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일국과 국제적 차원에서 노동조합과 노동자당의 성립

국제노동자협회가 초기의 연합조직에서 중앙집권적인 연방주의 모델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분열이 발생하였다. 마르크스는 파리코뮌 이후 국제노동자협회를 국제적인 노동자당의 맹아로 여겼으며, 특히 총평의회를 그러한 당의 집행부로 설정하려 했다. 이는 국제노동자협회의 중앙조직인 총평의회의 지도력과 지부의 자치권 사이의 긴장으로 나타났다.

헤이그 대회에서 마르크스는 대회가 열리지 않는 기간에 국제노동자협회를 정치적으로 지도하고 대회의 결정사항을 이행할 수 있도록 총평의회에 강력한 권한을 부여할 것을 제안하였다. 또한 마르크스는 대회의 결의를 거부하는 회원단체를 총평의회가 다음 대회까지 잠정적으로 제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갖도록 하자고 주장하였다.(Stekloff, 1928).
반면 바쿠닌주의자들은 총평의회는 지부간의 연락과 통계수집 업무를 담당하는 기능적인 사무소이며, 특히 지부에 대한 강제적 권한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바쿠닌주의자들은 총평의회가 독단적이라고 선동하였으며, 그 결과 총평의회에 불만을 지닌 지부들을 규합할 수 있었다(Draper, 1989: 150~152).
바쿠닌은 원래 로잔대회와 바젤대회에서 총평의회의 권한을 확장하는 것에 동의하였지만 이 시기에 와서는 총평의회의 권력이 강화되어 국제노동자협회의 지부 내부 문제에 관여할 것을 우려하였다.
바쿠닌은 마르크스에 비해 스위스에 지지기반이 넓었는데, 국제노동자협회에 소속되어 있던 스위스의 로망연합(Romand Federation)지부가 내분으로 제네바지부(Geneva Federation)와 쥬라지부(Jura Federation)로 분열되었다. 그런데 헤이그 대회에 앞서 마르크스의 총평의회는 로망연합지부의 정당한 계승자를 다투는 내분에 개입하여 바쿠닌을 지지하던 다수파 쥬라지부 대신 마르크스를 지지하던 소수파 제네바지부의 정통성을 인정하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느슨한 연방체라는 국제노동자협회의 창립정신에 반하여 지부의 자주성을 침해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마르크스가 헤이그 대회에서 취했던 입장은 지나친 중앙집중민주주의 구축 혹은 과도한 마르크스의 지도력 강화로 해석될 수 있다. 존스톤은 이에 대해 마르크스의 의도는 총평의회를 국제노동운동의 전위나 중앙정부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하였다(Johnstone, 1967: 132).
또한 마르크스는 국제노동자협회가 망명가들의 음모적 실험의 도구로 전락될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에 총평의회 본부를 블랑키주의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런던에서 뉴욕으로 이전하는 결정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국제노동자협회의 중앙집권화에 찬성하였던 블랑키주의자들조차 이 결정에 반대하였다. 이들은 총평의회 이전 결정이 나자 국제노동자협회의 사망을 선언하고 대회 중에 철수하였다.
마르크스와 국제노동자협회 총무위원회가 조르게를 서기장으로 임명하여 뉴욕에 근무하도록 하였으나, 총평의회를 뉴욕으로 옮긴 것은 마르크스가 실질적으로 국제노동자협회를 해산시킬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1872년 헤이그 대회 이후 국제노동자협회는 급속히 쇠퇴하였다. 18739월 제네바 제6차 대회가 거의 스위스 대표들만 참가하여 실질적으로 무산된 후 마르크스는 국제노동자협회의 활동을 사실상 중단하였다. 그 이후 바쿠닌주의자들, 즉 무정부주의자들이 국제노동자협회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국제노동자협회가 실질적으로 무력화되고 각국에서 노동조합총연맹과 통일적인 노동자당이 출현함으로써 국제노동자협회의 임무는 다음 세대의 국제적인 노동조합 협의체와 노동자당 협의체에 넘어갔다.
국제노동자협회는 창립 당시부터 회원들에게 각국의 분리된 노동자 연합들을 결합시켜 중앙의 전국적 기관이라는 대표체를 갖는 전국적 단체로 만들 것을 규약 제7조를 통해 요구하였다(Marx, 1988b: 16). 나아가 1872년 헤이그 대회는 노동조합들의 국제화에 관한 결의를 통해 총평의회에 대중적인 국제적인 노동조합의 결성에 착수할 권한을 부여하였으며, 각국의 노동조합들에게 이 국제조직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였다.
또한 1871년 런던 회의는 이미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행동에 관한 결의를 통해 국제노동자협회 소속 단체들에게 각자 자신의 나라에서 중간계급의 정당들과 구별되는 노동자당을 건설할 것을 요구하였다. 국제노동자협회는 각국의 신생 노동자당들에게 조직과 노선을 제공하였으며, 그 결과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각국의 노동자당은 마르크스주의적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각국의 노동자당들이 자율적인 조직으로 발전하자 국제노동자협회는 이들을 묶을 수 있는 국제조직으로서 유지될 수 없었다. 이를테면 독일 사회민주노동당이 창당된 후 독일의 국제노동자협회 지부는 점차 이 당과 융합되어 갔으며 국내 문제에 전념하게 되었다(Johnstone, 1967: 135).
마르크스는 국제노동자협회가 실패하였다는 조지 하웰(George Howell)의 평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Marx, 1878).
 
국제노동자협회 이후 독일, 스위스, 덴마크, 포르투갈, 이태리, 벨기에, 폴란드, 미국 등 각 나라에서 다소 차이는 있지만 전국적 차원의 사회민주주의적인 노동자당이 건설되었으며, 각 나라의 노동자 대중들은 이제 더 이상 편협한 정파로 흩어진 채 별난 모임으로서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가 아닌 명실상부한 국제적인 그룹을 형성하여 공통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상호 협력하고 생각들을 공유하고 있다. ... 인터내셔널은 죽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첫 배양기를 지나 더 높은 시기로 발전한 것이며, 이러한 발전은 이미 첫 배양기에 잉태된 것이었다. ... 국제노동자운동의 역사는 앞으로도 많은 변화를 경험할 것이지만 그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꾸준히 발전할 것이다.
 
1889노동조합과 사회주의정당들의 2인터내셔널이 엥겔스의 열정적인 지원에 의해 파리에서 탄생하였다. 2인터내셔널 그 자체가 비록 공산주의자 국제조직이 아니었지만 제1인터내셔널, 즉 국제노동자협회의 후계자임을 자처하였다(정성진, 2006: 85). 리프크네히트는 1889년 제2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서 국제노동자협회는 사라지지 않고, 많은 나라에서 노동자운동으로 계승되었고, 여기 모인 우리들 속에 살아 있으며, 이 대회는 국제노동자협회의 계승자이다라고 밝혔다(Stekloff, 1928).
나아가 제2인터내셔널에 이어 1890년 국제광산노동자연맹, 190017개의 국제직업별노동조합 등 노동조합만으로 이루어지는 국제연대조직이 탄생함으로써 일국과 국제적 차원에서 노동조합과 노동자당이 비로소 정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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