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쇼제국주의와 부르주아제국주의의 대결

1차 대전 직전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는 영국의 해군에 도전하고자 거대한 전함을 지속적으로 건조하고 있었다. 영국과 독일이 거함 건조 경쟁을 하는 가운데, 영국의 동맹인 일본은 프랑스와 미국의 양해아래 전함구축에 주력하였다. 미국 역시 독일뿐만 아니라 대서양과 태평양에서 영일동맹에 대응하고자 전함 건조에 나섰다. 그리하여 1차 대전에 즈음하여 영국, 독일, 미국, 일본은 모두 엄청난 해군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1차 대전이 끝난 직후 독일은 전쟁에서 패배하고 러시아는 혁명으로 인해 혼란한 상태였다. 따라서 미국의 경쟁자는 영국과 일본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 영국, 일본이 다시 전함구축 경쟁에 돌입하였다. 이들 나라의 전함 구축 규모는 단순한 1위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2위와 3위가 동맹할 것을 고려하여 상대방 두 나라의 해군력을 합한 규모 이상을 목표로 하였다. 

미국의 주력함 건조 계획은 1916년 8척이었다. 1918년에는 해군이 28척으로 계획하였으나 최종적으로 16척으로 결정되었다. 미국의 목표는 대서양에서 영국과, 태평양에서 일본과 동시에 전쟁을 하더라도 승리할 수 있는 전함의 규모를 가지는 것이었다. 영국 역시 상대방들을 압도할 수 있도록 4척의 전함과 4척의 순양함을 추가로 건조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 역시 1920년까지 전함 8척과 순양함 8척을 보유할 건조계획을 세웠다. 일본은 “세계 대양을 재패해야 한다”는 아키야마 사네유키와 사토 데츠타로의 주장에 따라 노후화된 전함을 포함하여 각각 8척의 전함과 순양함을 추가적인 예비전력으로 확보하고자 하였다. 일본은 이를 위해 재정의 30%를 전함 구축비용으로 책정하였다. 

특히 태평양에서 경쟁하고 있는 미국과 일본은 서로를 잠재적인 적대국가로 상정하고 군비경쟁을 가속화하였다. 당시 군비전문가들은 일본이 미국의 군사력에 접근하는 1921년 이후에 양국이 태평양에서 전쟁을 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영국은 미국과 일본의 군비 증강을 중단시켜 자신의 군사력 우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미국 역시 일본의 추격을 경계하였다. 이상주의자였던 미국의 윌슨대통령은 국제기구와 국제조약을 통한 국제평화를 주장하며 영국과 일본에 대해 군축을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1922년 워싱턴 조약에 의해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의 주력함 톤수는 5: 5: 3: 1.75: 1.75의 비율로 제한되었다. 

워싱턴 조약은 세계 패권을 놓고 경쟁하던 영국과 미국이 힘을 합쳐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일본의 군비증강을 견제한 것이었다. 워싱턴 조약에 불만을 품었던 일본은 계속해서 군비증강을 하였다. 결국 일본은 1934년 워싱턴 조약을 파기하고 본격적으로 미국과 영국에 대항하였다. 독일과 일본은 군비를 증강하면서 영불과 미국을 각각 유럽과 태평양에서 견제하기 위해 전략적인 협력관계에 돌입하였다. 

일본은 이미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정권 만주국을 세움으로써 최혜국 동등대우라는 문호개방정책을 위반하여 미국과 태평양전쟁의 불씨를 만들었다. 나아가 독일과 일본의 전쟁분담 계획에 따라 1939년 일본은 만주를 점령하였고, 독일은 체코를 병합하고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양국은 1940년 공식적인 동맹을 맺고 유럽과 태평양에서 각각 전쟁에 돌입하였다.

미국이 영국과 전쟁을 하지 않고 패권을 승계한 이유는 독일과 일본이 양차 대전을 일으키면서 미국과 영국이 동맹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공동의 적과 싸우면서 영국은 자연스럽게 미국에 굴복하였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 난 직후 영국과 프랑스에 전쟁 물자를 지원하는 등 이미 경제적으로는 전쟁에 참여한 상태였다. 그런데 독일에 밀리던 연합군이 파병을 요청하자 윌슨 대통령은 내심 참전을 원하였지만 도덕적 명분을 필요로 하였다. 독일은 이미 연합군에 전쟁 물자를 수출하는 미국의 상선에 대해 “잠수함 U보트를 통해 무제한 공격을 하겠다”고 경고한 상태였다. 1915년 영국 여객선 루시타니아호가 독일 잠수함 U보트에 의해 격침되어 124명의 미국인 승객이 죽자, 윌슨 대통령은 참전할 것을 대비하여 군비를 증강하였다. 하지만 노동조합 등 민주당의 지지세력들이 전쟁에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윌슨 대통령은 1916년 대선에서 사실상 전쟁 불참을 약속하는 평화강령을 선언하였다.

1917년 독일은 멕시코의 카란사 대통령에게 “멕시코가 독일 편에 서면 전쟁에서 이긴 후 1848년 멕시코 전쟁에서 미국에 빼앗긴 영토를 다시 멕시코에 돌려주겠다”는 ‘짐머만 비밀전보‘를 보냈다. 그런데 미국이 암호를 해독하여 그 내용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 해 3월 3척의 미국 선박이 독일 해군에 의해 격침되었다. 같은 해 4월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가 연합국에서 탈퇴하였다. 독일이 승리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확산되자 여론은 전쟁 참여로 기울어졌다. 윌슨은 1917년 4월에 상하 양원 합동 회의에서 독일에 전쟁을 선포하였고 그 해부터 50만 명의 미군이 유럽에 파견되었다.

1차 대전이 끝난 후 1923년 체결된 영국-미국 채무협정으로 확정된 영국의 전쟁 부채는 46억 달러, 1926년 4월 26일 체결된 미국-프랑스 채무협정에 의해 확정된 전쟁 채무는 40억 달러였다. 영국은 독일로부터 전쟁배상금을 받아 그 돈으로 미국에게서 빌린 전쟁차관을 갚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독일의 경제가 붕괴되면서 영국은 미국에게 전쟁차관을 제때에 갚을 수 없었다. 영국은 이러한 전쟁차관을 미국이 감면시켜 주길 원하였으므로 미국의 외교정책에 협력하였다.

히틀러는 1928년 『신질서(Neuordnung)』라는 저술을 통해 독일이 세계를 지배하는 미래의 세계질서를 제시하였다(Hitler, 1941). 히틀러는 일본이 장래 게르만의 세계지배를 위협할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히틀러는 먼저 일본과 협력하여 미국까지 굴복시킨 후 일본과 최후의 대결전을 통해 전 세계를 지배하는 전략을 구상하였다. 

신질서에 따르면 먼저 독일이 게르만계 국가들을 통합하여 게르만제국을 건설한 후 유럽과 아프리카를 점령한다. 히틀러의 신질서의 일부인 ‘동방대계획(The Generalplan Ost)에 따르면 독일은 중앙유럽과 동유럽을 정복하여 폴란드인과 러시아인을 노예로 삼는다. 독일은 나머지 서부유럽과 남부 유럽에 독일인을 이주시켜 식민통지를 한다(Norman, 1974).

히틀러는 게르만족의 세계지배를 위하여 일본과 협력하여 소련, 중국, 서방국가들을 굴복시키고자 하였다. 히틀러는 소련에 대해 우랄산맥을 기준으로 서쪽은 독일이 동쪽은 일본이 지배하는 것을 구상하였다. 독일과 일본은 1942년 비밀회담을 통해 중국의 영토를 양자강을 기준으로 양국이 분할하기로 하였다. 히틀러는 중동과 인도 역시 일본과 분할하여 점령하고자 하였다. 다만 히틀러는 아프리카 전부를 독일의 식민지로 삼는 대신 일본과의 협상을 통해 태평양과 호주, 뉴질랜드 등 동아시아는 일본의 지배로 남겨주기로 하였으며, 그에 따라 일본은 아시아를 지배하는 대동아경영계획(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을 수립하였다.

히틀러는 유럽과 러시아 및 중국을 먼저 점령하는 유라시아 우선 정책을 구사하였다. 1차 대전 이후 독일은 패전국이라서 해군력을 증강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히틀러는 2차 대전에서 주로 지상전에 의존하였다. 독일이 대서양에서의 전면전을 피하고 유라시아에서 지상전에 주력함으로써 미국과 독일의 전면전은 그만큼 늦추어졌다. 히틀러는 해양세력인 일본과 동맹을 맺어 일본이 태평양에서 미국과 대립하도록 하였다. 또한 히틀러는 남미를 직접 정복하지 않고 당분간 독일의 경제적 식민지로 남겨두되 장기적으로 남미의 나치세력을 키워 나치 정권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히틀러는 유럽을 전부 정복할 때까지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고자 하였다. 히틀러는 먼저 영국을 굴복시킨 후 영국의 해군과 일본의 해군을 이용하여 미국과 해상 전쟁을 벌이고자 하였다. 히틀러는 영국이 독일에 패배하면 미국이 캐나다를 병합할 것이고 이에 반발한 영국이 자신에게 협조할 것이라고 믿었다. 히틀러는 유럽 정복 이후 일본과 함께 미국에 대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1941년 비밀회담을 하였다.  

히틀러의 신질서는 실제로 독일의 전쟁계획에 반영되었다. 히틀러는 유럽을 정복 중이던 1941년 1월 31일 연설에서 “올해는 유럽의 신질서가 도래할 것이며, 이는 새로운 세계를 여는 서막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2차 대전 당시 미국은 히틀러의 신질서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으며 특히 히틀러가 애초부터 미국과 전쟁할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기 9개월 전인 1941년 3월 15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히틀러의 신질서는 유럽정복뿐만 아니라 미국을 포함한 모든 선거체제를 전복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또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해 10월 27일 “독일은 대서양 건너편을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하지만 그들의 잠수함과 레이더를 보면 그렇지 않다”고 강조하고 “미국이 획득한 히틀러의 전쟁 계획 지도에 따르면 히틀러는 파나마를 포함한 중미를 점령하고 재분할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독일과 일본이 전쟁 준비에 전념하자 미국은 1939년 독일과 일본 등 여러 나라와 동시에 전쟁을 하는 무지개 전쟁계획을 수립하였다. 무지개 전쟁계획은 미국이 영국이나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 경우와, 맺지 않는 경우에 독일, 일본과 동시에 전쟁을 하는 계획이었다(Steven, 2002).

1차 대전 종전 이후 국제연맹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분할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게르만민족의 자결과 게르만인의 '생활공간' 확보를 명분으로 게르만계 국가를 병합하여 게르만 대제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이에 1935년 프랑스와 소련은 히틀러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체코를 보호한다는 조약을 체결했다. 

히틀러는 1938년 3월 게르만 국가인 오스트리아를 합병했으며 이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독일인 거주자 지역인 주데텐란트 할양을 요구했다. 영국과 프랑스 및 이탈리아는 유럽전쟁을 피한다는 명분으로 1938년 뮌헨 협정을 통해 독일이 주데텐란트를 합병하도록 승인했다. 체코는 국토의 30%를 잃고, 500만 명의 인구를 잃었다. 뮌헨 협정 직후 체임벌린 영국수상은 히틀러와의 협정으로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 지켜냈다고 선언했다.

1939년 8월 독일과 소련은 불가침조약을 맺으면서 두 나라 사이에 완충지대를 만들기 위하여 폴란드와 발트3국을 각각 점령하기로 하였다. 독일은 그 다음달 9월에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하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7년 「격리연설」에서 “미국이 국제정치의 무법성을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며 윌슨주의가 추구하는 평화추구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임을 밝혔다. 1938년 미국은 중국에 무기판매를 결정했고, 일본에 대한 금수조치를 권고하였다. 

영국과 프랑스 등 연합군은 미국에게 참전을 요구하였고, 프랑스가 1940년 6월 독일에 항복하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를 설득할 수 있는 전쟁 참여 명분을 찾았다. 미국은 태평양 전쟁 중에 일본에 대해 원유 등 금수조치를 함으로써 일본의 공격을 유발하였다. 미국은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과 일본의 동맹인 독일에 대해 동시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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