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좌파정당의 제도화 진행에 따른 최상급노조와의 관계 비교

1) 양자의 관계 유사성
 
(1) 노조와의 조직적 연계
 
노동계급의 시민권 획득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노동조합의 합법화 과정이며, 정치적인 측면에서 선거권의 획득과 정당결성의 과정이었다. 노동자들은 단결권을 획득하여 전국적인 노동조합 조직을 건설하였고, 이는 강력한 반체제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노동조합의 정치세력화는 초기에는 반체제정당의 성격을 지녔으나 선거권의 확대로 인해 원내 계급정당으로 전환되었다. 제도화된 노동자정당은 노동자들의 선거권 획득으로 제도화의 문턱을 넘을 가능성이 높아졌고 나아가 보통선거권이 정착됨에 따라 노동자정당은 기존 정당들의 담합을 균열시켜 정착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하였다.
반체제적인 노동자정당은 원내에서는 소수였지만 원외 노동운동과 결합하여 점차 주요한 정당으로 성장하였다.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제조, 자원개발, 운수통신 등 중공업은 대규모의 반숙련 노동자를 형성하게 되고 이들 노동자들을 토대로 최상급노조와 노동자정당이 상호 연대하면서 발전하였다.

노동자정당으로서 좌파정당은 산업사회의 확대에 따라 형성된 거대한 노동자군, 강력한 노동조합을 사회정치적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기반이 제도정치에 반영될 때 노동자정당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였다. 산업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지배적인 계급균열과 계급대립이 투표율과 의석수에 반영될 때 좌파정당은 원내에서 주요정당으로 성장하였다. 이 시기 좌파정당은 사회주의 강령을 공식화하고 강력한 이념정당으로서 노동계급을 조직화하여 계급정당으로서 정착되었다.
독일사민당과 프랑스의 사회당 및 영국노동당은 급격하게 성장한 노동조합이라는 제도 밖의 저항세력과 결합하였다. 특히 독일과 같이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강했던 나라에서 자본주의가 늦게 도입되었지만 노동계급의 조직적 결속력, 정치적 편향성, 이념적 급진성이 한층 빠르고 강하게 진행되었다. 그 이유는 공산주의자동맹과 국제노동자협회에서 사회주의 노동자정당과 노동조합의 건설을 주창하였던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았고 독일제국의 탄압으로 노동자들이 빠르게 급진화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주의자탄압법은 오히려 반감을 불러일으켜 노동자 대중이 좌경화되었으며, 이는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독일제국이 사실상 각각 다른 제후국가로 성립하여 지역마다 정당의 정치적 기반이 다른 반면 독일사민당은 사실상 유일한 노동자정당으로서 전체 제국에 걸쳐 노동계급의 지지를 골고루 받았다.
산업혁명이 가장 빨랐던 영국에서 노동자정당의 창당이 다른 나라에 비해 늦었고 원내 진출도 강력한 소선거구제의 양당제로 인해 방해받았다. 영국노동당은 초기에 자유당 내 노동자 의원을 흡수함으로써 성장하였다. 노동당 당원 대부분은 조합원이었는데, 광부들이 초기의 노동당에 결합하지 않았다. 노동조합대표자회의 소속의 당원의 비중은 190657.4%에서 190866.1%로 늘었으며, 1910년에 이르러 이 비율은 97.5%까지 증가하였다(Thorpe, 2008; 24-25). 또한 노동당의 재정은 노동자대표위원회를 통해 노동조합대표자회의 소속의 조합들이 대부분 부담하였는데, 1904년 전당대회에서 모든 조합원 당원에게 1년에 1페니의 의무분담금을 부과하였으며, 이 자금으로 노동당 소속의 의원들에게 1년에 200파운드의 봉급을 지불하고 또한 선거자금에 충당하였다(Thorpe, 2008; 17-18).
프랑스의 좌파정당들은 독일이나 영국과 달리 초기에 노동조합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생디칼리스트들은 노동자들의 직접행동과 총파업을 강조하고 국가와 의회를 이용하려는 사회주의정당 노선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초기의 좌파정당에 결합하지 않았다. 1905년 통합사회당(SFIO)의 출범 이후에도 CGT의 지도자들은 계급정당과 거리를 두고 독자성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는 정당이 노조를 지도한다는 게드파 노선에 대한 반발임과 동시에 장 조레스의 의회주의적 노선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혁명적 생디칼리스트 전략이 국가의 탄압이라는 벽에 부딪치자 CGT는 개혁주의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1910년을 전후로 하여 프랑스 노동조합은 정당과 선거를 통한 정치투쟁, 즉 국가권력으로의 접근을 시도하면서 적극적으로 통합사회당을 지지하게 되었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의 주도로 창당되었기 때문에 창당 초기에 영국의 노동당과 마찬가지로 민주노총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에도 대의원대회 등을 통해 민주노동당만을 지지한다는 방침을 수차례 공식적으로 밝혀왔다. 민주노동당 창당 직전 민주노총 대의원 중 75.8%(113)가 민주노총이 주도적으로 민주노동당을 건설해야 한다고 응답했으며, 86.7%(130)는 자신이 직접 민주노동당 창당에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반면 22.8%(34)는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 창당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중조직의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고 응답하였다.
각종 선거에서 조합원들의 투표성향을 보면 2002년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조합원들은 민주노동당(52.4%), 한나라당(17.3%), 민주당(15.4%) 순으로 투표하였으며, 정당명부 투표에서 민주노동당(72.2%), 한나라당(9.9%), 민주당(9.8%), 사회당(1.5%) 순으로 투표하였다(민주노총, 2002). 조합원들은 2002년 대선에서 권영길(76.2%), 노무현(17.2%), 이회창(2.3%) 순으로 투표하였으며 2004년 총선 정당명부 투표에서 민주노동당(87.2%), 열린우리당(5.2%), 한나라당(1.7%), 민주당(1.2%) 순으로 투표하였다. 한편 민주노총이 2007년 대선 직전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지지도를 조사한 결과, 권영길(85.7%), 문국현(1.7%), 이명박(1.4%), 정동영(1.2%), 이회창(1%) 순으로 나타났다(김흥국, 2007).
배타적 지지 방침은 다른 부문단체에도 파급되었다.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이 예상되던 2003년 말 전농과 전여농의 농민들이 집단입당하면서 배타적 지지를 선언하였다. 철거민과 노점상이 주요 구성원이었던 전빈련도 배타적 지지를 선언하였으며, 한총련, 한국청년단체협의회 역시 배타적 지지를 선언하고 그 구성원들을 집단입당시켰다. 민주노동당은 이에 화답하여 민주노총과 마찬가지로 중앙위원과 대의원의 일정 비율을 이 부문 단체에게 할당하였다. 이후 부문조직과 대중조직들의 상설적인 대중투쟁전선인 민중연대 역시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선언하였다. 하지만 2007년 민중연대가 진보연대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진보연대가 민주노동당 지지방침을 공식화하려고 하자 민주노동당 밖의 좌파세력들이 반발하면서 진보연대에서 이탈하였고 그 결과 대중투쟁전선이 분열되었다. 이어 2008년 민주노동당에서 떨어져 나온 진보신당은 민주노총이 여전히 민주노동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하는 것에 대해 반발하였다(김태연, 2009; 14).
 
 
(2) 노조와의 거리두기 및 노조의 영향력 감퇴
 
서구의 좌파정당들은 초창기에 당의 노조에 대한 정치적 지도를 상정하고 있었으나 그 구체적 수준은 나라마다 차이를 보였다. 서구에서 당과 노조는 점차 일방에 의한 타방의 지배라는 불평등한 관계를 극복하고 상호 자주성을 인정하고 대등한 관계에서 동반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좌파정당이 노동자가 아닌 유권자의 지지를 획득하려는 국민정당의 모습을 띠자, 당 내에서 노동조합과의 거리를 두고자 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좌파정당은 갈수록 노동조합과의 공식적 협력관계가 국민들에게 드러나는 것을 회피하고자 하였다. 즉 내면에는 노조의 지지를 기반으로 국민들로 지지기반을 확장하고자 하였으나 대외적으로는 노조와의 밀접한 관계를 부담스러워하였다.
독일의 경우 당이 노조 건설을 주도하였기 때문에 노동운동 출신으로서 사회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사회민주당의 중앙집권적 지도부는 자유노조에 대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다만 이들은 수정주의에 경도되어 정치투쟁을 의회투쟁으로 국한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노동조합의 활동을 사민당의 의회활동에 종속시키면서 정치적 대중파업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1906년 만하임 협정을 통해 노동조합은 사민당과 대등한 관계를 수립하였으며, 1910년에 이르러 노동조합의 팽창으로 인해 당은 거대한 노동조합을 더 이상 과거처럼 종속시킬 수 없었다.
1918년 사민당이 최초로 집권하고 그 이후 선거에서 재집권하고자 사민당은 노동자정당 보다는 다양한 일하는 사람들의 민중정당으로 자신을 설정하였으며, 그 이후 사민당은 지금까지 노동조합에 의해 각인된 자신의 이미지를 회석하고자 하였다. 사민당이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를 수용하기 전까지는 노동계급에 기반한 국민정당 노선을 걸었지만 그 이후에는 친노동자적 정책에서 대폭 후퇴하였다. 슈뢰더 정부가 사회복지와 노동정책에서 후퇴하자 일부 노동조합은 사민당을 더 이상 친근로자적 국민정당으로 지지하지 않았다. DGB는 자신들이 지지해왔던 사회민주당에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반면 사회민주당은 DGB가 일반 유권자들을 의식해야만 하는 사민당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과도하게 공격하고 있다고 보았다. 독일 노동자들은 과거에는 사민당에 대해 노동자들의 당이라는 소속감을 지니고 지지하였으나, 이제는 충성심보다는 사민당이 자신들의 이해를 다른 정당에 비해 더 잘 대변하고 있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지지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특히 독일이 후기산업사회에 진입하면서 다양한 직종의 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대공장 육체노동자에 기반하였던 사민당의 노동계급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 전체 노동자 중 사무원의 비율이 높아지자 사민당은 이들의 지지를 얻고자 중도노선을 강화하였다. 노동계급의 감소와 고령화는 사민당의 당원구성에도 직접적으로 반영되었다. 게르트 밀케(Gerd Mielke, 2009: 233)에 의하면 2010년 지역 당원 대상 조사결과에 나타났듯이 대다수 지역의 하부조직들은 적극적인 정치활동을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당원 감소와 당원의 고령화에 직면하고 있었고 당 조직 활동을 바라보는 지역 당원들의 시각은 매우 부정적이었다(장환석, 2012: 6, 재인용).
영국노동당이 1920년대 급속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 역시 노동계급의 성장과 이들의 노동당 지지, 사회민주주의노선으로의 전환 등이다. 당이 노조를 지도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애초부터 노동당 창당 과정에서 사실상 배제되었기 때문에 초기의 노동당 지도부들은 노조에 대한 지도 의사가 없었다. 노조가 당을 만들었지만 노조는 당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주기를 원했지 당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려고 하지 않았다. 반면 느슨한 지구당, 원내 노동당, TUC, 사회주의단체들의 연합체인 노동당은 거대한 노동조합대표자회의를 지도할 능력도 없었다. 1914년 이전에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는 개량주의적인 노동조합에 개입하는 것을 회피하였고, 사회당은 관료의 노동조합 지배에 대해 이렇다 할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영국노동당 역시 집권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득표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동조합 이외의 표가 필요했기 때문에 노동조합만 대변하는 당이라는 유권자의 인식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정당화된 좌파정당들은 대외적으로는 탈노동조합을 천명하면서도 대내적으로는 여전히 노동조합의 조직적 재정적 지원을 요구하였다. 노동당은 노조의 재정지원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그로인해 유권자들에게 노동당이 재정문제 때문에 여전히 노동조합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다고 비춰지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물론 영국노동당의 노동조합과의 거리두기’(distance the Party from trade unionism)는 다른 서구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조건의 변화에 기인한 측면이 있다. 노동당과 노동조합에 가입한 화이트칼라 등 중간층 노동자와 전통적인 블루칼라 노동자 사이에 긴장이 조성되기도 하였다. 또한 일반 당원과 조합원 사이의 괴리가 증대하였다. 노동조합에 소속되지 않은 지구당의 개인 당원들은 노동당에 더욱 애착을 가지고 있었으며, 조합원들보다 3배나 많은 당비를 내고 있었지만 당대회에서 이들의 표결권은 노동조합에 미치지 못하였다. 1970-80년 대 급속히 성장한 화이트칼라 노동조합들은 블루칼라 노동조합들에게 유리한 당내 대의원구조, 당대회와 중앙위원회 결정방식을 개선하고자 하였다.
일정기간 동안 당과 노조의 상층지도부 사이에서 당의 노동조합과의 거리두기에 대해 공감대가 암묵적으로 형성되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이러한 당의 현대화 과정을 보수당의 장기 집권을 막아 노동진영 전체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고 인정하였다. 하지만 좌파정당들이 강령과 정책을 탈노동적인 방향으로 수정하고 집권한 이후 노동조합의 요구를 외면하자 양자의 긴장이 심화되어 양자는 과거와 같이 끈끈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민주노동당이 원외정당에서 벗어나자 비로소 민주노총과의 긴밀한 관계가 국민과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각종 국민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국민들은 민주노총을 자신의 이해만을 추구하는 과격한 귀족 노동자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의 입장만을 대변한다고 보고 있다. 또한 국민들은 민주노동당이 서민을 대변하는 것을 높게 평가하나 동시에 노동자만을 대변해서는 안 된다고 보고 있다.
민주노총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대기업과 정규직 노동귀족’, 자신만을 위한 파업, 인사비리 등이었고 이는 노동운동의 고유한 문제이기보다는 기업별노동조합 체계의 한계로 인한 것이었다.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를 받고 있는 민주노동당 역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해와 요구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전체 노동자들을 대표하지 못한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었다(공계진, 2009).
또한 2004년 총선을 전후로 민주노동당이 언론에 부각되자 과거 학생운동에 관여했거나 사회 비판적이었던 대졸 사무직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입당하였다. 대졸 사무직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 민주노총 조합원이 아닌 당원들은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당으로 인식되어 당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다는 언론공세에 비교적 동의하고 있었다. 이에 호응하여 민주노동당 일각에서는 비정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민주노총을 정규직 중심 조직이라 비판하면서 민주노총과의 거리 두기에 동의하였다. 이들은 정규직 중심의 민주노총이 대기업 중심으로 운영되면서 비정규 노동자들의 이해와 요구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동시에 각종 추문에 휩싸인 민주노총의 도덕적 해이를 지적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민주노동당 역시 2004년 상반기 원내 진출 이후 대국민이미지 전략 차원에서 민주노총과의 거리두기에 나섰다. 이러한 경향이 심화되어 2011년 진보대통합 과정에서 국민참여당과의 통합문제로 인해 민주노총과의 관계가 심하게 훼손되었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관계가 실질적으로 파탄된 계기는 민주노동당이 2011925일 당대회에서 민주노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안건으로 제출한 것이었다. 그 이후 통합진보당은 창당하면서 민주노총에 대한 할당 제도를 폐지하고, 최고위원회가 노동계를 대변할 수 있는 대의원을 추천하고 중앙위원회에서 인준하도록 하였는데, 이로써 양자의 조직적 관계도 해소되었다. 결국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이 먼저 민주노총과의 관계를 훼손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3) 노조의 정치활동 대리주의
 
독일의 경우 사민당이 노조 설립을 주도하였기 때문에 노조는 오로지 당을 통해서만 정치활동을 할 수 있다고 여겨졌다. 자유노조 지도부들은 사회주의자는 그 이론을 노동운동의 일상 관행에 합치시켜야 한다는 베른슈타인에 기울어져 있었는데, 자유노조의 지도자였던 칼 레기엔(Carl Legien)노동조합은 오로지 사회민주당을 통해서만 자신의 요구를 입법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노조의 지도자들은 노동운동의 정치적 팔로 자부하는 사민당의 흐름에 보조를 맞추었다(마르티네, 1983: 46). 실제로 독일노동운동에 있어 국가권력의 탄압으로 정치투쟁이 우선되던 노동조합 초기에 정당의 지도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1906년 만하임 협정 이후 노동조합은 사민당의 정치활동의 도구라는 종속적 지위에서 형식적으로 벗어났지만 사민당과의 공식적 협력관계로 인해 그 이후에도 노동조합의 정치활동은 실질적으로 사민당의 정치활동에 국한되었다. 2차 대전 이후 독일의 노동조합은 사민당과의 공식적 협력관계를 종식하였지만 양 조직의 역사적 배경과 인적 자원의 중첩으로 인해 노조는 주로 사민당을 통해 정치활동을 하였다.
그런데 사민당 정부에서도 더 이상 케인즈주의가 작동하지 않자 DGB의 임금협상조건은 더욱 악화되었고 이는 노동계급에 대한 DGB의 사회적 위상 약화로 귀결되었으며, 그 결과 노동조합의 가입률이 떨어졌다. 또한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이 점차 멀어지는 비동조화가 심화됨에 따라 DGB의 전략적 파트너로서 사회민주당의 역할이 축소되었다. 결국 사민당이 재집권을 위해 친노동자적 정책을 포기하자, DGB사민당을 통한 정치활동 이외에 다른 대안을 찾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독일의 DGB는 의제별로 사민당 이외에도 다양한 정치적 사회적 단체와 연대를 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환경문제에 대해서는 그린피스’(Greenpeace)Deutscher Natur Ring 등과 협력하고 있다.
영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는 노동당 당규상 중앙집행위원회(NEC)와 전당대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 정치에 대한 노조의 자발적 무관심혹은 정치적 태만으로 비판받았다. 영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는 노동당을 통한 의회진출에도 불구하고 노사자율교섭이라는 경제투쟁에 자신을 한정시키면서 노동당의 탈노동화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영국노동당이 집권기간 동안 사회적 타협을 위해 노조의 양보를 강요하거나 선거를 앞두고 국민여론을 의식하여 노동조합과 거리두기를 반복하자, 노동조합은 노동당만을 통한 정치활동에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오늘날 TUC는 노동당 이외의 정치단체와 접촉을 늘리고 있으며, 이를테면 옥스포드빈민구제위원회’(Oxford Committee for Famine Relief,Oxfam)노동자 권리를 위한 운동인 '상표 뒤의 노동'(Labour behind the Label) 등과 연대하고 있다.
프랑스의 CGT는 초기에 통합사회당과 특별한 조직적 연계를 맺지 않은 채 독자적인 정치적 파업을 감행하였지만 국가권력에 의한 파업 진압 이후 사회당을 통한 정치활동을 전개하여왔고, 특히 공산당 창당 이후에는 노조의 정치활동이 철저히 당에 종속되어왔다.
하지만 냉전시기와 소련의 붕괴 이후 공산당의 몰락을 목격한 CGT는 공산당과 거리를 두고 다양한 정치활동을 시도하고 있다. 이를테면 CGT는 노동자에게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강요하고 있는 국제투기자본을 감시하고 세금을 부과하여 초국적 자본의 국제 이동을 제한하고자 시민 지원을 위한 금융거래 과세를 위한 연합
(Association for a Taxation of financial Transactions in Assistance to the Citizens, ATTAC) 등과 연대활동을 강화하고 있다(Upchurch, & Mathers 2008: 532-535).
이처럼 서유럽의 최상급노조들은 과거처럼 특정 정당을 통한 정치활동에 얽매이지 않고 정치적 선택을 다양하게 구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들은 정치력을 극대화하고 조합원의 다변화하는 요구들을 실현하기 위해 여러 정당과 사안별로 연대하려고 한다. 이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있는데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응하는 것뿐만 아니라 환경보호 등 주요한 사회적 의제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비정부조직(nongovernmental organizations, NGOs)과 연대하고 있다. 노동조합의 이러한 활동은 사회운동 조직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다원적인 사회정치적 운동과 동맹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해결능력을 높이려는 노력이다.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을 창당하면서 민주노동당에만 의존하는 정치활동을 극복하겠다는 결의가 있었고 그 이후에도 그러한 시도를 하였지만 그 결의는 상층부와 대의원대회에서 형식적인 논의에 그치고 조합원 대중의 결의로 확장되지 않았다. 결국 민주노총이 조합원을 정치주체로 형성하여 의회주의를 견제할 수 있는 독자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하지 못하고 노동정치를 민주노동당에 일임하였다. 특히 민주노총이 조합원 당원의 정치활동을 민주노동당에 사실상 일임했기 때문에 이는 현실에서 조합원 당원들을 정파의 영향력에 방치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 결과 민주노총은 자신의 정치세력화를 민주노동당의 활동으로 국한시키는 대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민주노동당이 존속하는 동안 당원의 40%가 민주노총 조합원이었고, 민주노총의 간부들은 각종 할당제도를 통해 최고위원회와 대의기구의 30%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민주노총은 갈수록 민주노동당의 중요한 결정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갔다. 2007년 민주노총의 핵심적인 대선전략인 대통령후보 민중경선제가 민주노동당 대의원대회에서 부결되었으며, 2011년 국민참여당의 통합과정에서 민주노총의 공식적인 입장은 민주노동당에 의해 철저히 무시당하였다.
민주노총이 조합원 당원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여 진보대통합의 결정 과정을 주도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민주노총이 조합원 대중의 요구에 근거하여 추진하였던 좌파정당 통합운동은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 모두에게 버림받았다. 진보신당은 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총이 주도한 통합안을 부결시켰으며,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의 의사를 무시하면서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강행하였다. 특히 20119월 민주노동당 임시당대회에서 국민참여당과의 통합 안건을 놓고 표출된 민주노총의 내분은 민주노동당의 정파구조가 민주노총 의사결정에 혼란을 주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쌍방의 대리주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이를 극복하는 긴장적 협력관계를 확립하지 못하였다. 양자는 서로를 동원의 대상으로 본다는 인식을 극복하지 못하였고, 서로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힘을 합쳐 돌파하는 대신 회피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양 조직은 자신들의 동반성장과 노동계급의 집권전략을 논의하는 상설적인 전략단위조차 설치하지 못하였다. ‘거대한 소수전략실현, 공동의제 설정과 실천, 공동의 지역집권전략 수립도 실패하였다(공계진, 2009). 결국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는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비판적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상호 장점을 결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부정적인 측면이 서로 동조화되어 실패하였다.
 
 
2) 양날개론 전제조건 형성의 실패
 
(1) 노조 조직율과 산별노조의 한계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관계가 서유럽에 비해 조기에 파탄된 객관적 조건을 찾는다면 노동자정치세력화에 있어서 산별노조와 좌파정당이라는 양날개가 튼튼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서유럽의 경우 높은 노동조합조직율과 강력한 산업별 노동조합에 기반하여 최상급노조가 전국 노동운동센터의 역할을 하였다.
프랑스의 경우 노동조합 조직율은 낮으나,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대변할 최상급노조를 기업별로 선택할 수 있고, 자신이 선택한 최상급노조의 단체협약을 적용받는다. 프랑스의 경우 노동자들이 이러한 단체협약 효력 확장제도를 활용하기 때문에 노동조합의 파업을 대체로 지지하는 편이며, 실질적인 노동조합 조직율은 매우 높다고 평가할 수 있다.
민주노총은 비록 민주노조운동을 계승하였지만 노동조합의 조직율이 낮고, 대기업 노조 중심으로 건설되면서 한국노총과 분립되는 한편, 강력한 산별노조 건설에 실패하였다. 고용노동부(2016)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동조합 조직율은 87년 민주화운동 직후 최고점에 도달했다가 IMF 사태까지 점차 하락하였으며, 그 후 10% 수준에서 정체상태를 보이고 있다. 2015년 말 우리나라 노동조합 조직율은 10.2%로 나타났으며, 상급단체별 소속현황은 한국노총 43.5%, 민주노총 32.8%, 미가맹 23.0%이다. 한국의 노동조합 조직율은 OECD 주요국 중 최저수준이며, 그에 따라 단체협약 적용률 역시 최저수준이다.
11 주요 국가의 노동조합 조직율과 단체협약 적용율
(출처 : OECD Employment Outlook,2009)
 
 
 
국가
노조조직율(%)
단체협약적용율(%)
스웨덴
68,3
90
이탈리아
33,4
80
영국
27,1
30
독일
19.1
68
일본
18.2
15
미국
11.9
14
한국
10.3
10
민주노총의 조직율이 낮은 상태에서 정체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은 영세 미조직 노동자, 비정규 노동자들을 조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노동자와 중소사업장 노동자를 포괄할 수 있는 산별노조로의 전환을 추진해왔지만 형식만 산별노조일 뿐 실제로는 기업별노조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기업별노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산별노조 건설은 노동운동의 오랜 숙원이었고 민주노총은 출범 당시부터 산별노조 건설에 나섰지만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출한 2004년 말까지 민주노총 전체 노동조합의 4.7%, 조합원 수로는 47.4%가 산별노조에 소속되어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산별교섭이 실시되고 있는 조직은 얼마 되지 않았다.
민주노총 활동가들은 산별노조가 기업별노조의 문제점과 미조직노동자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고 산별로의 전환이 늦어진 것이 노동운동의 가장 큰 위기라고 진단하였다(이상학, 2005; 6-7). 200410월 민주노총 간부 설문조사에서도 산별노조전환을 위한 사업이 민주노총에서 제대로 하지 못한 사업으로 두 번째에 올라있다. 민주노총은 최근까지도 산별노조 건설에 주력하고 있지만 대공장 위주의 기업별노조의 연합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실질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총 홈페이지에 따르면 201212월 말 현재 민주노총 산하 산별노조는 23개이며, 여기에 속한 전체 조합원 수는 554,981명이고, 이는 전체 조합원의 80% 정도가 산별노조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외형적 지표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산별노조 건설 수준은 원래의 목표나 취지에 훨씬 미흡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산별노조는 출범 당시부터 조직 편재의 기준으로서 지역과 업종 사이에서 혼선을 빗었으며, 기업별노조는 산별노조의 기업별 지부의 형태로 외형만 전환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결과 산별교섭이 일부 진행되고 있지만 임금과 같이 산별노조가 합의한 주요사항은 해당 교섭에 참여한 사업장에만 적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산업 전체에 적용되는 협약을 체결할 수 없는 산별노조는 동일 산업 내 임금 격차를 해소할 수 없다. 특히 아직까지도 산별노조 중앙은 기업별 지부의 활동이나 교섭에 지도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현재의 산별노조는 "기업별노조의 통합수준에 불과하다"는 심각한 비판에 직면해 있다(김태현, 2012).
또한 민주노총은 전노협 계승과정에서 사측과의 협상에 주력할 수밖에 없는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에 근거하여 노사관계 외부에 다양하게 포진했던 민주노조운동의 역량을 흡수하지 못하였고 결국 실질적인 노동운동의 전국센터의 역할에 이르지 못하였다.
 
 
(2) 집권에 접근하지 못한 미약한 좌파정당
한국의 경우 노동계급 정치세력화는 민주노동당 창당으로 현실화되었지만 낮은 노조 조직율, 약한 노동조합에 근거하여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노동자의 당을 자처하였으나 정작 노동자의 지지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였다. 2004년 총선 이후 유권자들 중 좌파정당을 지지하는 비율은 최소 10% 이상을 유지하고 있으나 민주노동당 대통령후보의 득표율은 3%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는 유권자들이 민주노동당을 건전한 비판세력으로 여기고 있으나 아직은 대안세력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에 소속된 조합원들 중 민주노동당에 투표하지 않는 경우가 상당하며, 대선의 경우 민주노동당 후보가 얻은 득표는 전체 노조원 수의 반을 약간 넘는 수준이고, 총선의 경우 좌파정당이 얻는 득표수는 전체 노조원 수를 약간 상회할 뿐이다. 이는 노동자들 역시 일반 유권자와 마찬가지로 민주노동당을 사회의 소금 정도로 인식할 뿐 아직 집권능력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은 2004년 총선에서 13%로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지만 전체 득표수는 노동조합 조직대상 노동자 전체의 19%에 불과하였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전체 노동자의 지지가 낮은 이유 중 하나는 전체 노동자에 대한 노동조합 조직율이 낮기 때문이다. 즉 노동조합에 소속된 조합원들은 그렇지 않은 노동자들보다 좌파정당에 더 많이 투표하는 경향이 있는데, 조직율이 낮다보니 좌파정당의 노동자 유권자에 대한 득표율이 낮은 것이다. 결국 한국노총뿐만 아니라 민주노총이 전체 노동자를 포괄하지 못하는 한계가 민주노동당에 반영되었던 것이다(민주노동당, 2009b).
이 경우 좌파정당은 노동조합과 협력하여 노동조합 조직율을 높이고 친노동적 경향을 높여 득표율을 높이는 전략을 사용해야 하나 민주노동당은 반대로 우경화로 나가 일반 유권자의 지지를 확대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민주노동당은 2004년 총선 이후 득표율을 높이고자 노동자 표보다는 일반 국민의 표를 의식하고 민주노총과의 거리두기에 나서는데, 오히려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80%의 노동자의 표를 얻는 전략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
12 노동자 조직 현황과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 선거 결과
 
정당득표율(%)
득표수
전제 노조원 수
노동자 수
2002년 지방선거
8.1
1,339,726
1,606,000
13,839,000
2002년 대선
3.9
957,148
1,606,000
13,839,000
2004년 총선
13
2,774,061
1,537,000
14,538.000
2006년 지방선거
12.1
2,263,051
1,559,000
15,072,000
2007년 대선
3.0
712,121
1,688,000
15,651,000
2008년 총선
5.7
973,445
1,666,000
15,847,000
2010년 지방선거
7.35.
1,519,362
1,643,000
16,804,000
2012년 총선
10.3
2,198,405
1,781,000
17,338,000
2012년 대선
불출마
 
 
 
2014년 지방선거
4.26
973,023
1,905,000
18,429,000
서유럽의 좌파정당은 전체 노동자의 지지를 충분히 받은 후 더 높은 득표율을 위해 우경화의 길을 걸었던 반면, 민주노동당은 노동자의 표를 제대로 얻지 못한 상태에서 우경화의 길을 걷는 조로화의 모습을 보였다. 즉 서구의 좌파정당이 노동자의 지지를 확보한 이후 국민정당화의 길로 나아가고, 재집권 과정에서 노동자정당의 성격에서 이탈하였지만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유권자의 지지를 확보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즉 원내 소수정당에 머물렀던 조건에서 국민정당화의 길로 나아갔다.
민주노동당이 국민정당화의 경향을 보일수록 당 내에 있어서는 민주노총의 위상이 갈수록 낮아지고, 이는 민주노동당 내에서 노동정치의 위상이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민주노동당의 노동중심성은 노동자와 민주노총을 정치의 주체로 세우는 것에 이르지 못하고 득표전술에 그친 셈이다.
대외적으로는 민주노총이 전체 노동자를 대표하지 못한다는 비판은 민주노동당이 전체 노동자를 대변하지 못하고 민주노총의 입장만 대변한다는 비판으로 재현되었다. 민주노총이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 중심이라는 일반 국민과 미조직 노동자의 비판적 시각이 민주노동당에 반영되면서 당과 노조 사이에 긴장과 불협화음이 조성되었다.
민주노동당이 노동계급의 지지를 토대로 집권을 넘볼 만큼 주요한 국민정당으로 성장하기도 전에, 따라서 민주노총이 배타적 지지를 해소할 필요가 전혀 없었던 단계에서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는 민주노동당에 의해 사실상 버림을 받았다. 결국 민주노총은 서구의 노동조합과 달리 정당을 통한 국가권력으로의 접근이라는 염원을 단 한 번도 실현하지 못한 채 제1기 노동자의 정치세력화 실패라는 수모를 피할 수 없었다.
 
 
(3) 노동의 자본과 국가에 대한 힘의 균형 실패
 
2차 대전 이후 20년 동안 영국, 독일 등 서구에서 집권한 좌파정당이 추진했던 대표적인 계급타협이 최상급노조, 좌파정당, 국가 등에 의해 합의되고 추진된 사회적 대타협인 코프라티즘(corporatism)이다. 이들 좌파정당은 지속적인 경제성장, 강력한 노동조합과의 동맹, 자본의 일부 양보 등을 배경으로 하여 케인즈주의 경제학에 근거한 재정지출의 확대로 특징짓는 코프라티즘을 구가하였다. 코프라티즘의 양대 축은 복지국가와 사회적 대타협이었다.
서유럽의 경우 좌파정당이 집권을 경험할 만큼 주요정당으로 성장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최상급노조와 좌파정당의 결합은 국민국가 안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 제2차 대전 이후 오일쇼크 이전까지 포드주의 생산조직과 케인즈주의 복지국가는 확장일로에 있었으며, 그에 따라 최상급노조의 조직력과 사회적 영향력은 절정에 달하였다. 2차 대전 이후 20년 동안 좌파정당과 최상급노조는 복지국가체제 안에서 총자본과 국가를 상대로 노사정의 사회적 대타협을 도출할 수 있었다.
코프라티즘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 시기 노동자계급은 포드주의 아래서 동질적인 정체성을 기반으로 자본의 공세에 총파업 등으로 맞서면서 다른 한편으로 조직적으로 협상할 수 있었고, 자본도 강력한 노동계급을 일방적으로 굴복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타협에 나설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며, 사회민주주의정당 입장에서는 재집권을 위해 자본주의의 주요계급인 자본가와 노동자의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노동계급의 지지를 얻는 한편 국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여 다수 유권자의 지지를 얻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의 최상급노조와 좌파정당은 총자본과 국가를 압박하면서 이들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내어 사회적 대타협을 하는 코프라티즘을 경험하지 못하였다. 민주노총은 처음부터 총자본과 정부에 대해 압박과 협상을 병행하면서 노동자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권익을 달성해나간다는 사회적 조합주의를 선언하였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노동, 자본, 정부 등 3자가 협상테이블로 나와 대타협에 이르도록 하는 3자 간의 힘의 균형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구와 같은 사회적 타협이 도출될 수 없었다.
한국에서는 총자본과 국가가 노동조합 보다 항상 우위에 있었으며, 노사정 협상을 원내에서 추동하는 강력한 좌파정당이 존재하지 않았고, 노동조합 자체의 힘도 미약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농민이나 사회단체와 연대하여 민중연대와 같은 전선체를 통해 강력한 재야투쟁을 전개하여 남아공의 당 - 전선체 - 노동조합의 3각 체제를 시도하였지만 총자본과 국가가 당과 노조를 대등한 협상 주체로 인정하도록 할 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3. 당과 노조의 관계 변화에 대한 비교분석의 시사점
 
1) 좌파정당과 최상급노조의 관계에 있어 제도화 동조 현상
 
서유럽과 한국처럼 발전된 자본주의 국민국가에서 사회주의 세력과 혁명적 노동운동은 모두 제도화의 과정을 겪는데 최상급노조는 자본주의 체제 내로 포섭되고, 좌파정당은 국민정당화 경향으로 나아가면서 양자 모두 사회변혁의 지향성을 점차 상실하였다.
산업혁명 과정에서 기계적 대공업은 대규모 미숙련공과 반숙련공을 배출하였다. 노동계급이 사회적 세력으로 성장하여 자본에 반항하게 되자 자본과 국가는 노동자의 결사를 금지하는 한편 제한적인 노동자보호입법을 통해 이를 무마하고자 하였다. 노동조합은 대중적 조직력과 파업이라는 무기를 통해 근대사회의 지배계급인 자본주의의 가장 강력한 반체제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결국 각국은 체제 위협요소를 체제 내로 포용하고자 결사금지법을 폐지하고 노동조합을 합법화하였다.
반체제정당으로서 좌파정당은 보통 반체제세력으로서 노동조합을 기반으로 성립하였다. 노동조합과 좌파정당이 반체제세력으로서 제도 밖에 얼마나 방치되는가는 각 나라의 사정에 따라 다르지만 일정한 시차를 두고 점차 제도화되었다. 반체제정당으로서 좌파정당은 원내에 진입한 후 점차 의석을 확장하는데, 이는 포드시스템으로 인하여 노동자 수의 폭증과 이에 따른 노동조합의 확대, 보통선거의 실시로 인한 노동자들의 투표 참여에 힘입었다.
13 민주화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좌파정당의 제도화 과정
 
 
 
 
 
산업혁명
-지배세력의 포섭
-반체제세력의 제도화
 
대공업시대
-수요중시 복지재정정책
- 압박과 타협
 
후기산업사회
- 공급중시 신자유주의 금융정책
- 국가권력 지향과 다수득표전략
 
 
 
 
 
 
 
 
 
발생기
 
계급균열의 발생과 반체제정당의 성립
진입장벽
성장기
 
계급균열의 반영으로서의 제도정당
 
정착장벽
성숙기
 
다수정당화와
정당체계 고착
계급정당의 딜레마
쇠퇴기
 
국민정당화와
카르텔 편입
 
 
 
 
 
 
 
 
 
 
 
부르주아민주주의(결사의 자유, 투표의 자유, 표현의 자유)
 
1. 국민국가요인으로서 사회균열(독립, 통일, 연방제, 인종과 민족, 종교)
2. 정치제도요인(대표제,
선거구, 선거연합)
 
노동계급의 위상약화(계층분화, 자동화, 고령화, 국가의 복지제도 종속, 노동조합 보수화
 
 
 
 
 
 
 
비제도정당(지체형이나 향후 압축형, 비약형의 가능성)
 
소수정당(미국의 좌파정당)
 
 
사회주의 집권정당
 
 
 
 
 
 
 
좌파정당은 첫 집권을 정점으로 민중정당으로 변화되는데, 이는 노선을 중도화하고, 노동조합과의 전략적 동맹을 완화하여 좀 더 다양한 계급의 지지를 획득하여 정권을 탈환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이 과정에서 정당 내부에 노선투쟁과 정파대립이 격렬해지고 당 내 좌파들이 탈당하여 공산당을 창당하게 된다. 좌파정당은 수차례 집권을 통해 보편적인 국가운영주체로 부상했으며, 그 결과 좌파정당은 다수의 유권자를 포괄하고자 국민정당임을 자처하였다. 이 지점에 이르러 좌파정당은 노동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보다 정권참여에 더 비중을 두게 되어 친노동자적 의제 관철을 명분으로 하여 보수정당과 연립도 불사하여 담합정당으로 전락하였다. 나아가 노동조합과 조직적 연대를 포기하고 지속적인 국가운영자로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선거정당 혹은 캠페인정당으로 변모하였다.
이와 같은 좌파정당과 최상급노조의 제도화 동조현상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첫째, 이들 양자는 국가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변혁주체로서의 지위를 점차 상실하고 국가를 용인하고 나아가 국가를 통한 사회개혁을 자신의 목표로 설정한다.
노동조합은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정부와 의회 등 정치시스템에 대한 통로를 확보하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경향은 총자본과 국가에 직면하고 있는 최상급노조의 경우에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특히 최상급노조는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 집권하였을 때 자신의 제도적 요구를 좀 더 쉽게 관철할 수 있음을 알게 되자, 정부와의 협상을 중요시하게 되고 점차 사민주의 정부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정부와도 사회적 협상을 하려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둘째, 좌파정당은 다른 조직들과의 관계에서 득표율과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절차적 민주주의로서 선거게임에 점차 몰입하여 선거참여자로서 경쟁조직과 카르텔(담합)을 형성함으로써 자신의 생존기반이 점차 제도 내 성과로 축소되고 대중을 대변한다는 대표성은 구호에 불과해진다.
셋째, 양자 모두에서 과두화와 관료화가 진행되고 양자의 과두와 관료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암묵적 동맹을 맺고 대중들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려는 경향으로 인해 조직 내부의 민주주의 병목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넷째, 양자는 모두 개량화되지만 개량화의 속도와 수준에서 현저한 차이를 드러내고, 그로 인해 양자는 이해관계의 차이 때문에 과거와 같은 긴밀한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노동조합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이 여전히 강력한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에 저항할 수밖에 없으며 노동관계를 규율하는 보수정치에 맞서 자본주의를 개혁하고자 한다. 즉 최상급노조는 조합원의 계급적 이해관계라는 한계 내에서 개량화된다. 반면, 좌파정당은 선거에서 노동자 계급에 국한되지 않는 다양한 계급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고 그 한도에서 과거와 달리 노동조합이 반대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경우가 늘어난다.
 
 
2) 좌파정당과 최상급노조의 관계에 있어 제도화의 회피 및 지연 전략의 필요성
 
당과 노동조합의 제도화 관점에서 양자의 관계에 대한 입장을 살펴보면 먼저 제1인터내셔널에서 정당 건설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아나키즘 혹은 노동조합주의가 극복되고 당과 노동조합이 별도로 성립되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입장이 일반적으로 확립되었다. 이어 양자의 관계에서 노동조합은 정당으로부터 완전한 자주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영국의 노동조합주의는 영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가 노동당을 창당함으로써 극복되었다. 독일사민당에 있어 노동조합은 정당에 복종해야 한다는 라쌀주의는 양자의 자주성을 인정하지만 정치투쟁에 있어 정당의 노동조합에 대한 지도성을 강조하는 사회주의에 의해 약화되었다. 프랑스에 있어서도 아나키스트들조차 정당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다만 프랑스의 사회주의정당은 마르크스주의와 아나키스트 등 다양한 급진적인 사상이 혼재되어 있었으며, 영국의 노동당은 마르크스주의와 다소 거리가 멀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은 사회변혁을 위해 당과 노동조합의 전략적 관계를 중요시하며 기본적으로 양자의 독립적 관계를 인정하나 정치문제에 있어 당의 지도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현실에 있어 당이 노동운동의 영역에서까지 노동조합의 자주성을 침해하곤 했으며 사회주의혁명이 달성된 나라에서는 양자의 독립적 관계 자체가 보장되지 못하였다.
한국의 좌파정당과 최상급노조는 오늘날 한국이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된 자본주의 국민국가이므로 서유럽과 유사한 제도화 과정을 짧은 시간에 걸쳐 경험하였다. 민주노동당 스스로 점차 민주노총당이라는 평판을 부담스러워 하였으며, 결정적으로 진보대통합과 야권연대 과정에서 민주노총과 멀어지는 선택을 하였다. 민주노동당은 원내 주요한 좌파정당으로 성장하기도 전에 집권세력으로서 신자유주의를 수용했던 국민참여당과 통합하고, 보수야당과 전면적인 선거연합을 하였고, 이들과 연립정부 구성을 의도하였다. 민주노동당은 다수 노동자 유권자의 지지를 확보하기도 전에 계급노선을 사실상 포기한 셈이고, 계급적 기반이 없이 대중성을 확장하려고 하였으나 이마저 실패하였다. 성급하게 국민정당화로 나아가고 기존 정당과 담합을 추진하는 민주노동당의 이러한 조로화 때문에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이해관계가 틀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이 통합진보당으로 전환되어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해산되기 이전에 양자의 관계는 실질적으로 파탄되었다.
유럽에서는 집권한 좌파정당이 노동자정당이라는 협소한 지위를 벗어나고자 하였고, 최상급노조는 좌파정당 정부에 협조해야 하는 난처함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양자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이완되었다. 반면 한국에서는 민주노동당이 노동계급의 지지를 충분히 조직해 내지 못해 좌파정당으로서 충분히 성장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민주노총과의 전략적 결합이 여전히 필요한 조건에서, 민주노동당이 성급하게 의회권력에 집착하여 민주노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민참여당과의 선통합을 통해 국민정당화의 길을 재촉함으로서 양자의 관계가 파탄되었다. 유럽에서는 노동계급의 지지를 기반으로 국민정당화로 나아간 좌파정당이 최상급노조와의 관계를 이완시켰다면, 한국에서는 민주노동당이 집토끼도 간수하지 못한 상태에서 성급하게 산토기까지 잡으려다 집토끼마저 잃은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초기에 설정하였던 양자의 동반성장전략은 그 방향이 옳았다고 볼 수 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지향했던 정치투쟁과 경제투쟁, 의회주의와 대중투쟁의 전략적 결합이 선언적으로는 가능하였지만 현실에 있어 간단하지 않았다. 정당이 자신의 민주주의적 토대를 경시하면서 선거와 집권에 집착하는 한 정당의 노동자적 토대는 약화되며, 반면 노동조합의 입장에서 경제투쟁에 주력하면 의회에서 노동정치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그 만큼 경제투쟁의 사회적 파급력도 약화되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역시 민주노동당을 매개로 하여 제도화 심화과정을 거치면서 민주노동당에 대한 의존이 높아져 민주노동당을 견제할 수 없게 되었다. 나아가 제도정당을 비제도권과 연결시켜주는 대중투쟁조직마저 제도정당과 동조화되고 대중적 기반을 상실하여 와해됨으로써 정당의 제도화 심화를 지연시킬 재야세력이 실종되었다.
당과 노동조합이 사회변혁을 위한 전략적 관계를 설정하고 유지하려면 사회변혁에 대한 이해관계가 공유되어야만 한다. 또한 양자가 사회변혁에 대한 이해관계를 공유하려면 최상급노조와 좌파정당의 제도화가 지연되거나 의식적으로 회피되어야 한다. 특히 제도화의 속도가 상대적으로 더딘 최상급노조가 좌파정당의 제도화를 견제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양자의 제도화 간격을 메울 수 있는 양자의 대표성, 자주성, 민주성이 아래와 같이 제고되어야 한다.
첫째, 최상급노조와 좌파정당은 산업구조와 인구분포의 변화에 대응하여 노동자계급대표성을 강화해야 한다. 최상급노조는 개별적인 노사관계에 국한되지 않는 다양한 노동운동을 포괄하는 노동운동센터로서의 위상을 회복해야 한다. 또한 다양한 노동자들을 조직해내어 조직율을 제고하고 단체협약의 효력 확장제도 등을 통해 전체 노동계급의 대표성을 획득해야 한다. 최상급노조는 강력한 노동운동의 기반 위에서 소비자운동, 환경운동, 소수자운동 등 진보적 시민운동과 연대해야 한다. 좌파정당은 득표율 확대를 위해 몰계급적인 국민정당화 노선을 지양하고 노동계급의 지지를 먼저 안정화시킨 후 다양한 민중들의 지지획득을 지향해야 한다.
14 좌파정당의 제도화 진행에 따른 최상급노조와의 관계 비교
 
 
 
 
 
 
독일사민당
영국노동당
프랑스공산당
민주노동당
발생기
당이 노조 건설에 관여
노조가 당을 건설
노조는 창당에 관여 안함
노조가 타 세력과 연대하여 창당
관계
설정
만하임협정으로 대등한 협력관계 성립(1906)
원내 노동당의 자율성 보장
아미앙헌장(1906)은 정당을 배척하였으나 파업 진압 이후 통합사회당과 협력관계 수용
노조가 당을 배타적으로 지지
성장기
혁명파 축출하고 동반성장
처음부터 개량주의로 동반성장
친공산적 배타적 지지
원내 진출 후 노조와 거리두기
성숙기
대타협하나 긴장 관계
대타협하나 긴장 관계
냉전 이후 동반 퇴조
성숙기로 진입 못하고 관계 소멸 됨
쇠퇴기
공식적 지지관계 해소
노조의 당 지배구조 혁신
공식적 지지관계 해소
 
둘째, 최상급노조와 좌파정당은 연대 원칙 안에서 상호 자주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영역에 걸맞는 운동과 정치를 전개해야 한다. 최상급노조는 노동정치를 좌파정당에 일임하는 것이 아니라 원내 활동을 지원하면서도 독자적이고 자주적인 노동정치를 전개해 나아가야 한다. 노동의제를 국회 밖에서 제기하고 대중투쟁으로서 국회가 노동의제를 수용하도록 압박해야 한다. 좌파정당은 이러한 노동운동과 진보적 시민운동을 포괄하는 민중정당노선을 강화해야 한다. 또한 좌파정당은 평상시에 사회운동을 조직해낼 수 있는 제도권 진지의 역할을 하고 스스로 사회운동의 주체로 나서는 사회운동정당노선을 견지해야 한다. 결국 최상급노조의 좌파정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는 일정시기까지 필요하지만, 최상급노조가 좌파정당을 무조건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긴장적 협력관계 안에서 조건부로 지지하는 관계로 전환해야 한다.
셋째, 최상급노조나 좌파정당 모두 과두의 출세주의적 경향, 중간활동가들의 관료화, 정파의 대중장악을 개선할 수 있는 민주적 제도와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대중들이 과두, 관료, 정파를 통제하려면 먼저 대중들이 제도 내에 개량화되는 것을 차단 혹은 지연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최상급노조와 좌파정당 내에서 노동계급적 토대와 이해관계가 형성되어야 하며, 자신의 권력을 절차적으로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민주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주체적인 대중이 육성되어야 한다. 서유럽의 경우 노동자정당이 좌파정당으로서 성장할 때까지 일정 기간 좌파정당 안에서 강력한 사회주의세력이 잔존했었지만 한국의 경우 민주노동당에는 사회주의 세력의 일부만 진입하였고, 이들 역시 약화되거나 이탈하였다. 그나마 민주노총에서는 이들 사회주의 세력들이 분열되고 제도화에 효과적으로 저항하지 못하였다.
무엇보다 최상급노조와 좌파정당 안에서 대중들의 의식화, 투쟁화, 정치화가 일상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양 조직에서 조합원과 당원들을 교육하는 기관이 과두의 영향에서 독립되어 운영되어야 하며, 과두와 정파의 요구에 매몰되지 않는 활동가들은 대중투쟁을 끊임없이 조직하는 한편 조합원들과 당원들의 대국민 정치활동을 진작시켜야 한다. 무엇보다 제도화되지 않은 사회변혁 운동과 결합하는 제도권 정당으로서 사회운동정당노선을 견지할 때 좌파정당은 과두와 관료의 폐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또한 제도권 밖의 다양한 변혁적 세력의 일부가 최상급노조와 좌파정당 내로 들어와 변혁적 네트워크로 존재하면서 대중의 급진화를 추동하고 제도화를 견제하는 전략적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정리하면 우리 사회 역시 장기적으로 좌파정당이 집권을 하면 유럽의 경우처럼 양자의 조직적 관계가 서로의 요구에 의해 해소될 수밖에 없다. 또한 정당명부 비례대표가 확대되는 등 양당구조가 균열이 나고 원내에서 좌파정당 복수시대가 가능해지면 민주노총이 특정 정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노동조합의 특정 좌파정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는 특수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과도적 현상이다. 노동조합이나 노동자정당이 복수로 존재할 때 그들이 대표하는 노동계급의 일부는 서로 다르다. 복수의 좌파정당이 병존하는 상황에서 노동조합이 특정 정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하거나 배제하면, 조합원의 다양한 정치적 성향이 충돌될 수 있으며 노조 내 정치적 균열을 심화시켜 대중조직의 통일성을 훼손할 수 있다. 다만 영국 노동조합대표자회의가 노동당을 창당하였듯이 특정한 경우에는 배타적 지지가 가능하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는 좌파들이 비판하는 것처럼 농민이나 빈민 및 기타 진보진영을 포괄하는 민중정당을 건설하여 사회적 대타협과 개량적 의회주의를 통해 노동자의 처지를 개선하고자 하였던 국민파의 입장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배타적 지지는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이 비록 노동현안을 해결할 수 없는 원내 소수정당이었지만 민주노총 내 개량주의적 흐름을 민주노동당 안에 묶어두는 역할을 하였다. 배타적 지지가 소멸된 후 이런 개량주의 흐름은 실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거대 보수야당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좌파정당이 노동계급 일반으로부터 안정적인 지지기반을 구축할 때까지 배타적 지지는 전략적으로 유지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좌파정당 인사들이나 민주노총 인사들 모두 아직 자신들의 실패가 서구의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에서 보여주는 역량의 소진이 아니라 일시적 장애라고 보고 있고, 향후 노동중심의 새로운 통합적인 진보정당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 따라서 단기적으로 보면 양자 모두 민주노동당의 조로화나 민주노총의 미성숙을 개선하여 양자의 조직적 관계를 더 연장시킬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다.
양자가 향후 배타적 지지와 같은 조직적 지지 관계를 유지한다면 양자는 과거와 달리 상호 부정적인 동조화를 약화시킬 수 있는 긴장적 협력관계를 구축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민주노총은 집단입당제와 블록투표제를 통해 좌파정당의 국민정당화 경향을 지연시킬 수 있는 과도기적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민주노총은 단체협약 효력의 사회적 확장, 미조직노동자를 위한 사회적 의제 투쟁을 통해 전체 노동계급에 대한 대표성을 강화하고, 개별적인 단체협약에 얽매이지 않는 다양한 노동운동의 역량을 포괄하는 한편, 산별노조 건설과 총연맹의 강화를 통해 명실상부한 전국 노동운동센터로서의 위상을 확립하여 원내 의석을 확장하려는 좌파정당의 강력한 동반세력이자, 비판적 견인세력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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