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과 제국주의의 관계 변화(봉쇄정책의 형성)

 1차 대전 중 서로 전쟁 중이던 협상국과 동맹국 모두 군대를 파견하여 러시아 적군과 싸웠다. 1917년 윌슨 대통령은 러시아 제국과의 동맹을 포기하고 러시아공화국의 케렌스키의 임시 정부를 지원하였다, 

그런데 영국과 프랑스가 윌슨 대통령에게 러시아공화국을 전복시키기 위한 파병을 요청하자, 윌슨 대통령은 1918년 6월 전쟁장관의 반대를 무릅쓰고 5천여 명으로 구성된 북러시아원정대(American North Russia Expeditionary Force)를 러시아 북부 아르칸젤스크(Arkhangelsk)에 보냈다. 미국의 개입 명분은 1차 대전 당시 러시아 제국에게 제공한 전쟁물자의 회수와 러시아공화국 군대에 포위된 체코군의 구출이었다. 윌슨 대통령은 “사회주의혁명은 시간이 지나면 쇠약해져 민주주의가 회복될 것”이라고 봤다, 윌슨은 러시아 적군과의 전쟁은 러시아공화국 내부를 더 단결시킬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적군과의 전투를 회피하였다. 

윌슨 대통령은 북러시아원정대와 별도로 미군 8천여 명으로 구성된 시베리아원정대(American Expeditionary Force Siberia)를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시켰다. 윌슨은 겉으로는 “적군에게 점령당한 지역의 민족자결과 독립을 위해 개입한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시베리아의 자원과 철도를 일본이 독차지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두 지역의 미군은 적군과 직접적인 전투를 하지 않은 채 연합군과 함께 1920년 철수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1922년까지 시베리아 일부와 사할린 북부를 지배하였으며 1925년 사할린 북부를 소련에게 돌려주었다. 

이와 같은 미국의 러시아혁명 개입으로 미국과 소련은 당분간 냉랭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후버 대통령은 국내의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대기근에 대한 인도적 목적으로 1921년 소련에게 대규모 식량 지원을 하였다. 1차 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소련에게 소련에서 국유화된 미국 자산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였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1933년 미국의 자본가들과 언론인들이 소련 진출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소련과의 관계회복을 주장하였다. 이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소련과 협상하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교역 확대와 과거 러시아 제국의 채무 변제, 미국 자산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였다. 소련은 미국과 수교하였지만 미국이 원하는 교역이나 보상에 동의하지 않았다. 윌리암 불리트(William Bullitt)가 1933년부터 1936년까지 주소련 미국대사로 파견되었다. 불리트는 소련의 반자본주의정책을 목격하고 반소인사가 되었다. 이후 미소관계는 다시 냉랭해졌다. 

하지만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소련은 미국의 주요 우방이 되었다. 소련은 미국의 무기지원 프로그램(Lend-Lease program)에 따라 비행기, 함정 등의 지원을 받았다. 소련은 2차 대전에서 최대 2,700만 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독일을 항복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독일의 주력군인 소련 주둔군 총사령관 빌헬름 카이텔 원수가 항복한 이후, 독일은 동유럽에서 베를린까지 소련군에 의해 밀려났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동유럽에서 독일에게 치명타를 안기고 있는 소련에게 경제적 지원은 물론 전쟁 물자까지 지원하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소련과 협력해서 전쟁을 빨리 끝내고 자신의 구상인 유엔을 성시시키고자 하였다.

2차 대전의 결과 연합군이 승리하였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종래의 식민지를 상실하였다. 반면 소련은 동유럽과 아시아에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중국을 포함하여 사회주의 국가가 급속하게 팽창하자, 루스벨트 사후의 미국은 사회주의에 대한 공포심에 사로 잡혔다. 

2차 대전 직후 소련에 외교관으로 파견 나간 조지 프로스트 케넌(George Frost Kennan)은 본국에 미국의 대소련정책에 관한 비밀보고서를 보냈다. 그는 소련이 미국의 적국으로 부상한 점을 지적하고 “전쟁보다는 봉쇄를 통해 소련이 붕괴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케넌은 1947년 7월 미국 외교협회 기관지인 ≪포린어페어≫ 기고문을 통해 “공산주의는 틈만 있으면 새어 나오는 물”이라면서 이에 대한 ‘봉쇄전략’을 강조하였다. 영국의 처칠 역시 “소련이 동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철의 장막을 쳤다”면서 소련에 대한 공세적 정책을 주장하였다(케넌, 2013: 247 - 280). 

이러한 봉쇄정책은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수용되었다. 1948년 미국은 국가안전보장회의 결의문(NSC 48/48-2)을 계기로 미소협력을 통해 현상을 유지하는 정책에서 봉쇄정책으로 전환하였다. 그 내용은 유럽을 재건시켜 소련과 맞서도록 하는 한편 소련을 국제질서에 편입시켜 외교적 수단으로서 안보 위협을 완화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그 내용은 장기적으로 소련을 해체시키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조치를 강화하는 것이었다(Lor, 2001). 마침 중국 본토가 공산화된 직후 1950년 매카시 상원의원이 공산주의자 색출운동을 선동하면서 미국 내에서 반공여론이 불붙었다. 이러한 국내 정세로 인해 소련과 제3세계에 대한 봉쇄정책은 더욱 강경해졌다.

그런데 케넌(2013)이 주장한 소련에 대한 봉쇄는 이데올로기의 대립보다는 현실주의에 토대한 정치적 봉쇄를 기본으로 하였다. 하지만 트루먼독트린은 미국식 도덕주의와 이상주의에 입각하여 군사적 봉쇄를 기본으로 하였다. 케넌은 “소련이 서유럽을 정복할 의사가 없다”고 보고 군사적 대결을 격화시키는 나토와 같은 군사동맹에 반대하였다. 또한 케넌은 중요한 지역에서만의 제한적인 봉쇄를 의도하였으나 트루먼 독트린은 봉쇄의 범위를 전 세계로 확대하였다. 봉쇄정책을 입안한 케넌조차 트루먼의 군사적 봉쇄를 피하지 못하였다.

윌리엄스(1995)는 이미 1970년대 초에 미국의 이런 군사대결 정책을 제국주의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소련과 공산주의의 위협을 과장하면서 군비증강과 군사개입을 강조하는 미국의 대외정책을 수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소련의 핵무기는 단지 방어용에 불과하며 소련 역시 공존의 의사가 있으므로 군축협상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는 베트남전쟁의 실패를 교훈 삼아 미국이 사회주의 국가와의 공존의 길을 선택할 것을 주장하였다. 특히 그는 “잉여생산물을 수출하고 원자재를 수입하기 위해 제3세계를 희생양으로 삼는 무역정책을 중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외교정책의 혁명을 통해 미국이 민주주의, 시민들의 삶과 권리를 증진시키기 위한 노력에 집중할 수 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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