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차 대전 사이의 제국주의 경쟁(국제연맹의 실패와 국제연합의 출범)

미국은 먼로주의 정책을 통해 중남미를 독점할 수 있었다. 또한 미국은 문호개방정책을 통해 태평양과 아시아 지역에서 유럽 열강들과 동등한 지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미국은 1차 대전에 즈음하여 영국을 포함하여 어떤 유럽의 강대국 보다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따라서 미국은 전 세계에 걸쳐 개입정책과 고립정책을 구사할 수 있는 외교적 자유를 획득하였다. 

또한 이 시기 미국의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미국은 자신의 생산물을 팔 시장과 원자재를 공급받을 지역을 찾아야 할 입장이었다. 하지만 인도, 중동, 극동,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는 이미 유럽의 식민지로 전락되어 미국이 진출하기 어려웠다. 결국 미국이 유럽 열강의 식민지에 진출하려면 유럽 열강의 식민지 지배를 균열시켜야만 하였다.  

1차 대전에 참전한 윌슨 대통령은 이러한 미국의 고민을 해결하고자 문호개방주의를 민족자결주의로 더 구체화시켰다. 민족자결주의는 중남미 대륙에 대한 유럽의 개입을 차단한 먼로주의나 중국의 식민화에 반대하고 영토 보존과 자유무역을 주장한 문호개방정책과 일맥상통한다. 이는 해당 지역에서 유럽의 지배권을 약화시키고 미국의 영향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은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유럽 열강들이 새로운 식민지를 획득하는 것에 반대하였으며, 기존의 식민지도 식민지의 요구에 따라 독립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민족자결주의에 따르면 신생국이 바로 공화국을 세울 문명적 능력이 없다면 열강의 후견 기간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미국은 이러한 신탁통치 기간에 신생국에게 미국식 공화주의와 자유무역 제도를 이식시키고자 하였다.

1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윌슨 대통령은 ‘평화에 관한 14개항’을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민족자결, 민주주의, 중립국의 권리, 항해의 자유, 자유무역 등이었다.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에 토대하여 세계의 패권질서를 재편하고자 국제연맹의 창설을 주장하였다. 윌슨 대통령의 제안을 수용한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정작 미국의 상원은 임기 말의 병약한 윌슨 대통령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이 조약의 가입을 거부하였다. 

미국은 1차 대전에 패배한 독일제국에게 민족자결과 내정불간섭을 내용으로 하는 14개조를 항복조건으로 내세웠다. 독일제국의 황제가 전쟁 패배의 책임을 지고 독일 사민당에게 정권을 내 준 후 사민당 정부는 이러한 항복조건을 수용하였다. 하지만 항복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이 14개조를 독일에 적용하는 것을 거부하고 가혹한 배상을 요구하여 독일이 분개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1차 대전 직후 민족자결주의라는 명분에 의해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이집트 등 대부분의 식민지를 상실하고 현재의 터키로 축소되었다. 당시 중동은 페르시아, 즉 이란을 제외하면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는 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에 오스만 제국을 해제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은 1차 세계대전 직후의 전후 문제를 다룬 1920년 세브르 조약에 의해 실현되었다. 먼저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오스만 제국에 대한 모든 이권을 박탈당하였다.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는 비밀리에 ‘삼자 조약’을 체결하여 영국에게 오스만 제국에 대한 독일의 이권을 넘겼다. 

상원에 의해 거부된 윌슨의 구상은 2차 대전 직후 루스벨트의 신생독립국에 대한 신탁과 유엔구상에 의해 실현되었다. 1차 대전 직후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사실상 독일과 오스만 제국과 같은 패전국에 국한되어 적용되었다면, 2차 대전 직후의 루스벨트의 신탁은 일본과 독일의 식민지에는 물론, 미국과 영국 및 프랑스 등 연합국이 점령한 식민지에서도 적용되었다. 루스벨트는 2차 대전이 끝나갈 무렵 전후 세계체제의 구상에 있어 식민지 시장에 대한 미국의 접근을 보장받고자 하였다. 이에 미국은 식민지의 독립을 영국과 프랑스에 요구하였다. 

2차 대전의 승전국인 영국 역시 민족자결주의라는 명분으로 인도를 상실하였다. 인도인들은 20세기 초부터 대거 미국으로 건너가 공장노동자와 철도노동자로 일하였다. 1차 대전 이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인도계 미국인들을 자극하여 인도의 독립을 주장하는 인도계 미국인들의 단체가 생겼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인도계 미국인들이 ‘가다르 당(Ghadar Party)’을 조직하였다. 인도의 독립에 동조하는 미국인들이 ‘인도의 해방을 위한 친구들(Friends for the Freedom of India)’을 결성하였다. 2차 대전 중에 버마와 가까운 인도 국경에 수천 명의 미군들이 주둔하면서 미국은 인도의 독립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루스벨트는 처칠에게 인도를 독립시킬 것을 여러 차례 요구하였다. 간디는 루스벨트에게 인도의 독립을 위해 미국이 개입해달라고 청원하였다. 영국이 ‘인도해방운동(Quit India movement)’ 관련자 수천 명을 체포하자 루스벨트는 다시 처칠에게 압력을 행사하였다. 루스벨트는 인도의 독립을 지원하던 장제스의 주장에 동조하여 1942년 3월 10일 처칠에게 “우선 인도에 임시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허용하고 향후 1년 안에 인도를 독립시키자.”고 제안하였지만 영국은 거부하였다. 

인도가 하나의 나라로 형성되면서 독립을 요구하자, 영국은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을 이용하여 분리 지배 정책을 강화하였다. 그 결과 파키스탄이 1947년 인도에서 분리되어 독립하였다. 하지만 벵골어를 사용하는 동파키스탄은 서파키스탄 중앙정부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인도가 동파키스탄을 지원하면서 1947년과 1965년에 이어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생하였다. 인도의 승리 후 1971년에 방글라데시의 독립이 확정되었다. 한편 70%가 불교계 주민인 실론은 인도와 함께 영국의 식민지였으나 1948년 스리랑카로 독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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