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국, 독일, 프랑스와 한국의 좌파정당 제도화 과정 비교

영국, 독일, 프랑스와 한국에서 좌파정당의 제도화에 영향을 미치는 객관적 요인으로서 산업혁명을 전후로 한 노동계급의 형성, 포드주의 시대의 대공장노동자의 결집, 후기산업사회의 노동의 지위 약화 등을 고려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총자본과 국가는 노동계급에 대한 부르주아민주주의의 허용, 노동계급과의 타협을 통한 복지국가 실현,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공세 등의 포섭전략을 구사하여왔다. 영국, 독일, 프랑스와 같은 발전된 자본주의 국민국가에서 노동조합과 좌파정당은 총자본과 국가의 이러한 전략에 포섭되어 매 시기마다 압박과 타협을 반복하면서 길게 보면 제도화에 점차 몰입되어 자본주의 국가권력에 편입되어왔다. 이러한 제도화 과정은 원내 진출과 다수 득표 및 권력 참여라는 의회주의로 규정될 수 있다.
비록 한국에서 민주주의 진전과 자본주의 발전이 서유럽에 비해 제한되었고 따라서 총자본과 국가가 제한된 포섭전략을 구사하였지만 민주노동당 역시 서유럽의 좌파정당과 유사한 객관적 요인을 배경으로 총자본과 국가의 전략에 포섭되면서 빠르게 의회주의에 빠져들었다. 이 논문은 먼저 이들 서유럽국가와 한국에서 좌파정당의 제도화 과정이 보편성을 띠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한국에서의 특수성이 어디에서 기인하였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1) 제도화 과정의 유사성
 
(1) 이념적 조직적 분화
 
반체제정당은 시간이 흐를수록 처음 결성 때의 혁명노선을 수정하고 점차 체제에 순응하는 경향을 보인다. 반체제정당이 체제에 통합되는 모습은 초기에 체제에 대해 정당성을 거부하는 태도와 이후 입장을 바꿔 체제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는 태도에 의해 좌우되는데, 이는 정당의 지도자나 간부가 사회화되는 과정과 밀접히 관련된다(사르토리, 1986: 197-201). 유럽의 사회주의 반체제세력 역시 좌파정당으로 제도화되면서 과거의 이념적 급진성을 완화시켰다. 좌파정당들이 반체제정당으로서 속성을 상실하자 당 내 급진세력이 이에 반발하여 분당하였다.
좌파정당은 초창기에 정강의 총론에 있어 변혁적 선언을 하지만 정강의 각론에 있어 개량적 실천을 규정하였다. 독일사민당의 1891에르푸르트 강령은 이념적 측면에서는 사회의 완전한 변혁을 선언했지만, 구체적인 실천적 내용에 있어서는 여성에 대한 투표권 부여, 8시간 노동제, 소득세 부과 등 국가를 통한 점진적인 개혁에 머물렀다. 이러한 급진적 이념과 개량적 실천의 괴리는 이후 사민당 분열의 배경이 되었다(Schorske, 1955). 1890년 이후 사민당이 의회에서 다수당으로 부상하자 점차 기존의 정치질서에 부분적이나마 통합되어 가는 현상이 나타났다. 노동조합이 점차 체제에 순응하게 되었으며, 사민당 당료들의 관료화, 지도부의 과두화 등이 심화되었고 이들은 당 노선과 전략을 개량주의로 이끌었다.
좌파정당은 이러한 이념과 실천의 모순으로 인해 1차 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전후로 하여 급진적인 공산주의와 개량적인 사회민주주의로 나눠지는데,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 국가를 타도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개선할 대상으로 설정하였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는 애국주의를 수용하여 1차 대전에서 자국의 제국주의 전쟁수행에 적극 협력하였다. 또한 이들은 러시아혁명모델을 배척하는 등 폭력혁명에 반대하고, 소련과 소련의 지도하에 있던 코민테른과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이에 반해 공산주의는 독일사민당의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전쟁협력을 반대하고 러시아식 폭력혁명을 시도하거나, 프랑스의 공산당처럼 소련 및 코민테른과의 종속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독일사민당에서 보듯이 공산주의의 폭력혁명 시도는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가담한 지배세력에 의해 진압되었다. 러시아식 폭력혁명이 유럽에서는 옳지 않다는 대중적 정서 속에서 공산주의는 유권자의 지지를 얻지 못하게 되고 2차 대전 후 반소냉전이 심화되자 이러한 양상은 더욱 뚜렷해졌다.
1920년 프랑스 통합사회당의 다수파가 공산당으로 분당한 이후 통합사회당은 개혁주의와 혁명주의를 봉합하려고 했는데 레온 블룸은 1926년 사회주의혁명인 권력의 정복과 부르주아정부로의 참여인 권력의 행사를 구분하고 통합사회당이 연립정부 내에서 제1당이 되는 조건에서 권력의 정복을 위해 필요하다면 권력의 행사도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사회당은 의회에서 노동계급 이익의 대변자라고 자처하였으며, 공화국의 방어를 최우선 순위에 두면서 중도-우파 정당들과 함께 연립정부를 구성하였다.
독일사민당과 프랑스통합사회당과 달리 영국노동당은 창당 당시부터 마르크스주의자와 같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을 배제하였기 때문에 애초부터 사회민주주의 노선에 기반하였다. 즉 혁명주의와 개량주의의 갈등이 아니라 혁명주의에 대한 분리와 배제가 이뤄진 셈이다.
각국의 좌파정당이 공산당과 사민당으로 분열되자, 노동조합 역시 분열되었다. 독일사민당에서 분리된 공산당은 별도의 노동조합을 조직해 나갔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영국노동당에 결합하지 못한 공산계는 노동당과의 연대를 둘러싸고 코민테른의 혼선을 답습하였고 노동당에 대항하는 별도의 정치적 노동조합을 묶어내고자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반면 1920년대의 프랑스 노동운동은 공산당과 CGTU, 사회당과 CGT로 크게 분열되었다. 당과 노조에서 좌파의 분열은 1930년대 인민전선 때까지 이어졌으며 양대 노총은 1936년 다시 합병하였다. 하지만 독소불가침조약 이후 CGT 내의 공산당 당원들이 반파시스트 투쟁에서 평화옹호 노선으로 전환하자, CGT 지도부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추방되었다.
최근 서구의 정당들이 중도정당으로 변화되면서 좌파정당으로서 정체성을 잃어가자 좌파정당 내부에서 혹은 좌파정당의 외부에서 좌파정당의 전통적인 가치와 노선을 유지하려는 새로운 정당의 흐름이 나타났다. 특히 좌파정당이 득표율을 최고의 목표로 설정하는 선거전문가정당이나 미디어정당에 이르면 이러한 경향이 더욱 강해져 새로운 좌파정당이 출현하게 된다. 독일사민당의 오스카 라퐁텐 당수와 슈뢰더 수상 후보와의 갈등에서 보듯이 국민 다수의 입장을 대변하려는 인기 후보와 당의 전통적인 노선은 충돌할 수 있으며, 그 결과 당 내 좌파들이 우경화에 반발하여 탈당하거나 새로운 좌파정당을 창당하기도 한다.
민주노동당의 경우 당 분열은 온건파의 권력장악과 강경파의 이탈이라는 측면보다는 일부 강경파의 이탈이 있었지만 크게 보면 온건파 내부의 노선과 조직의 갈등, 즉 정파경쟁의 측면으로 볼 수 있다. 민주노동 창당부터 해산될 때까지 강경한 사회주의 세력이 당에 결합하지 않았고, 당에 결합한 일부 사회주의 세력은 사회민주주의 노선으로 전환하거나 사회주의 입장을 견지하다가 탈당하였다.
노선측면에서 보면 초기의 소수의 사회주의 강경노선과 다수의 사회민주주의 온건노선의 대립이 있었는데, 사회민주주의 내에서 다시 반미자주화와 남북통일 문제에 방점을 두는 자주계열과 노동과 복지문제에 방점을 두는 평등계열이 있었다. 하지만 원내 진입 이후 심상정과 민주노총 출신, 노회찬 같은 구 혁신정당 계열 모두 사회민주주의노선으로 전환하면서 주요 노선 대립은 온건노선 내에서 자주계열과 평등계열의 대립으로 형성되었다.
유럽에서 공산계열에 대한 친소논쟁이 있었다면 한국의 민주노동당과 그 이후 통합진보당에선 종북논쟁이 있었다. 유럽에서 친소적인 공산당은 프랑스공산당처럼 냉전 기간 중 이념적인 공격을 받고 소련 붕괴 이후 정치적 몰락의 길을 걸었다. 혹은 독일공산당처럼 정부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다가 이후 복원되었지만 군소정당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영국의 친소 공산당은 시종일관 군소정당에 불과하였다.
반면 한국에서는 자주계열의 주축이 종북세력으로 공격받았으며, 1차로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때 고립되었다가 통합진보당 때 일시적으로 다른 세력과 통합하였으나 20125월 이후 분당 사태로 2차로 고립되었다. 통합진보당은 결국 이념공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2014년 정부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으며, 그 잔존세력이 정당으로서 복원을 시도하고 있으나 2016년까지 과거의 영향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동당 정파대립 구조의 전개과정을 보면 원내에 진출하기 직전까지는 민주노동당의 다수는 평등계열이었고 이들이 중앙당과 서울시당, 부산시당, 인천시당 등의 실권을 쥐고 있었다. 그런데 2003년 말과 2004년 초 민주노동당 원내진출 직전 비례대표 후보선출을 기점으로 국민파와 중앙파의 경쟁이라는 민주노총의 정파구조가 민주노동당에 전이되었다. 2004년 상반기 최고위원회 선거부터 2006년까지 지도부선거에서 전국연합 출신을 주축으로 한 자주계열과 다양한 소수 정파의 연합인 평등계열이 대립하였다.
2008년 분당을 기점으로 평등계열이 대거 탈당한 후 자주계열 내부의 정파구도로 전환되었다. 구 경기동부연합과 구 광주전남연합을 주축으로 하여 구 부산울산경남연합과 구 실천연대 등이 당권파를 이루었다. 구 인천연합과 전국연합 출신이 아닌 자주계열, 민주노총 국민파 중 노동운동전략연구회출신의 혁신연대등이 댱권파에 대항하여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을 당 대표로 출마시켰다. 하지만 전국연합 출신들이 강기갑 의원을 당대표로 당선시키면서 이수호 선본 등이 추진한 혁신과 재창당은 실패하였다. 이 시기 민주노총의 국민파 역시 전국연합 계열인 전국회의와 노연 출신들의 혁신연대 등으로 대립하였다. 이러한 전국연합 계열의 독주로 인해 다른 자주계열은 소외되고, 이러한 대립구도는 민주노총 중앙선거와 산별선거 및 대기업 노동조합 선거로 파급되어 민주노총이 전체적으로 정파대립구도에 휩싸였다.
정파의 폐해는 정파의 존재 자체보다는 이들이 정당과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경쟁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부정적 행태라고 볼 수 있다. 서유럽의 경우나 한국의 경우나 좌파정당의 구성원들은 권력을 추구하면서 경쟁하게 되는데, 한국에서 경쟁은 노선논쟁이나 종북논쟁을 매개로 정파대결로 나타났다. 즉 권력을 추구하는 의회주의라는 본질이 정파투쟁의 외피를 띠고 나타난 셈이었다.
민중운동과 좌파정당을 비교적 잘 알고 있고 특정 정파에 깊숙이 몸담고 있지 않았던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는 민주노동당이 분당되는 과정이나, 통합진보당이 사실상 식물상태에 빠지게 되는 과정에서 그 결정적인 이유가 패권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민주노총, 2012a). 표면적으로는 종북주의 논쟁이나 대선결과에 대한 평가의 차이가 부각되었지만 그 배후에는 조직간 권력경쟁이 있었다.
사실 민주노동당은 2008년 분당 이후 더욱 민족문제에 활동의 방점을 두었고, 북에 대한 모호한 태도를 변화시키지도 않았다. 하지만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김형탁, 한석호 등 패권과 종북 문제를 쟁점화하여 민주노동당 분당을 주도한 평등계열은 이러한 사정을 잘 알면서도 자신들이 창당을 주도한 진보신당을 탈당하여 2011년 민주노동당과 통합하였고, 통합과정에서 종북문제보다 패권문제, 즉 의회주의 성과물을 배분하는 문제에 더 골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2년 지역구후보 선출과 비례대표후보 선출의 부정선거 논란으로 촉발된 통합진보당 분당 사태에서 국민참여당 계열이 다시 종북문제를 부각시켰고 구 민주노동당의 평등계열은 사실상 여기에 다시 동조하였다.
종북주의 논쟁, 대선결과 평가는 모두 파벌 간 주도권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요소들이었다. 다수세력에 있어 패권주의적 행태와 정치연합의 취지를 무색케 하는 승자독식주의가 난무했고, 다른 한쪽은 분당을 하더라도 충분히 생존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대부분의 정파들은 정파문제가 대두된 이후 줄곧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혁신과 단결을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정파의 불가피성을 피력하면서 구태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민주노동당 정파들은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정파대립 구도를 노선대립구도로 전환하여 대중들을 장악하였다. 정파에 종속된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중간간부들은 정파들이 대중을 장악하도록 하는 통로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지도부에 정파의 입장을 관철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정파에 소속된 간부들이 내부정치에만 매몰되면서 일반 당원들과 일반 조합원들을 정치 주체로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이런 문제는 다수파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당내 정파들은 다 이러한 조직문화에 휩쓸려 있었다(이수봉, 2008).
특히 민주노동당 대의원대회나 선거에서 자주와 평등노선종북 논쟁’, ‘사회주의 논쟁등으로 왜곡되어 나타나 대중을 동원하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하였고 이는 강령논쟁으로 발전하였다.
통합진보당 분당 역시 제도화의 과실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정파 간의 무리한 경쟁이 초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이질적이었던 정파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과거 정권의 핵심세력까지 결합한 통합진보당은 처음부터 하나의 이념과 하나의 문화, 심지어 단일조직의 민주주의가 적용될 수 없었다. 따라서 통합진보당이 단일조직이 아니라 기존 정당들의 이념과 강령, 조직을 존중하면서 매우 구체적이고 명확한 공동요구들을 중심으로 선거투쟁과 대중투쟁을 포함하는 공동활동을 수행하는 이른바 공동전선 형태의 당(정성진, 2012)으로 시작하였다면 당의 붕괴를 좀 더 지연시킬 수 있었다. 통합진보당은 총선 이후 각 정파들이 창당의 한계를 무시하고 단일조직에서나 가능한 다수결과 승자독식에 근거한 권력투쟁에 몰입한 결과 창당한지 반년도 안 돼 태생적 한계가 곪아 터진 것으로 봐야 한다.
민주노동당에서 통합진보당에 이르기까지 정당의 분열은 민주노총의 내분을 가져왔으나 프랑스의 경우처럼 노조의 조직 분열로 악화되지는 않았다. 민주노총의 다수는 민주노동당 초창기 때 소수 강경세력의 반대를 누르고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방침을 확고히 하였다. 하지만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이러한 배타적 지지방침은 1차로 큰 타격을 받았고 민주노동당이 통합진보당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국민참여당과의 통합 문제로 실질적인 힘을 상실하였으며, 통합진보당 분당 이후 공식적으로 소멸하였다. 그 이후 민주노총은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를 반대하는 입장과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를 인정하되 어느 정당을 지지할 것인가를 두고 다시 대립하는 입장 등으로 나누어졌지만 조직적 내분으로 비화되지는 않았다.
 
 
(2) 창당강령의 포기
 
영국노동당과 독일사민당의 경우 창당 당시의 사회주의 강령을 최초의 집권과정에서 사회민주주의 강령으로 후퇴시켰다가 오늘날에는 사회민주주의의 핵심 정강마저 포기하였으며, 그 결과 창당강령과 현재의 강령을 비교하면 사실상 창당강령을 포기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프랑스사회당은 영국노동당과 독일사민당의 길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였다. 다만 프랑스공산당의 경우 친소적인 공산주의강령을 유지하다가 미소데탕트 시절에 일시적으로 진보적 민주주의 노선으로 완화하였다가 다시 공산주의강령으로 복귀하였다. 하지만 프랑스공산당은 소련 붕괴 이후 사회민주주의 강령 수준으로 다시 후퇴하였다.
독일사민당의 경우 1891년 에르푸르트 강령이 선언적이나마 마르크스주의적인 사회주의를 선언하였으나 1차 대전 직후 처음으로 집권한 이후 1921년 괴를리찌 강령(Görlitzer Programm)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민중정당임을 자처하면서 현실주의노선으로 수정하였다. 사민당은 1959년 고데스부르그 강령(Godesberger Programm)에 이르러 사회민주주의로의 노선수정을 분명히 하면서 노동자에 기반한 국민정당으로 전환되었다. 사민당은 이후 1989년 베를린 강령, 2007년 함부르그 강령에 이르기까지 수정주의 노선을 강화하였으며, 특히 슈뢰더 이후에는 친노동자적 복지국가라는 사회민주주의 가치도 사실상 포기하였다.
영국노동당은 애초부터 마르크스주의와 거리를 둔 온건한 사회주의에 기초하였다. 영국노동당의 급진적 선언과 개량적 실천이라는 모호한 입장은 1918년 제 1 야당의 위치에서 자유당과의 차별화를 시도하면서 근대적이고 전국적인 노동자대중정당을 지향하며 채택한 새로운 당헌에 반영되었다. 노동당이 1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연립정부에 참가하면서 전시의 경제통제정책을 추진하였는데, 그 성과로 생산수단의 사회화라는 당헌 4조를 채택하였다. 하지만 2차 대전 직후 노동당이 추진한 국유화정책은 실패하였고 그 여파로 노동당은 국유화정책을 번번이 후퇴시켰으며 1995신노동당노선을 앞세운 토니 블레어에 의해 당헌 4조가 폐기되었다.
프랑스공산당의 경우 다른 서구의 공산당과 마찬가지로 친소노선으로 인해 2차 대전 이후 냉전구도에서 유권자의 외면으로 사회민주주의를 내건 사회당에 비해 열세였다. 하지만 1970년대에 이르러 냉전체제가 이완되면서 미소가 일시적으로 화해하고 상호공존을 인용하는 미소의 긴장완화 국면, 즉 데땅트(detente) 시기에 유럽의 공산당들은 선거에서 선전하자, 이들은 기존의 공산주의 노선을 현실주의 노선으로 수정하였다. 이것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페인의 공산당이 주도하였던 유로코뮤니즘이고 특히 프랑스공산당은 유로코뮤니즘을 정강차원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로 구체화시켰다.
유로코뮤니즘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선거와 의회 및 지방자치, 헌법상 기본권과 민주적 제도 등 부르주아민주주의를 활용하여 노동자와 시민들의 힘으로 구조개혁을 통해 독점자본주의 국가를 일하는 사람들의 국가로 전환하고, 민주적인 중간층과 연대하여 선거 등을 통해 합법적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할 것을 목표로 하였다(Boggs & Plotke, 1980: 441-443).
이러한 유로코뮤니즘을 수용한 공산당들은 점차 다양한 계급의 지지를 획득하려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변화되었으며, 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경향은 독일 나치의 침략에 맞서 소련과 연합했던 민주적인 제국주의 국가를 지지하고자 했던 1935년 제7차 코민테른회의의 인민전선 노선에서부터 시작하였다(Mandel,1979). 이러한 주장은 그람시의 시민사회의 헤게모니 장악을 통한 국가기구로의 침습이라는 진지전 논리와 유사한 것으로서 다만 유로코뮤니즘은 의회주의를 더욱 강조한 것이다. 크리스 하먼 역시 사회주의로 가는 영국의 길과 같은 유로코뮤니즘의 내용은 옥중수고 등 그람시의 주장과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Harman. 1977). 간단히 말해 유로코뮤니즘은 베른슈타인의 사회민주주의로의 배반, 스탈린주의의 위장, 그람시 유산이라고 지칭할 정도로 서로 상반될 수 있는 내용들이 뒤섞여 있었다(Piccone. 1981: 722).
1968년 프랑스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진보적 민주주의(advanced democracy)를 위하여, 사회주의 프랑스를 위하여'라는 '샹피니강령(champigny manifesto)'을 채택하였고 197119차 당대회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선거를 통해 평화적으로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이행기로 규정하였다(Adereth 1984, 200). 프랑스공산당은 197622차 당 대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공식적으로 폐기하였고 197923차 당 대회에서 선거에 의해 점진적으로 달성되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재확인하였다(Adereth 1984, 247).
프랑스공산당은 차르 체제를 폭력으로 전복한 뒤에 기존의 모든 법들을 폐기해야 한다고 보았던 러시아의 볼셰비키와 달리 자신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이행기 체제에서 도입된 진보적인(progressive) 법률들을 활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이유는 유럽혁명에서는 러시아와 달리 기존의 의회를 활용한 사회주의로의 민주적 경로가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Adereth 1984, 209).
민주노동당의 노선에 있어 노동자정당 노선과 민중정당 노선의 대립은 창당 당시 사회주의 강령 논쟁, 2003년 임시당대회 당시 사회주의 노선 논쟁, 2011년 사회주의 삭제와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 논쟁 등 평등계열의 사회주의 노선과 자주계열의 진보적 민주주의노선 대립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노선갈등을 고려하여 민주노동당의 창당 이념은 노동자정당 노선과 민중정당 노선을 절충하였다. 민주노동당 강령 전문은 평등계열의 노선을 반영한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의 계승 발전과 자주계열의 노선을 반영한 민중 주체의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이 섞여 있었고 민주노동당이 지향하는 체제가 현실사회주의 구체제나,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를 답습하지 않는 새로운 유형이라는 점을 천명하였다. 강령상의 사회주의와 자주적 민주정부는 민주노동당 내 다수 의견에 따르면 논리적으로 결합될 수 없는 것이나 당의 정파연합적 성격을 고려한 것이었다(민주노동당, 2009g).
강령은 주요산업의 국공유화, 정치개혁을 통한 노동계급의 정치적 자주권의 강화, 민중생존권의 보장, 제국주의 지배질서의 부정 등을 강조하였으며, 그 밖에 대부분은 자본주의를 극복한 사회주의 사회의 상을 제시하기보다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필요한 구체적인 입법과제를 제시하고 있었다.
한편 20075월 집권전략위원회가 민주노동당 중앙위원과 대의원 전체를 상대로 한 이메일 설문조사결과에 따르면 자본주의를 극복하여 사회주의를 지향해야 한다는 입장이 각각 75%67%에 달하고 있다. 다만 자본주의를 전복하여 사회주의적 목표를 실현해야 한다는 입장은 각각 13%17%에 불과하다. 강령의 내용과 민주노동당 활동가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민주노동당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막연하나마 과거 혁명방식은 아니지만 자본주의를 극복한 넓은 의미의 사회주의라고 볼 수 있다(민주노동당, 2009e; 84-85)
민주노동당 노선의 우경화 과정을 살펴보면 평등계열은 200311월 원내 진출을 앞두고 임시대의원대회에 민주노동당이 향후 5년 동안 사회주의적 노선과 활동을 강화해야 한다는 당발전특별위원회 보고서를 제출하였는데, 이에 대해 일부 자주계열이 사회주의 노선의 편향성을 지적하면서 좀 더 대중적인 노선으로서 진보적 민주주의를 제기하였다(민주노동당. 2003)
민주노동당 내에서 자주계열이 점차 다수를 이루고 평등계열 내에서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사회민주주의로 노선전환을 하는 세력들이 늘면서 민주노동당은 노동자정당 노선을 완화시켰다. 자주계열이 주축이 된 민주노동당 내에서 사회주의 가치를 완화시켜야 한다는 다수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강령개정 작업에 나섰다. 2008년 평등계열이 대거 탈당한 직후 민주노동당은 혁신재창당준비위원회를 출범시키고 다양한 전문가 집단으로 국민평가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국민평가위원회는 보고서를 통해 민주노동당이 계급정당이라는 이미지를 탈피하여 서민대중을 대표-대변하려는 진보적인 국민정당으로서의 이념지표를 재정립하고, 다양해지는 계층·집단을 포괄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민주노동당, 2008b; 99-100).
민주노동당은 2008년 혁신재창당방안에 따라 강령검토소위원회에서 강령개정의 필요성에 대해 논의하였다. 2009년 정책당대회는 강령개정위원회를 구성하였고 2011년 정책당대회는 진보대통합을 앞두고 당 내 사회주의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을 다수결로 통과시켰다. 강령개정 해설에 따르면 이는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진보대통합의 노선을 제기하려는 의도이자, 진보대통합 협상 과정에서 평등계열의 사회주의 강령에 대응하여 민주노동당의 강령안을 미리 확정하려는 의도였다(민주노동당, 2011c).
민주노동당에서 사회주의 노선이 약화되는 과정을 보면 사회주의를 주장한 세력 중 해방연대는 2008년에 탈당하였으나 정당 결성에 이르지 못하였다. 노회찬, 심상정, 일부 민주노총 조합원 등 탈당자 다수는 사회주의적 성격을 강화한 진보신당을 창당하였으나, 이들은 2011년 진보대통합 과정에서 사회주의 강령을 고집하지 않았다. 노회찬은 원래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자처하였으며, 심상정은 2012년 대선 전에 사회주의에서 사회민주주의로 노선 전환을 하였다. 진보신당 출신들은 통합진보당에 합류한 후 다시 국민참여당 출신들과 탈당하여 정의당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노선을 사실상 포기하였다.
민주노총 역시 창립 때부터 자신의 정치세력화를 순수한 노동자정당으로 설정한 것이 아니라 의회주의에 입각하여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이라는 기치아래 다양한 계급이 함께 하는 민중정당을 설정하였는데 이 기조는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에도 일관적으로 유지되었다. 이를테면 민주노총은 2003년 대의원대회에서 향후 5년간 민주노총의 운동방향을 논의하면서 평등’, ‘자주’, ‘연대의 기치를 높이 들고 변혁의 전망을 열어 나가야 한다고 선언하였는데, 노동자중심의 진보정당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노동자, 농민, 빈민, 청년학생, 시민사회단체 등 민주세력과 함께 민중생존권, 사회개혁, 반미 반전평화, 자주통일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것을 활동 목표로 삼았다(민주노총, 2003; 75-83).
 
 
(3) 의회주의 경도와 부르주아 정당과의 연대
 
서구의 경우 나라마다 시차가 있으나 대부분 좌파정당이 합법적으로 결성되고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 나라에서 보통선거와 평등선거가 실시되었고 선거운동에서 표현의 자유가 허용되어왔다. 좌파정당이 선거에 참여하면서 지지율 확대 차원에서 노동자대중은 물론 일반 대중에게까지 당의 문호를 개방하였다.
의회정치가 활성화되고 다양한 대중매체가 의회에서 정당의 각축을 실시간으로 보도함에 따라 대중들은 자신이 이해관계가 정당으로 대변되고 사회의 계급갈등이 의회에서 정당의 경쟁으로 재현되고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고 그 결과 대중들이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정당을 지지하였다. 이처럼 대중정당이 대중매체를 통해 대중의 여론을 반영하는 대중정치가 정착되었고, 그로 인해 정당의 대중적 기반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대중정치의 역학관계는 정당의 지지율 혹은 득표율로 지표화되었으며, 그 최종 결과물은 국회의원 의석수이거나 대통령과 같은 공직선출자의 당선이었다. 정당들에게 있어 공직자의 당선은 정당지지자에 대한 보상이자, 국가권력으로의 접근 그 자체였다.
좌파정당 역시 불특정 다수인 전체 유권자의 지지를 얻고자 다른 정당과 경쟁을 하였다. 그 결과 좌파정당들의 포괄정당화 경향은 노동계급의 지지를 기반으로 국민 다수의 지지를 획득하고자 하는 국민정당화로 나타났다. 보수정당이 자본주의 정책을 추진하다 실패하면 유권자들 사이에서 그 후유증에 대한 비판여론이 높아져 좌파정당은 선거에서 승리하거나 집권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선거에서 이긴 좌파정당은 자본주의사회를 폐지할 수 있는 사회주의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보수정당의 자본주의 정책 실패를 치유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다수 유권자의 지지를 얻고자 하였다. 즉 좌파정당은 선거라는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개량화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한편 공직당선자를 배출하거나 국가권력을 장악하려는 정당 간의 경쟁은 거꾸로 당선이나 권력창출을 위한 정당 간의 협조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정당들의 경쟁과 협조의 양태는 선거제도, 정당제도, 국가권력 구성방법에 따라 나라마다 다르게 나타났지만 그 어느 것이든지 당선자를 늘리고 국가권력에 참여하려는 것이었다. 좌파정당 역시 야권연대로서 후보단일화를 통해 당선자수를 늘리려고 하였으며, 연립정부 참여를 통해 국가권력에 접근하려고 하였다.
영국은 소선거구제를 유지하였는데, 노동조합 출신의 정치인들은 이러한 다수대표제의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영국노동당이 성립하기 이전부터 자유당의 당적으로 출마하여 원내에 진출하였고, 광부노조는 영국노동당 창당 이후에도 당분간 자유당의 당적으로 출마하였다. 영국노동당은 제1차 대전 전까지 자유당의 선진적 부문과의 선거연합에 큰 비중을 두었다. 영국노동당은 자유당과의 비밀협상을 통해 특정 선거구에서 후보단일화를 하기로 하였고 그 결과 각자 우세한 지역에서 단일후보로 출마하여 보수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프랑스의 결선투표, 2차 투표에서 보듯이 선거제도에 따라 선거연합, 즉 후보단일화가 어느 정도 강제되기도 했다. 좌파정당 후보가 부르주아 정당 후보를 누르고 보수정당 후보와 다투는 경우 결선투표는 좌파정당에게 유리하지만 대부분 좌파정당 후보는 부르주아 정당 후보에 뒤졌다. 그 결과 결선투표가 없을 때보다 있을 때 좌파정당의 일부 후보가 원내에 진출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부르주아 정당의 후보가 결선투표에 나아가게 된다. 즉 결선투표로 인해 부르주아 정당이 좌파정당보다 더 많은 이익을 보게 되고 그 결과 양당의 의석차이는 더욱 확대된다. 프랑스공산당이 사회당과 선거연합을 하여 일부 의석을 차지하였지만 크게 보면 공산당의 약화와 사회당의 강화로 귀결되었고 그 결과 공산당은 선거연합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이처럼 선거연합은 좌파정당에게 초기에는 의회진출을 보장해주지만 그 이후에는 주요정당으로의 성장을 가로막는 양날의 칼이다.
1899년 프랑스의 좌파정당 출신들이 공화정의 연립정부에 결합하자, 프랑스 좌파정당들은 이에 대한 찬반으로 심각한 내분을 겪다가 부르주아정부로의 예외적 결합이라는 마지노선에 합의한 끝에 통합사회당을 출범시켰다. 독일사민당이나 영국노동당 역시 제1차 대전을 전후로 하여 부르주아 연립정부에 참여하였고, 이후 선거에서 지지기반 확대를 목표로 노동자 이외에도 농민과 소생산자 등 다수의 일하는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민중정당 노선을 제기하였다.
오늘날 영국에서 노동당과 보수당의 양당체제가 자리 잡아 소선구제임에도 불구하고 후보단일화를 위한 선거연합은 흔하지 않지만 자유민주당과 같은 제3당이 선거에서 부상하는 경우 원내 다수를 확보하기 위한 연립정부가 출현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다당제 아래의 소선거구제와 결선투표로 인해 공산당과 사회당 등 좌파정당들의 선거연합이 매 선거마다 논쟁이 되고 있다. 독일은 하원의 경우 정당명부제를 채택하여 선거에서 후보단일화를 할 필요성이 거의 없으며, 단지 원내 다수를 확보하기 위한 연립정부 출현은 빈번한 편이다.
민주노동당의 의회주의 경향은 이미 2004년 원내 진출을 앞두고 예정되었던 수순이었다. 선거가 반복됨에 따라 당의 활동에서 선거의 비중은 중요해졌으며, 선거 전후에 집중적으로 입당한 당원들은 기존의 당원에 비해 당의 기반을 득표율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각종 선거가 끝날 때마다 유권자의 성향에 부합하는 대중정당이 강조되었다.
민주노동당의 원래 선거방침은 진보의 독자성을 견지하는 선택적 야권연대였지만 2012년 총선의 통합진보당의 야권연대는 획일적인 전국적인 야권연대였으며, 그 결과 일부 지역에서는 진보진영이 동의할 수 없는 보수적인 민주당 후보를 지지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져 논란이 되었다. 또한 통합진보당이 경선 없이 민주당에게 양보를 받은 지역구의 경우 그 선정의 객관적 기준이 논란이 되었으며, 당내 소수세력은 다수세력이 야권협상을 통해 특혜를 받았다고 반발하였다.
민주노동당 내에는 야권연대에 의한 정권교체의 요구도 존재했는데, 야권단일정당이라는 빅텐트를 통해 정권교체를 하고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입장은 2012년 총선과 2012년 대선을 거치면서 보수야당으로 흡수되었다. 반면 민주노동당의 다수를 구성했던 자주계열은 전통적으로 연립정부의 성격을 지니는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여 통일과 민중의 해방을 앞당긴다는 전략을 지향하였고 이러한 전략은 민주노동당 강령에 진보적 민주주의노선으로 표현되었다. 2011년 자주계열이 다수결로 통과시킨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은 명분상으로는 자주와 민주 및 통일을 지향하는 자주계열의 정당노선이었지만 실제로는 계급정당이 아니라 민중정당임을 선언하면서 선거연합, 연립정부 등 선거몰입과 그로인한 국민정당화의 길을 이론적으로 허용하였다.
민주노동당 내 평등계열은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때까지 중도정당과의 후보단일화 및 연립정부에 반대하였고, 이들이 만든 진보신당 역시 같은 입장을 취하였다. 하지만 2010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민주당 등이 후보단일화를 하여 큰 성과를 낸 후 진보신당은 후보단일화에 적극적이었으며, 점차 연립정부 수용론도 제기되었다. 노회찬, 심상정 등 평등계열이 민주노동당 및 국민참여당과 함께 창당한 통합진보당의 경우 구 민주당 세력들이 대거 결합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연립정부 수용론에 기울어져 있었다.
심상정은 2011년 진보신당 전 대표의 자격으로 미국에서 한 강연을 통해 민주당이 포함된 연립정부를 통해 2012년 정권교체를 하자고 제안하였으며, 정의당 시절에는 2016년 총선을 앞두고 연립정부 가능성을 언급하였다. 특히 2016년 신년 기자회견에서는 정의당 대표의 자격으로서 더불어민주당에 대해 연립정부 수립을 공식적으로 제안하였다.
 
 
2) 국지적 냉전과 분단 고착으로 인한 국민국가의 미완성
 
(1) 민중정당으로서 출발과 의회주의 몰입
 
서구의 좌파정당은 1차 대전 전후의 민중정당화와 2차 대전 이후 국민정당화를 거쳐 1990년 이후 신자유주의를 본격적으로 수용하였는데, 민주노동당은 창당 10여년 만에 국민정당적 성격을 드러내었고, 신자유주의를 주도한 정당과 통합하였다. 민주노동당이 서구의 좌파정당과 달리 노동자정당이 아닌 민중정당으로 출범하였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민주노동당의 우경화는 매우 빨리 진행되었다.
독일사민당과 프랑스사회당 및 영국노동당은 창당 당시 민주노동당과 달리 사회주의 노선을 명확히 하였다. 이 정당들은 이념지향적인 중앙지도부가 노동자들을 사회주의 이념으로 포섭하고 조직화함으로써 처음부터 노동자들을 기반으로 하였으며 의회진출을 지향한 합법정당이었다.
이들 좌파정당은 노동자정당으로 출발하였지만 점차 노동자 이외에 농민이나 사무직 등 다양한 일하는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자 민중정당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사민당은 1921년 괴를리찌 대회에서 사민당은 도시와 농촌에서 노동하는 민중의 정당임을 천명하게 된다. 사민당과 같은 서구의 노동자정당이 주장하는 민중정당은 보수정당이 주장하는 국민정당과 다른 것이었으나, 노동자정당의 우경화로 인해 2차 대전 이후에는 민중정당은 갈수록 국민정당화되었다.
프랑스의 좌파정당 역시 창당 당시에는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노동자정당의 성격을 지녔다. 1905년 프랑스의 통합사회당은 혁명적인 마르크스주의뿐만 아니라 선거에 치중하는 개량주의를 주장하는 다양한 집단의 연합적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사회주의정당, 노동자정당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았다. 장 조레스와 바이양은 이러한 입장을 혁명적 개혁주의’, ‘혁명적 진화론등의 용어로 설명하였다. 조레스는 특히 노동자가 공화국에 참가하여 국가권력을 공유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통합사회당은 급진당의 사회개혁법안에 조건부 지지입장을 보였으며 부르주아 정당과의 제휴는 피하였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은 독일사민당, 영국노동당, 프랑스의 사회당과 달리 처음부터 사회주의 노선을 명확히 하지 않고 다양한 계층을 포괄한 민중정당이었는데, 이는 민주노동당 창당의 역사적 조건이 달랐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식민지와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제3세계의 경우 부르주아민주주의 보장과 국민국가 달성이 동시대적 과제로 나타날 때 민족민주혁명 혹은 민족민주전선이 사회주의정당의 발현 양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민주노동당은 창당 때부터 체제변혁을 지향하는 강도가 서구의 좌파정당 창당 당시보다 약하였고 창당 주체 역시 노동자 이외에 다양한 계층을 포괄하였다.
한국은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배한 후 자신의 힘이 아니라 연합군에 의해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났으나 다시 미소에 의해 분단되고 동족 간의 이념전쟁을 치렀으며, 전쟁 이후에도 1987년 민주화까지 군부독재 아래에 있었고 지금까지도 냉전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오늘날 한국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경제사회 영역이 발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영역은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장귀연(2002)은 이러한 한국적 특성에 주목하여 한국은 정치영역이 시민사회영역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탈구현상을 보이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탈구현상의 내면에는 분단과 이념대립으로 인한 반공이데올로기가 자리 잡고 있으며, 지배세력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용인할 수 없는 좌경화로 보고 있다. 정진상(2005)에 따르면 1987년 민주화 이후 반공 이데올로기가 약화되어 노동계급 형성에 유리한 조건이 조성되었지만, 반공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노동운동이 노동자 정치운동으로 나아가는 데에 장애로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한계로 인해 노동자들은 한편으로는 지배세력의 탄압으로 인해 또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와 연대하여 자신의 생존권을 보장받거나 외세와 지배세력에 저항하여 분단을 극복하고자 하는 다른 계층들의 요구에 의하여 자신의 정치세력화를 노동자정당보다는 좀 더 폭넓은 민중정당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였다. 결국 한국의 탈구현상으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는 임현진(2009)이 지적하듯이 노동자정당보다는 민중정당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불완전한 민주주의, 분단, 냉전의 잔존, 노동자의 좌경화에 대한 탄압, 보수정당의 기득권 등 한국적 상황은 좌파정당의 출현을 지연시켰다. 장귀연(2002) 역시 탈구현상에 의해 좌파정당이 늦게 출현하였다고 보고 있으며 김수진(2008) 등 다수의 학자들이 1987년 민주화 이후 계급정치가 실패한 근본적인 이유로 반공주의와 보수독점체제를 들고 있다.
국가보안법에 의해 합법적인 사회주의정당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해방 직후와 4.19혁명, 1987년 민주화 기간 동안 사회주의세력 중 일부는 대중적 진보정당이라는 민중정당을 시도하였으나 국가의 탄압과 기존 보수정당의 담합구조에 의해 제도권 진입이 차단되었고, 창당에 이른 경우도 노동조합의 정치세력화 금지, 소선거구제 등 각종 진입장벽에 의해 원내에 진출하지 못하였다.
서구에서는 시민들의 기본권 쟁취투쟁과 노동자의 정치세력화 투쟁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좌파정당의 창당에 강력한 원동력을 제공하였다(이수봉, 2008). 한국에서도 19876월 민주화투쟁과 7월 노동자투쟁이 결합되어 노동자정당의 출현으로 나타났다면 노동자정당은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시민들의 민주화운동은 큰 진전을 이루었지만 노동자들은 시민운동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정치참여의 자유를 쟁취하지 못하였다. 반면 2001년 창당된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의 1997년 노동법개악반대투쟁의 연장선에 있었지만 그 당시 조직결성의 자유, 선거권, 민주적 기본권이 이미 주어진 상태에서 창당했기 때문에 서유럽의 좌파정당과 달리 창당과정이 노조 이외의 반체제세력의 제도화 투쟁과 결합될 기회가 없었다.
민주노총의 투쟁으로 인해 노동조합의 정치세력화가 합법화되고 정당명부제가 일부 시행됨에 따라 민주노동당에 이르러 사회주의적 색채를 지닌 노동자정당이 가능하였지만 민주노총은 노동자정당이 아니라 다양한 민중들과 함께 민중정당을 창당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은 창당 당시부터 노동자 이외에도 농민, 빈민, 학생, 통일운동 인사 등이 결합하여 민중정당 성격을 지녔다.
민주노동당 창당강령은 서구 초창기 사회주의정당과 마찬가지로 총론과 이념에서는 사회변혁을 선언했지만 각론과 실천에서는 체제개선을 도모하였다고 불 수 있다. 서구 좌파정당이 선언적인 의미에서 사회주의와 노동자정당 정체성을 강령에 채택하였지만 민주노동당의 경우 창당강령에 노동자뿐만 아니라 다양한 피지배계층을 당의 기반으로 선언하였으며, 사회주의적 이상과 가치를 강조하였지만 사회주의 자체를 적극적으로 표방하지 않았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은 창당 당시부터 노동자정당 변혁정당이라기보다 민중정당, 체제개선 정당의 성격이 강하였다.
민중정당으로 출발한 민주노동당은 노동자정당으로 출발한 서구의 좌파정당들보다 더 빠르게 정당제도와 선거제도에 의존하면서 제도 권력에 참여하려는 의회주의 성향을 강화시켰다. 불완전한 민주주의, 분단, 대외의존성을 극복하고 국민국가를 완성하려는 당내외 열망은 이러한 열망을 원내 의석확대와 국가권력 참여를 통해 해결하고자 했던 민주노동당의 의회주의 몰입을 일정부분 정당화시켰다. 이를테면 민족주의적 경향의 자주계열들은 민주노동당이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을 정도의 주요정당으로 성장하기도 전에 야권연대와 후보단일화 및 연립정부를 통해 소선거구다수득표제의 양당제를 돌파하고 자주와 민주 및 통일의 과제를 조속히 해결하겠다고 공언하였으며, 그러한 명분 아래 노동계급의 기반을 확고히 하지 않은 채 다수득표를 위해 우경화로 나아갔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은 강령의 변혁적 성격의 완화와 선거몰입을 통해 서구의 노동자정당보다 더 빠르게 국민정당화로 나아갔다.
민주노동당은 창당 때부터 사회주의 색채를 두고 논쟁을 치렀으며 2011년 강령에서 사회주의적 성격을 삭제하고 성격이 모호한 개량적인 진보적 민주주의를 채택하는 한편, 다른 좌파정당과 진보적 시민사회단체의 반발을 무릅쓰고 신자유주의 도입 세력인 국민참여당까지 포함하는 진보대통합을 추진하면서 국민정당화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10 영국, 독일, 프랑스와 한국의 좌파정당 제도화 과정 비교
 
 
 
 
 
 
영국노동당
독일사민당
프랑스공산당
민주노동당
제도화
국가
온건한 포섭전략
제한적 포섭전략
포섭전략
제한적 포섭전략
주체
노동자>온건사회주의세력
사회주의세력>노동자
다양한 사회주의연합>노동자
노동자>민중운동세력>사회주의세력
발생기
성격
노동자정당
마르크스와 라쌀의 사회주의당
사회주의당
민중정당
강령
개혁적 사회주의
총론은 변혁적이나 각론이 개혁적
총론은 변혁적이나 각론이 개혁적
총론은 변혁적이나 각론이 개혁적
성장기
등원
약한 단일국가 약한 내각제 소선거구제에서 자유당과 연대
강한 연방국가 강한 내각제 소선거구 -> 정당명부
단일국가 약한 대통령제 소선거구
강한 단일국가 강한 대통령제 소선거구 -> 정당명부비례대표
분당
창당 때부터 강경파 배제
집권 다수파가 혁명파 제거
친소세력이 공산당으로 분화
의석경쟁과 노선갈등으로 분당
성숙기
노선
사민주의(민중정당-국민정당)
사민주의(민중정당-국민정당)
진보적 민주주의- 온건공산주의
원내 진입 이후 진보적 민주주의
집권
자유당 도태 보수당과 경쟁
다당제에서 소연정 -> 대연정
다당제에서 야권연대(후보단일화, 연립정부)
다당제에서 야권연대(후보단일화, 연립정부)
특히 한국사회가 급속히 후기산업사회와 저출산 고령화사회로 진입함으로써 민주노동당의 외적인 조건은 노동자정당보다는 국민정당의 길을 재촉하였다. 이런 조건에서 민주노동당은 서구의 좌파정당보다 빨리 노동조합과의 거리두기에 나섰고, 점차 노동자정당의 색채를 지우려고 하였다. 반면 민주노총은 의석확보를 위한 당 내 정파들의 무한경쟁, 중도보수정당과의 후보단일화, 국민참여당과의 합당, 연립정부 구상 등 민주노동당의 의회주의 몰입을 견제할 실질적인 힘이 없었다.
민주노동당은 진보대통합을 통한 야권연대방침에 따라 진보대통합을 통해 몸집을 키운 이후 2012년 총선에서 보수야당과 선택적인 야권연대를 통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고 대선에서 후보단일화를 통해 보수야당과의 연립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였다(민주노동당, 2009h: 민주노동당, 2011b). 하지만 민주노동당은 진보대통합보다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에 주력하였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견지하는 선택적 야권연대보다는 의석확대를 극대화할 수 있는 획일적인 야권연대를 추진하여 자신의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민주노동당은 서구의 좌파정당보다 빠르게 의회주의에 몰입하여 조로화의 경향을 보이고, 결국은 통합진보당을 거쳐 정부의 정당해산으로 인해 소멸하였다. 민주노동당이 조로화를 거쳐 소멸에 이른 것은 한국이 국지적인 냉전과 분단의 고착으로 인해 온전한 국민국가로 발전하지 못한 객관적 한계에 기인한 것이며, 한편으로는 이러한 객관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주체의 한계이기도 하다.
 
 
(2) 전근대적 정파의 발호
 
민주노동당 내 정파들은 분단구조와 군부독재에 저항하던 통일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 내의 정파 활동, 즉 민족해방(NL)/민족민주(ND)/민중민주(PD), 국민파/중앙파/현장파 등)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정파는 크게 보면 민족해방을 중시하는 자주계열과 노동해방을 중시하는 평등계열로 분류되는데, 이러한 정파구조는 국지적 냉전과 분단 고착으로 인한 한국자본주의의 모순, 즉 국민국가의 미완성을 배경으로 한다. 서유럽이 동서냉전과 영토분쟁을 극복하고 자본주의 국민국가를 발전시켜왔다는 점에서 한국의 냉전과 분단은 전근대적인 특징이라고 볼 수 있고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정파구조는 이러한 전근대적인 특징을 반영한다.
한국의 좌파운동 내 전근대적 정파는 정당민주주의 관점에서 자신의 과거 활동에 대한 재평가를 거치지 않고 민주노동당 안에서 과거 노선에 치중한 인적 결합으로 재현되었다. 결국 과거의 정파는 근대적인 정파의 재구성이라는 자기과제를 외면한 채 민주노동당에서 권력집단으로 부상하였다.
민주노동당 내 정파는 이론적으로 당의 구심력으로 혹은 원심력으로 작동할 수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주로 원심력으로 작동하였다. 당 활동가들은 물론 일반 당원들도 민주노동당의 정파분열에 대해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특히 일반 시민들에게 민주노동당의 정파대립이 보수 언론에 의해 부각되었다. 중앙위원들과 상근자들은 정파의 존재 자체보다는 투명하지 못한 활동을 문제 삼고 있었다(민주노동당, 2007c; 131). 일부에서는 이들 정파들이 공개적으로 경쟁할 수 있도록 브라질 노동자당처럼 정파명부비례대표제를 도입할 것을 주장하였다(민주노동당, 2005c; 17 : 민주노동당, 2007a; 135).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에 비해 더욱 정파구조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그 과정을 보면 첫째, 각 정파가 먼저 지역대학, 대규모 사업장, 지역청년회나 사회단체 등 지역별로 거점을 확보하여 지역지배구조를 구축한 후 지역 차원의 반대세력을 권력에서 소외시켰다. 특히 자주계열은 자기 계열 내에서는 지역별 분할지배체제를 용인하되, 중앙에서는 협의 창구를 운영하면서 전국적인 정파로서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정파가 과거 경기동부, 광주전남, 부산울산경남, 인천 등 전국연합 계열이다. 민주노동당에 늦게 결합한 실천연대 등 군소 정파들도 특정 거점 지역에 집중하여 지역지배체제를 구축하고 전체 자주계열의 협의 창구에 결합하였다.
둘째, 정파들은 자신들의 소속 활동가들을 민주노동당, 노동조합, 농민조직 등 각종 대중조직의 중간간부로 진출시키거나 이들 중간간부들을 포섭하였고 이러한 중간간부 장악은 정파가 각종 선거와 이슈에 있어 당원들을 동원하는 경로가 되었다. 특히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과 달리 지도부와 대의원 및 지역간부들을 동시에 선출하고 대의원과 지역간부들은 중앙지도부의 방침에 따르는 전당적인 의사결정구조를 구축하고 있어 정파의 소수 지도자 정파의 활동가 당원이라는 비공식 소통구조가 당 지도부 당 지역조직 당원이라는 공식적인 통로의 외피를 쓸 수 있었다. 민주노동당 내에서 정파의 지도자와 활동가들은 각종 선거와 의사결정기구 안에서 정치적 운명을 공유했기 때문에 민주노총의 지도부와 개별 노동조합 간부들의 관계에 비해 훨씬 정파적이었다.
셋째, 민주노동당은 투표자가 3만여 명에 불과하여 정파들이 활동가들을 통해 이들을 조직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각 시도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자주계열이 중앙에서 협의 창구를 통해 각각 자기 지역에서 적게는 3천여명, 많게는 5천여명의 당원들을 활동가들을 통해 조직해내는 방식으로 최고위원, 대의원, 지역간부를 선출하는 동시전국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평등계열과 자주계열은 모두 전국적인 선거본부를 꾸리고 당원조직화에 나섰으나 조직력은 자주계열이 우세하였다. 당원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경기동부의 실질적인 리더인 이석기 의원이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경선에서 1위로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활동가 당원을 장악하고 있는 이러한 정파네트워크 덕분이었다.
물론 민주노동당이 정파문제를 인식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민주노동당은 울산북구 재보궐선거에서 패배한 2005년과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 2007년 등 두 차례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고 민주노동당 쇄신 방안과 민주노동당 혁신재창당 방안 등을 마련하여 추진하였다. 민주노동당은 그밖에도 당발전방안, 당 혁신 방안, 조직강화방안, 당직선출방안, 두 차례의 제도개선방안 등을 결의하여 실행하였으나 고질적인 정파대립과 정파담합 및 노선갈등 그리고 이에 따른 각종 선거에서의 당원 동원과 과열 경쟁 등의 폐해를 극복하지 못하였으며, 원내외 지도부의 불협화음, 활동가들의 관료화도 차단하지 못하였다(민주노동당, 2008c).
 
 
(3) 국가의 제한적인 포섭전략과 진보당 해산
 
근대 부르주아 시민혁명은 자본주의 민족통일국가의 완성, 집회결사표현의 자유 등 부르주아민주주의 실현을 그 내용으로 한다. 서구의 경우 시민혁명 이후 노동계급이 이러한 부르주아민주주의를 자신들에게도 적용되도록 투쟁한 것이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한국처럼 식민지와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제3세계의 경우 근대 부르주아 시민혁명이 뒤늦게 나타나며 부르주아민주주의 실현도 불완전하다. 부르주아민주주의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지배계급이나 국가가 반체제세력에 대한 포섭전략을 제한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또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반체제세력의 일부가 제도권 밖에서 아직도 강력하게 잔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의 경우 좌파정당은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정치적 자유를 억압받고 있으며, 그 때문에 강경한 좌파들은 제도권 밖에서 반체제세력으로 남아 있다. 노동조합 역시 공무원과 교사는 조직결성과 표현의 자유를 제한받고 있으며, 주요산업의 핵심 업무에 종사하는 노조원들은 파업을 할 수 없으며, 모든 노동조합들은 정치파업을 할 수 없다. 정부는 남북 분단을 이유로 통일운동 인사들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하고 있다. 이러한 지배세력의 불완전한 포섭전략은 좌파정당이 원내 주요정당과 집권정당으로 성장하는데 장벽을 이루고 있는 반면, 반체제세력을 잔존시켜 좌파정당이 반체제세력과 연대할 경우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
부르주아민주주의를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국가의 포섭전략은 좌파정당의 탄생과 성장 및 소멸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정당들의 분포가 사회균열을 반영한다고 볼 때 사회균열을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는 국가혁명과 산업혁명이라는 점을 이미 살펴보았다. 시민혁명을 전후로 한 민족통일국가의 완성과 함께 부르주아민주주의의 허용수준은 좌파정당의 제도권 진입장벽과 퇴출장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냉전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분단국가인 한국의 경우 지배세력의 반체제세력에 대한 포섭전략이 제한적이라는 것은 국가보안법 논리가 그대로 적용된 통합진보당 해산에서도 입증되었다.
헌법재판소(2014)는 통합진보당의 목적인 진보적 민주주의강령이 대한민국 헌법의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에 반하고 이석기 의원 등의 내란선동 활동이 통합진보당의 활동으로 인정된다는 이유로 통합진보당을 해산시켰다. 헌법재판소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코민테른의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NLPDR, National Liberation People's Democracy Revolution)을 남한 상황에 맞게 변형시킨 북한의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NLDR, National Liberation Democracy Revolution)’의 위장노선으로 판단하였다. 헌법재판소는 이석기 의원이 주도한 내란선동을 위한 회합이 통합진보당의 경기도당위원장에 의해 주최되었고 그 자리에 중앙당을 포함한 통합진보당의 당직자들이 참석하였다고 밝혔다.
헌법재판소의 논리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강령을 채택하고 반정부적 선동을 해온 독일공산당의 해산판결을 모태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진보적 민주주의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에 따르면 위장노선이므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달리 명시적으로 사회주의를 지향하지 않으며, 폭력이 아니라 자유선거를 통한 사회변혁을 추구하며, 소수의 독재에 기반한 민주집중제가 아니라 다수결에 근거한 절차적 민주주의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진보적 민주주의 자체가 아닌 진보적 민주주의의 숨은 목적을 심판한 셈이었다. 또한 독일헌법이 정당해산 사유로서 당원의 활동을 제시하는 반면 우리 헌법은 정당의 활동을 들고 있기 때문에 이석기 의원이나 경기도당의 활동을 통합진보당 전체의 활동으로 인정하려면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
통합진보당 해산은 야권공조와 후보단일화에 적극적이었던 민주노동당에게 종북낙인을 찍어 야권공조를 파괴하여 야당의 집권을 저지하는 한편, 대선기간에 박근혜 대통령에게 독설을 퍼부었던 이정희 진보당 대표 등 반정부인사를 제도권에서 퇴출하기 위하여 뿌리 깊은 빨갱이 공포’(레드컴플렉스)를 악용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통합진보당 해산 이후 일부 세력들이 원외정당을 창당하였으나 특정 정파의 외연에 불과하여 민주노동당의 재현으로 볼 수 없다. 또한 국민참여당 출신과 진보신당 출신, 민주노동당 일부 출신 인사들이 정당해산 전에 통합진보당을 탈당하여 정의당을 만들었으나 창당의 배경이나 당의 노선, 그리고 인적 구성으로 볼 때 민주노동당의 맥을 잇는다고 볼 수 없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