. 또한 1975년 조선로동당창건 30주년 기념으로 주체사상의 이론 전집 10권이 발행된다.

이훈(1994)에 따르면 1976사회과학에 실린 박승덕의 주체사상은 자연과 사회에 대한 가장 올바른 견해와 세계를 인식하고 개조하는 강력한 무기를 주는 위대한 사상”, 1977년 리성준의 주체사상이 기초하고 있는 철학적 원리가 발표됨으로써 주체사상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체했다(이병수, 2010:42-43).

김일성 주석은 19758월 인도 주간신문 블리쯔책임주필이 제기한 질문에 대해 사람이 자주성과 창조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로서 세계를 지배하는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하는 요인이다고 답변했다. 또한 김일성은 19779사회주의교육에 관한 테제에서 사람은 자주적인 의식과 창조적인 능력을 가질 때에만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사회적 존재로 될 수 있으며, 자주의식과 창조적 능력은 타고난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있어서 타고난 사상과 지식이란 없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김일성은 19771215일 최고인민회의 제6기 제1차 회의의 인민정권을 더욱 강화하자는 연설에서 근로인민대중이 역사의 주체이며, 사회 발전의 동력이기 때문에 인류 역사는 자주성을 위한 근로인민대중의 투쟁의 역사이며, 이는 인민대중의 창조적 활동에 의해 발전한다.”고 주장하여 사회역사원리를 명시했다(이병수, 2010:43-44).

19801013일 조선로동당 제6차 당대회에서 개정된 당 규약은 조선로동당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에 의해 창건된 주체형의 혁명적 마르크스-레닌주의당이라고 선언하면서 오직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주체사상, 혁명사상에 의해 지도된다.”고 강조했다. 즉 주체사상은 당의 규약에 의해서도 북의 유일 지도사상으로 확립됐다. 북의 1972년 헌법은 20년 동안 개정되지 않은 채 유지되었기 때문에 주체사상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북의 현실에 적용한 것이라고 선언한 조항도 1992년 헌법까지 존속했다(박선영, 2015 :42).

6차 대회에서 김정일은 중앙위원회 비서, 군사위원,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후계자로서 공식 등장했다. 김정일은 1980123일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선전선동부, 평양 시당위원회 책임일군협의회에서 한 연설 당조직들 앞에 나서는 몇 가지 과업에 대하여을 통해 제6차 당대회 결정을 높이 받들고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를 더욱 힘 있게 다그치기 위한 전투적 과업을 제시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후계자로서 지위를 확고히 하는 계기로 삼기 위해 주체사상을 김일성주의로 정립했다. 김정일은 1974212일 개최된 당 중앙위원회 58차 전원회의에서 중앙위원회 정치위원으로 선출되어 김일성의 후계자로 결정된 직후 ‘2.19’ 문헌 온 사회를 김일성주의화 하기위한 당사상사업의 당면한 몇 가지 과업에 대하여를 발표했다. 김정일은 이 문헌을 통해 주체사상을 "사상, 이론, 방법의 (전일적) 체계"로 정의하고 김일성주의로 격상시켰으며, 김일성주의를 주체시대의 새로운 요구를 반영하여 나온 새롭고 독창적인 위대한 혁명사상이라고 선언했다.

김정일(1974.4.2)주체철학의 이해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하여에 따르면 주체철학은 자연과 사회는 사람이 지배하며 사람에 의해 개조된다.”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밝힘으로써 인민대중이 자기운 명의 주인, 역사의 주인으로 등장한 우리 시대의 철학적 과제를 빛나게 해결했다. 김정일(1974.4.14)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원칙의 마지막 10원칙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개척하신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계승하며 완성하여 나가야 한다는 규정을 두어 자신의 권력승계를 정당화했다(최대석, & 현인애, 2007: 265). 김정일은 이후에도 197610김일성주의의 독창성을 옳게 인식한데 대하여등을 발표하는 등 주체사상을 체계화했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주체사상의 체계화를 지도한 것을 인정하지만 그의 논문들이 사후에 공개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북의 학자들이 1982년 김정일의 주체사상에 대하여이후에 비로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주체철학에 대한 해설 논문을 발표했다는 점에서 위 논문의 실제 작성 시기가 논란되고 있다(이병수, 2010:41-42).

 

 

5) 주체사상의 완성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823월 김일성 주석의 70회 생일에 맞추어 발표한 논문 주체사상에 대하여를 통해 철학적 원리와 사회역사원리 그리고 그의 구현을 위한 지도적 원칙 등 주체사상의 전일적인 사상이론체계를 확립했다. “주체사상에 대하여에 따르면 인민대중이 역사의 주체이지만 옳은 지도를 받을 때만 사회역사발전의 주체가 된다. 인민대중은 지도와 결합돼야 하고, 혁명운동에서의 지도의 문제는 인민대중에 대한 당과 수령의 영도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수령에 의한 영도는 198510월 간행된 주체사상총서에서 혁명적 수령관으로 정리된다. 주체사상총서는 노동당 창당 40주년을 기념해 사회과학출판사가 펴낸 10권의 주체사상에 대한 종합 해설서이며, 김정일의 논문에 살을 붙여 그것을 이론적으로 좀 더 심화시키고 보완된 것이다.

주체사상은 1970년대 이후 주체철학수령론혁명위업계승론후계자론으로 발전했다. 수령관은 1967년 이후 특히 1974당의 유일사상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에 의해 이미 정교화 되었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수령관을 철학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김정일은 1986715주체사상 교양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라는 저작을 통해 혁명의 주체는 수령, , 대중의 통일체이며, 인민대중은 당의 령도 밑에 수령을 중심으로 하여 조직 사상적으로 결속됨으로써 영생하는 자주적인 생명력을 가진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를 이루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사회정치적 생명체에서 수령은 그의 최고뇌수이고 생명활동의 중심이며 당은 그의 중추를 이루고 인민대중은 신체기관이다. 나아가 수령, , 대중은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결합되어 운명을 같이하기 때문에 서로 도와주고 사랑하는 혁명적 동지애의 관계가 된다. 동시에 이 담화는 민족제일주의를 제시하면서 주체사상의 민족주의적 색채를 강화시켰다.

수령관을 법제화한 1974당의 유일사상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2013당의 유일적 령도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으로 개정됐다. 이 원칙은 서문, 10개조 60, 후문의 구조로 되어 있다. 10대 원칙의 목표는 온 사회의 김일성-김정일주의화와 당의 유일적 영도체계의 확립이다. 이 원칙은 김일성-김정일과 당의 권위가 절대적임을 선언하면서 이에 반하는 종파적 경향에 대해 경고하고 있으며, 수령의 교시와 유훈을 무조건 관철할 것을 요구한다. 또한 원칙은 수령은 아버지로, 당은 어머니로 인민은 자녀로 하는 사회주의 대가정론을 선언하면서 인민들과 일군들에게 정신 도덕적 풍모와 혁명적 사업방법, 인민적 사업 작풍을 요구한다. 그밖에 정치적 생명, 당 중앙 사수, 백두 혈통의 영원한 승계 등을 강조한다. 과거에 비해 당의 권위가 추가됐으며 사회주의 공산주의 위업주체혁명위업으로 변경됐다(송인호, 2019: 152-162).

 

 

 

4. 주체철학의 사람중심의 철학과 인간 중심의 철학

 

1) 주체철학 형성에 대한 황장엽의 기여

 

황장엽은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철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1954년에 귀국하면서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철학강좌장을 맡았다. 황장엽은 1965년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에 임명되었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포함한 김일성 주석의 자녀교육을 책임졌다. 황장엽은 1970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된 이후, 조선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1972~ 1982), 1979년 노동당 비서와 중앙위원회 산하의 주체사상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황장엽은 19581월 초부터 19654월까지 김일성 주석의 이론서기로 일했다.

선우현(2000)과 황장엽에 따르면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 특히 사람 중심의 철학은 황장엽의 인간 중심의 철학과 같은 뿌리이다. 황장엽(2006: 189, 195)에 따르면 1960년대 중반까지 주체, 자주, 자립, 자위라는 주체사상의 4대노선과 혁명적 군중노선을 제기하고 이를 결합한 것은 김일성 주석이었다. 다만 황장엽은 마르크스주의를 각 나라의 실정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는 점, 중소에 대한 사대주의가 아니라 자주노선을 견지해야 한다는 점, 혁명적 군중노선에 근거하여 사업을 진행해야 한다는 점 등 김일성 주석의 사상에 자신의 인간중심의 철학을 결합시켰다. 또한 황장엽이 만든 사회적 생명이라는 개념은 수령에게 절대적 충성을 요구하는 논리로서 사회정치적 생명이라는 개념으로 전환됐다(한겨레. 2010.10.10)

1967525일 김일성의 교시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에로의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독재 문제에 대하여가 나오게 된 배경은 황장엽이 인간 중심의 철학을 고안하게 된 것과 관련이 있다. 당시 중국은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독재가 지속되는 과도기를 공산주의가 완전히 실현된 때로 보았으며, 김일성 주석의 동생이자 모스크바 유학파인 김영주가 이를 지지했다.

반면 스탈린의 공포정치를 비판해온 소련의 흐루쇼프는 과도기를 사회주의 경제제도가 실현된 때로 보면서 당시의 소련이 이제는 과도기를 지났으므로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완화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황장엽은 사회발전의 동력이라는 논문을 통해 과도기를 사회주의 경제제도가 실현되고 동시에 사회주의 생산력이 발전하여 사회주의 경제제도의 우월성이 입증될 때까지라고 주장했다. 또한 황장엽은 같은 논문에서 인텔리의 진보성은 출신 성분이 아니라 사회발전에 기여한 여부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선우현, 2000: 74-75).

김영주는 황장엽의 논문이 소련의 입장을 따르는 수정주의라고 비판하였으며, 이에 김일성이 김영주와 황장엽을 동시에 비판하면서 5.25교시를 발표했다. 5.25교시는 황장엽을 비롯한 인텔리의 혁명화를 강조하였으며, 이에 따라 황장엽은 1년 동안 사상검열과 총화에 시달렸다. 특히 이때 자신의 논문으로 인해 김일성으로부터 직접 비판을 받았다.

5.25교시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과도기뿐만 아니라 모든 제국주의가 소멸되어 사회주의의 종국적 승리가 이뤄질 때까지 지속되어야 한다. 북이 말하는 과도기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을 세울 때부터 정치, 경제, 사상, 문화 등의 모든 분야에서 자본주의를 완전히 타승하고 사회주의의 전면적 승리를 이룩해 무계급사회를 실현할 때까지이다.

5.25교시는 형식적으로는 중국과 소련을 동시에 비판하는 것이었지만 김일성의 유일사상, 유일지배를 강화하고자 하는 김정일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또한 도서정리사업이라는 명목 아래 사상적 통일에 방해가 되는 인텔리들이 제거되는 일종의 북식 계급투쟁이자, 문화혁명이었다. 황장엽은 그 이후부터 계급결정론, 계급투쟁, 프롤레타리아독재, 개인숭배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지니게 됐다(황장엽, 2006: 170-175). 황장엽은 수년간의 연구 성과를 인간 중심의 철학으로 정리한 후 이를 주체사상의 철학적 근거로 재구성할 것을 김일성에게 건의하여 197010월 경 승인받았다.

그 첫 번째 황장엽의 성과물이 1972917마이니치신문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김일성의 이름으로 발표된 우리당의 주체사상과 공화국정부의 대내외정책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이다. 황장엽(2006: 214)에 따르면 인간 중심의 철학 등 주체사상 연구에 관한 자신의 연구 성과들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넘겼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를 검토하여 자신의 서기들의 도움을 받아 19742.19 선언 온 사회를 김일성주의화하기 위한 당사상사업의 당면한 몇 가지 과업에 대하여.”를 발표했다. 이 두 개의 문건이 결합됨으로써 주체사상은 지도사상, 혁명이론, 영도방법의 전일적 체계를 완성했다.

조선노동당의 하부기관이 주체사상을 황장엽이 창시했다.”는 항간의 소문을 보고하면서 황장엽을 비난하자, 김일성이 주체사상은 내가 그 골격을 만들고 내 지시에 의해 내 비서인 황장엽이 다듬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인데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대응했다(황장엽, 2006: 249). 이러한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한글 창시를 세종대왕이 총괄하였듯이 김일성이 주체사상의 기본 틀을 마련하고 황장엽을 비롯한 학자들에게 이를 이론화하는 작업을 지시한 것이다. 따라서 주체사상을 황장엽이 창시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봐야 한다.

김일성 사후 김정일은 주체사상에서 황장엽의 흔적을 지우고 주체사상 특히 주체철학까지도 김일성-김정일의 전유물로 만들었다. 주체사상연구소 소장, 주체과학원 원장, 국제주체재단 이사장을 역임해 온 황장엽은 1996년에 이르러 당 간부들로부터 주체사상을 김일성-김정일 중심으로 해석하지 않고 사유화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황장엽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자기비판서를 제출했다. 이후 김정일이 주체사상에서 황장엽의 색깔을 지우기 위해 비서들의 도움을 받아 1996726일 발표한 문건이 주체철학은 독창적인 혁명철학이다.”이다. 북은 1996년부터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의 사상리론󰡕을 연속으로 출판하면서 김일성주의인 주체사상의 정립을 김정일의 업적으로 공식화했다.

 

 

2) 주체철학의 사람 중심의 철학과 황장엽의 인간 중심의 철학의 차이

 

서재진(2001:125)에 따르면 19729월 황장엽에 의해 이론화된 인간중심의 철학은 인민대중중심의 철학의 원리가 되었으며, 이는 다시 1974년에 이르러 사람중심의 철학적 원리로서 주체철학의 핵심으로 구성됐다. 주체철학은 황장엽의 인간 중심의 철학을 사람 중심의 철학으로 변용했다. 주체철학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추상적인 인간이나 개별적인 개인과 다른 개념으로 사용했다. 그 의미는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인민대중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즉 개인주의를 포괄할 수 있는 인간이나 개인이라는 표현을 의식적으로 배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물질(두뇌)이 먼저 생기고 의식이 나중에 수반한다는 점과 의식이 물질(두뇌)의 기능이라는 점을 규명했다. 주체철학은 물질의 의식에 대한 선차성, 즉 규정성이라는 철학의 근본문제에 대한 해답을 전제로 사람과 세계의 관계를 새로운 철학의 근본문제로 제기했다. 주체철학은 인간에 있어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는 선차성이라는 철학적 성과를 계승하여 사회적 의식(사상)이 사회적 존재(활동)에 거꾸로 주동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상결정, 행동결정의 원리를 규명했다.

주체철학과 달리 황장엽의 인간 중심의 철학에선 물질과 의식의 관계가 철학의 중요 문제이지만 근본문제는 아니다(황장엽, 2003c: 50). 이에 대해 주체철학은 황장엽의 주장을 관념론의 일종인 철학적 인간학(Philosophical Anthropology)이 주장했던 인간 중심주의(Anthropocentricism)와 같다고 비판한다(한호석, 1998). 황장엽 역시 자신의 철학이 인본주의(Humanism)에 근거하고 있다고 인정한다.

황장엽의 인간 중심의 철학에 따르면 사회발전에 있어 양적인 것은 인간과 사회적 재부 즉 사회의 구성요소인 사회적 존재를 기본으로 한다. 나아가 양적인 것에 이들 사회적 존재의 결합구조 즉 결합협력구조인 사회관계까지 포함한다. 하지만 주체철학은 의식성, 창조성, 자주성과 같은 사회적 속성을 가질 수 있는 인간만을 사회적 존재로 보고 그렇지 못한 사회적 재부를 사회적 존재로 보지 않는다. 사람은 본능이 아니라 학습에 의해 협업을 한다.

또한 동물은 사회적 존재가 될 수 없다. 사람만이 언어와 같은 고도의 소통체계를 지니며, 세대 간의 지식의 전수는 본능이 아니라 역사에 의한다. 따라서 사람은 유적존재 중에 유일한 사회적 역사적 존재이다.

사회의 발전은 사회구성요소를 변화시켜 이들의 새로운 결합협력관계를 만들 때 가능하다. 이러한 사회구성요소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사회적 운동력이 인간의 정신력, 물질의 힘, 사회의 결합협력으로 구성된 사회적 생활력이다. 개인의 생활력이 개인의 생명력이고, 사회의 생활력이 사회의 생명력이다. 개인의 생명력은 유한하지만, 대를 이어가는 사회의 생명력은 무한하다(황장엽, 2003d : 112-114).

다만 주체철학은 개인의 생명력 중 사회와의 결합협력만을 강조하여 개인이 당과 같은 집단에 소속되어 충성할 때만 진정한 사회정치적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주체철학은 인민이 당에 소속되어 사회정치적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인민이 당과 수령의 영도를 받기 때문이다. 결국 인민의 사회정치적 생명은 수령으로부터 나오고 그러한 사회정치적 생명은 당, 수령과 함께 영원하다는 것이다.

주체철학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는 생물학적 의미의 사회유기체론에 근거하고 있지만 황장엽의 인간 중심 철학의 사회적 생명체는 생물학적 유기체에 비유하는 것이 아니며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관계의 총체이다.

황장엽에 따르면 인간개조란 인간의 자주성과 창조성 그리고 사회적 결합협력성을 높이는 것이다. 따라서 황장엽의 인간 중심의 철학에 있어서는 사회의 원동력에 인간의 자주적인 사상을 고취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연을 창조적으로 활용하는 능력,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까지를 강조한다. 따라서 황장엽은 객관조건을 무시하고 주관적인 사상만을 강조하면서 사상의식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주체철학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지닌다. 즉 인간 중심의 철학보다는 주체철학이 <자주적인 사상의식으로 객관적 조건을 극복할 수 있다>는 사상결정론에 가깝다.

김정일에 따르면 사회주의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계급투쟁을 극복하였기 때문에 주체철학의 관점에서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이 원리를 부정하지 않지만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 반면 황장엽은 대립물의 투쟁보다는 통일을 강조하여 계급투쟁 자체를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보지 않으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이탈했다(한호석, 1998).

황장엽은 사회적 속성이 인간이 지니는 물질의 구성요소의 다양성과 그 결합구조의 복잡성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즉 사회적 속성은 인간이라는 고등생명체의 진화에 근거하고 있으며 사회적 관계를 통해 발전해왔다. 반면 주체철학은 자주성, 의식성, 창조성이 생물학적 바탕에 근거하고 있으나 생물학적 진화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다. 즉 생물학적 속성이 발전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게 됨으로써 비로소 생겼다. 인간이 아닌 고등생명체에겐 사회적 속성의 맹아조차 없다(한호석, 1998).

 

1. 주체철학과 인간 중심 철학의 비교 (선우현, 2000: 122-133)

 

주체철학(사람 중심의 철학)

인간 중심의 철학

성격

국가이데올로기

사변적 논증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근본문제에 대해 계승과 혁신

탈마르크스

역사 주체

계급중심의 인민대중(PT독재)

반계급적인 인본주의

집단주의

집단이 개인 흡수(수령, , 대중)

개인과 집단 균형

사회적 속성

사회적 존재로서 사회적 특성

생물학적 진화를 추가

사회적 존재

의자창 등 사회적 속성은 인간이 유일

사회적 재부도 추가

사회적 집단

사회유기체론: 뇌수(수령), 중추, 기관

사회적 생명체(수령부정)

생명력

정신적 생명력(생활력), 수령이 부여

물적, 결합협력 추가

사상의 역할

인간 개조, 사상결정론(주관>객관)

자연 및 사회가 한계

 

 

5. 주체사상의 위상변화

 

1) 사회주의 붕괴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차별성 강조

 

첫째 북은 1982년 김정일의 주체사상에 대하여”, 1985주체사상총서에서 보듯이 소련 등 사회주의권이 붕괴하기 전까지는 주체사상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독창적으로 계승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1965우리당의 주체사상에 대하여에 따르면 자주자립의 사상은 자주성과 독자성에 바탕을 둔 자력갱생의 혁명 원칙이며 창조적 적용 원칙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일반원칙과 다른 나라의 경험을 북의 실정에 맞게 창조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리성주에 따르면 자력갱생의 원칙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함께 주체사상의 핵심 내용이다. 자력갱생은 공산주의자들이 가져야 하는 행동기풍으로서 혁명적 실천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이 가져야 할 혁명 정신이다. 반면에 주체의 원칙은 공산주의자들의 근본 입장으로서 자기나라의 구체적 조건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창조적으로 적용해 나가는 즉 실천의 우위성에 기초한다. 주체의 원칙은 이론과 실천의 통일에 관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기본요구를 표현하는 것이다(김종곤, 2010:13).

김정일은 198353일 칼 마르크스 탄생 165돐 및 서거 100돐에 즈음하여 발표한 논문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의 기치를 높이 들고 나아가자에서 군사동맹 해체, 비핵지대, 평화지대 창설을 주장했다. 김정일(1986.6.27)에 따르면 김일성 수령이 마르크스레닌주의혁명이론을 조선혁명에 창조적으로 적용하는 과정에 주체사상을 창시하였기 때문에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북의 현실과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맞게 계승 발전시킨 새로운 사상이다.

주체의 세계관은 지난 시기의 철학적세계관이 가지고 있던 일면성을 극복하고 세계의 본질과 인간의 운명문제에 가장 심오하고 포괄적인 해명을 준 철학적 세계관이다(김정일. 1986.7.15). 또한 주체사상은 유물론적이며 변증법적인 원리를 계승하고 있다(김정일. 1986.7.15). 따라서 일부 일군들이 주체철학이 사람중심의 철학이기 때문에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유물변증법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김정일. 1986.7.15).

가장 고급한 물질의 운동인 인간의 운동이 저급한 물질의 운동보다 더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이 유물론과 변증법의 기본원리에 맞는다. 주체철학은 유물론과 변증법의 원리를 버린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제로 하여 물질세계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특출한 지위와 역할을 과학적으로 밝힘으로써 마르크스레닌주의 유물변증법도 더욱 완성했다(김정일. 1986.7.15). 김정일(1986.6.27)에 따르면 마르크스레닌주의로 풀지 못하는 문제들도 주체사상으로는 다 풀 수 있다.

 

오늘에 와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창시자들이 활동하던 시기에 비하여 혁명의 주체인 인민대중의 자주성과 창조성, 의식성이 훨씬 높아졌으며 사회발전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도 크게 달라졌습니다. 이로부터 새로운 역사적 환경에 맞게 혁명의 이론과 방법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제기됩니다(김정일. 1986.7.15).

 

북은 주체사상이 마르크스레닌주의처럼 다른 나라에도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원칙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연장선에서 김정일(1986.6.27)은 북의 학자들이 주체사상이 독창성과 함께 계승성을 가진다는 것을 옳게 풀지 못하기 때문에 주체사상이 우리 민족과만 관련된 사상인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둘째 북은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가 붕괴되어 마르크스주의의 권위가 실추된 이후에는 주체철학이 마르크스주의를 전제로 하지만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1990년대 중반 이후 북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한계를 총체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분야별로 비판하는 논문이 다수 발간됐다.

김정일은 199213사회주의 건설의 력사적 교훈과 우리 당의 총로선19921010혁명적 당 건 설의 근본문제에 대하여를 통해 소련 붕괴의 원인을 진단했다. 김정일에 따르면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 원인은 제국주의 세력과 국내 자본주의 세력의 재등장, 개방형 사회주의국가의 당정책의 오류, 정치사상적 교육의 부재, 관료주의 등이다(최대석, & 현인애, 2007: 267).

김정일(1992.10.10)에 따르면 사회주의 집권당들이 자기나라 혁명을 책임진 주인다운 태도를 가지고 당건설과 활동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주체적 입장에서 자기 인민의 요구와 자기나라의 실정에 맞게 풀어 나갔더라면 여러 나라에서 사회주의 집권당과 사회주의 제도가 연이어 붕괴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북은 소련과 동구의 붕괴가 사회주의 자체의 패배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평양선언(1992.4.20)에 따르면 일부 나라들에서 사회주의가 좌절되고 자본주의가 복귀된 것은 사회주의위업실현에서 큰 손실로 되지만 그것이 결코 사회주의의 우월성과 자본주의의 반동성을 부정하는 것으로는 될 수 없다. 여러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무너진 것은 과학으로서의 사회주의의 실패가 아니라 사회주의를 변질시킨 기회주의의 파산을 의미한다(김정일. 1994.11.1).

또한 북은 다른 나라와 달리 자신들은 견고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김정일(1991.5.5)은 사회주의 국가들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북의 체제가 견고한 것은 인민대중 중심의 우리식 사회주의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즉 우리식 사회주의의 내용인 주체사상으로 인해 북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 달리 견고하다는 것이다.

김정일(1990.5.30)은 북의 사회주의는 혁명 이후 계속혁명 즉 건설에 특화되어 있는 주체사상에 기초하고 있어 확고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1994사회주의는 과학이다에서 보듯이 북은 소련과 동구에서 사회주의 붕괴가 되돌릴 수 없게 되고 중국 역시 사회주의 노선에서 이탈하자,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기존의 사회주의를 비판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건설에 관한 마르크스-레닌주의리론은 기회주의자들에 의하여 심히 혼란됐다. 이로 말미암아 사회주의건설에서 좌왕우왕하는 편향이 나타났으며 일부 나라들에서 사회주의가 심각한 진통과 좌절을 겪게 됐다. 이처럼 시대가 첨예하게 제기한 리론실천적문제가 위대한 수령님에 의하여 빛나게 해결됐다(김정일1990.5.30)

 

사회주의를 전체주의라느니, 병영식이라느니, 행정명령식이라느니 하면서 비난하는 것은 황당무계한 궤변이다. 우리의 경험은 경제관리에서 당위원회의 집체적 지도를 보장하고, 군중 로선을 관철하며, 모든 사업에 정치사업을 앞세우고 일군들 속에서 혁명적 사업방법과 인민적 사업 작풍을 세우면 경제를 사회주의사회의 본성에 맞게 훌륭히 관리 운영해나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김정일. 1993.3.1)

 

1990년대 초반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주체사상의 우월성을 강조하지만 여전히 주체철학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연장선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주체철학은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을 포섭하였지만 철학의 근본문제를 새롭게 제기하고 그 구성체계와 내용도 새롭게 체계화한 독창적인 철학이다(김정일1990.5.30) 우리는 유물변증법의 역사적 공적은 인정하지만 그것을 노동계급의 완성된 철학으로는 보지 않는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제한성을 알아야 수령님의 혁명사상, 주체사상의 독창성과 우월성을 똑똑히 인식할 수 있다(김정일1990.5.30)

주체의 혁명이론에 의하여 반제민족해방혁명과 반봉건민주주의혁명, 사회주의혁명이론이 독창적으로 체계화되었으며 사회주의, 공산주의건설이론이 새롭게 전면적으로 밝혀지게 됐다. 수령님의 혁명이론에는 공산주의사회의 면모와 거기에로 가는 합법칙적 노정, 사회주의, 공산주의건설의 전략적 목표와 전략적 노선으로부터 혁명과 건설의 모든 분야의 투쟁방침과 구체적인 방도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으로 밝혀져 있다. 주체의 영도 방법에 관한 이론에 의하여 영도원칙으로부터 사업방법과 작풍문제에 이르기까지 혁명과 건설을 영도하는데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가 완벽하게 해명됐다(김정일1990.5.30)

그런데 김정일(1996.7.26)주체철학은 독창적인 혁명철학이다.”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종합적으로 비판하면서 주체철학이 마르크스주의 유물변증법을 새롭게 발전시킨 철학이라는 것을 납득시키려고 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했다. 이 담화에 따르면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이 이룩한 공적뿐 아니라 그 시대적 제한성과 사상적 미숙성을 알아야 선행이론을 교조적으로 대하는 편향을 막을 수 있고, 주체철학의 독창성과 우월성을 이해할 수 있다.

 

유물론과 변증법을 일정하게 발전시킨 것이 주체철학의 기본내용을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주체철학은 자기의 고유한 원리들로 전개되고 체계화된 독창적인 철학입니다. 주체철학이 철학사상발전에서 이룩한 력사적 공적은 마르크스주의 유물변증법을 발전시킨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중심의 새로운 철학적 원리들을 밝힌데 있습니다(김정일. 1996.7.26).

 

박민성(1999)에 따르면 사적유물론은 19세기 유럽을 대상으로 하여 다른 지역이나 오늘날의 사회주의 건설에 적합하지 않다. 주체시대 즉 자주성의 시대는 인민대중이 세계의 주인으로 등장하여 자기운명을 자주적. 창조적으로 개혁해나가는 역사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유물사관에 기초한 선행이론의 제한성은 사회주의제도가 선 다음 사회주의건설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났다. 사회주의혁명 시기에는 착취와 압박을 청산하고 인민대중의 사회정치적 자주성을 실현하는 문제, 다시 말하여 사회개조 문제가 전면에 나서게 된다. 사회주의제도가 수립된 다음에는 사람들을 자연과 낡은 사상 문화의 구속에서 해방하기 위한 자연개조, 인간개조 문제가 보다 전면에 나서게 된다(김정일. 1990.10.25. 1994.11.1)

사회주의건설의 실천은 사회주의제도가 선 다음 사상, 문화 분야에서 혁명을 계속하지 않으면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옳게 발양시킬 수 없고 인민대중의 자주위업을 끝까지 완성할 수 없다. 주체사상에 의하여 사회주의사회에서의 계속혁명 문제도 과학적으로 해명됐다(김정일1990.5.30)

특히 사상개조사업이 사회주의의 물질 경제적 조건을 마련하는 사업보다 더 중요하고 선차적인 과업으로 나서며 인간개조사업을 앞세워야 혁명의 주체를 강화하고 그 역할을 높여 사회주의를 성과적으로 건설할 수 있다. 객관적인 물질 경제적 조건에 결정적 의의를 부여하고 경제건설에만 매달리면서 인민대중의 사상개조사업을 부차시하며 혁명의 주체를 강화하고 그 역할을 높이는 사업을 소홀히 하면 전반적 사회주의건설을 옳게 할 수 없으며 경제건설 자체에서도 침체를 면할 수 없게 된다. 지난날 사회주의를 건설하던 일부 나라들에서 이런 현상이 적지 않게 나타났으며 사회주의배신자들은 이것을 기화로 개편놀음을 벌리면서 사회주의경제제도자체를 허물어버리는 반혁명적 행위를 감행했다(김정일. 1994.11.1)

 

 

2) 김일성 주석의 사망과 고난의 행군

 

1992년 헌법은 제3조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사람중심의 세계관이며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혁명사상인 주체사상을 자기 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고 선언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삭제했다. 북은 1998년 헌법에 최초로 전문을 추가하였지만 헌법이념이나 헌정사 대신 김일성 주석을 찬양하는 내용을 넣었다. 전문은 김일성 주석을 민족의 태양, 영원한 주석이라고 선언하고 김일성의 유훈으로 통치할 것을 밝혔다.

따라서 이 헌법은 내용상 김일성헌법이지만 실제적으로는 김일성의 유훈에 따라 김정일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헌법은 주석제와 중앙인민위원회를 폐지하고 국방위원장의 권한을 강화시켜 김정일이 선군정치를 통해 통치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었다.

김일성 주석 서거 이후 1994~ 1999년 사이에 일어난 고난의 행군은 소련 붕괴, 미국의 경제 봉쇄로 인한 대외 교류의 중단, 자연재해 등으로 발생했다. 중국이 북에게 물물교환이 아니라 경화 결제방식을 요구하면서 북의 경제가 더 악화됐다. 배급제와 복지체계가 붕괴되는 한편 효율적인 안보보장을 위해 핵개발과 군사화가 촉진됐다.

 

 

3) 붉은 기 사상과 선군사상

 

붉은 기 사상은 199478일 김일성 사망과 고난의 행군 직후인 1995828붉은 기를 높이 들자.”라는 로동신문의 정론으로부터 시작됐다. 붉은 기 사상은 수령에게 붉은 마음을 바쳐 충성하자.”수령 결사옹위 정신을 표현한다.

김진환(2010)에 따르면 김정일은 19933월 준전시상태 선포를 시작으로 선군후로, 선군정치를 전면화했다. 선군이라는 용어는 19971212일자의 로동신문을 통해서 최초로 확인됐다. 강성대국은 황장엽이 망명한 직후 1998822로동신문을 통해 제기됐으며, 1998년 개정 헌법에 명시됐다. 2003321로동신문논설은 주체사상은 선군사상과 선군정치의 뿌리이며, 선군사상이 주체사상을 이론적, 실천적으로 계승한 사상이라고 선언했다. 부승찬(2011)에 따르면 선군사상은 주체사상의 하위담론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북의 주장에 따르면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이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라며 두 자루의 권총을 김일성에게 남겼고, 김일성이 1952년 이 가운데 하나를 붉은 천으로 싸 김정일에게 선물했다.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당시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권총을 주면서 아직 끝나지 않은 제국주의 세력과 혁명투쟁을 총대’, 즉 무력투쟁으로 완성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이후 김정일은 혁명의 승리는 정의의 총대 위력에 의해 이뤄진다총대혁명 원리를 체득하고, 선군정치를 내세우게 됐다고 북은 주장한다. ‘한 자루 권총 사상은 죽음으로 최고 지도자를 지킨다는 ·폭탄 결사옹위 정신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또한 1964년 김정일의 대학졸업 논문이 사회주의건설에서의 군의 위치와 역할이다. 김근식(2014)에 따르면 김정일은 군대는 당이고, 국가이며, 인민이라는 독창적인 선군의 원리가 주체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김정일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이 조선혁명을 영도하면서 선군의 원리를 견지하였으며, 조국을 광복하는 유일한 길은 무장투쟁이라고 강조했다. 김일성(98:134)에 따르면 국력도 총대에서 나오고 민족적 자부심도 총대에서 나온다.

북은 군대가 소련과 동구의 몰락을 막지 못한 것은 비사상화, 비정치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면서 총대는 정치와 사상, 경제 분야에서 국력을 튼튼히 다지는 근본요인이라고 주장한다. 즉 정치강국도 총대에서 생겨나고 사상강국, 경제강국도 총대에 의하여 마련된다. 특히 북은 미국의 압박정책을 의식하면서 반공화국 압살책동이 악랄해진 조건에서도 조국의 방선이 철벽으로 다져지고 혁명과 건설에서 새로운 전환이 일어난 것은 총대중시, 군사중시 노선이 가져온 빛나는 결실이다고 강조했다.

선군사상은 혁명은 총대에 의하여 개척되고 전진하며 완성된다는 총대철학사상과 군대이자 당이고 국가이며 인민이 라는 선군원리와 인민군대를 주력군으로 하는 선군후로의 혁명전략·군사선행의 원칙에서 모든 문제를 풀어나가는 선군혁명원칙’(홍혜명, 2006), 그리고 군사를 제일 국사로 내세우고 인민대중의 자주적 요구와 이익,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과 존엄을 믿음직하게 수호하고 조국번영의 앞길을 열어나가는 반제자주의 정치, 애국, 애족, 애민의 선군정치이론’(문시철, 2008)을 제시하고 있다. 나아가 선군의 영도체계와 선군의 영도원칙도 포함된다(부승찬, 2011:121, 131).

2005년 신년 공동사설은 인민군대는 선군혁명의 기둥이며 주력군이라고 선언했다. 이는 사회주의 혁명과정에서 노동자 농민이 주력군이지만,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는 군대의 역할이 높아진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국가적 위기 앞에 충성과 규율이 높은 군대가 국가 안보 이외에 전 분야에 헌신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2009년 헌법은 선군사상에 부합하게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최고영도자로서 승격시켰다. 하지만 20211월 조선로동당 제8차 당대회에서 개정된 당 규약은 선군이라는 단어를 삭제했으며 이후 북에서 선군정치를 '김정일 애국주의'로 부르고 있다.

 

 

4) 황장엽의 망명

 

선우현(2000:27)에 따르면 황장엽은 마어쩌둥의 사상담당 비서인 천보다(陳伯達 진백달)와 마찬가지로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상 관련 문건을 실질적으로 작성함으로써 주체사상의 배후 인물이다. 주체철학은 황장엽이 이론화하였으나 사람 중심의 철학인간 중심의 철학으로 분화됐다. ‘사람 중심의 철학은 북의 주체사상에 공식적으로 반영된 반면, ‘인간 중심의 철학은 황장엽 개인의 철학이다.

인간 중심의 철학은 역사적으로 지식관료인 황장엽이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과정 즉 주체철학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즉 실천적인 주체사상과 달리 사변적 성격을 지닌다. 선우현(2000:116)은 인간 중심의 철학을 마르크스주의와 비교하여 거의 유일한 독창적 체계라고 평가했다.

1997년 황장엽은 남에 정착한 이후 자신의 인간 중심의 철학을 북의 국가이데올로기와 대치시키면서 자신의 철학으로서 사유화하였다. 그 결과 황장엽의 인간 중심의 철학이 자신의 연혁이자 물질적 토대인 북의 정치경제로부터 독립하여 오히려 북을 비판하는 도구로서 사용되고 있다. 주체사상 혹은 마르크스주의에서 진정한 사상의식은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을 움직이는 것이다. 인간 중심의 철학은 김영환과 같은 변절한 주체사상류의 반북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남에서나 북에서나 외면을 당하여 물질적 토대를 상실하고 철학자들의 사변 즉 형이상학으로 전락했다.

북의 사람 중심의 철학에서 사람은 집단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집단에 종속된다. 김정일의 논문 사회주의의 사상적 기초에 관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1990530)에 따르면 집단주의가 반대하는 것은 개인의 이익 자체가 아니라 개인의 이익을 위하여 집단의 이익을 해치는 것이다. 집단주의는 집단의 이익을 첫자리에 놓을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개인과 집단의 조화가 아니라 개인을 집단에 종속시킴으로써 개인과 집단의 갈등을 강제로 해소한다. 황장엽은 북에 있을 때 개인 중심의 민주주의를 변증법적으로 부정한 것이 집단 중심의 민주주의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집단 중심의 민주주의가 개인 중심의 민주주의를 하나의 구성요소로 포괄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황장엽은 망명 이후 개인 중심의 민주주의와 집단 중심의 민주주의를 대립물의 통일로 보아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을 포함한다고 보지 않는다(김원식, 2004: 173).

이러한 입장변화는 인간중심의 철학이 개념상 집단 이전에 인간 개인을 상정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론 자체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즉 인간중심의 철학은 북의 집단주의를 대변하는데 이론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인간중심철학은 한편으로 근대 자유민주주의 사상으로 체현된 개인주의에 기초한 인본주의’, 다른 한편 사회주의의 사상으로 대변되는 집단주의적 인본주의’, 양자를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변증법적으로 통일시킨 고차원적 인본주의를 새로운 인본주의로 제시코자 한다(황장엽. 2003:413).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개인이기도 하지만 구성원의 구성원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간 중심의 철학은 본질적으로 집단으로부터 독립된 개인과 집단에 통합되는 개인이라는 사회적 인간의 이중적 지위가 문제된다. 황장엽은 북에 있을 때는 집단에 통합되는 인간에 중점을 두었다면 남에 망명한 이후에는 집단과 개인의 조화를 주장해왔다. 이런 측면에서 황장엽은 집단의 자주성과 함께 개인의 자주성을 인정한다(황장엽, 2003d::42-43). 황장엽은 인터뷰를 통해 과거에 비해 개인에 방점을 둔 민주주의와 자유관을 피력했다. 황장엽은 이런 관점에서 개인과 집단의 조화를 강조하며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형태도 집단적 소유로 일원화하는 것을 반대한다(황장엽, 2003d : 127-128).

물론 사회주의국가에서도 타인에 대한 착취가 아니라 개인적 활용 목적의 개인적 소유를 부정한 것은 아니며, 심지어 인민민주주의에서는 생산수단에 대한 사유도 인정하나 황장엽의 주장은 중국의 사회주의시장경제와 같은 수준으로 소유형태의 다양화를 강조하는 것이다. 실제로 황장엽은 북에 있을 때부터 중국을 시찰하면서 북도 중국과 같은 개혁과 개방이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주체철학을 실무적으로 이론화한 황장엽이 1997년 남에 망명한 이후 주체철학은 김일성주의에 여전히 포함되어 있지만 과거에 비해 위상이 추락했다. 2002년의 신년공동사설 위대한 수령님 탄생 90돐을 맞는 올해를 강성대국건설의 새로운 비약의 해로 빛 내이자.”에서 주체사상에 대한 언급이 1995년 이후 처음으로 나타났다.

황장엽 망명 이후 김정일은 주체사상 대신 선군사상을 강조하였다. 2009년 헌법은 제3조에서 사람중심의 세계관이며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혁명사상인 주체사상, 선군사상을 자기 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고 선언하면서 김정일의 선군사상을 김일성주의 즉 주체사상과 동급으로 했다. 또한 이 헌법은 전문에 있던 공산주의라는 단어를 삭제했다.

 

 

5)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이 악화되자 조선노동당은 2010년 김정은을 후계자로 공식화하고 중앙당을 복원하고자 제3차 당 대표자회를 개최하여 당규약을 개정했다. 총비서를 비서국을 대표하는 자리가 아니라 당의 수반으로 바꾸고, 선거에서 추대하도록 했다. 총비서가 당중앙군사위원장을 겸직하도록 하여 김정일을 추대하였고,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자리를 만들어 김정은에게 직책을 부여했다(김창희, 2018:84-86).

20111217김정일 사망 직후 당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를 통해 김정은을 인민군총사령관에 추대했다. 2012411일 제4차 당대표자회를 통해 당규약을 개정하였고, 김정일을 영원한 총비서로 추대하고 김정은을 당 제1 비서에 추대했다. 김정은은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 정치국 상무위원도 겸임했다.

김정은은 집권 초기 주체사상과 선군사상을 수용하면서 핵 경제 병진노선을 채택했다. 이는 핵무기를 완성하는 것과 동시에 인민생활의 향상도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2012년 헌법은 스스로를 김일성 수령과 김정일 영도자의 주체적인 국가건설 사상과 국가건설사 업을 법화한 김일성-김정일 헌법이라고 선언했다. 또한 이 헌법은 핵 보유를 선언하면서 그 공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군정치에게 돌리고 있다.

김정은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비대해진 군부를 약화시키고 당을 강화시켰다. 2012년 리영호 총참모장을 숙청하는 작업은 당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를 통해 이루어졌고, 2013년 장성택의 제거도 당 조직지도부의 강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최대석·장인숙, 2015: 178). 즉 김정은은 리영호와 장성택을 숙청하면서 당정치국과 조직지도부에 무게를 실어주었다(최진욱·박영자, 2014: 68-69).

권력을 안정화시킨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김일성-김정일주의와 차별화된 통치노선으로서 인민대중제일주의를 제기했다. 김정은에 따르면 주체사상의 기원도 이민위천이다. 김효은(2021:38)에 따르면 북은 2012우리 식 사회주의는 인민대중제일주의를 구현한 주체의 사회주의다라고 선언했다. 김정은은 2013년 첫 육성 신년사에서 모든 것을 인민을 위하여, 모든 것을 인민 대중에게 의거하여!’란 구호를 제시했다. 20131월 제4차 당세포비서대회에서 김정은은 김일성-김정일주의는 본질에 있어서 인민대중제일주의라고 주장했다.

당의 위상을 강화하고 정상화를 위해서 임시당대회 성격을 가진 당대표자회가 아닌 7차 당대회가 무려 36년 만에 개최됐다. 7차 당대회에서 신설된 조선로동당 위원장은 전당을 대표하고 전당을 영도하는 당의 최고령도자이다. 당위원장은 당대회에서 추대하는 중앙위원회 및 모든 위원회와 부서를 총괄하는 직위이기 때문에 당 조직의 일원화를 고려한 것이다. 당위원장 직책이 신설되면서 비서국은 없어지고 정무국이 신설됐다. 김정은은 당 제1비서라는 과도기적 직책을 청산하고 조선로동당 위원장,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 정무국 위원장,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됐다. 헌법 차원에서 김정은은 국무위원장을 겸임함으로써 자신의 유일영도체계를 확립했다.

2. 북의 헌법과 조선노동당 규약의 지도사상의 변화

1946

창당, 당위원장, 총칙, 당원의 의무와 권리, 당의 조직과 의무, 규율

1948

인민민주주의헌법, 수상, 사기업과 토지에 대한 소유 및 상속

1956

3차대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지도지침, 반제반봉건민주혁명을 목적

1961

4차대회, 지도이념에 항일무장투쟁의 혁명 전통 추가

1970

5차대회,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병행

1972

사회주의헌법 프롤레타리아독재, 마르크스레닌주의 창조적 적용의 주체사상

1980

6차당대회, 마르크스레닌주의 삭제,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을 목적

1992

인민민주주의독재헌법, 마르크스레닌주의 삭제, 사람중심 세계관 주체사상.

1998

김일성헌법, 유훈통치, 주석제 폐지, 선군정치

2009

국방위원장 최고헌법기관화, 공산주의 삭제, 주체사상과 선군사상 병기

2010

3차 당대표자회의,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

2012

4차 당대표자회의, 김일성-김정일주의,

2012

김일성김정일헌법, 국방위 제1위원장, 핵보유 선언, /경제병진노선

2016

7차대회, 국무위원장과 당위원장 겸 김정은 유일지배체제 확립

2016

국방위원회 폐지, 국무위원장 최고영도자

2019

4월 전문(김일성의 주체사상 창시)외 주체사상과 선군사상 삭제

2019

8월 주체의 사회주의국가, 인민민주주의독재, 김일성-김정일주의.

2021

8차 대회 마르크스레닌주의, 주체사상, 전국적인 자주적 민주주의 발전

 

7차 당대회의 특징은 최고지도자의 영도 방식에 있어 선군보다는 선당을 강조한 것이다. 7차 당대회 결정서에 따르면 당의 유일적 영도체계를 세우는 사업은 김정은을 유일 중심으로 하는 전당의 정치사상적 단결을 다져나가는데 중심을 두고 심화시켜야 한다. 또한 모든 사업을 당중앙의 유일적 영도 밑에 조직진행하며 제기되는 문제들을 당중앙의 결론에 따라 처리하도록 하여야 한다(김창희, 2018: 87-90).

김정은 시대에 선군사상은 물론 주체사상의 위상도 약화됐다. 2016년 헌법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사람중심의 세계관이며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혁명사상인 주체사상, 선군사상을 자기 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는 조항이 유지됐다. 하지만 2019년 헌법은 전문에서 김일성 주석이 주체사상을 창시했다는 언급만 있을 뿐 주체사상에 관한 조항을 두지 않고 있다. 선군사상에 관한 조항도 삭제됐다. 다만 서문에서 주체의 사회주의국가를 선언하고 있는데 이는 주체사상이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원을 둔 것이며 사회주의 사상에 포함된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노동당은 20211월 제8차 당대회에서 인민대중제일주의 정치를 선언했다. 또한 개정된 규약 서문에 따르면 김일성-김정일주의는 주체사상에 기초하여 전일적으로 체계화된 혁명과 건설의 백과전서이자 과학적 사상이다(김효은. 2021:32-33). 8차 당대회 규약은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을 삭제하고 전국적인 범위 내에서 자주적이며 민주주의적인 발전을 실현할 것을 당의 목적으로서 선언했다. 당 위원장직을 폐지하고 총비서를 부활했다. 또한 당중앙위원회 제1비서 직제를 신설하고, “조선노동당 총비서의 대리인으로 규정했다.

 

 

6. 결론

 

첫째 주체의 철학적 원리가 제일 먼저 제시되는 주체사상총서의 서술 체계와 달리 주체의 철학적 원리 즉 주체철학은 1970년대 초반 주체사상의 마지막 형성시기에 정립됐다. 주체철학은 김일성과 김정일이 제시한 주체사상의 기본 틀에 철학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황장엽과 같은 철학자들의 논증을 통해 즉 사변적으로 정립됐다. 이처럼 1960년대 주체의 혁명이론과 주체의 영도방법이 먼저 정립된 후 주체의 철학적 원리가 나중에 나왔으므로 주체철학은 주체사상의 철학적 근원이 아니라 나중에 인위적으로 결합시킨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수령관은 1970년대 정립된 주체철학에 의해 이론화되었지만 사실은 주체철학이 정립되기 훨씬 전인 1950년대 중반에 스탈린주의의 영향 아래 형성됐다. 수령관이 1970년대 주체철학의 성립과 무관하게 그전에 정립됐다는 것은 1966년 제2차 조선노동당대표자회의 시기에 김영주에 의해 그 초안이 작성됐다는 당의 유일사상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에서도 확인된다(통일정책연구소, 2003: 44). 또한 수령으로부터 부여받은 사회정치적 생명의 영생이라는 수령관의 철학적 논거도 1980년대 이후 부가된 것이다.

셋째 주체철학 특히 사람 중심의 철학은 황장엽의 인간 중심의 철학을 토대로 하여 출발하였으나 같은 내용은 아니다. 황장엽은 1960년대 중반부터 계급과 경제결정론을 중시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해 의문을 품고 계급이 아닌 인간 중심의 철학이라는 새로운 범주를 고안해내고 이를 주체사상과 결합하고자 했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황장엽은 김일성 주석의 승인을 받아 휴양소에서 주체사상의 철학적 기초를 고안하는 연구에 집중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는 인간 중심의 철학을 바탕으로 인간의 사회적 속성, 인간 중심의 역사관이나 사회적 집단의 생명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주체사상의 철학적 기초를 만들어냈다.

인간 중심의 철학은 주체철학과 달리 황장엽 개인이 발전시킨 사변적 논증에 가깝다. 황장엽은 사물 운동의 동력을 사물간의 모순관계에서 찾지 않고 사물 자체 즉 주체의 특성에서 찾았다. 이는 주체철학의 사람 중심의 철학에 반영됐다. 하지만 황장엽의 철학은 주체철학과 달리 대립물의 통일 즉 사회협력을 강조하면서 계급투쟁과 계급독재에 반대하는 등 인본주의로 경도되면서 마르크스주의에서 이탈했다. 황장엽의 철학은 정신력 특히 사상의지만을 강조하는 주체철학과 달리 사회운동의 동력으로서 물질적 힘과 사회적 결합협력의 중요성도 정신력만큼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따라서 주체외부의 객관적 한계를 경시하는 주체철학과 상대적으로 구별된다.

넷째 주체사상 특히 주체철학은 최고지도자의 이해관계, 사회주의 붕괴, 황장엽의 망명, 새로운 지도자에 걸 맞는 새로운 지도사상의 필요성 등으로 인해 국가이데올로기로서 지위가 점차 약화됐다. 주체사상 즉 김일성주의는 후계자의 지위를 확고히 하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의해 이론적으로 체계화됐다. 주체사상은 초기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독창적으로 계승했다는 점을 강조하였으나 사회주의 붕괴기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관련성을 점차 희석시킴으로써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사상적 위기가 주체사상에 미치는 것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또한 주체사상은 그 철학적 원리를 사변화한 황장엽의 망명 이후 소위 인간 중심의 철학과의 차별성을 강조함으로써 주체철학 자신의 위기를 모면하고자 했다.

정권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김정일 시대에는 김정일주의가 필요한 것이며, 역시 김정은 시대에는 김정은주의가 필요하다. 그러한 배경에서 주체사상은 비록 김일성-김정일주의로서 연명하였지만 김정일의 선군사상이나 김정은의 인민대중제일주의의 부각에 따라 조선노동당 규약과 헌법에서 점차 희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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