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이후 주체사상 등장의 정치경제적 배경

주체사상과 마르크스주의 1

                                                                          김장민(정치학 박사 프닉스)


1. 서론

 

과거 소련이나 중국, 그리고 오늘날 북에 있어서 국가 이데올로기의 쟁점이나 권력투쟁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쉽지 않다. 일단 이들 국가들이 과거에 혹은 현재까지도 철의 장막에 쌓여 있기 때문에 목격한 사실을 객관적으로 증언해 줄 인물들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다.

공개된 언론은 당의 입장을 대변하기 때문에 그 내용이 사실을 균형 있게 반영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 공개된 재판기록이나 국가기관의 문서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트로츠키 세력이 1917년 혁명 전후부터 원래 간첩이었다는 소련의 판결문과 공산당의 결정문, 박헌영 세력이 일제와 미군정 시기부터 간첩이었다는 판결문과 조선노동당의 결정문에 대한 진실 공방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들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문헌연구도 제약성을 지닌다. 먼저 이들 나라에선 집단적 저술이 원칙이라서 실제 저자를 구별하기 어렵다. 이들 국가의 최고지도자가 작성했다는 문건들은 그 양이나 전문성을 볼 때 상당수는 관료들이 대신 작성했거나 초안을 제공했을 가능성이 높다. 심지어 서방의 학자들은 과거의 문건이 회수되고 수정된 문건이 원래의 문건으로 공표되었을 가능성조차 제기한다.

이교덕(2001:17)에 따르면 북은 김일성 주석이 19458월 해방이후 발표한 문헌들만 공식문헌으로 취급하다가 1979김일성 저작집출판 때부터 항일무장투쟁 시기의 저술을 삽입했다. 일부 학자들은 항일무장투쟁 당시의 연설이나 발표문이 추후에 발표되거나, 시기에 따라 표현이 변화됐다는 점을 들어 위작을 주장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646월 당중앙위원회 지도원으로서 당 사업을 시작한 이후 발표한 이른바 노작가운데 조선로동당출판사에서 출판된 것만 530여 편이다. 15권의 김일성종합대학의 임무에 대하여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대학시절 작성한 논문과 연설문 및 서한 등 무려 1,500여 편이 실려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대학 시절 김일성 주석의 지시에 따라 수많은 학습 과제에 대한 보고서를 썼으며, 개인교수들이 이 보고서들을 첨삭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대학 때부터 김일성 주석을 수행하면서 때로는 직접 현장 지도에 참여하였으며, 매주 자신의 조선노동당 활동을 총화 하는 글들을 작성했다(이교덕. 2001:19-20). 이처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발표한 저술의 양과 주제들을 고려할 때 국방위원장이 이 모든 문건을 오롯이 자신이 작성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경직된 사회주의 국가의 예민한 문제에 대한 연구는 그 나라들의 공식 문건에만 의존할 수 없다. 이들 문건을 참고하면서도 이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북의 주체사상에 대한 연구는 특히 그러하다.

주체사상에 관한 연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쟁점은 북의 주장처럼 주체사상이 항일무장투쟁 시기에 김일성 주석에 의해 창시되었는가?”이다. 주체사상의 형성시기, 특히 등장 시기가 1930년인지 아니면 북의 권력투쟁기인 1955년인지에 따라 주체사상이 등장한 이유와 그 핵심 요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주체사상이 등장한 시기가 규명된다면 주체사상이 형성된 배경과 핵심 내용을 제대로 알 수 있다. 또한 그러한 시대적 배경과 요구를 규명한다면 주체사상과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관계가 시대조건에 따라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논문은 북의 주장과 그에 비판적인 입장에 따라 시기별로 주체사상의 이론적 형성과 발전과정을 간단히 살피고, 이러한 지식적 배경 아래 주체사상의 등장시기와 그 등장의 정치경제적 배경을 분석한다.

 

 

2. 주체사상의 형성 과정

 

첫 번째 민족적 사회주의 시기는 김일성 주석이 중국공산당에 편입되기 전의 청년시절까지이다. 김일성 주석이 작성했다는 1926타도제국주의동맹의 강령, 1930년 카륜회의 즉 공청 및 반제 청년 동맹 지도간부회의에서의 연설문 조선혁명의 진로가 이 시기 대표적인 문건이다. 황병덕(1995)은 주체사상이 일제식민지 경험에 따른 반제국주의적 민족관, 마르크스레닌주의유교적 전통주의 등의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한다.

두 번째 자주적 사회주의 시기는 김일성 주석이 중국군과 소련군에서 활동했을 때부터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아 건국을 하고 1950년 전쟁을 마무리한 후 스탈린이 사망했을 때까지이다. 김일성 주석은 건국 시기까지는 중국 공산당과 소련 공산당의 지도를 받았으며 그 이후 이들의 간섭에 반발하면서 중소로부터 자주권을 획득하고자 하는 의지가 더욱 강력해졌다.

세 번째 주체의 사회주의 시기는 1967년까지 국내파, 소련파, 연안파, 갑산파 등 경쟁자를 제거하고 주체사상을 이론적 무기로 삼아 중소로부터 독자노선을 걸으면서 김일성 유일지배체제를 수립할 때까지이다. 1955사상에서의 주체가 제기된 이후 경제에서의 자립’(1956.12), ‘정치에서의 자주’(1957.12), ‘국방에서의 자위’(1962.12), ‘외교에서의 자주’(1966.10)가 잇따라 제기되면서 주체, 자주, 자립, 자위의 소위 4개 노선이 1960년대에 정립됐다. 19675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415차 전원회의까지 주체사상의 대강이 완성됐다.

네 번째 시기는 주체사상이 주체철학과 결합하게 된 1970년 중반까지이다. 서재진(2001:125)에 따르면 19729월 황장엽에 의해 이론화된 인간 중심의 철학인민대중중심의 철학의 원리가 되었다. 이 내용이 김일성 주석이 19729월 일본의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이 제기한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처음 발표됐다. 이러한 내용들은 1974년에 이르러 사람 중심의 철학으로서 주체철학의 핵심이 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75년 조선로동당창건 30주년 기념으로 주체사상의 이론 전집 10권이 발행됐다.

이 시기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후계자로서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계기로 삼기 위해 주체사상을 김일성주의로 정립했다. 그는 1974219온 사회를 김일성주의화 하기위한 당사상사업의 당면한 몇 가지 과업에 대하여, 19744주체철학의 이해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하여, 197610김일성주의의 독창성을 옳게 인식한데 대하여를 발표했다.

김정일(1974.4.14)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원칙의 마지막 10원칙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개척하신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계승하며 완성하여 나가야 한다.”는 규정을 두어 자신의 권력승계를 정당화했다(최대석, & 현인애, 2007: 265).

다섯 번째는 혁명적 수령관까지 이론화됨으로써 주체사상이 체계적으로 완성된 시기이다. 주체사상은 1970년대 이후 주체철학수령론혁명위업계승론후계자론으로 발전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823월 김일성 주석의 70회 생일에 맞추어 발표한 논문 주체사상에 대하여를 통해 철학적 원리와 사회역사원리 그리고 그의 구현을 위한 지도적 원칙 등 주체사상의 전일적인 사상이론체계를 확립했다. 198510월 간행된 주체총서는 노동당 창당 40주년을 기념해 북 사회과학출판사가 펴낸 10권의 종합 해설서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86715주체사상 교양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라는 저작을 통해 수령, , 대중은 운명을 같이하는 사회정치적 생명체라고 주장하면서 최고뇌수인 수령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을 요구했다. 김일성 주석이 노년에 접어들자, 1984년 김유민의 후계자론, 1989년 김재천의 후계자문제의 이론과 실천에서 보듯이 후계자 문제는 철학적 수준에 정교화됐다. 이 시기에 김일성-김정일의 권력분점도 후계자론에 의해 이론화됐다.

 

 

3. 주체사상의 등장시기

 

북의 주장에 따르면 주체사상의 형성 시기는 당시 중학생으로서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14살의 김일성 주석이 결성한 1926타도제국주의동맹’(. )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821017조선로동당은 영광스러운 <. >의 전통을 계승한 주체형의 혁명적 당이다고 선언한 바 있다. 북의 주장에 따르면 타도제국주의동맹은 강령에서 당면과업으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선의 해방과 독립을 이룩할 것을 내세웠다. 또한 강령은 최종목적으로 조선에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건설하며 나아가서 모든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세계에 공산주의를 건설할 것을 선언했다.

즉 북의 주장에 따르면 김일성이 이때부터 조선의 특색에 맞는 민족해방, 사회주의, 공산주의 혁명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주체사상은 마르크스와 레닌의 입장과 달리 식민지의 혁명은 종주국 혁명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 인민대중의 자주적인 투쟁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론적 독창성을 지녔으며, 김일성 주석은 이미 타도제국주의동맹 시기부터 이런 입장을 천명했다는 것이다.

김정일이 1982년에 발표한 논문인 주체사상에 대하여에 따르면 김일성은 자신이 주도한 1930630일 카륜회의 즉, ‘공청 및 반제 청년 동맹 지도간부회의에서 조선혁명의 진로라는 연설을 통해 타도제국주의 동맹의 강령에서 밝힌 주체사상을 더욱 구체화했다. 즉 이 연설에서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창시하였으며, 그 원리와 조선혁명의 주체적 노선을 밝혔다(최대석, & 현인애, 2007: 261).

 

수령님께서는 고루한 민족주의자들과 행세식 마르크스주의자들, 사대주의자들과 교조주의자들을 반대하고 혁명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시는 투쟁과정에 주체사상의 진리를 발견하시였으며 마침내 19306월 카륜에서 진행된 공청 및 반제청년동맹지도간부회의에서 주체사상의 원리를 천명하시고 조선혁명의 주체적인 로선을 밝히시였던것입니다.

 

이 연설에 따르면 조선의 인민대중은 조선혁명의 주인 된 입장으로서 조선의 혁명을 조선 자체 자주적인 역량으로 해야 하며, 이를 위해 당은 인민대중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조직 동원해야 한다. 나아가 일제로부터 해방되려면 전체 민족의 결속이 필요하다. 이런 배경에서 북은 주체사상의 핵심으로서 역사의 주인은 인민대중이고, 역사는 인민대중의 자주권을 실현하려는 투쟁이라는 주체사관은 물론 혁명적 군중노선도 이러한 유격전 시기의 군민합심에 의해 이미 구현되고 있었다고 본다.

북의 주장에 따르면 해방 직후 주체사상에 따른 북의 건국이념과 노선을 제기한 것이 1945103일 김일성 주석의 연설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하여이다. 이 연설에서 김일성은 당시 조선을 식민지반봉건사회로 규정하고 반제반봉건인민민주주의혁명을 통해 진보적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인민정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항일무장운동 시기나 해방 직후 김일성이 작성한 문건이나 연설문에 북이 주장하는 주체사상의 발아적인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북의 공식문건에서 주체라는 개념이 정치 사상적으로 등장한 것은 이보다 훨씬 뒤인 1950년대 중반이다.

19551228일 김일성 주석은 노동당 선전선동 일군들 앞에서 한 연설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에서 소련파, 연안파, 남로당파에 대하여 주체가 없는 사람들, 사대주의자들, 종파주의자들이라고 아래와 같이 비판했다.

 

우리 당내의 혁명활동가들은 쏘련, 중국, 남반부 등 여러 곳에서 왔거나 혹은 국내에서 투쟁한 사람들로써 구성되어 있는데 흔히 종파분자들은 이것을 자기의 종파적 목적에 리용하려고 합니다. 남반부에서 들어온 사람들 가운데는 자기가 남반부에서 들어온 사람들 중의 대표적 인물이라고 자처하여 나서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자기가 높은 자리만 얻으면 인차 남반부에서 들어온 사람들 을 마치 자기가 나서서 일자리를 주선해주어서 밥 먹을 자리나 얻어 준 것 같이 만들고 마치 그들의 운명을 자기가 결정하는 듯이 하여 그들을 자기 개인 활동의 토대로 만들려고 합니다. 지난 시기 리승엽이 이런 식으로 일부 남반부에서 온 동무들을 롱락하였습니다. 쏘련에서 나온 사람들 중에서는 허가이 같은 자를 실례로 들 수 있습니다. 허가이는 마치 쏘련에서 나온 사람들 가운데서는 자기가 대표적 인물인 것처럼 자처하여 나섰습니다. 중국에서 나온 사람들 중에서는 박일우 같은자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중국에서 나 온 사람들 중에서 자기가 대표적인 인물인 것 같이 생각하면서 중국에서 나온 동무들을 간부로 등용하지 않는다느니, 쏘련에서 나온 사람과 중국에서 나온 사람은 서로 생활풍습이 맞지 않는다느니 하면서 계급의식이 약한 동무들을 자기 주위에 규합하려고 쏠라닥쏠라닥 장난을 하고 있습니다.

 

주체라는 단어가 사상적으로 언급된 것은 이 문건이 최초인 것으로 평가된다. 김일성 주석은 19554월 전원회의에서 행한 연설에서도 소련파, 연안파, 남로당파를 거명하며 그들이 종파주의를 행하고 있다고 비판하였지만 주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고 자체라는 말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당학습에서 자체의 것을 많이 배우는 문제가 중요합니다. 어떤 동 무들은 자체의 것을 잘 배우려 하지 않으며 마치 자체의 것은 마르크스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 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체의 것이 조선 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한 산 마르크스주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만 19551228일 연설에서 주체라는 단어가 사상적인 의미에서 사용되었지만 아직은 주체사상이라는 표현이 나타나지 않았다. 주체사상이라는 단어는 1961년 제4차 조선노동당 대회 이후 사용됐다. 정영철(2005: 104)에 의하면, ‘주체사상이라는 용어가 공식매체에 처음 등장한 것은 로동신문19621219일자이며, 󰡔김일성저작집󰡕에서는 19634월의 대학의 교육교양사업을 강화할 데 대하여가 처음이다.

정리하면 주체사상이 공식적으로 제기된 것은 1950년대 중반이지만 그 뿌리는 그 전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북의 주장처럼 김일성 주석이 항일운동 시기부터 지금과 같은 주체사상의 핵심내용을 정립하여 주체사상을 창시한 것은 아니다. 남의 학자들도 대부분 이와 같은 견해이다. 1930년대 국제공산주의 운동 안에서 코민테른의 일방적인 지령 때문에 중국 공산주의운동이나 조선공산주의 운동에 적지 않은 혼란이 초래됐다. 김일성 주석이 이러한 상황에 일정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김일성이 1930년대에 주체사상을 창시했다는 것은 과장이다(최대석, & 현인애, 2007: 257).

 

 

 

 

4. 1955년 이후 주체사상 등장의 정치경제적 배경

 

김갑철(1984), 양재인(1990) 등에 따르면 주체사상의 등장 배경은 중소분쟁의 심화, 스탈린 사망으로 인한 소련의 대북 통제력 약화, 김일성 체제의 정통성 확보를 위한 당내 반대세력의 제거, 자립적 사회주의 건설과 민족경제노선의 추구 등이다. 또한 서재진(2001)에 따르면 주체사상의 등장 배경은 흐루쇼프의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과 동유럽 폭동이 북으로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 국내 정적에 대한 비판 논리, 중소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의도,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북에 미치는 영향을 차단하려는 목적이다.

 

 

1) 중국과 소련의 내정 간섭

 

조선 말의 항일무장투쟁 세력들은 국내에서 근거지를 잃고 중국의 간도나 러시아의 연해주로 후퇴했다. 조선이 일본에 강제로 합병된 후 조선 내의 공산주의 운동이나 조선 밖의 항일무장투쟁은 소련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의 강한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소련공산당은 코민테른을 통해 조선의 운동에 대해 지원과 지도를 하였고, 중국공산당은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김일성 주석과 같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을 중국군의 동북항일연군에 편입시켰다. 김일성 주석은 1940년 소련의 극동전선군 정찰국 산하의 독립부대 88독립보병여단에 편입된 이후 소련공산당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해방 이후 김일성 주석은 소련의 지원 아래 북의 정권을 장악하였지만 그 대신 소련공산당의 지도를 받아야 했으며, 194812월 소련군이 철수한 이후에야 자신의 독자적인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북이 1950년 전쟁에서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은 이후 소련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의 북에 대한 간섭이 다시 강화됐다. 1950년 전쟁 이후에도 미소 냉전, 타이완 문제 등으로 인해 북은 소련과 중국에게 지정학적으로 중요했다. 소련은 북을 동구와 같은 완충국가로 만들고 싶어 했다. 소련과 경쟁관계에 있던 중국 역시 타이완 문제로 미국과 적대관계였기 때문에 북을 남의 미군 사이의 완충국가로 삼고자 했다. 중국은 1945년 말부터 북에 합류하였던 조선의용군 총사령관 무정, 조선독립동맹 등 조선인 팔로군과 신4, 그리고 정전협정 이후에는 1958년까지 주둔한 중국인민군을 통해 북의 내정에 간섭했다.

해방 직후 연안파는 최대 파벌이었고 소련파는 주로 소련에서 태어난 고려인 엘리트들이었다(조우찬, 2016: 107-108). 소련파는 200여 명에 불과하지만 소련군 철수 이전까지는 북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 하지만 소련군 철군 이후 영향력이 급감했다. 1950년 전쟁 전후까지 북의 국가와 당의 각종 고위공직은 소련과 중국의 지시를 받는 조선인인 소련공산당 당원과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채워졌다. 이들은 소련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의 지원 아래 김일성 주석과 권력투쟁을 유지했다. 북 내의 소련과 중국의 공산당 당원들은 북을 자신의 영향아래 묶어 두기 위해 서로 경쟁하였지만 필요할 때는 힘을 합해 김일성 주석을 압박했다.

항일무장 투쟁 시절부터 중국공산당과 소련공산당의 간섭을 경험했던 김일성 주석은 정전협정 이후 중국공산당과 소련공산당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권력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김일성 주석은 자신의 체제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한편, 소련이나 중국의 지원을 받는 반대세력을 제어할 수 있는 명분으로서 독자적인 이데올로기를 모색했다.

북은 자신보다 앞서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주창했던 유고의 외교노선으로부터 자극받았다. 스탈린의 뜻에 의해 코민포름은 1948년 총회에서 유고슬라비아를 제명하였고, 이듬해 소련은 유고에 대한 모든 원조를 중단했다. 하지만 티토는 소련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자주노선과 중소 등거리 외교를 유지했다.

이에 흐루쇼프는 195562일 유고를 방문하여 티토와 함께 양국관계를 회복하는 베오그라드선언(Belgrade Declaration)을 발표하였고 티토 역시 이듬해 소련을 답방했다(이향재, 1988). 베오그라드선언에서 양국은 정치체제가 다르지만 서로 존중하고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고 상호의 관계가 평등함을 확인했다. 또한 양국은 정치적 사회적 체제 나아가 사회주의 형태에 있어 상대방의 선택권을 인정하고 각자의 자주성, 주권, 영토를 존중하기로 했다. 나아가 양국은 사상적, 정치적, 경제적 분야에서 서로 다른 의견을 지니더라도 상대방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 그밖에도 양국은 다른 나라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어떤 형태의 침략이나 시도를 하지 않기로 했다(Rajak. 2004 : 179-180).

흐루쇼프는 1956년 연설에서 유고슬라비아와의 관계가 악화된 것은 스탈린의 독단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1963820일 흐루쇼프 서기장이 다시 유고를 방문했을 때 티토는 다른 나라나 다른 당에 의한 내정간섭을 완전히 배제하며 모든 나라들이 외부의 압력 없이 자유의지를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였는데 흐루쇼프가 이를 수용했다(서재진, 2001:14).

한편 전인영(1990)에 따르면 북의 자주노선은 모스크바 선언의 영향을 받았다. 1957111664개국의 공산당·노동자당이 모여 사회주의 혁명과 공산주의 건설의 원칙은 각국의 조건에 따라 자주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모스크바 선언을 채택했다. 하지만 이 원칙은 소련의 체코 침공 직후인 1968926일 발표된 브레즈네프 선언에 의해 사실상 폐기됐다. '주권과 공산주의 국가의 국제적인 의무'라는 이 선언에 따르면 소련은 서방이 사회주의 국가를 해체하려는 시도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2) 국내파와 연안파 및 소련파의 도전

 

김일성 주석은 19568월 소련파와 연안파가 중심이 된 종파사건을 극복하면서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자주적 입장을 확고히 하고자 했다. 조선은 원래 소련파, 연안파, 박헌영의 국내파, 김일성의 만주파와 그 연계조직인 갑산파 등으로 구성된 연립정부였다. 1950년 전쟁에 대한 책임 논란은 박헌영 세력이 간첩죄로 숙청됨으로써 일단락됐다. 스탈린이 사망한 195335일 박헌영 세력 12명이 체포됐다. 그해 리승엽 등 10명은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나머지 두 명은 10년 이상의 중형을 받았다. 박헌영은 1953311일 체포되었으나 간첩죄를 인정할 때까지 재판이 늦어져 19551216일에서야 사형선고를 받았다(김동원 안광획 이정훈, 2021).

하지만 사형선고 이후에도 박헌영에 대한 사형은 8월 종파사건이 일단락될 때까지 집행되지 않았다. 중국공산당과 소련공산당이 모두 박헌영을 자기들의 나라로 송환할 것을 요청하며 구명운동을 하고 있었다. 연안파와 소련파 역시 중소의 입장에 따라 김일성 주석의 박헌영 제거에 대해 반발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연안파 최창익, 소련파 박창옥은 소련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의 이후 스탈린 격하운동에 편승하여 김일성의 권력 독점에 대해 비판하였다. 이들은1956423일에 열린 조선노동당 제3차 당대회에서 당내 민주주의를 주장하며 김일성 주석에게 1인 지배와 개인숭배에 대한 자기비판을 요구했다. 반면 김일성 주석은 개인숭배 또한 박헌영이 조장한 것이라고 반박하면서 여전히 박헌영을 추종하는 화요파, 엠엘파의 잔재를 청산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김일성 측의 주장에 따르면 연안파는 인민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기에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필연성과 인민정권에 대한 당의 영도를 부정하고, 당의 민주집중제 원칙에 반대하며 당내 종파활동의 자유와 종파유익설을 주장했다. 특히 김일성은 최창익이 교조주의에 반대한다는 구실 아래 수정주의에 빠지고 말았으며, 우익투항주의로까지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김일성은 우리는 교조주의, 수정주의를 다 반대하며, 그 뿌리에 있는 종파주의를 반대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소련공산당은 “3차 당대회를 정식 대회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김일성 주석을 압박하며 소련파와 연안파에 힘을 실어주었다. 마침 김일성 주석이 동유럽 공산권 국가로 순방을 나가 있는 동안 조선노동당 6차 전원회의가 195682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부주석 최창익을 비롯한 반김일성 세력은 이 회의를 앞두고 민주적 집단지도체제를 확립한다는 명분으로 김일성 주석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여, 주석직에서 물러나게 할 계획을 세웠다.

김일성 주석이 측근으로부터 이러한 내용의 첩보를 전해 듣고 전원회의를 830로 연기하고 조기 귀국하여 직접 전원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소련파와 연안파는 또다시 김일성의 개인숭배와 독재를 비판하였지만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결국 다음날 회의에서 최창익, 윤공흠, 서휘, 리필규, 박창옥 동무들의 종파적 음모 행위에 대하여라는 결정서가 채택되면서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고 출당되었다.

그런데 주소련 북한대사 리상조가 스탈린에게 구명운동을 하고, 중국으로 망명한 윤공흠, 서휘, 리필규, 김강 4인이 마오쩌둥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에 19569, 아나스타스 미코얀 부총리와 펑더화이 국방부장이 이끄는 중소공동대표단이 진상조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방북했다. 공동대표단이 입석한 가운데 노동당 중앙위 9월 전원회의가 열렸으며 여기에서 김일성 주석은 중국과 소련의 압박 때문에 8월 전원회의 결정이 성급하였음을 인정하고 박창옥, 윤공흠 등을 복당시켰다.

그러나 미코얀과 펑더화이가 떠나자 김일성 주석은 당증 교환사업을 벌여 반대파 척결 사업을 더욱 강화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최창익, 박창옥을 비롯해 김두봉, 오기성 등의 반대파는 모두 현직에서 철직 혹은 추방됐다. 195612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이 사건을 '반당 반혁명적 종파음모책동'사건으로 규정했다. 소련파 및 연안파와의 연계가 우려되던 박헌영 역시 같은 달에 처형당했으며, 최창익은 옥사하였고, 박창옥은 처형됐다.

8월 종파사건의 배경 중의 하나는 경제노선을 둘러싼 대립이었다. 북의 경제개발 특히 사회주의로의 이행기에 해당하는 15개년 경제계획에 있어 어느 부분을 먼저 발전시키냐는 매우 중요한 논의였다. 김일성 주석은 농업협동조합을 확대하고 중소에 대한 의존과 안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공업과 국방산업을 우선 발전시키고자 하였으며, 다만 북의 산업 현실과 인민의 수요를 고려하여 농업과 경공업을 보완적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반면 중국과 소련 그리고 연안파와 소련파는 중공업과 국방산업을 발전시켜 중소에 대한 의존에서 탈피하려는 김일성의 구상에 대해 내심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외형상으로는 인민의 수요에 부응하고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경공업을 우선 발전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8월 종파사건을 마무리한 김일성 주석은 '중공업 우선발전, 경공업·농업 동시발전'이라는 자신의 발전전략을 관철할 수 있게 됐다.

 

 

3) 1956년 스탈린 격하운동 이후 김일성 1인 통치에 대한 비판

 

흐루쇼프는 1953년 스탈린 사후 라브렌티 베리야(Lavrentiy Beria)를 제거한 후 권력을 잡았다. 베리야는 스탈린의 심복이자 공안기관의 책임자로서 스탈린의 숙청에 협력했다. 베리야는 스탈린 사후 공포정치를 완화하고 경제개혁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대외적으로 유화정책을 주장했다. 하지만 흐루쇼프는 베리야가 반소 시위가 발생한 동독을 서방에 포기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다른 정치국원들을 설득시켜 베리야를 숙청했다. 베리야는

반역, 학살 등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19531223일 재판 직후 6명의 공범들과 함께 총살당했다. 20005월 러시아의 대법원은 베리야 유족들이 신청한 재심요청을 기각하였으나 공범들은 반역죄가 아닌 권력남용죄가 인정되어 25년 징역형으로 감형됐다.

1956224일에 열린 소련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에서 흐루쇼프는 개인숭배와 그 후과들(On the Cult of Personality and its Consequences)”로 알려진 비밀연설을 통해 스탈린을 비판했다. 흐루쇼프는 일단 스탈린이 레닌의 성과를 발전시킨 것은 공로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자화자찬과 무오류, 개인독재와 개인숭배, 권력남용과 공포정치 등을 마르크스레닌주의 원칙에서 일탈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흐루쇼프의 연설에 따르면 스탈린은 심지어 자신을 레닌보다 더 우위에 놓았다.

스탈린과 베리야의 권력남용과 공포정치에 대해 단죄하는 흐루쇼프의 연설에는 스탈린의 심복이자 자신의 경쟁자인 베리야를 숙청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의도도 숨겨져 있었다. 이 연설문의 초안은 1954년 마르크스-엥겔스-레닌-스탈린연구소 소장을 지낸 표트르 포스펠로브(Pyotr Pospelov)가 주도한 조사위원회가 작성했다. 이 연설의 내용 중 스탈린의 잔혹한 숙청에 대해 흐루쇼프 입장에서 스탈린과 베리야의 죄상을 과장했다는 반론이 있다(마리오 소사. 2013).

흐루쇼프에 따르면 스탈린은 전당대회나 중앙위원회를 소집하지 않고 자기 혼자서 중요한 결정을 함으로써 자신의 1인 지배를 강화시켰다. 또한 스탈린의 집권 기간 동안 많은 인민들과 당원들이 고문으로 인한 허위자백, 위증, 가짜 문서 때문에 유죄판결을 받아 감옥에 가거나 사형당했다. 17차 당대회에서 선출된 139명의 중앙위원 및 중앙위원 후보 중 70%가 당과 혁명 및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혀 체포되거나 사살당했다. 17차 당대회 대표 1,966명 중 1,108명이 반혁명죄로 체포당했다.

또한 흐루쇼프는 스탈린이 생전에 자서전과 영화를 통해 스스로를 우상화했다고 비판하고 역사, 철학, 경제, 문학, 예술 등에 파고든 개인숭배를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하고 이를 근절할 것을 제안했다. 흐루쇼프는 연설의 마지막에서 당의 대의기구를 정상화하여 집단지도체제와 민주집중제와 같은 소비에트 헌법에 근거한 혁명적인 사회주의 법치(Socialist Legality)와 소비에트 사회주의 민주주의 원칙을 회복할 것을 다짐했다.

흐루쇼프의 1인 지배에 대한 적대감은 동유럽, 중국, 북에도 영향을 미쳤다. 개인독재는 필연적으로 권력남용을 낳는다고 확신한 흐루쇼프는 집권하자마자, 소련의 위성국가였던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지도자들이 스탈린을 흉내 내어 개인숭배를 하고 있던 것을 비판했다. 또한 흐루쇼프는 이들 국가에서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도 계급모순이 존재하므로 계급투쟁이 필요하다는 논리 아래 대규모 숙청을 정당화하는 것을 비판했다. 흐루쇼프는 이들 국가의 공산당에게 이러한 정책을 수정할 것과 독단적인 지도자를 교체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소련의 권고를 받아들여 헝가리에서 19536월 라코시(Rakosi)가 너지(Nagy)로 교체됐고, 폴란드에서 19543월 비에루트(Bierut)가 치란키에비치(Cyrankiewcz)로 교체됐다.

흐루쇼프의 연설에 자극 받은 중국공산당은 19564월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어 사회주의 건설과 사회주의 개조 등에 관한 여러 문제를 토론했다. 이 자리에서 마오쩌둥은 중국의 경제발전전략, 중앙과 지방의 관계, 소수민족, 외교관계에 관한 <10대 관계를 논한다>를 제기했다. 이어 1956915일 열린 중국공산당 제8기 전국대표대회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 간의 계급모순은 기본적으로 해결되고 현재 국내의 주요모순은 당면한 경제문화가 인민의 수요를 만족하지 못하는 것으로 전환됐음을 확인하고, 사회주의 건설 시기로의 돌입을 선포했다.

또한 제8대는 민주집중제와 집단지도체제를 견지하여 개인숭배와 개인독재를 지양하는 등 당 내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것, 당과 군중의 관계를 강화하고 실사구시의 원칙을 견지하여 주관주의, 관료주의, 종파주의를 극복할 것을 강조했다. 특히 마오쩌둥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중앙서기처가 설치되었고 총서기에 덩샤오핑이 선임됐다. 이 대회에서는 마오쩌둥 사상은 우리 모두의 공작 지침이다.”라고 명시돼 있던 당장(黨章)의 조항이 삭제됐다. 대신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습에 노력하고 끊임없이 자기의 의식을 높여간다.”는 구절이 추가됐다(서재진, 2001:17-18).

북의 경우 흐루쇼프의 연설 직후 19563월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열렸고 여기서 흐루쇼프 연설을 번역하여 청취했다. 그해 4월에 있을 조선노동당 제3차 대회 직전에 열린 이 회의에서는 소련의 압력, 소련파와 연안파의 주장으로 인해 당내에 약간의 개인숭배 현상이 있었음이 인정됐다. 또한 김일성 측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연설을 계기로 그 동안 통상 사용하던 김일성에 대한 수령호칭은 물론 경애하는과 같은 수식어도 사용하지 않는 등 소련의 눈치를 많이 보았다(이종석, 1995:206).

 

 

4) 사회주의 국가의 혼란의 국내 유입 차단

 

(1) 동유럽의 반체제 운동 차단

 

스탈린을 격하하는 흐루쇼프의 연설은 스탈린의 지배 아래에 있던 동유럽에 탈소련과 자유화 시위를 유발했다. 폴란드에서는 19566월 포즈난 노동자들이 빵과 자유의 슬로건을 내걸고 시위를 하다가 폭동으로 악화됐다. 결국 군대가 투입되어 시위를 진압했다. 헝가리의 1956년 사건은 훨씬 대규모 사건으로 발전되었고 결국은 소련 군대가 투입되어 진압됐다. 폴란드와 헝가리의 사태는 김일성 주석의 연설에 의해 북에 널리 알려졌다(김일성, 1957,4.4) 김일성 주석은 자주적인 조선의 혁명은 외세의 혼란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서 동유럽 사태가 북으로 파급되지 않도록 경계했다. 김일성 주석은 이런 관점에서 수정주의와 반마르크스주의적 경향이 내외부에서 발생하지 않도록 사상적 투쟁과 단련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김일성, 1957.12.5).

 

(2) 중소분쟁에서 등거리 정책

 

흐루쇼프는 1956년 연설에서 소련을 노동자국가에서 전 인민의 국가로 전환됐다고 선언하였고 대외적으로 미국과의 평화공존론을 제기했다. 특히 흐루쇼프는 서유럽은 러시아와 달리 선거와 의회를 통한 혁명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수정주의 경향은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에 참석했던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부를 비롯하여 프랑스와 스페인 공산당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영향은 사민주의 정당과 선거연합을 통해 합법적인 사회주의혁명을 하고자 하였던 유로코뮤니즘의 배경이 됐다. 흐루쇼프의 평화공존론은 사회주의권과 자본주의권의 긴장 완화(데땅뜨)로 이어졌다. 1960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의에서 소련의 주도로 평화공존론을 재확인하는 공동선언서가 채택됐다.

그런데 중국은 1954년과 1958년 타이완 해협 위기 당시 타이완을 지원한 미국과 적대적 관계였다. 따라서 중국은 흐루쇼프의 대미 유화정책을 비판했다. 이런 갈등으로 인해 소련은 1958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제25개년 계획에 대한 지원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또한 소련은 1962년 중국과 인도의 국경 분쟁 당시 중국을 지지하지 않았다. 이러한 여파로 인해 중국과 소련의 교류는 단절되었고 국경문제도 악화됐다. 양국은 국경에 군대를 증강 배치했다. 결국 1969년 양국은 무력 충돌하였으며, 핵전쟁 직전까지 가다가 미국의 중재로 협상을 시작했다.

북은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동시에 군사 원조와 경제 원조를 받아왔기 때문에 중소분쟁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고자 했다. 이러한 등거리 외교정책이 외교에서의 자주노선으로서 정립됐다. 김일성 주석은 1956년부터 1961년 사이에 5차례 소련을 방문했다. 김 주석은 중국에 1958년 한 달 가까이 체류하였으며, 1959년 재차 중국을 방문했다. 19607월 김일성 주석은 우호협력과 상호지원 조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소련과 중국을 동시에 방문하기도 했다.

이러한 등거리 정책은 중소로 하여금 북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일종의 외교경쟁을 유발시켰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정우곤(1992)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중국과 소련과의 관계에서 자율성을 누림으로써 개인숭배 비판 등의 내정간섭을 피해갈 수 있었다.

김일성 주석은 중소분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소련의 우경 수정주의, 중국의 좌경 모험주의를 모두 반대하고 자주적인 혁명노선을 견지한다면서 주체를 더욱 강조했다. 1966105일 제2차 당대표자회의에서 경제 국방건설 병진노선이 결정됨과 동시에 소련과 중국의 그릇된 노선을 반대한다는 노동당의 주체적 노선이 내외에 선포됐다.

 

어떤 사람들은 한 나라의 당대회를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새로운 단계의 개시로 묘사하고, 어떤 당의 정책과 결정을 국제공산주의운동의 공동강령으로 선포하면서 그것을 다른 형제당에 내리 먹이려 하고 있다. 어떤 당의 결정이나 조치는 그 당 내부에서만 의무적인 것이지 결코 다른 당의 활동을 규제할 수 없다. 특히 소위 개인숭배 반대운동을 다른 당에 내리 먹이려 하고 그것을 간판으로 해서 형제당, 형제나라의 내정에 간섭하며 그들 나라의 당지도부를 전복하기 위한 활동을 하는 것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다. 확실히 개인숭배 반대소동에 의해 수많은 형제당이 소용없는 열병을 앓고 국제 공산주의 운동이 커다란 손실을 입은 것이 현실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일부 사람들에 의해 개인숭배 반대소동은 계속되고 있다. 이런 행동은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단호히 배격되어야 한다.

 

이처럼 중국 및 소련과의 등거리 외교노선이 중소에 대한 비판으로 발전하자, 소련의 군사지원과 중국군의 감축이 본격화됐다. 정전협정 이후 34개 사단의 중국군은 북의 농사, 관개수로 확충, 도로와 교량의 복구, 공장건설 등 전반적인 사회기반시설 건설에 동원됐다. 중국군은 1955년 말까지 19개 사단이 철수했으나, 8월 종파사건으로 철군이 중단됐다. 북이 친중인사들을 숙청하자, 중국은 군대를 잔류시켜 북을 압박 감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김일성은 내정간섭에서 벗어나고자 19571216일과 25일에 마오쩌둥에게 중국군 철수를 제안했다. 이에 중국과 소련은 북이 공식적으로 먼저 중국군 철수를 요구하는 방식에 동의했다(이상숙, 2009: 91).

중국의 입장에선 실전 경험이 많은 중국군을 전쟁의 위험이 줄어든 한반도에서 철수시켜 타이완 위기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리강(2013)에 따르면 미국이 1957년부터 주한미군을 감축하면서 방어용 전술핵을 배치하였기 때문에 중국 입장에선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할 의사가 없어 보였다.

 

 

(3) 중국의 문화대혁명 차단

 

북이 중소등거리 노선을 취하였지만 상대적으로 중국에 우호적이었다. 소련이 개인숭배 비판을 북과 중국에 강요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반발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북은 중국-인도 국경 분쟁과 쿠바 미사일 사태에 대한 소련의 태도에 실망하였다. 북은 한미와 군사적으로 대결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평화공존노선에 반대했다. 북은 1964년 흐루쇼프가 실각할 때까지 소련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고 상대적으로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이종석, 2011: 29-31).

문화대혁명은 스탈린 격하 운동으로 자신의 권력이 약화된 마어쩌둥의 반격이라고 볼 수 있다. 흐루쇼프가 스탈린 격하 연설에서 스탈린의 계급투쟁에 따른 대규모 숙청을 비판한 직후에 중국은 소련의 압력으로 계급투쟁이 아니라 인민의 수요와 낮은 생산력이 주요 모순이라면서 기존 입장을 수정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은 마오쩌둥의 지도 아래 19579월 제8기 전국대표대회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다시 입장을 바꿔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 간의 모순이 현재의 주요모순이라고 강조했다.

마오쩌둥은 195988기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펑더화이를 우경반당집단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좌경적 흐름은 1965년 중국공산당 중앙의 사업회의에까지 이어져 같은 해 중국공산당 중앙은 정치와 경제, 조직과 사상을 정화한다는 ‘4청 운동을 채택하기에 이른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소설 류즈단(1961)과 역사극 해서파관’(1962) 등 문예 학술에 대한 좌경적 비판이 고조됐다.

서북지방의 영웅적인 혁명가인 류즈단이 당 내 좌경그룹에 맞섰다는 류즈단의 내용과 펑더화이가 1959년 소련의 입장을 추종하면서 마오쩌둥을 비판한 루산회의를 은유적으로 미화했다는 해서파관의 내용이 마오쩌둥 측으로부터 비판받았다. 이는 문화대혁명이 촉발되는 계기가 됐다.

19668월 중국공산당 811중앙위원회 전체회의는 중국공산당 중앙회의의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을 통해 문화대혁명 및 좌경적 지도방침을 선포했다. 문화대혁명은 사회주의 하에서도 여전히 하나의 계급이 다른 계급을 뒤엎는 정치대혁명이 진행돼야 한다는 것을 핵심내용으로 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에서의 계속혁명이론에 근거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은 사회주의 건설기에 있어 주요모순을 경제건설에 두지 않고 계급투쟁에 두는 오류를 범했으며, 실사구시를 무시했다.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이 김일성 주석을 수정주의자로 공격했다. 1966812일 노동신문 논설 자주성을 옹호하자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따라가는 것을 사대주의로 비판하면서 자주노선을 강조했다. 또한 1967127로동신문에 보도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통신사 성명중국 홍위병들이 조선에서 정치적 불안이 조성되고 있다는 허위선전을 하고 있으나 당, 정부, 인민, 군대 모두 하나의 사상으로 단결되어 있다고 밝혔다.

문화혁명으로 인해 북은 중국과 긴장관계에 돌입하는 한편 브레즈네프가 집권한 소련과 관계를 개선했다. 하지만 조소관계는 50년대와 달리 상당히 대등한 관계로 전환됐다(이종석, 2011: 29-31).

 

 

5) 경제적 조건을 극복하는 대중동원 이데올로기의 필요성

 

북은 건국 당시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한 상태였으며, 더구나 1950년 전쟁으로 산업기반이 대부분 파괴됐다. 따라서 전후 경제복구가 제1의 과제였다. 1947년에 실시된 11개년계획은 기업소 복구, 국영상공업 확대, 생산의 급속한 증대와 인민의 생활 개선 등을 주요 과업으로 설정했다. 1948년에 실시된 21개년계획은 공업의 편파성 극복과 생산품의 품질 제고 및 원가 절하에 주력했다. 그리고 19491950년에 실시된 2개년계획은 낙후된 산업과 농업의 발전, 전 지역의 경제복구를 위한 토대 조성을 주요 과업으로 설정했다. 전후복구 3개년계획(19541956)의 목적은 1950년 전쟁 이전 수준 도달이었다. 북은 이 시기에 국민소득과 공업총생산을 각각 2.2배와 2.6배로 증가시킬 계획목표를 세웠으며, 곡물 수확고는 376만 톤으로 목표를 설정했다. 이러한 계획은 중국, 소련 및 기타 사회주의국가의 지원에 조기달성 했다.

 

우리가 자본주의 발전단계를 정상적으로 거치지 못한 것만큼 자본주의하에서 마땅히 해결하였어야 할 생산력발전의 과업을 오늘 우리 사회주의시대에 와서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반드시 사회주의의 물질적 기초를 계속 튼튼히 닦아서 생산력을 적어도 발전된 자본주의나라들의 수준에까지 끌어올리고 로동계급과 농민의 차이를 완전히 없애야 합니다(김일성, 1967).

 

이러한 북의 경제복구에서 중소 등 사회주의 국가의 경제적 지원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북은 1954~1956년까지 주로 중국과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로부터 총예산 세입인 115,600만 달러의 64.6%에 달하는 무상원조를 받았다. 하지만 흐루쇼프가 무상원조를 장기차관으로 전환하면서 1956년의 3억 루블이 소련의 마지막 무상원조였다. 북 재정수입 중 중국과 소련의 원조가 한국전쟁 이후 한 때 33,4%에 달했으나 중소의 지원이 감소함에 따라 1958년에는 단지 4.5%에 불과했다(이상숙, 2009: 93).

북중은 중국군의 철수를 합의한 후 북의 요청에 따라 일시적으로 경제적 군사적 협력을 강화했다. 소련의 군사지원이 급감한 반면 중국은 철군 이후 북의 전투력의 공백을 중화학무기의 지원으로 보완했다. 북중은 195712월에 과학기술협력협정, 19585월에 북중 간 장기 무역협정을 체결했다. 그 결과 1958년 양국 간 무역은 1957년보다 50%나 증가했고, 중국은 2500만 달러의 차관과 함께 운봉 수력발전소 건설을 지원했다(이상숙, 2009: 99).

하지만 북이 중소를 비판하면서 중국의 지원은 또다시 감소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이미 북이 소련파와 연안파를 숙청한 후 독자노선을 걸으면서 중소 분쟁에서 자신의 입장에 서지 않은 북에 대해 경제 원조를 대폭 축소했다. 나아가 북의 제15개년계획(195761) 당시 소련뿐만 아니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도 경제 원조를 줄였다.

196238일 김일성 주석은 우리가 남의 원조를 반대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원조를 주지 않는 데야 어떻게 하겠습니까.”라며 현실을 인정한 후 남의 원조가 없이도 혁명은 해야 하며 사회주의는 건설해야합니다라면서 자주노선과 자력갱생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나아가 김일성 주석은 혁명과 건설은 인민대중 자신의 사업이기 때문에 혁명과 건설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는 마땅히 자력갱생의 원칙에서 자체의 힘으로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621219로동신문은 논설을 통해서 주체에 대한 사상은 우리 당이 자기행동에서 확고하게 견지하고 있는 근본원칙이라고 천명했다. 또한 신문은 자립적 민족경제노선을 사회주의 건설에서 우리당의 주체사상을 반영한 가장 현명한 방침이라고 주장했다.

결국은 북은 저개발상태를 극복하고 사회주의혁명과 건설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인적자원’, 즉 인민대중의 노동력과 혁명적 창발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북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중심으로 혁명의 원동력을 설명하는 마르크스의 혁명이론과 달리 인민대중의 혁명에 대한 의지와 역량에서 혁명과 건설의 원인을 찾는 실천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최대석, & 현인애, 2007: 259).

북에 따르면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건설을 다그치기 위한 결정적 담보는 인민대중의 창조력을 남김없이 동원하여 그들의 열성과 창발성과 재능을 전면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있다(김일성, 1965). 이러한 김일성 주석의 언급은 이 시기의 주체사상이 단순히 대외적 독자성에 대한 강조나 국내의 권력투쟁의 수단만이 아니라, 인민대중의 적극적인 역할을 인정하고 이를 끌어내기 위한 통치 이데올로기로서의 성격이 전면화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최대석, & 현인애, 2007: 264).

이처럼 중소의 지원이 급감한 1955년 이후 대중동원 이데올로기로서 주체사상의 역할이 증대됐다. 15개년 경제계획 직전인 19561213일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발표된 사회주의 건설에서 혁명적 대고조를 일으키기 위하여에 근거하여 전반적인 생산능력 등을 증대하기 위한 천리마운동이 시작됐다. 제철능력을 초과 달성한 강선제강소의 모범은 천리마운동으로서 1958년 전국의 각 분야로 확산됐다. 196025일 김일성 주석이 청산리협동농장에서 15일 동안 현지지도하면서 혁명적 군중노선에 입각한 농업 분야의 경제관리체계인 청산리방법을 확립했다. 또한 1961년 김일성 주석이 대안전기공장을 현지지도하면서 기존의 지배인 지배체제를 당위원회 중심의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하는 등 청산리방법을 공업 분야에 적용했다. 이러한 대안의 사업체계는 전체 공업 분야에 확산됐다(김동원 안광획 이정훈, 2021).

북은 중소로부터 독립, 소련의 동유럽 탄압, 소련군이 철수한 쿠바사태를 겪으면서 경제건설과 자주국방을 동시에 실현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에 제17개년계획(19611967) 동안 경제 건설 및 자주국방이라는 병진노선을 분명히 했다. 특히 전민 무장화, 전군 간부화, 전국 요새화와 함께 전군 현대화라는 4대 군사노선을 채택하면서 국방산업에 주력하게 됐다.

1970년대 들어 유일사상화’,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와 함께 사상 기술 문화 분야에서의 3대혁명이 강조됐다. 16개년계획(19711976) 기간이던 1973‘3대혁명소조운동이 본격화됐다. 특히 ‘3대혁명 붉은기 쟁취운동은 부족한 자원을 인력으로 보완하기 위한 노동력 동원 캠페인의 성격을 지닌다. 1984년까지 10여 년 동안 10여만 명이 3대혁명소조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이들 중에서 국기훈장 수여자, 노력영웅, 공화국영웅 등이 배출됐다.

장인숙(2011)에 따르면 사회주의 국가에서 생산력 증대를 위한 대중동원운동의 원형은 사회주의 경쟁원리에 근거한 소련의 1935년 스타하노프 운동(Stakhanovite Movement)이다. 다만 이 운동은 영웅호칭 부여라는 정신적인 동기 부여 못지 않게 포상금 등 물질적 보상도 수반했다는 점에서 정신적인 동기 부여를 강조하는 북의 노력 동원과는 다르다. 또한 북이 개인의 성과보다는 집단의 성과를 강조한 점도 다르다.

황장엽(2006:163)에 따르면 천리마운동은 단순한 생산력 증대운동이 아니라 공동체 생산자를 공산주의적 인간형으로 개조하는 것이다. 이는 집단적 혁신이라는 혁명적 군중노선을 경제부문에 적용한 것이다. 그 내용은 당-관료-일꾼들이 상하와 상호의 협업을 통해 인민들의 역량을 최대한 동원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군중노선의 전개는 자립경제노선의 체계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자본, 자원, 기술의 한계를 극복하는 길은 오로지 노동력 동원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오일환 정순원, 1999).

이러한 생산력 증대운동과 경제단위의 경영혁신은 중국의 대약진운동에 영향을 받았다. 실제로 수차례 파견된 북의 방중 대표단은 중국 전역에서 농촌의 인민공사가 성공한 사례들을 참관했다. 북은 제15개년 계획부터 대중동원형 자립경제를 추구하는 상황에서 중국의 대약진운동에 고무되어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주류 시스템에 참여하지 않고 중국과 긴밀한 협력 아래 대중동원형 자립경제의 노선을 걸어갔다(이상숙, 2009: 103).

 

 

6) 갑산파의 숙청 이후 김일성 유일체제의 확립 및 김정일의 부상

 

갑산파는 1930년대 조국광복회 사건, 일명 '혜산 사건' 때 국내를 거점으로 활동한 항일조직 출신으로서 1950년대까지 '김일성파'와 같은 개념으로 쓰인다. 1930년대 만주의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의 11당 주의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 만주성위 산하에서 활동했다. 19357월 코민테른의 통일전선 지침과 그에 따른 중국공산당의 지시로 인해 19365월에 동북항일연군의 외곽에 한인이 주도하는 반파시즘 항일 통일전선, 즉 조국광복회가 창립됐다. 한편 식민지 치하의 경찰기록에 의하면 박달과 박금철이 주도한 갑산공작위원회는 19363월부터 함남 갑산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193612월에 김일성 주석과 회합한 후에 조국광복회 산후 국내 하부조직으로서 참여했다. 이후 갑산공작위원회는 1937년 초에 한인민족해방동맹으로 개칭했다(조우찬, 2016: 92).

갑산파의 실질적인 지도자인 박달은 해방 직후 석방됐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정치에 참여하지 못했다. 반면 19483월에 열린 제2차 조선노동당대회에서 박금철의 중앙위원 서열은 67명 중 67위였다. 박금철은 소련파, 연안파, 박헌영의 국내파에 대항하는 범만주파(김일성파)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국내파가 제거된 직후인 1954년에는 김일성의 지원을 받아 권력순위가 4위로 상승했다(조우찬, 2016: 104-105).

조우찬(2017)년에 따르면 박금철 등 갑산파는 소련의 경제개혁조치인 리베르만 방식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등 실용주의 노선을 주장했다. 또한 이들은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만을 유일한 혁명 전통으로 삼으려는 김일성에 반대했다. 조국광복회를 매개로 김일성 계열의 무장투쟁과 연계되었던 갑산파는 자신들의 무장투쟁뿐만 아니라 무장투쟁과 병행한 국내 정치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즉 이들은 무장투쟁 일변도의 김일성의 노선보다 자신들의 종합적인 투쟁노선에 더 정통성을 부여하려고 했다.

갑산파의 이러한 시도에 대해 김일성 계열 특히 김정일은 갑산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김일성(1967.6.20)에 따르면 박금철은 이미 일제에 검거되었을 때 변절하였으며 수정주의에 경도되어 당이 내린 목표량을 무시하고 간부들에게 󰡔목민심서󰡕를 읽도록 하는 등 봉건사상을 전파했다. 당시 북은 실학사상에 대해 기존의 우호적인 입장을 바꿔 봉건사상이라고 비판하고 있었다. 또한 박금철은 자신의 함경도 출신을 중용하는 등 지방주의를 부활시켰다.

갑산파는 196754일부터 8일까지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415차 전원회의에서 당에서 추방됐다. 이 전원회의는 김일성 유일사상체계와 유일지배체계 확립이라는 예민한 문제를 다뤘기 때문에 그 내용은 추후에 간부 당원에게만 공개됐다. 이 전원회의 결정의 요지는 수령의 혁명사상으로 당을 무장시켜 어떤 다른 사상도 용납하지 않으며, 수령을 중심으로 하는 당의 사상의지 및 행동의 완전하고도 무조건적인 통일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또한 수령 외에는 그 누구도 모른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게 하며, 수령의 혁명사상을 유일한 지도적 지침으로 삼고 유일적 영도 밑에 혁명사업과 건설사업을 진행한다는 것이었다(정창현. 2015:135-136).

또한 북은 1967년 김일성의 5.25교시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에로의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독재 문제에 대하여를 통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과도기뿐만 아니라 모든 제국주의가 소멸되어 사회주의의 종국적 승리가 이뤄질 때까지 지속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확립하면서 김일성의 권력을 강화하는 당 내 계급투쟁을 정당화했다.

갑산파 숙청 이후 김일성 주석의 1인 지배가 더욱 강화된 것은 물론, 김일성 주석과 그 부모인 김형직과 강반석에 대한 우상화 작업이 가속화됐다. “그 분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시다”(로동신문 1967.7.21), “조선의 어머니”(로동신문 1967.8.17) 등의 기사가 등장했으며, 1968년에는 김일성 주석의 생일이 국가 명절로 지정됐다. 이후 김일성은 자신의 사상비서인 황장엽 등을 동원해 주체사상을 김일성주의로 체계화하고 '1당 독재 제체''1인 독재 체제'로 전환하는 것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했다(이종석, 1995:69).

나아가 갑산파의 숙청이 김정일의 사전계획과 집행에 따른 것이라며 김정일의 업적을 강조하는 등 김정일로의 후계승계도 가시화됐다(조우찬, 2017: 204). 김정일은 1964년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후 619일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지도원이 됐다. 19655월부터는 제1부수상 김일의 참사실에 근무하였고, 19662월에는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에서 예술 부문을 담당하는 지도원을 겸했다.

갑산파 숙청 당시 김정일은 영화 등 예술 분야에서 공산주의적 혁명전통의 교양을 강조했다. 김정일은 마침 박금철이 갑산에 자신의 생가를 만들고 자신에 대한 충성을 미화하는 󰡔일편단심󰡕이라는 연극을 공연하도록 하자, 이런 것들이 박금철의 개인 우상화에 해당된다고 비판했다(김정일, 1992, 232-233) 또한 북에 따르면 종파적 수정주의자들의 책동을 간파한 김정일이 갑산파가 도입한 가화폐제도의 수정주의적 본질과 그 위험성에 대해 가장 먼저 파악했다(근로자 68/05, 6).

김정일은 1967615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일군들을 상대로 한 담화 반당 반혁명분자들의 사상여독을 뿌리 빼고 당의 유일 사상체계를 세울 데 대하여를 발표했다. 정창현(2015: 138)은 김정일이 전체 당 간부 앞에서 최초로 연설한 1967년 전원회의에서 박금철을 전면적으로 비판했다고 주장하나 조우찬(2017)은 그 연설자는 김정일이 아니라 김일이었다는 반론을 제시했다. 어쨌든 정창현(2015)에 따르면 19675월 당 전원회의에서 김정일의 연설은 김일성 유일사상체계와 김정일 후계체제가 하나로 연결되는 수령체제의 출발점이었다.

또한 김정일은 군부에 김일성 유일사상을 전파하고 이에 반발하거나 소극적인 지휘관을 숙청하는 등 유일지배체제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후계자로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19691월초 숙청된 민족보위상 김창봉의 죄목은 군대 내에서 유일사상체계 확립에 대한 방해, 혁명전통 계승에 대한 반대 및 저지, 군대 내에 가족주의적 종파 형성 등이었다. 대남사업총국장 허봉학도 청와대 기습,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등 대남군사모험주의를 벌이고 당의 노선을 불이행했다는 비판을 받고 실각했다.

이런 배경에서 김정일은 1969119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및 조선인민군 정치국 일군들과 한 담화 인민군대 당 조직과 정치기관들의 역할을 높일 데 대하여를 발표했다. 또한 1974년 김일성 유일체제를 구체화한 당의 유일사상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이 발표됐고 이는 2013당의 유일적 령도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으로 수정됐다.

 

 

5. 결론

 

이 논문은 주체사상이 김일성 주석 개인의 사상이 아니라 국가이데올로기로서 북이 처한 시기별 조건에 따라 형성되고 발전되어 왔음을 살펴보았다. 북의 문건에 의하더라도 주체사상이라는 표현은 1955년 권력투쟁기 이후에 나타났다. 다만 주체사상이 형성될 수 있는 요인들, 즉 중소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날 필요성, 유격전에서 정신력의 중요성, 인민대중의 협력과 지지를 토대로 하는 총력전의 개념 등은 항일무장시기부터 존재해왔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

따라서 북의 입장을 선해하더라고 주체사상의 등장 시기는 항일무장투쟁기가 아니라 국내파와 연안파 및 소련파와의 권력투쟁이 격화되던 1955년 이후이다. 다만 민족해방과 사회주의혁명, 대외적 자주노선, 대중적 사업방식 등 주체사상의 기본내용은 항일무장투쟁시기부터 싹트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주체사상이 등장 시기는 1955년 이후이지만 그 형성과정은 항일무장투쟁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1955년 이후 주체사상이 등장하게 된 배경은 첫째 정치 외교적으로 중소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이들의 간섭을 물리칠 수 있는 자주적인 외교노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둘째 북의 입장에선 내부적으로 스탈린 사후의 사회주의권 혼란, 중국의 문화대혁명의 혼란이 국내에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고, 중소의 군사지원이 줄어든 조건에서 중소분쟁으로 인한 안보불안을 극복하는 자주국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셋째 열악한 경제조건에서 중소의 지원이 충분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객관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결의와 헌신을 전 인민에게 요구할 수 있는 대중동원 이데올로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넷째 김일성 주석의 권력 강화를 위해 자신의 경쟁자인 박헌영 세력, 친중파, 친소파를 숙청할 수 있는 논거와 그 숙청을 정당화하고 자신의 1인 지배를 절대화할 이론, 이를테면 수령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스탈린 사후 권력승계 투쟁으로 인한 소련의 혼란과 흐루쇼프가 전임자인 스탈린을 격하하는 것을 목격한 김일성 주석이 자신이 사망한 후 권력승계 투쟁으로 인한 혼란을 예방하고, 자신의 사후 권위가 유지되려면 생전에 자신을 추종하는 후계자를 미리 양성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권력승계 투쟁을 세대 단위로 최소화하는 한편, 자신에게 가장 충실한 후계자는 직계 혈통일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인 인식 아래 후계문제를 이론적으로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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