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국은 언제부터 아메리카에 진출하였나?

스페인은 주로 아메리카에서, 포르투갈은 주로 아시아에서 식민지를 개척하고 있었다. 그런데 포르투갈이 브라질에 진출함으로써 양국은 충돌하였다. 이에 1493년 스페인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교황은 서경 38도를 기준으로 동쪽은 포르투갈이, 서쪽은 스페인이 지배한다고 발표하였다. 이 기준에 따르면 포르투갈은 브라질을 스페인에 양보해야 햐기 때문에 포르투갈이 교황의 선언에 반발하였다.

이에 교황은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Tratado de Tordesillas)을 통해 양국의 식민지 경계선을 다시 조정하였다. 양국이 이 협상에 동의함에 따라 대서양의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카보베르데 섬 서쪽 서경 4337분 을 기준으로 동쪽은 포르투갈이, 서쪽은 스페인이 차지하기로 하였다. 이 조약의 결과 포르투갈은 브라질을 계속해서 지배할 수 있었지만 그 대신 필리핀을 스페인에게 양보하였다. 이 조약 당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 독점에 도전할 수 있는 국가는 영국과 프랑스였지만 두 나라는 종교개혁 이전이므로 교황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었다.
그런데 1534년 영국에서 교황을 부정하는 국교회가 성립하고 프랑스에서도 종교개혁의 결과 교황의 권위가 추락하자 이들 조약들은 점차 효력을 잃기 시작하였다. 특히 신교도 국가인 네덜란드가 종교개혁 이후 1579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네덜란드는 식민지 개척에 나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 독점권을 위협하였다.
스페인의 마젤란 함대가 인도양을 거쳐 세계일주에 성공한 후 1522년 유럽으로 돌아옴으로써 지구가 동글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기준선이 명확한 경계가 될 수 없다는 의문이 생기게 되었다. 특히 스페인이 마젤란 이후 인도네시아의 말루쿠 해에 진출하자, 먼저 아시아에 진출하였던 포르투갈과 말루쿠 해에서 충돌하였다.
이에 양국은 1529년 사라고사조약(Treaty of Saragossa)을 통해 아시아에서 식민지 경계를 정하였다. 사라고사 조약은 말루쿠 제도의 동쪽 297.5 리그를 통과하는 자오선을 두 번째 경계로 했다. 이 조약을 통해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비롯한 아시아의 식민지에 대한 기존의 권리를 보장받는 대신 스페인에게 배상금을 지불하였다. 반면 스페인은 호주에 대한 우선권을 보장받았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경쟁적으로 아메리카 신대륙을 개척하였으나 에스파냐 왕 펠리페 2(Felipe II, 1527~1598)는 포르투갈 왕위를 계승하여 전체 신대륙을 지배하였다. 종교개혁 이후 신교의 네덜란드와 국교인 영국은 카톨릭인 두 나라의 이러한 특권을 무시하고 신대륙에 진출하였다.
잉글랜드-스페인 전쟁 중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 해협에서 잉글랜드 함대에게 패배한 이후 영국은 스페인이 지배하였던 아메리카 대륙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였다. 이미 영국에게 굴복한 스페인은 30년 전쟁으로 치명타를 입었고, 그 이후 영국이 명실상부한 최강자로 부상하였다.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끝난30년 전쟁은 신교와 구교 간의 종교전쟁으로 시작하여 영토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전쟁의 결과 구교도인 스페인은 신교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여 네덜란드와 스위스 등이 독립하였고 포르투갈 역시 다시 독립을 쟁취하였다. 영국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식민지에서 경쟁하였으나 제3차 영국 - 네덜란드 전쟁(16721674) 이후 영국의 해상권이 네덜란드의 해상권을 압도하기 시작하였다.
스페인이 아메리카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을 상실하자 같은 카톨릭국가이자 유럽 열강으로 부상한 프랑스 역시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하였다. 영국은 이후 9년 전쟁(1702-1713)을 비롯하여 프랑스와 식민지를 놓고 수차례 전쟁을 하는데 7년 전쟁(1754 - 1763)에 이르러 식민지에서 프랑스에 대한 우위를 확립하였다. 이 시기 아메리카 신대륙에서도 프랜치인디언 전쟁이 발발하였다. 1760년 영국은 프랑스의 캐나다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스페인은 이 전쟁에 뒤늦게 개입하여 영국을 공격하나 패배하였다. 이 전쟁의 결과 영국, 프랑스, 에스파냐는 1763년 파리조약을 체결하는데, 이 조약에 따라 프랑스는 미시시피강() 이동(以東)의 루이지애나를 영국에게 넘겨주고, 서부 루이지애나를 스페인에게 양도하였다. 또한 영국은 쿠바와 필리핀을 스페인에게 돌려주는 대신 에스파냐로부터 플로리다를 얻었다. 이로써 영국은 북미 대륙에서 스페인과 프랑스를 굴복시키고 맹주가 되었으며, 향후 미국을 형성하였던 13개 식민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7년 전쟁에서 영국의 지원으로 북미의 영국 식민지들은 단결하여 독립적인 군대를 보유하게 되고 조지 워싱턴 등 독립전쟁의 지도자들을 배출하게 된다. 이뿐 아니라 영국의 식민지들은 공동으로 전쟁을 수행함으로써 엥글로 식민지로서 하나의 정체성과 회의구조를 갖데 된다. 이는 영토, 국민, 주권이라는 미국의 원형이 이 전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영국은 이 전쟁에 대규모 정규부대를 출전시켜 전쟁비용을 부담하였고, 이러한 전쟁비용을 이후 엥글로 식민지에게 세금으로 걷고자 하였기 때문에 미국 독립의 명분을 주게 되었다. 즉 영국이 북미에서 프랑스를 굴복시켰지만 이 전쟁은 자신의 식민지를 잃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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