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가 만든 정신분열의 홍콩 르노와르를 아십니까?

중국체제에 서구 체제 알 박기
 
홍콩민주화 시위의 주요 원인은 서구화된 홍콩인과 중국의 갈등이다. 서구화된 홍콩인 입장에선 중국체제로부터 되도록 멀어지고 싶은 것이다. 제국주의에 편승하여 중국의 분열을 자초하려는 홍콩인도 문제이지만 인기 없는 중국 사회주의 모델도 문제이다. 정치는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경제는 자본주의를 허용하는 중국 사회주의 모델의 한계는 사실 사회주의 자체의 모델이다. 사회주의는 이념상 자본주의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그 한계를 극복하여 더 좋은 사회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민중들은 사회주의 사회를 동경해야 하고, 홍콩인들은 중국 사회를 동경해야 한다. 하지만 홍콩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의 시민들은 스탈린과 모택동의 혹독한 정치를 기억하고 있으며,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두려워하고 있다. 현실의 사회주의 정치 체제가 정치적 자유, 민주주의, 인권이라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장점을 더 고양시키지 못한 것이 사회주의 자체의 문제인지, 자본주의와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과도적 조치인지는 사회주의 자체의 숙제라고 볼 수 있다.
홍콩 사태의 부차적 원인은 제국주의에 의한 홍콩의 정체성 왜곡과 미영 등 서구의 책동이다. 우리의 언론보도는 이 부분을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고, 일부 진보진영 역시 이 부분을 외면하고 있으므로 이 부분을 지적하고 싶다.
19세기 이후 영국은 자국산 모직물과 인도산 면화를 청나라에 수출하고 청나라로부터 차를 수입하였다. 그런데 차 수입이 급증하여 무역적자가 발생하였고 차 대금을 결제할 은이 부족하였다. 이에 영국은 청나라에 아편을 수출하여 무역적자를 해소하고자 하였다. 청나라가 아편 무역을 단속하자 영국이 1841년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1842년 홍콩을 영원히 빼앗았다. 영국은 이어 1860년 영국의 해적선 애로우호에 대한 단속을 핑계로 전쟁을 일으켜 구룡반도 역시 영원히 빼앗았다. 이후 중국 침략의 교두보로 성장한 홍콩은 좁은 면적으로 인해 포화상태에 도달하였고 개화정책을 도입한 청나라로부터 위협 받았다. 이에 영국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가 쇠약해진 틈을 타서 1898년 제2차 북경조약으로 홍콩을 둘러싼 신계지역 즉 구룡반도 북부와 주변 235개 섬을 99년간 점령하는 권리를 얻었다.
1949년 중국의 공산화 이후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자산가들과 망명객들이 홍콩에 모여들었다. 미국과 영국은 홍콩을 한국, 대만과 마찬가지로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교두보이자, 자본주의의 우월을 과시하는 쇼윈도우로 육성하였다.
1997년 신계지역의 반환을 앞두고 1980년대 초부터 영국과 중국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신계지역은 홍콩 면적의 86%에 달해 영국은 신계를 반환한 후 홍콩을 독자적으로 운영할 수 없는 처지였다. 대처수상은 신계에 대한 조차기간을 연장하고자 하였으나 등소평은 홍콩 국경을 개방하여 중국인으로 홍콩을 넘쳐나게 하겠다.‘는 식으로 강력히 반발하였다. 결국 영국은 홍콩을 고사시키기보다는 일단 중국에 반환한 후 50년간 일국양제를 시행함으로써 서구체제를 보장받기로 하였다.
홍콩의 중국 반환에 즈음하여 홍콩인들은 정체성 혼란과 불안에 휩싸였다. 이 시기 홍콩의 르노와르 영화는 집단정체성이 붕괴되어 가치관이 개인화, 파편화되는 홍콩의 내면을 잘 그려주었다. 1984년 홍콩반환이 발표된 후 백만 가까운 홍콩인들은 영국 국적을 취득하거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장국영, 주윤발 등 르노와르 배우들도 정체성 혼란 끝에 뿔뿔이 흩어졌다.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홍콩인들의 불안이 높아지자 영국은 이를 틈타 중국을 비난하면서 홍콩기본권법을 제정하는 등 홍콩의 서구정치체제를 강화하였다. 홍콩을 식민지로 삼아 홍콩인의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를 탄압하였던 영국이 홍콩 반환 이후 친서방 진지를 구축하기 위해 홍콩에 갑자기 서구식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이식한 것이었다. 이에 중국은 영국의 이러한 조치를 중국을 분열시키는 책동으로 규정하고 반발하였다.
 
 
영국을 계승하여 홍콩에 알 박기 하려는 미국
 
1899년 미국 국무장관 J.M. 헤이는 청나라가 이미 개방한 22개 항구에서 특정 국가에게만 부여하였던 특혜관세를 폐지하고 모든 나라에게 평등한 관세, 입항세, 철도요금을 적용할 것을 요구하였다. 미국은 나아가 1900년 다른 열강들이 청나라를 점령하는 것을 반대하고 청나라의 영토보존을 주장하였다. 이 제안에 대해 일본은 반대하였고, 러시아는 침묵하였다. 하지만 헤이 국무장관은 1900년 열강들이 이 제안에 동의하였다고 공포하였다.
1900년 의화단이 미국 선교사를 처형하고 베이징에 있는 서방 국가의 공관을 공격하자, 청나라는 이에 고무되어 서방국가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에 헤이 국무장관은 억류된 열강의 외교관을 구출한다는 명분으로 열강들이 연합군을 구성하여 의화단의 난을 진압하고 외교관을 구출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후 미국은 다른 7개의 서방국가와 함께 군대를 파견하여 베이징을 점령하였다. 미국은 베이징의정서를 통해 다른 서방국가와 동등한 기득권을 보장받았다. 미국이 중국의 내륙에 군대를 보낸 것은 이것이 최초이다.
연합군은 의화단의 난을 진압한 후 33천만 달러의 배상을 중국에 요구하였다. 그 중 2,400만 달러는 미국에게 돌아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에 뒤늦게 진출한 미국이 영국, 일본 등과 동등해질 수 있었다. 러시아와 일본의 만주 진출을 우려한 미국은 1921‘9개국조약체결 당시 다른 열강의 지지를 받아 일본이 1915년 중국에 요구한 ‘21개조를 취소하도록 하였다.
미국은 일본이 항복한 직후 미소협력 분위기를 고려하여 장제스에게 공산당과 화해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장제스 군대가 공산당을 공격하였다. 결국 장제스의 무능, 부패, 독단에 질린 미국은 우리가 지원을 해도 장제스는 마오쩌둥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다고 보고 더 이상 장제스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았다. 미군이 중국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직접 개입한다고 해도 강력한 공산당 군대를 제압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으며, 여전히 협력관계에 있었던 소련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냉전이 시작된 이후에도 미국은 전쟁에 지친 미국 여론 때문에 중국 내전에 직접 개입할 수 없었다. 특히 미국이 중국 군대와 전쟁을 할 경우 소련이 그 틈을 노려 서유럽까지 장악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다. 미국으로선 중국과 소련을 상대로 아시아와 유럽에서 동시에 전쟁을 할 수 없었다. 장제스는 대만으로 도망가면서도 수많은 좌익인사와 민주인사들을 학살하였지만 미국은 공산당으로부터 대만의 장제스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일국양제는 양날의 칼이다. 1984년 조약에서 일국양제를 관철시킴으로서 영국과 미국은 홍콩을 서구화하는데 있어 50년의 시간을 번 셈이므로 2047년까지 홍콩의 중국으로부터 자발적 이탈이라는 망상을 꿈꾸기 시작하였다. 중국이 홍콩을 반환받는 명분을 제공하였지만 영국과 서방은 공산주의 체제에 자본주의 체제를 알박기를 해 놓은 셈이다. 중국 역시 서구의 의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왔다. 홍콩을 돌려받은 중국은 홍콩을 기반으로 홍콩 주변의 경제를 발전시키고, 그 결과 홍콩이 중국에 실질적으로 흡수시키고자 하였다. 따라서 등소평은 홍콩 맞은 편의 선전 지역에서 개혁개방의 첫 삽을 떴다.
2014년 홍콩 행정장관의 완전한 직선제를 요구하는 우산혁명이 발생하였다. 홍콩에 완전한 직선제를 도입하면, 서구화된 홍콩인들은 자치와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중국 체제로부터 이탈하고자 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중국통일을 추구하는 공산당이 이를 허용할 리가 없다. 영국은 중국이 홍콩을 탄압하면 일국양제라는 홍콩반환의 조건을 위반하였다면서 국제사회에 호소할 것이고, 미국은 이를 명분으로 국제사회라는 이름으로 홍콩문제에 개입할 수 있다.
홍콩 시위를 주도하는 일부 인사들은 미국 유학파이거나 친미인사들로 미국이 이들을 관리하고 있다. 미국은 반미국가 출신의 유학생, 이민자들을 반미국가를 전복시키는 행위에 동원해왔다. 쿠바나 과테말라에서 보듯이 이민자들을 모아 반미국가를 노골적으로 침략하였다. 또한 반정부 시위도 배후에서 조종해왔다. 1953CIA의 커밋은 이란의 모사데그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하여 언론과 군대를 매수하였다.
미국이 애용하는 방식은 평화적 시위를 폭력시위로 부추겨 정부 전복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홍콩의 일부 시위 주동자들이 의도적으로 폭력사태를 조장하려다 체포되었는데, 중국 당국이 이들 뒤에 미국이 있다고 의심하는 것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과거 CIA는 특히 이란 출신 갱단을 매수하여 모사데그지지 시위를 하면서 이슬람 사원을 파괴하도록 하였다. 또한 깡패들로 하여금 모사데그를 지지한다고 거리에서 외친 후 폭동을 일으켜 모사데그가 폭력적인 공산주의자라는 여론을 만들었다. 그밖에도 시위대끼리 충돌하도록 하여 이란인들이 모사데그의 지도력에 의문을 품도록 하였다. 미국 NSC 위원으로 근무했던 모리스(Roger Morris)1963년 이라크의 카심 수상을 권좌에서 몰아낸 바트당의 쿠데타 배후세력 으로 CIA를 지목하였다. 특히 그는 케네디 대통령이 CIA의 지원을 사전에 승인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미국은 과테말라 출신 갱단을 고용하여 모국에서 파괴와 시위를 하도록 조종하였다.
홍콩 민주화 시위의 주모자들을 만난 줄리 에이드 홍콩 주재 미국 영사관 정치부 책임자는 과거 중동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명분으로 반미정부들을 전복시키는 활동과 연계되는 등 대외 심리전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미국은 소련과 동유럽 붕괴, 천안문 사태에 개입한 심리전 전문가 진 샤프의 스위밍 전술을 공식적인 외교전술로 채택하고 있다. 이 전략은 인터넷, SNS 등 최신 매체수단을 활용하여 민주주의와 인권 보호를 명분으로 반미국가의 야당을 지원하여 평화적으로 친미국가를 수립하도록 하는 것으로서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에 진가를 발휘하였다.
미국의 전략은 홍콩인과 중국의 갈등을 심화시켜 1984년 조약 위반의 문제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영국의 호소로 홍콩 문제가 국제사회의 의제가 된다면 미국은 또 하나의 대중국 카드를 갖게 되는 셈이다. 미국 국무부 산하 민주주의인권노동국은 티베트의 달라이라마에게 재정적 지원을 하고 있으며, 같은 이유로 파륜공이나 홍콩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고 있다. 미국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중국의 체제를 약화시키고자 티베트의 반체제운동을 지원하였다. 특히 타이완을 침몰하지 않은 미국의 항공모함으로 삼아 중국이 통일 문제에 국력을 쏟도록 압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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