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주노동당의 발생기(2000년-2004년 총선) – 전략적 동반성장 관계

1)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 창당 주도
 
1970년 산업화 이전까지 사회균열은 민주와 반민주의 대립구도였다. 1954년 진보당이 사회민주주의와 남북평화통일을 들고 나와 계급균열과 지역균열을 반영하고자 하였으나 이승만 정권에 의해 해산되었다. 19604.19혁명 이후 제2공화국에서 혁신계는 합법화되었지만 주요한 정치세력이 되지 못하였다. 이는 노동계급의 저성장, 반공이데올로기, 기존정당의 담합구조에 의한 것이었다. 1960년까지 광업, 제조업, 건설업 종사자는 전체 취업자의 5.8%50만여명에 불과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 박정희 정권은 3선 개헌을 둘러싼 민주 대 반민주 구도를 대통령선거를 기점으로 하여 영호남 지역 구도로 전환하여 영구집권을 기도하였다. 이러한 지역균열과 함께 1970년 전태일 분신이 보여주듯이 계급균열이 본격화되었다. 1972년 이후 유신정권에서 이러한 기존의 남북대립 이외에 동서의 지역균열, 계급균열, 민주 대 반민주 균열이 병존하였으며, 특히 대규모 사업장을 필요로 하는 중화학공업성장전략으로 인해 계급균열이 심화되었다. 박정희 정권의 신민당, 전두환 정권의 신한민주당 등 보수야당은 학생운동세력, 재야민주화세력과 결합함으로써 원내에서의 입지를 강화하였다.
전두환 정권은 민주한국당 등을 위성정당으로 만드는 한편 김영삼과 김대중 등 전통적인 야당인사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하였는데, 그 결과 70년대부터 형성되어왔던 재야세력과 야당인사들이 결합하여 강력한 반체제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에 전두환 정권은 야당인사들의 정치활동을 허용하여 반체제세력을 분할 통제하려고 하였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허울뿐인 야당인 위성정당이 소멸되고 과거의 정통 야당이 복원되었다. 그에 따라 거대 여야가 한국의 정당구조를 지배하였고, 이들의 담합에 의해 좌파정당의 원내 진입이 차단되어왔다. 이 시기 좌파정당이 원내에 진입하지 못한 이유는 소위 진보운동의 다수인사가 비판적지지라는 명목으로 보수야당에 입당하자는 수혈론에 경도되어 있었고, 독자적인 좌파정당 건설을 도모하고자 하는 소수인사는 강력한 소선거구제와 지역선거 구도에 의해 선거에서 매번 낙선하여 정당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은 국회에서 자신들을 대변해 줄 정당이 필요했기 때문에 창립 당시부터 노동자의 정치세력화, 즉 독자적인 노동자정당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민주노총은 1995년 창립선언문과 강령 및 규약을 통해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와 민주세력과의 연대 및 노동자정당 건설을 선언하였다. 민주노총은 1996년 총선을 맞아 정치위원회를 설치하고, 각 지역, 산업별로 정치위원회를 두는 등 정치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였다. 또한 민주노총은 총선후보를 발굴하고 정치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총선에 3명의 후보를 내기로 결정하였다. 민주노총은 199612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의 석 달 동안 한국노총과 함께 노동법을 개악시킨 정부와 국회의 입법조치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주도하여 국민들의 공감을 얻었으나 국회에서의 입법을 되돌릴 수 없었다.
1997년 김영삼 정부가 추진했던 노동법 개정 방향이 반노동적으로 급선회하고, 또 이에 대해 보수야당마저 묵시적으로 동조하자, 노동운동은 마침내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선언하였다. 민주노총은 19972월 대의원 대회에서 “1998년 지방선거 참가, 1998-99년 정당건설, 2000년 국회의원 선거 참가라는 정치일정을 확정하였고 당면해서 대통령선거에 적극 대응하기로 결정하였다. 민주노총은 19977월 대의원대회에서 총파업을 주도하였던 권영길 위원장을 대통령선거 후보로 내세우기로 결의하였다. 이어 민주노총은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민예총), 학계 등과 함께 국민후보 추천위원회를 구성하고 국민후보운동이 2000년 총선까지의 진보정당 건설을 목표로 1997년 대선 이후에도 이어질 것을 확인하였고, 이를 위해 대선에서 선거투쟁과 대중투쟁을 결합할 것을 결의하였다. 민주노총은 9월 대의원대회에서 권영길 위원장을 국민후보로 승인하면서 전국연합, 진보정치연합과 함께 국민승리21’을 결성하였다. 국민승리21과 권영길 후보는 12월 대통령선거에서 신자유주의 반대와 진보정당 건설을 조직적 과제로 삼았다.
하지만 대선에 있어 진보진영 일부마저 평화적 여야 정권교체라는 명분 때문에 김대중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하였고, 그 결과 권영길 후보는 30626(1.2%)라는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하였다.
19982월 국민승리21은 대선패배에 굴하지 않고 진보세력과 함께 진보정당을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우선 6월의 지방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민주노총은 19985월 대의원대회에서 대선조직인 국민승리21을 확대하여 노동자중심의 진보정당을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19986.4지방선거에서 국민승리21은 기초의원에 40명이 출마하여 18명이 당선되었으며 광역의원에 6명이 출마하여 2, 기초단체장에 3명이 출마하여 3명이 모두 당선되는 성과를 얻었다. 민주노총은 이 선거에서 기초단체장, 광역 및 기초의원으로서 추천후보 40, 지지후보 5명 등 모두 45명의 후보를 출마시켜 기초단체장 2, 광역의원 3명 및 기초의원 13명 등 총 18명을 당선시켰다.
민주노총은 1998년 총파업 단행과 노사정 협상에도 불구하고 정리해고제 실시를 저지하지 못했지만 노동조합 정치활동 금지조항을 폐지시키는데 성공하였고 그 결과 민주노총의 창당 작업이 가속화되었다.
19998월 국민승리21이 주도하여 진보정당창당준비위원회발기인대회가 열렸고 1700명의 발기인들은 수차례 투표를 통해 당명을 민주노동당으로 정하였다. 민주노총 역시 19998월 대의원대회에서 새로운 진보정당에 조합원들이 발기인과 당원으로 참여할 것을 결정하였다. 창당준비위원회는 두 차례에 걸친 진보정당창당 원탁회의를 개최하여 노동, 농민, 빈민, 지식인, 여성, 청년, 학생 등 각 부문의 참여를 추진하였고, 민주노총은 20001월 대의원대회에서 전국의 조합원을 상대로 당원과 기관지 구독자를 모집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강령과 규약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였다. 2000130일 민주노동당이 전국 40여 개의 지부와 13천명의 당원으로 창당되었다.
2000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출마자들은 평균적으로 13.1% 득표하였고 전국적으로 1.2%를 얻었으나 소선거구제에서 당선자를 한명도 내지 못하였다. 이에 민주노동당은 2000년 헌법소원을 제기하였고, 2001년 헌법재판소는 '11표제'에 대하여 위헌 결정을 내리고, 국회에 대해 정당명부 비례대표 투표제도를 도입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비례대표 의원을 지역구 의원과 따로 투표하여 선출하는 정당명부 비례대표제가 부분적으로 시행되었고 어떤 정당이라도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정당득표율 3% 이상을 획득하면 무조건 1석 이상을 배분받게 되었다. 그 결과 민주노동당은 2002년 지방선거 광역의원 정당명부 비례대표 투표에서 8.13%를 획득하여 자민련을 제치고 제3당으로 부상하였으며 광역 비례의원 9명을 당선시킴으로써 소선거구제를 기반으로 하는 양당체제를 균열시킬 수 있었다. 민주노동당은 나아가 이 선거에서 울산동구와 울산북구의 구청장선거 등 4개 지역구 선거에서 당선자를 내었다. 또한 그해 2002년 대통령선거에 권영길 후보가 다시 출마하여 3.98% 득표하였다.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13.1%의 정당명부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비례대표에서 8, 소선거구에서 2석을 얻어 마침내 원내 진출에 성공하였다.
 
 
2)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민주노총은 출범 당시부터 좌파정당 창당을 목표로 하였으며, 이러한 목표는 국민승리21’진보정당창당준비위원회’, ‘민주노동당창당준비위원회를 거쳐 민주노동당으로 실현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만을 통해 정치세력화를 한다는 배타적 지지는 처음부터 예정된 것이었다.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 창당 직전 20001월 대의원대회에서 당과 노조의 관계에 대한 포괄적인 입장을 천명하였는데, 이를 통해 민주노총이 지향하는 배타적 지지의 의미를 추측할 수 있었다. 이 대회에서 민주노총은 정당과 노동조합은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한 조직체이면서도 상대적 독자성과 자율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상호 존중과 이해, 긴밀한 협력관계가 요구된다고 밝히면서 동시에 민주노동당이 노동자 중심성과 투쟁성을 담보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할 것을 다짐하였다.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로 인해 공식적으로 민주노동당 이외의 정당에 대한 민주노총 차원의 지원이 차단되고 간부들의 다른 당 후보 출마가 제한되었다. 하지만 일반 조합원 차원에서는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는 정치적 선언에 불과하여 조합원들의 투표 성향을 실질적으로 구속할 수 없었다. 조합원들이 실제 각종 선거에서 당선 가능한 후보를 찍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지역구 선거에서는 당선권에 있는 다른 정당 후보를 찍는 경우가 많았으며, 단지 비례대표 정당명부는 대부분 민주노동당을 찍었다.
배타적 지지는 민주노동당 창당 당시부터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민주노동당 창당을 의회주의로 비판해오던 민주노총 내 현장파는 독자적인 계급정당 건설을 지향하면서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방침이 자신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2008년 진보신당 창당 이후에는 진보신당 지지자들도 배타적 지지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진보신당에 결합한 민주노총 중앙파 일부 역시 과거의 주장과 달리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비판하였다. 특히 2008년 이후 좌파정당들 간의 경쟁과 대중투쟁전선 내부의 분열이 확연해지자,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점차 어려워졌다. 조합원들과 간부들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그리고 사회당 등에 혼재되어 있는 상황에서 민주노동당에 대한 일방적인 지지는 진보신당의 반발은 물론, 일부 조합원과 조합 간부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진보신당이나 사회당이 원내 의석을 지니지 못하고 민주노동당이 유일하게 원내에 진출한 좌파정당이었기 때문에 민주노동당에 대한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위협받지 않았다.
20119월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의 공식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임시당대회에서 국민참여당과의 선통합을 시도하면서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로 상징되는 양자의 관계는 실질적으로 파탄되었다. 민주노동당을 계승한 통합진보당은 2012년 민주노총에 대한 할당제도를 폐지하고 당 지도부가 노동부문 대의원을 임명하도록 함으로써 민주노총과의 조직적 관계를 끊었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여전히 각종 선거를 앞두고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가 통합진보당에 계승되었음을 확인하고 조합원들에게 통합진보당을 지지할 것을 호소하였다. 2012년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가 유지되었고, 사회당과 통합한 진보신당은 배타적 지지를 얻지 못한 채 단 한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였다.
2012년 총선 직후 통합진보당이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 선출 부정선거 시비로 인해 정쟁에 휘말리고 그로 인해 중앙위원회 폭력사태가 발생하여 노동자와 국민으로부터 지탄을 받자, 민주노총은 통합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공식적으로 철회하였다. 그 이후 민주노동당의 후신인 통합진보당에서 정의당이 분당되어 나왔지만 민주노총과 공식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였다. 결국 민주노총은 어느 정당과도 공식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으며, 이는 민주노총의 1기 정치세력화가 민주노동당의 성과를 계승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실패하였음을 의미하였다.
민주노총의 현장파는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이나 통합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가 없어지면 많은 조합원들이 자신들을 지지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하지만 통합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가 없어진 후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정치적 성향을 분석하면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가 여전히 상대적으로 높을 뿐, 다른 좌파정당의 지지율은 크게 증가하지 않았다. 상당한 부동층이 형성되고 그 일부가 거대야당에 대한 지지자로 전환되었다. 통합진보당 지지에서 이탈한 간부들과 조합원들은 계급정당 건설보다는 민주당이나 박원순 서울시장과 같은 유력한 정치인 쪽으로 이동하였다. 심지어 민주노총 전직 지도부 일부는 대통령선거에서 노동계를 대표하는 인사의 자격으로 거대 야당의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였다.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를 상징하는 배타적 지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첫째, 배타적 지지로 구체화된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는 서유럽의 사례와 비교하더라도 애초부터 구조적으로 개량주의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으며, 이러한 태생적 개량주의는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영향력을 보장하는 배타적 지지를 통해 민주노동당에게 그대로 투영되었다.
먼저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와 민주노동당 창당은 최상급노조가 강력한 산별노조를 기반으로 좌파정당과 조직적 연대를 한다는 양날개론에 근거하였으나 실제로는 노동자 조직화라는 객관적 토대가 취약한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산별노조가 먼저 건설되었다면 결합이 가능했던 지역의 일반노조나 노동운동단체가 민주노총에 결합하지 못했으며, 민주노총은 출범 이후에도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였다(김창우, 2007). 무엇보다 민주노총 건설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변혁적인 노동운동을 지향하였던 전노협이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맹’, ‘대우그룹노동조합협의회등과 전국노조대표자회의를 출범시킨 것을 계기로 조기에 청산됨으로 민주노총은 사무전문직과 대기업노동자의 온건 노선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또한 노동조합의 형태가 아닌 다양한 변혁적 노동운동세력들은 민주노총 건설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에 민주노총은 출발부터 개량주의에 경도되었다.
이러한 성급한 양날개론은 국민승리21의 급조와 민주노동당 창당이라는 선거주의, 의회주의로 나타났다. 민주노총 1기 집행부가 선언한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은 노동조합의 투쟁력을 기반으로 사회적 대타협과 의회에서 입법개선을 중요시하는 국민파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온건노선은 창당 시절부터 민주노동당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민주노동당의 전신은 국민승리21’이었는데, 이는 이름에서 보듯이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이 창당노선에 반영된 것이었다. ‘국민승리21’1997년 대선에서 내걸었던 일어서라 코리아역시 국민승리21’투쟁하는 노동자정당으로 각인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온건노선이었는데, 김세균 교수 등 평등계열 일부는 이를 우경화로 비판하면서국민승리21’에서 탈퇴하였다.
둘째,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는 민주노총이 의무적으로 민주노동당에게 인적 지원, 조직적 지원, 재정적 지원을 하고 선거 때마다 표를 주는 경직적인 관계를 형성시켜 오히려 양자 모두에게 독이 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민주노동당의 입장에선 굳이 민주노총의 요구를 진지하게 실천하지 않더라도 일방적 지지를 얻었기 때문에 노동중심성의 강화라는 당의 과제를 기필코 달성하겠다는 절박성이 부족하였다. 즉 노동중심성 실현에 대한 압박요인이 없었기 때문에 이는 강제성이 없는 선언적인 의미에 그쳤다. 이처럼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는 민주노총이 조합원의 정치활동을 민주노동당에 일임하는 대리주의로 변질되었으며, 그 결과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이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기도 전에 의회주의에 몰입하는 것을 차단할 수 있는 대중적인 정치기반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물론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 창당 당시 스스로 이러한 대리주의를 경계하였다. 민주노총은 20001월 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동당을 통한 정치세력화와 별개로 주요한 정치정세나 사업에 대해서 독자적 방침을 가지고 조합원에 대한 정치의식화와 교육, 활동 및 사업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하지만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에도 정치위원회를 통해 독자적인 정치활동을 하겠다는 애초의 목표는 거의 성과가 없었다. 민주노총이 추구하는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는 민주노동당 활동에 국한되어 당원확대사업으로 축소되었고, 노동자의 정치적 단결이라는 자기과제를 민주노동당으로 넘겨버리는 결과로 나타났다(민주노동당, 2009b).
민주노총이 일반 조합원을 상대로 하는 독자적인 정치활동을 포기함으로써 민주노총의 정치활동은 민주노동당 창당과 지원을 위한 상층간부들의 활동으로 축소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민주노총상임집행위원회는 1999719상임집행위원회 사업평가()을 통해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 창당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창당 추진주체들이 상층중심의 사업으로 인하여 노조 내의 광범위한 동의와 대중적 동력을 끌어내지 못하였다. 민주노총이 진보정당의 창당일정과 사업방침을 결정하는데 있어 대중조직의 발전과 역량에 맞게 조절, 추진하지 못하였다. 당건설의 과정에서 대중조직의 발전과 통일단결을 이루어내지 못하였다.
 
 
3)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정치적 결합
 
(1) 선거 결합
 
1997년부터 2007년까지 권영길 초대위원장이 국민승리21과 민주노동당의 대선후보로 나섰다. 2000년부터 2008년까지 3번의 총선에 출마한 민주노동당 후보는 모두 246명이며, 이중 민주노총 후보는 47명이다. 2002년과 2006년 지방선거의 민주노동당 후보는 모두 1019명이었으며 이중 민주노총 후보는 316명이었다. 2010년의 경우 민주노동당 452, 진보신당 174명 등 총 626명 중 147명이 민주노총 후보였으며 이중 압도적으로 민주노동당 후보가 많았다.
2000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전국 227개의 선거구 중 21개의 선거구에 후보를 출마시켰고 이중 민주노총 출신은 10명이었다. 본선까지 간 민주노총 소속 후보는 3명이었다. 2000년 총선 결과 민주노동당은 의석을 확보하는데 실패하였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후보들은 출마지역에서 평균 13.1%의 득표율을 기록하였다. 특히 민주노동당은 울산, 창원 등 노동자가 밀집해 있고 노동운동이 활발한 공업지역에서 40%에 가까운 득표율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는 1992년 민중당 후보 득표율의 2배가 되는 것으로서 한국에서 좌파정당의 가능성을 확인한 셈이었다.
2002년 지방선거에 출마한 민주노동당 후보는 218, 민주노총 후보는 112명이었다. 이 가운데 정당추천이 허용되는 광역·기초단체장, 광역의원 52명은 모두 민주노동당을 통해 출마하였으며, 정당추천이 허용되지 않는 기초의원 60명도 대부분 민주노동당 당원이었다. 민주노총 후보 중 25명이 당선되었다(김학태, 2006). 2002년 지방선거 광역단체장 투표에서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민주노동당 후보를 가장 높게 지지하였다(52.4%). 그 다음으로 한나라당(17.3%), 민주당(15.4%) 순으로 나타났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72.2%가 정당명부제 투표에서 민주노동당에 투표한 것으로 나타난 반면, 한나라당(9.9%), 민주당(9.8%), 사회당(1.5%), 미래연합(0.2%)은 소수였다.
지방선거 이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36.1%2002년 대선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를 지지하겠다고 응답했으며, 그 다음으로 민주당 후보(14.1%), 한나라당 후보(8.4%), 사회당 후보(0.3%), 미래연합 후보(0.1%) 순으로 나타났다. 지지정당은 민주노동당(55.1%)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으며, 민주당(12.0%), 한나라당(9.7%), 사회당(0.7%), 미래연합(0.1%), 자민련(0.1%) 순으로 나타났다(민주노총, 2002).
민주노총은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진보진영 단일후보 선출을 위한 범국민추진기구를 구성하고 대선투쟁은 단순한 선거투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단결권쟁취, 공공산업 사유화저지, 사회개혁투쟁 등 정책 실현도 병행해야 함을 확인하였다.
2002년 대선 직후 민주노총 조합원의 대선 당시 지지후보 설문조사에 따르면 권영길 후보(76.2%)1위였고, 2위는 노무현 열린우리당 후보(17.2%), 3위는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2.3%)였던 것으로 나타났고 지지후보가 없다는 의견은 2.9%를 차지하였다.
20031월 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총은 진보진영의 정치적 대표체로서 민주노동당의 위상을 확대강화하고 진보정치 대 보수정치로의 정치적 재편을 추동할 것을 선언하였고 특히 조합원의 5% 이상을 당원으로 조직하고, 민주노총의 주요한 요구가 당 활동 속에서 충분히 실천될 수 있도록 총연맹과 당 간의 정례협의회와 당의 노동위원회를 실질적으로 강화할 것을 결의하였다.
또한 민주노총은 투표일 공휴일 지정, 정당명부제 확대, 대선결선투표제 도입과 같은 정치개혁을 위해 민주세력과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공무원노조와 전교조 등 노동조합 정치활동의 완전한 보장을 정책과제로 내걸었다.
2004년 대의원대회는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 지지방침을 재확인하고 민주노총후보 출마, 정치기금 모금, 정치 선전, 지도부 순회, 현장조합원 교육, 당원 확대 등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승인하였다.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123개의 선거구에 후보를 출마시켰고 이 중 민주노총 출신은 52명이었고, 본선까지 간 민주노총 소속 후보는 12명이었다. 52명의 민주노총 출신 후보는 평균 13.5%의 득표로, 민주노동당 지지율 13.0%를 약간 상회하였고, 노동자 밀집지역은 높은 득표율을 보였다. 민주노총 자체 여론조사 결과 2002년 대선에서 조합원의 47.4%가 권영길 후보를 지지하였지만, 2004년 총선에서는 조합원 70% 이상이 민주노동당을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고, 90% 이상이 투표에 참여하였다. 민주노총은 특히 5,350명의 당원 확대와 56명의 후보 발굴, 10억 이상의 기금모금, 전국현장순회와 여성, 비정규노동자, 특히 공무원노조의 지지선언을 이끌어 내 민주노총이 확고하게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성과를 남겼다.
민주노총의 조합원에 대한 자체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2004년 국회의원선거에서 투표했던 정당은 민주노동당(87.2%)1, 뒤를 이어 열린우리당(5.2%), 한나라당(1.7%), 민주당(1.2%)의 순이었다.
2006년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과의 사업에 있어서 5.31지방선거, 당 노동부문 최고위원 선거, 당과의 정례협의회, 비정규직/노사관계로드맵 대응을 중요사업으로 설정하였다. 민주노총은 20065.31지방선거를 겨냥하여 현장의 정치활동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민주노총은 1, 2차 세액공제사업, 광역단체장 후원사업, 정치실천단 조직, 당원과 후원당원 확대사업, 비정규직노동자의 참정권 보장을 위한 서명활동, 투표조직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였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 801명이 출마하여 81명이 당선되었는데, 민주노총은 204명을 출마시켜 100명 이상 당선을 목표로 하였으나 34명을 당선시켰다. 민주노동당 출마자 중 노동조합 출신은 42.8%(간부: 34.1% + 조합원: 8.7%)이었으며, 선거비용을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세액공제로 조달한 경우는 36.5%이었다(민주노동당, 2006e; 70, 83).
민주노총이 20071126일 대선 후보에 대한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지지도를 조사한 결과, 권영길 후보가 85.7%1위를 차지했으며, 이어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1.7%),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1.4%) 순으로 나타났다. 이어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1.2%), 이회창 무소속 후보(1%)의 순서로 대답하고, 지지하는 후보가 없다는 의견도 5.6%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지하는 정당을 조사한 결과 민주노동당(89%)을 가장 선호하고 그 뒤를 한나라당(1.9%), 창조한국당(1.2%), 대통합민주신당(1%)의 순서로 나타났다.
2008년 총선 당시 102명의 민주노동당 후보 중 민주노총 후보는 25명이었다(민주노총, 2008f). 2010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노총 지지후보는 316명이었고 민주노총 후보는 147명이었다. 이들 중 민주노동당 출마자는 전체 452명 중 372, 진보신당 출마자는 전체 174명 중 85, 무소속 출마자는 6명이었다. 이들 민주노총 후보 중 기초단체장 3, 교육감 6, 교육위원 16, 기초의원 132, 광역의원 24명 등 총 181명이 당선되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각종 공직선거에서 결합한 과정을 평가하면 조합원 간부들 중에서 후보자 발굴과 선거출마 그리고 상층과 중앙에서의 결합은 나름 성과가 있었지만 일반 조합원의 선거운동 결합, 그리고 지역과 현장에서의 결합은 미흡하였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 112명이었던 민주노총 후보는 2006204명까지 확대되었다. 하지만 2010142명으로 감소하였다. 특히 울산의 경우 2002년과 2010년을 비교하면, 후보 수는 25명에서 9명으로 급감하였다(하부영, 2010). 이들 민주노총 출신 후보에 대해 민주노총은 현직 조합원의 경우 민주노총 후보로 선정하여 총연맹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지원하였고, 전직 조합원의 경우 민주노총 지지후보로 선정하여 제한적으로 지원하였다.
상층에서 선거운동의 결합을 보면 민주노총 연맹위원장이 민주노동당 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결합하고, 사무총장은 선거대책본부에 결합할 뿐 아니라 광역시도당과 시군구 당 조직의 선거기구에도 지역본부장 등 간부들이 결합하였다. 또한 민주노총은 당과 따로 독자적인 선거대책본부를 구성하였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선거를 통해 일반 조합원들을 발동시켜 양조직의 질적, 양적 강화를 실현한다는 목표를 설정하였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논의하여 마련한 활동지침의 주요 내용은 선거법 교육, 후원금 내기, 연고자 파악 및 연락하기, 선거관련 행사 참가하기, 배우자와 대화하기 또는 편지 쓰기, 출퇴근 선전하기, 사이버선전하기, 투개표 참관인 참여하기 등이었으나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주로 가족, 친지, 동료 등 연고자를 찾아 민주노동당 지지를 호소하였다. 또한 울산 등 노동자 밀집지역에서 민주노총은 당원인 조합원을 통해 당원이 아닌 조합원들을 선거에 적극 결합시키고자 했으나 조합원들이 세액공제 이상의 적극적인 활동에 나서는 경우가 드물었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조합원 당원에 대한 일상적인 정치교육과 정치활동을 통해 조합원의 정치적 의식과 활동역량을 배가시키고 이를 토대로 선거 시기에 조합원들은 일반 유권자들 속으로 들어가 민주노총의 활동을 소개하고 민주노동당 지지를 호소하고자 하였으나, 실제로는 이러한 일상적 활동이 부족하여 선거 시기에 조합원을 동원하는 수준에 그쳤다.
 
 
(2) ‘거대한 소수선택과 집중
 
민주노동당은 창당 당시부터 국회 원내 활동과 국회 원외 활동의 결합을 추구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원내 소수정당인 민주노동당은 원내 활동뿐만 아니라 민주노총과 같은 부문조직뿐 아니라 전국민중연대와 같은 민중투쟁조직과 함께 국회 밖 투쟁에 참여하여, 그 대중투쟁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대중들의 정치적 각성을 고양시켜 그 역동성이 선거에 반영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선은 평등계열에서는 사회운동정당노선으로 인식되었으며, 자주계열에서는 대중적 진보정당이 우측에 대중적인 부문조직을, 좌측에는 상설연대체인 민중투쟁전선을 두고 이들과 함께 현장투쟁과 선거투쟁을 전개한다는 내용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양 입장은 2004년 원내 진출을 전후로 하여 거대한 소수전략으로 수렴되어 당 내에서 꾸준하게 논의되어왔다.
거대한 소수전략의 핵심은 노동자, 농민, 빈민 등 거대한 민중의 힘으로 소수인 10명 의원단의 열세를 극복하여 민중들의 요구를 전 국민들 사이에서 쟁점화하거나 법제도로 성사시키는 것이다(민주노동당, 2009c). 따라서 '거대한 소수' 전략은 원외의 대중투쟁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이해당사자와 함께 정책을 수립하고 정책실현을 위한 운동과 네트워크를 통해 국회를 압박하여 입법을 실현한다는 입법프로세스까지 포함하였다. 따라서 이 전략은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 등 사회단체와 함께 사회적 쟁점을 공동으로 설정하는 것을 포함했고 이는 구체적으로 이들 단체와 함께 선거공약과 입법안을 공동으로 마련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거대한 소수' 전략은 애초에 의정활동전략으로서 제기되었으나 집권전략위원회 등 일부에서는 집권전략의 일환으로서 논의되었다. 이에 따르면 민주노동당은 의정활동만을 통해 집권할 수 없으므로 대중투쟁과 결합된 의정활동을 토대로 당 지지율을 높여 합법공간에 더 많이 진출하고 확대된 합법공간을 이용하여 사회변혁 전략의 일환으로 강력한 제도개혁운동을 전개하는 등 대중투쟁 의정활동 성과 정당지지율 상승의 선순환 전략을 수행해야 한다. 원내 의정활동과 원외 대중운동의 통합전략으로서 '거대한 소수' 전략은 집권전략위원회가 논의하여 제출한 민주노동당 의원활동 기조와 방침에 대한 중앙위원회 권고안에 포함되어 2009년 중앙위원회에서 채택되었다(민주노동당, 2009j).
거대한 소수전략이 작동한 사례는 2005년과 2006년의 쌀 수입 개방 협상 및 비준안󰡑 반대투쟁과 󰡐비정규직 권리보장입법󰡑 투쟁이다. 이때 민주노동당은 󰡐원내 쟁점 형성 사회적 이슈화 민주노총과 전농의 대중투쟁 촉발 원내 압박󰡑이라는 전술을 택하였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동당은 원내에서 소수정당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 쌀시장 개방을 막지 못했고 비정규직 철폐법안을 성사시키지 못했지만 국회 밖에서는 전농뿐만 아니라 농민 5단체, 그리고 민주노총뿐만 아니라 한국노총과의 연대투쟁을 주도하면서 거대 여야를 압박하였다(민주노동당, 2009d). '거대한 소수' 전략의 성공 여부는 반드시 국회에서의 입법투쟁이 실현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의정활동과 대중투쟁의 결합, 입법의 성패와 상관없이 대중들이 정치적으로 각성되고 조직되어 이것이 투표로 나타나는 것까지 포함한다.
민주노동당 내에서 거대한 소수전략이 입법과정을 통해 작동되도록 하는 입법전술로서 선택과 집중이 논의되었다. 민주노동당은 2004년 원내 진출 이후 10명의 의원들밖에 없었으므로 원내외에서 '거대한 소수' 전략을 실현하려면 백화점식 활동이나 개인기 활동이 아니라 조직적인 선택과 집중의 의정활동 방침을 수립하고 실행해야만 하였다. 이러한 선택과 집중은 민주노동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하면서 자신들의 입법과제를 수립하고 민주노동당에게 이를 요구하며 입법을 위해 서로 공조하는 민주노총이나 다른 부문조직들에게도 해당되는 전술이었다. 이를테면 민주노총 역시 자신들이 원하는 모든 입법을 원내 소수정당인 민주노동당을 통해 관철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국민들과 다른 정당들의 동의를 받을 수 있는 핵심적인 사안에 대해 우선적으로 입법을 추진해야만 하였다.
민주노동당 원내외 지도부 차원에서 선택과 집중에 성공한 사례는 삼성에 대한 대응이었다. 최고위원회는 전략을 짜고 의원단이 다시 상임위원회에서 세부적인 역할을 배분하였고, 시민단체와 연대하면서 원외에서 대중투쟁도 전개하였다. 하지만 민주노동당 시각에서 사회구조에 깊숙이 잠복해 있는 모순을 전당적으로 제기하여 이슈화하는 것은 큰 성과가 없었고, 삼성처럼 이미 이슈화된 여론에 대응하는 것에 머물렀다.
한편 민중연대를 계승한 대중투쟁전선체인 진보연대가 2007년 출범 과정에서 민주노동당 지지 문제와 다수결에 근거한 단일기구로의 전환 문제로 분란이 일어나고,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으로 진보진영이 강력한 통합력을 상실하자 원외 대중투쟁이 약화되고 결국 원내외 활동의 결합인 거대한 소수전략은 점차 작동되지 않았다.
분당 이후 민주노동당이 대중조직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가면서 점차 대중투쟁보다는 의회활동에 집중하고 노동자, 농민, 빈민, 학생 등 부문조직들은 진보정당의 분열상태에서 정치적 구심점을 형성하지 못한 채 거리에서의 투쟁에 점차 소극적이 되면서 '거대한 소수' 전략은 점차 잊혀졌다. 민주노총마저 갈수록 거리에서 대중투쟁보다는 의회에서 입법투쟁에 경도되었다.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선언하고 실제로 총파업에 나서는 경우는 갈수록 줄어들었으며, 총파업에 돌입해서도 상징적으로 끝내는 경우가 많았다. 민주노총의 총파업은 정부, 자본가의 미미한 양보를 얻어내고 종료되거나 정부의 탄압으로 흐지부지되었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의 대중투쟁을 국회에서 지원하고 당원들이 투쟁에 결합했지만, 원내 소수정당이기 때문에 민주노총의 입장을 국회에서 관철시킬 힘이 없었다. 이러한 투쟁이 반복될수록 조합원들은 대중적 정치투쟁의 한계만을 인식하게 되었다. 민주노동당은 국회에서 비정규법이나 노사관계 로드맵이 개악되는 것을 저지하려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개악을 막지 못하는 무력한 모습을 보였고 조합원들은 역시 소수정당은 안 된다는 패배감을 느꼈다.
거대한 소수전략과 선택과 집중전술을 중심으로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정치적 결합을 평가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거대한 소수' 전략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민주노동당과 함께 했던 대중조직들이 사회적 힘을 충분히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의 배후지, 즉 민주노총, 전농, 상설연대체, 시민사회단체, 즉 대중적 힘을 발휘할 진지가 강력하게 구축되어 있었어야 했는데, 이것이 부족했기 때문이다(민주노동당, 2009d).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노동운동과 의정활동의 결합이라는 거대한 소수전략을 설정한 것은 타당했으나 실제로는 원외 대중운동은 연대집회에 머물렀으며, 원내 활동은 소수정당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비정규직 철폐 입법투쟁을 쌀 수입 개방 저지투쟁과 비교하면 민주노총은 전농보다 더 큰 조직이었지만 대중투쟁은 그만큼 성공하지 못하였다. 민주노총이 비정규직 문제에 의무감이 있었지만 그 구성원이 주로 정규직이라서 자기 문제로 투쟁에 임한 것은 아니었다. 양극화 해소라는 사회적 의제가 있었지만 자본가, 정부, 보수언론이 저항했기 때문에 강력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해 타당 의원이 가세하지 못하였다. 특히 사내하청이나 파견직을 제외하면 일용직과 임시직이 대부분인 비정규직 노동자는 자신의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인해 조직화에 성공하는 경우가 흔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강력한 투쟁 주체로 형성되지 못하였다. 결과적으로 민주노총의 정치적 대중투쟁을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제도화시킬 수 있는 권력자원이 부족하였다(김영수, 2007; 98).
둘째, 민주노동당의 원내 지도부와 원외 지도부의 소통 부족과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소통 부족 그리고 그로 인해 공동의 전략과 전술을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거대한 소수' 전략과 선택과 집중 전술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 '거대한 소수' 전략에서 민주노동당이 소수 의원들의 힘을 극대화하고, 민주노총 등과 함께 대중투쟁의 거대한 흐름을 만들려면 의원들의 역할을 원내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입법과제가 사회적 쟁점으로 제기된 투쟁현장에 의원들을 조직적으로 배치했어야 하였다. 이 경우 의원단은 경우에 따라서 쌀 투쟁에서 보듯이 투쟁현장의 야전지휘부로서 역할을 해야 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역할을 주로 원내에 한정하였다.
의원단과 대중단체들이 외형상 협력하고 있었으나 구체적인 대응전략까지 공동으로 논의하지 못하였다. 심지어 민주노총마저 당과 만나 의원들이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구체적인 전략을 논의하지 못하였다. 국회의원을 겸할 수 없는 최고위원회는 의원들을 구속할 수 있는 이러한 전략을 짜지 못하였다. 이를테면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비정규직을 철폐하는 입법안을 같이 논의했지만 다른 노동정책의 경우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하여 같이 논의한 경우가 드물었다(민주노동당, 2009d).
거대한 소수전략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구체적인 주체는 당 지도부, 즉 최고위원회가 되어야 하는데 의원단에 대한 최고위원회의 구속력이 취약하여 의원들이 언론 노출을 노리고 개별 플레이하는 경향이 증가하였다. '거대한 소수' 전략에 따라 의원단의 활동방침을 수립하는 주체에 대해 의원단과 최고위원회는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양상을 보였다. 의원들은 최고위원회가 원내 활동에 대한 선택과 집중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별화되고 싶지 않지만 국회에서 상황은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에 대응은 의원단이 할 수밖에 없고, 여론 역시 의원단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개별적으로 상임위원회에 주력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 결과 의원 개인들은 최우수 의원에 뽑히고, 노회찬 의원처럼 스타의원이 나왔지만 당 전체로 볼 때 지지도는 오르지 않았고 당 지지자들은 의원들이 자신들의 인기에 집착하는 의회 활동에 경도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최고위원회와 의원단의 의정활동에 대한 시각차이가 존재하였는데, 형식상 최고위원회가 의원단을 지도해야 했지만 의원단에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이 집중되는 권력쏠림현상이 있었기 때문에 의원단에 대한 최고위원회의 지도나 통제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거대한 소수' 전략과 선택과 집중 전술을 지휘해야 할 지도력의 부재는 최고위원과 의원의 겸직을 금지시킨 당직공직겸직금지 제도와 관련이 있다. 원내 지도력과 원외 지도력을 분리하여 원외 지도부가 원내 지도부를 지휘하도록 한 이 제도는 민주노동당이 2003년 말 임시당대회 당발전특별위원회 보고서를 통해 민주노동당의 의회주의 몰입을 막는 제도로 도입되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지도부들이 대거 국회로 쏠리면서 원외 지도력의 공백이 생겨 이 제도가 순작용을 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 사라져버렸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초대 지도부가 대거 의원단으로 쏠리면서 최고위원회라는 원외 지도부에 공백이 생긴 셈이었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의 의원단은 민주노동당 대표, 민주노총 위원장 등 양 조직의 전직 지도부가 주요 구성원이었고, 최고위원회의 인적 구성으로 볼 때 최고위원회가 의원단을 지도할 수 있는 개인적 리더십도 부족하였다.
이 제도에 대해 당시 이00 의원은 의원이 아닌 지도부가 의원단을 지도한다는 것이 비현실적이므로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심00 의원 역시 원외 지도부의 한계를 인정하였지만 당직과 공직의 분리가 나름대로 장점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살리려면 최고위원회에 의원단 대표뿐만 아니라 몇몇 의원이 섞이도록 보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009d). 결국 이 제도는 정파와 상관없이 당내 비판에 직면하여 20072월 중앙위원회에서 폐지되었다. 이 제도 폐지 이후 민주노동당 당 대표는 강기갑, 이정희 등 의원들이 역임하였고, 원외 지도부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초기 지도부는 당직공직겸직금지제도를 활용하여 국회 안팎에 지도력을 배분하여 민주노동당의 성급한 의회주의 경향을 지연시킬 수 있었으나 오히려 그들 대부분이 국회를 선택하여 스스로 의회주의에 몰입되었다.
 
 
4) 조직적 결합
 
(1) 인적 결합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 2005년까지 당원이 급증하였고 민주노총 역시 꾸준하게 입당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전체 당원 중 민주노총 조합원 비율은 점차 하락하였다. 민주노총 소속 당원의 비율은 199948.98%, 200147.94%, 200343.49%, 200542.32%이었다. 2007년 기준으로 민주노동당 당원 중에서 민주노총은 당원의 40%, 진성당원의 50%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민주노총 전체 조합원 중 4% 만이 당원이었다.
 
4 연도별 민주노총 조합원의 당원 수와 당원 비율
 
 
 
 
총 당원 수
민주노총 조합원 당원수
연도
당원 당우 수
전년대비
증가수
당원 수
구성비(%)
전년대비
증가수
1999
7,375
 
3,612
48.98
 
2000
11,643
4,268
5,683
48.81
2,071
2001
17,248
5,605
8,269
47.94
2,586
2002
25,564
8,316
11,515
45.04
3,246
2003
35,068
9,504
15,252
43.49
3,737
2004
60,341
25,273
25,345
42.00
10,093
2005.12
72,424
12,083
30,592
42.67
5,247
2007.2
78,277
5,853
31,990
40.8
1,398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과 같은 배타적 지지 단체에게 대의기구 구성원 총수의 일부를 할당하였다. 2005년 기준으로 중앙대의원과 중앙위원의 구성을 보면 지역대의원의 50%가 부문할당이며, 그 중 56%가 민주노총, 비정규직, 한국노총 등 노동계에 할당되었는데, 이는 중앙대의원과 중앙위원 총원의 18.6%가 노동계라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계 할당의 대부분은 민주노총에게 돌아갔고 일부만이 한국노총에게 할당되었다(민주노동당, 2005a).
민주노동당은 배타적 지지 단체에게 할당된 중앙위원과 대의원의 선출방식을 그 단체에 맡겼는데 민주노총은 자신에게 할당된 대의원에 대해 별도의 선출절차 없이 대의원을 내부적으로 선정하여 그 명단을 당에 통보하였다. 민주노총은 전체 할당 대의원 수를 당으로부터 통보받으면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연맹별 지역별 배정기준과 숫자를 확정하면 각 연맹과 지역에서 대의원대회, 혹은 중앙집행위원회, 운영위원회 등을 통해 선출 혹은 인준의 방식으로 대의원을 확정하여 총연맹을 통해 민주노동당에 통보하는 방식이었다.
당원인 민주노총 조합원은 당원의 자격으로 당내 지역 대의원 선거에 출마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의원인 민주노총 조합원의 비율은 할당 비율보다 높았다. 전체 대의원 중 할당대의원과 선출대의원을 합한 민주노총 조합원의 비율을 보면 중앙위원회의 경우 2002년 중앙위원회 총원 98명 중 노동할당 17명을 포함한 전체 노동조합 출신은 41명에 달해 42% 수준이었다. 중앙위원회에서 민주노총 등 노동조합 출신은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는데 2005년의 경우 민주노총 소속 중앙위원은 75명으로 총수는 늘었지만 비율은 34%로 감소하였고 중앙대의원은 326명에 이르렀지만 역시 그 비율은 감소하였다. 2005년 상반기 전체 당원 중 민주노총 소속 당원의 비율이 42%임을 감안하면 민주노총은 대의원 분포에서 과소대표 되고 있었다(민주노동당, 2005a).
민주노총에 대한 할당의 문제점을 보면 첫째, 민주노총 등에 할당된 부문 대의원들은 선출과정에 있어 민주적 대표성이 부족하였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에 할당된 대의원 선출 절차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방식은 당원이 직접 선출하는 민주노동당의 방식과 다른 것으로서 민주적 절차가 충족되지 않은 것이었다. 할당 대의원들은 당원이 직접 선출한 대의원과 달리 당 활동 결합에 있어 적극성이 부족하였고, 특히 중앙위원회나 대의원대회 등 각종 대의기구 참석률이 당내에서 선출된 경우보다 낮아 당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에 따라 민주노총도 단순한 배정방식을 지양하고 조합원이나 조합 내 당원들에 의한 직접선출 등 절차적 정당성을 제고하는 방안을 모색하였으나 실현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민주노총의 해명에 따르면 할당된 대의원들은 대부분 민주노총의 간부들이고 이들은 조합원의 직접선출에 의하므로 결과적으로 절차적 정당성을 충족한다는 것이다.
둘째, 민주노동당에 다양한 계층들이 입당하면서 민주노총의 할당 비율을 둘러싼 당 내 논란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는 민주노동당의 노동자 대표성, 민중 대표성, 국민 대표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창당 당시부터 부문할당은 자신과 이념 및 실천을 공유하는 배타적 지지 단체와의 직접적인 연결고리라고 인식해왔다. 하지만 점차 다양한 계층들이 민주노동당에 입당하면서 기존의 할당 방식을 비판하고 자신들에 대한 할당을 요구하였다.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단체 중 이러한 할당을 받지 못한 경우가 있었고, 장애인 등 일부 부문의 경우 전체 국민 중 장애인의 비율에 비해 장애인들이 민주노동당에서 할당 받는 비율이 너무 낮다고 불만을 제기하였다. 이들 소수자 부문들은 민주노총에 대한 할당이 너무 높다면서 그 일부를 축소하여 자신들에게 할당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민주노총 지도부는 노동부문 할당비율의 유지를 민주노동당의 노동중심성이 견지되는 시금석으로 여기며 반발하였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당내 노동자, 농민 등 민중의 중심성과 당의 정체성을 구현하기 위한 부문할당의 정신이 진보정당으로서의 소수자 배려원칙과 서로 충돌되지 않는다는 의견을 제출하고 일부 양보안을 제시하였지만 크게 개선되지는 못하였다.
 
5 민주노동당 지도부와 국회의원 중 민주노총 간부 출신
 
 
 
 
지도부
국회의원
2000
5인 대표단 중 4(권영길, 천영세, 양경규, 박순보)
16대 국회의원 당선자 없음
2002
5인 대표단 중 4(권영길, 천영세, 최순영, 김태일)
2004
13인 최고위원원회 중 4(천영세, 이용식, 이영희, 박인숙)
17대 국회의원 10인 중 5(권영길, 단병호, 천영세, 최순영, 심상정)
2006
12인 최고위원회 중 4(문성현, 천영세, 박인숙, 심재옥)
2008
9인 최고위원회 중 3(이수호, 최순영, 이영희)
18대 국회의원 5인 중 2(권영길, 홍희덕)
2010
9인 최고위원회 중 2(이혜선, 최은민)
2012
4인 통합진보당 공동대표단 중 2(조준호, 심상정)
19대 통합진보당 국회의원 13인 중 2(정진후, 심상정)
민주노총이 노동계 대의원의 대부분을 가져가는 것에 대해 노동계 내부의 비판도 제기되었다. 특히 민주노총 소속 노동조합이라고 해도 일정 수 이상의 조합원이 있어야 대의원을 할당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 노동조합의 경우 대의원을 할당 받을 가능성이 낮았다. 또한 노동부문 할당 중 민주노총 부분을 줄이고 그 부분만큼 민주노총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비정규부문에 대한 할당을 늘려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뿐만 아니라 전체 노동계급에 대한 대표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민주노동당, 2009e; 106).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민주노동당 지도부와 국회의원 중 민주노총 간부 출신을 보면 57인 중 23, 28인 중 9인으로서 그 비율이 점차 감소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비례대표 의원 중 민주노총 인사를 보면 2004년에는 8명 중 4, 2008년에는 5명 중 1, 2012년에는 13명 중 1명이며, 이를 보더라도 노동계나 민주노총 출신 국회의원들은 급감하였다.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 당시 권영길, 노회찬, 박순보, 양경규, 천영세 등 5명의 대표단 중 권영길 전 민주노총위원장, 박순보 전 전교조 부산시지부장, 양경규 민주노총 부위원장, 천영세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민주노총 간부 출신이었다. 2002년 민주노동당 공동대표단 권영길, 천영세, 김태일, 최순영, 김혜경, 노회찬 등 5명 중 민주노총 간부 출신은 권영길, 천영세, 김태일 민주노총 부위원장, 최순영 민주화학섬유연맹 지도위원 등이었다. 2004년 민주노동당 최고위원 13명 중 민주노총 간부 출신은 박인숙, 이용식, 이영희, 천영세 등 4명이었고, 2006년 민주노동당 최고위원 12명 중 민주노총 간부 출신은 문성현, 박인숙, 심재옥, 천영세 등 4명이었다. 2008년 민주노동당 최고위원 9명 중 민주노총 간부 출신은 이수호, 최순영, 이영희 등 3명이었고, 2010년 민주노동당 최고위원 9명 중 민주노총 간부 출신은 최은민, 이혜선 등 2명이었다. 반면 2012년 통합진보당은 공동대표단 제도를 두었고 4명의 공동대표 중 민주노총 출신은 심상정, 조준호 등 2명이었다. 다만 민주노총이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에 반대했기 때문에 조준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민주노총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었다.
200417대 국회의원에 선출된 권영길, 조승수, 천영세, 이영순, 강기갑, 최순영, 심상정, 노회찬, 단병호, 현애자 등 10명 중 이영순, 강기갑, 현애자를 제외하고 모두 노동운동 출신이었으며, 특히 권영길과 단병호는 민주노총 위원장을 역임했고, 천영세는 민주노총 지도위원, 최순영은 민주화학섬유연맹 지도위원, 심상정은 금속연맹 사무처장 출신이었다. 200818대 국회의원에 선출된 권영길, 강기갑, 홍희덕, 이정희, 곽정숙 등 5명 중 노동운동 출신은 권영길과 전국민주연합노조 위원장 출신인 홍희덕 등 2명이었다. 201219대 통합진보당 국회의원 13명 중 민주노총 간부 출신 인사는 심상정과 전교조위원장 출신인 정진후 2명뿐이다.
민주노동당은 대표단 혹은 최고위원회에 노동담당 최고위원을 두었는데, 창당 때부터 2004년도까지 민주노총 부위원장 겸 정치위원장이 당연직으로 지명되었으나, 나중에는 정치위원장이 단독후보로 나서 찬반투표를 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2006년 민주노동당 노동부문 최고위원 선거의 무산과 당 노동위원장의 장기공석은 민주노총이 당과의 사업에 있어서 원활한 소통구조를 갖는데 어려움을 야기하였다. 민주노총 정치위원장 겸 노동담당 최고위원은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를 기획하고 총괄 집행하는 역할을 지향하였으나 실제로는 양자 사이의 소통 통로의 역할에 머물렀다. 노동부문 최고위원의 지위는 민주노동당에게는 민주노총의 입장만 고집스럽게 대변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민주노총에게는 자신이 만든 민주노동당에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지 못하는 능력 부족으로 인식되었다.
 
 
(2) 기관 결합
 
민주노총은 20001월 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와 매월 정례회의를 할 것을 결정하였고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 양 조직은 지도부 정례협의회를 분기별로 개최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정례협의회는 중앙뿐만 아니라 광역시도, 시군구에서도 열렸는데, 시군구의 정례협의회는 양 조직의 사업집행을 공유하는 수준에 머물렀으며, 갈수록 그 필요성이 약해져 대부분 유야무야되었다.
정례협의회는 통상적으로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각각 자신의 주요 사업계획을 설명하고 상대방의 협조를 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정례협의회에서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에게 선거지원, 당원확대, 재정지원 등을 요구하였고 할당 방안 등 상호 현안을 논의하였다. 반면 민주노총은 자신의 현안을 설명하고 의정활동에 반영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특히 민주노총 투쟁에 당이 적극 결합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정례협의회의 문제점을 보면 이 회의의 취지가 양 조직의 지도부가 정기적으로 만나 쌍방의 동반성장 전략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부정기적으로, 의례적으로 진행되었고, 나중에는 회의 자체가 거의 소집되지 않았다.
정례협의회는 양 조직의 최고지도부가 참여하는 회의이기 때문에 이 회의가 양 조직과 대외적으로 미치는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전략이 필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상견례에 불과하였다. 정례협의회에서 결정되는 내용은 양 조직에 구속력이 있다는 점에서 양 조직의 정책과 기획 책임자가 평상시에 양 조직의 발전방안을 논의하여 그 초안을 정례협의회에서 토론하여 결정하고 대외적으로 발표하는 등 정례협의회를 정치적 행위로 고양시켜야 했었다. 하지만 정례협의회에서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과 연대하여 집권을 실현하기 위한 장단기 계획을 제출하고 이에 대해 논의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 이후 정례협의회에 전농,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 등 다른 배타적 지지 단체까지 참여하여 산만해지면서 민주노총과 긴밀한 논의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민주노총, 2009a). 민주노동당은 여러 배타적 지지 단체의 요구를 수용해야 하는 입장에서 민주노총만의 정례협의회를 자주 열 수 없었던 반면, 민주노총은 가능하면 별도의 정기적인 정례협의회를 원했다.
정례협의회는 주로 민주노총이 일상적인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지만 민주노동당이 소극적으로 임하다가 선거 시기 등 민주노동당이 필요할 때 민주노동당의 요구로 부정기적으로 개최되었다. 2008년 민주노동당에서 진보신당이 분당된 이후에는 민주노총의 입장에선 조합원의 반발로 인해 특정 정당과의 정례협의회가 곤란하게 되었다.
20085월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민주노동당이 비대위원회 체계로 전환된 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첫 정례협의회를 열고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확인하고 양자에 있어 배타적 지지에 걸맞는 전략적 관계의 구체성이나 긴밀함이 떨어진다는데 의견을 같이 하고 전략적 연대 강화를 위해 총장급을 책임자로 하는 협의구조를 상시적으로 가동하기로 하였다. 양 조직은 총장급의 상시적 협의기구 설치, 분기별 정례협의회 개최, 합동수련회 등 양 조직의 전략적 연대관계와 발전 방안을 논의하였다. 특히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의 혁신재창당 방안을 현장에서부터 조합원과 함께 민주노동당이 새롭게 혁신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혁신재창당 과정에 적극 참가하기로 하였다. ‘총장급을 책임자로 하는 상시적 협의구조에 대해 정성희 민주노동당 집행위원장은 하루에 한 차례 이상의 전화,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의 만남이라고 설명하였다. 이용식 민주노총 사무총장은 사안별로 총장만 만나는 것이 아닌 각 정책 단위들도 함께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양자는 이명박 정부에 맞선 사회공공성 수호 투쟁,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투쟁 등을 공동으로 전개하기로 하고, 민주노총은 이수호 전 민주노총위원장이 주도하는 민주노동당 혁신-재창당 과정에서도 조직적으로 적극 참가하기로 하였다(민주노총, 2008g).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 체계에서는 일시적으로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과의 공조가 원활하였고, 민주노총 인사들이 비대위 내 혁신재창당위원회에 대거 결합하여 혁신재창당방안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20086월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이러한 혁신재창당방안이 민주노동당의 거대정파에 의해 사실상 무력화되고, 이어진 민주노동당 지도부 선거에서 이수호 전 민주노총위원장이 당내 거대정파들의 담합에 의해 패배하는 등 민주노총 인사들의 민주노동당 혁신이 실패한 후 양 조직의 관계는 다시 소원해지고 정례협의회도 뜸해졌다. 양 조직의 정례협의회는 2009년에 중단되었다가 진보대통합이 공식적으로 논의되면서 20113월에 다시 재개되었다(연윤정, 2011).
 
6 민주노동당 전반기 정례협의회 논의사항
 
 
 
 
회의 시기
민주노동당 사안
민주노총 사안
기타 의제
20025
지방선거계획안
선거지원 방안
 
20028
대선계획안
 
 
200410
당원확대방안 총선평가
하반기 투쟁사업
정례협의회 방식
20053
당원확대, 할당 조정
민주노총 비리사건, 비정규법 저지
사회공공성강화투쟁
20059
대중조직과 당의 관계 당비인상 세액공제
지방선거 노동자후보 발굴, 국정감사 대응
 
200511
공동사업
비정규 투쟁
쌀 비준 반대, 사회양극화 투쟁
20068
 
포스코 투쟁 정례협의회 정례화
한미FTA 투쟁
20074
민주노동당 대선 방침
조합원의 대선후보경선 참여 방안
 
20085
분당 이후 혁신재창당방안
민주노총의 6~7월 총력투쟁
광우병 쇠고기 수입 저지투쟁
20113
진보대통합
4·27 재보선 정치방침
노동조합법 재개정
민주노총은 1995년 대의원대회를 통해 96년 총선을 맞아 총연맹, 각 지역본부, 산업별로 정치위원회를 두어 노동자 정치세력화 방안, 정치교육, 공직선거 출마자 발굴 등을 논의할 것을 결정하였다. 민주노총은 총연맹과 산별 단위뿐만 아니라 단위사업장에도 정치간부를 육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현장의 정치위원회를 구성하고자 하였으나 대규모 사업장을 제외하면 실현되지 못하였다. 민주노총은 20001월 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동당 창당과 병행하여 정치위원회를 중심으로 각 지역별로 정치학교 개설 등 노동조합 차원의 독자적인 정치 사업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를 위해 민주노총은 정치위원회 구성을 위한 현장순회와 정치실천단 수련회를 계획하였지만 연말 노사관계 로드맵투쟁으로 역량이 분산됨으로써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정치위원회는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에 대한 기본방침을 토론하고 그 초안을 양 조직에 제출하는 전략기구의 역할과 구체적인 정치방침을 수행하는 집행기구의 역할을 동시에 맡았으나 실제로는 전략수립보다는 집행의 역할에 편중하였다. 민주노동당이 분당되기 직전인 2007년 민주노총 정치위원회 현황을 보면 총연맹 정치위원회는 16개시도 지역본부 정치위원장, 15개 산별 정치위원장 등 38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거의 매월 13차례 회의를 열어 최대 27, 최소 9명이 참가하였다. 일상적인 사업계획 수립과 평가 이외에 주요 안건을 보면 민주노동당 대의원대회 안건 논의, 대선방침 논의, 조합원 정치교육, 출마자 교육, 세액공제와 당원확대, 민주노동당과 합동수련회 등이다(민주노총, 2008a).
민주노동당은 창당 당시부터 노동관련 의제를 다루는 회의체계와 일을 집행하는 집행부서로서 노동위원회를 설치하고 민주노총 부위원장 겸 정치위원장이 노동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중앙당에는 노동위원들로 구성된 노동위원회를 두었다. 노동위원회는 조합원 당원에 대한 교육과 정치사업, 당원 확대사업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 사업을 담당하였다. 노동위원회는 대부분의 광역시도당에 설치되었고 상당수 시군구위원회도 노동위원회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중앙당 노동위원회의 경우 담당 상근자가 1인에 불과하고 재정이 부족하여 실질적인 사업을 추진하지 못하였고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위원회체계가 사실상 와해되어 집행부서로 전락하였다. 지역의 노동위원회에는 노동위원장이 있다고 해도 사실상 노동위원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위원회체계로 운영되지 못하였고 특히 시군구의 경우 그러하였다.
민주노총은 미조직비정규실을 2003년부터 설치하였고 민주노동당은 기존의 노동위원회 외 비정규직철폐운동본부를 2005년 추가로 설치하였다. 양 조직은 광역시도별로 비정규센터 설립을 추진하였으며, 일부 시군구 지역까지 비정규직센터가 설립되었다. 양 조직은 비정규 사회연대기금을 조성하며 비정규직 철폐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하고자 하였으나 실질적인 성과는 내지 못하였다. 다만 2010년 지방선거에서 야권이 정책연대와 후보단일화로 승리한 지역에서 야권연대의 정책합의사항으로서 지역비정규직센터가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으로 설립되었다.
양 조직 모두 비정규직 철폐에 관한 정책 수립과 비정규직 조직사업을 담당하면서도 정작 상호 간의 전략적인 논의와 협업이 미흡하였다. 첫째, 양 조직에서 노동위원회와 같은 기존의 기구와 별도로 비정규직 문제를 담당하는 기구를 새로 만드는 문제에 대해 논쟁이 발생하여 비정규직 문제를 담당하는 기구의 출범이 늦어졌다. 둘째, 민주노동당이 비정규직노동자 조직화를 민주노총과 별도로 추진할 수 있는지가 논쟁되었고, 정책방향에 대해서도 비정규직 자체의 철폐 혹은 비정규직 노동 유형의 필요성은 인정하되 정규직과의 차별을 철폐할 것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양 조직 간에 이견이 존재했음에도 토론과 조정이 제때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민주노동당의 비정규직철폐운동본부는 자기 역할을 지속적으로 확고히 하지 못한 채 폐지되었다.
 
 
(3) 사업장과 지역 결합
 
민주노동당은 창당시기부터 주로 읍면동에서 당원들의 세포단위로서 분회를 설치 운영하였다. 민주노총 역시 이에 부응하여 개별 사업장에서 민주노동당 당원들로 구성된 직장분회 혹은 현장분회의 설치를 추진하였는데, 이러한 직장분회는 당원들이 밀집되어 있는 대규모 사업장에서만 가능하였다(민주노총, 2009b). 민주노총이 총연맹과 지역본부뿐만 아니라 단위노조에서 결성하고자 했던 정치위원회가 노동조합의 정치기구라면 분회는 지역과 사업장의 당 조직이었다. 즉 직장분회는 민주노총 사업장에서 민주노총과 당이 만나 당의 민주노총 사업, 민주노총의 당 사업이 진행되는 곳이었다..
2003340개 전체 민주노동당 분회 중 직장분회가 55개에 달했으나 그 이후로 크게 증가하지 못하였다. 2005년 기준으로 민주노동당 전국분회장 수련회 자료집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1018개의 민주노동당 분회가 건설되어 있고 당원의 60%가 분회의 성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중 약 92%가 지역분회이며 6%가 직장분회이며, 2%가 특별분회이다(민주노동당, 2005e).
2008년 민주노동당 경기도당 직장분회장 간담회 자료집에 의하면 경기도의 경우 기아자동차지부 화성지회 직장분회, 쌍용자동차노동조합 직장분회, 만도지부 평택지회 직장분회, 한라공조 평택지회 직장분회, 에스제이엠지회 직장분회, 서울지하철 지축정비지회 직장분회 등이 조직돼 있으며, 쌍용자동차와 같이 대규모 사업장에서는 여러 개의 분회가 운영되고 있다(민주노동당, 2008e).
분회가 활성화되었던 2005년 기준으로 시군구 지역위원회의 직장분회는 지역 평균 0.7(최대 21, 최소 0)이다. 지역위원회에 사업장이 다수 존재하는 조건에서 직장분회가 지역 평균 0.7개에 불과하다는 것은 당과 민주노총이 지역 차원에서 공동사업을 추진할 주체가 형성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직장분회가 활성화되지 못한 이유는 지방 소도시의 경우 직장과 주거가 생활공간 측면에서 중복되었다는 점에서 당 조직과 현장조직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 반면 대도시에서는 양자가 너무 동떨어져 있어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기 어렵다는 점, 특히 지역에서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결합 방향에 대하여 지역구에서 선거지원 중심의 활동에 주력할 것인지 아니면 현장에서 노동자정치세력화에 주력할 것인지에 대한 혼란이 있었다는 점에 기인한다.
민주노총 조합원은 기본적으로 지구당에서 활동할 것을 요구받았다. 또한 민주노동당은 모든 선출직 간부를 당원 직선으로 뽑기 때문에 민주노총 조합원이나 간부들이 지구당 활동을 거치지 않으면 당 간부로 선출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들이 노동조합 활동과 함께 지구당 활동까지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지역분회의 경우 조합원의 참여률이 낮고, 직장분회는 지역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당과 민주노총이 지역에서 일반 조합원 차원에서 일상적으로 지역사업을 공동으로 진행하는 일은 드물었다.
직장분회와 지역위원회 사이의 마찰도 존재하였다. 직장분회는 같은 직장의 동료들로 구성되어 당원임에도 불구하고 그 폐쇄성으로 인해 민주노동당 지역위원회가 조합원 당원들에게 직접 접근하기 어려웠다. 또한 민주노동당 정파가 노동조합 선거에 개입하여 노동조합 지도부와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 직장분회는 정파에 장악된 지역위원회와 자신이 소속된 노동조합 사이에서 자기 위상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었다. 이 경우 민주노총은 직장분회가 당 조직임을 내세워 그 운영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았고 직장분회를 실질적으로 책임져야 할 민주노동당 노동위원회는 지역 차원에서 실질적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직장분회는 종종 당과 노조 사이에서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대상이 되었다.
결국 전반적인 민주노동당 노동위원회의 활동 부족과 지역주민사업 중심의 민주노동당 지역위원회 활동에 따라 직장분회는 방치되었고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조합 내에서 조합원의 당적이 달라지는 경우가 속출하자 이러한 경향이 더욱 짙어졌다. 대부분의 직장분회는 민주노동당 지역조직임에도 불구하고 당과의 의사결정이나 실천 활동의 소통구조가 취약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분회들은 분회 소식지 등을 통한 당 활동 선전, 당원확대사업, 출마자 발굴과 선거 시기 선거지원 등에 나섰다. 하지만 조합원인 당원은 평상시에 거주지 주민들과 거의 정치사업을 하지 않으므로 선거 시기 노동조합이 후보 지원을 위해 조합원들을 지역에 배치하여도 득표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직장분회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은 그 근거로 첫째, 조합원 당원이 주거지가 아니라 사업장에만 매몰됨으로써 정당 활동의 기본인 지역이 공동화되고, 직장분회가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선거 때마다 정파들의 현장조직과의 연계를 반복하면서 결국 장기적으로 선거조직화될 우려가 크고, 둘째, 현장의 당원 능력으로 볼 때 노동조합 이외에 별도의 조직을 운영할 여력이 없다는 점을 들었다. 민주노총 남002007년 인터뷰에서 지적하듯이 사업장마다 직장분회는 큰 공장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중소기업들은 공단별로, 혹은 지역위원회별로 민주노총 조합원인 열성당원들로 구성된 노동부문 당 활동가 조직을 만들어 민주노총 조합원과 지역 노동자들에 대한 정치사업을 시도해야 했지만 그리하지 못하였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지역토대를 강조하였기 때문에 지도부와 의원들의 지역결합을 독려하였다. 민주노동당은 기본적으로 지역 활동을 통해 지역구 의원들을 보다 많이 배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당 지도부는 지역구 출마를 원칙으로 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소선거구제에서 민주노동당 당적으로 당선되는 것이 곤란하였으므로 민주노총과 당 지도부는 대부분 정당명부 비례대표에 출마하였다. 민주노총과 전농 등 대중조직의 지도부가 부문대표로서 비례대표에 당선되면 당과 지역 당원들은 이들 비례대표 의원들이 출마할 지역구를 미리 정해 지역 활동에 주력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이들이 중앙의 의정활동에 얽매여 있는 한편 지역구 당선의 가능성이 높지 않았기 때문에 비례대표 의원들은 선거에 임박해서야 지역에 집중하였다.
또한 입법과정에서 의원과 지역 당 조직의 공조가 부족하였다. 국회의원들이 재래시장활성화를 위해 대형할인점을 규제하는 입법을 발의하는 과정에서도 지방의원이나 지역 당 조직과의 공조가 부족해 입법효과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였다(민주노동당, 2009d). 지방의원들은 국회의원과의 일상적인 소통구조를 희망하였지만 보통은 당선된 초기에 합동으로 상견례를 하고 관심사를 교환하는 정도에 그쳤다.
광역의원 정당명부제뿐만 아니라 기초의원의 중선거구제로 인해 민주노동당이 지방의원에 당선되는 것은 상대적으로 가능성이 높았다. 이에 따라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지역 간부들의 지방의원 출마가 활발하였다. 이들 중 상당수가 당선되었으며, 민주노총은 지방의원협의회를 구성하여 지방의원들과 수련회를 통해 의정활동을 공유하고, 지역 정책을 협의하는 한편 선거시기에는 선거대책을 논의하였다.
특히 울산 북구에서 민주노동당 당원과 민주노총 조합원이 대거 출마하여 각종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울산에서 집권하여 진보정치가 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안세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고 이러한 지역집권모델을 전국에 확장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민주노총 소속의 현대자동차 노조원들이 다수 유권자인 울산 북구에서 국회의원과 구청장, 구의회 다수를 차지하여 지역에서 집권당이 된 민주노동당은 집권모델을 구현하지 못하였다. 심지어 민주노동당은 주민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중산동음식물자원화시설건립을 강행하여 주민들의 대규모 시위를 자초하였고 이는 대규모 충돌사태로 번져 부상자와 구속자까지 발생하였다(김장민, 2009: 276-277). 민주노동당 당원들과 조합원들은 이 시설 건립을 둘러싸고 내분에 휩싸였고 한편에서는 주민대책위원회를 이끌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공권력을 동원하여 민주노동당 당원이 지도부인 주민대책위원회를 탄압하였다. 울산의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지도부는 이러한 분쟁을 조정하지 못했으며 당론조차 합의할 수 없었다. 민주노동당이 집권한 지역에서 모범을 창출하기는커녕, 주민과의 의사소통, 민주주의 절차, 문제해결 능력 등 국정운영 능력이 기대수준에 미달하였으며, 주민들에 대한 강압적 태도 역시 다른 보수정당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후 민주노동당은 2004년 총선 당시 음식물자원화시설 사태를 무마하기 위해 주민들에게 유인물을 배포하여 선거법 위반으로 조승수 의원이 의원직을 상실하였으며, 이어진 재보궐선거에서 정갑득 현대자동차노조위원장이 출마했음에도 이 사건으로 인한 민심 악화로 인해 패배하였다. 중앙당 지도부는 선거패배에 대한 책임공방을 거듭하다가 정파대립으로까지 번져 김혜경 지도부까지 사퇴하였다. ‘중산동음식물자원화시설사태는 민주노총 집권 지역의 당 조직뿐만 아니라 중앙당 지도부의 국정운영능력과 문제해결 능력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5) 재정적 결합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 재정에 가장 많이 기여한 부분은 정치자금법상 정당에 대한 후원금과 의원 개인에 대한 후원금이다. 민주노총은 중앙과 지역 그리고 단위노조에서 당원이 아닌 조합원들에게 당비 대신 후원금을 내도록 독려하였다. 민주노총이 후원금 모금 목표액을 초과한 것은 10만원을 정치자금으로 후원하면 11만원을 돌려받는 세액공제가 주효하였다.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자료에 따르면 민주노동당이 존속하는 동안 연인원으로 최소한 20만 명의 조합원이 민주노동당에 후원금을 냈다. 민주노동당 20062월 대의원대회 자료집에 따르면 2005년에 민주노총이 각 연맹별로 취합하여 민주노동당에 통보한 세액공제 총액은 265천만 원이다.
정당후원회가 마지막으로 가능했던 2005년도 민주노동당 수입현황을 보면 전체 수입액 160억 원 중에서 당비가 46.1%, 후원금이 34.3%, 국고보조금이 12.6%로서 재정자립도가 80.4%로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38.4%, 1야당인 한나라당의 22.6%보다 매우 높다. 중앙당 및 시·도당후원회의 모금총액은 90억 원으로 정당별로 보면 민주노동당이 62억 원으로 가장 많고, 열린우리당 12억 원, 한나라당 11억 원, 민주당이 3억 원을 모금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5년 민주노동당 의원의 후원금 액수를 보면 평균 12401만 원을 모금하여 한나라당 보다 700만 원이 많았고, 여당인 열린우리당과 7만원 차이 밖에 나지 않았다. 기부건수로 볼 때 민주노동당 단병호, 심상정, 노회찬, 강기갑, 최순영, 현애자 의원 등이 상위 20위 안에 들었으며, 단병호, 심상정, 현애자, 노회찬, 최순영, 강기갑 의원이 기부건당 소액 상위에 들었다(중앙선거관리위원회, 2006).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후원금 다음으로 민주노동당 재정에 기여한 것은 조합원들의 당비이다. 민주노동당 내 민주노총 조합원 비율은 40%를 유지하였고, 이중 절반 정도가 보통 1만원의 당비를 납부하였다. 200410월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 자료집에 따르면 전체 당원의 당비납부율은 66%, 자동이체 등록률은 82.77%이다. 반면 민주노총 조합원인 당원의 당비납부율은 66.64%이고 자동이체 등록률은 89.35%이다. 2008년 민주노동당 대의원대회 자료집에 따르면 2005년 말 기준으로 전체 당원의 당비납부율은 58.78%, 자동이체 등록률은 88.36%이다. 반면 민주노총 조합원인 당원의 당비납부율은 66%이고 자동이체 등록률은 92.1%이다.
민주노총은 후원금과 당비 이외에도 민주노동당 창당 이전부터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정치기금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민주노총은 진보정당을 통해 2000년 총선에 참여하기로 하고 조합원 1인당 1000원의 총선기금을 모금하기로 하고 이와 별도로 2001년부터 매년 정치활동자금을 위한 특별회계를 운영하기로 하였다. 또한 민주노총은 2002년 대선에서 조합원 1인당 1000원의 정치기금 조성을 결의했지만 전체 조합원의 3.8%23천여명만 참여하였다. 민주노총은 2004년 총선을 앞둔 114일 중앙위원회에서 조합원 1인당 5,000원을 총선투쟁 기금으로 모금하고 이를 정치교육과 결합하여 지출할 것을 결정했으나 정치 기금 모집에 참여한 조합원들의 수가 적어 2억 원만 모였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재정적 관계를 보면 무엇보다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의 재정지원에 과도하게 의존하였는데, 양자의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민주노총은 재정지원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의 후원금, 국가의 국고보조금 등 당비 이외의 수입에 과도하게 의존하였는데 이는 당원과의 소통을 통해 당비 등 재정의 자립기반을 확충하고자 하는 노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갈수록 당비 증가가 둔화되는 반면 원내 진출 이후 당이 비대해지면서 이러한 재정의 외부 의존은 당의 취약성으로 나타났다. 민주노총이 주로 재정지원을 하다 보니 수입과 지출 과정에서 민주노총 조합원과 그렇지 않은 당원들 사이에 위화감이 노출되었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당 활동과 선거출마에 있어 일반 당원에 비해 재정적 곤란함이 덜하였다. 민주노총 조합원 출신인 민주노동당 후보들은 최소한 선거자금 때문에 출마를 포기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민주노총의 정치기금 조성은 항상 목표치에 미달하였지만 조성된 정치기금에 비해 출마한 민주노총 출신 후보자들이 상대적으로 적어 이들에게 기탁금 등 선거비용을 지원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이를테면 민주노총은 2004년 총선 민주노총 후보들에게 총연맹이 기탁금의 50%를 지원하고 이와 별도로 지역본부와 단위 노조에서 재정지원을 하기로 하였고 그 결과 민주노총은 15명의 예비후보에게 총 18천만 원을 지원하였으나 이중에서 실제로 후보에 등록한 조합원은 12명이었다. 2006년 지방선거의 경우에도 민주노총 출신 후보자들은 민주노총의 지원을 따로 받았기 때문에 출마에 대한 재정적 부담이 적었다. 이런 이유로 민주노동당의 출마자 중 민주노총 출신들이 많았다. 선거 후 부채의 규모도 민주노총 후보의 경우 가장 낮았다.
또한 10만원 한도 내에서 당비나 후원금을 내더라도 연봉이 2500만 원 이상이면 연말정산으로 10만원을 세액공제 형태로 반환받았기 때문에 실제로 민주노총 조합원인 당원이 부담하는 것은 2만원에 불과하였다. 반면 연봉이 2500만 원 이하인 노동자 당원은 세액공제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이에 정규직 민주노총 조합원과 저임금 근로자, 실업자 등의 당비를 차등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당내에서 제기되었으나 실제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민주노총이 세액공제를 통한 후원금 모집을 대대적으로 추진하였으나 세액공제 사업 시 모금 창구가 중앙별, 산별, 지역별로 단일화되지 못해 혼란을 주었다. 후원금 모집 후 이에 대한 지출권한은 형식적으로 당에게 있었지만 통상 각급 단위의 민주노총의 의견을 반영하곤 하였는데, 당과 노조 내외에서 구체적인 지출 내용에 대해 이견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또한 정치자금법상 제한으로 인해 노조의 후원금 모집에 대한 노조의 자율성이 없었고, 그 결과 법정절차의 준수 문제로 검찰의 대대적인 수사를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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