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파리코뮌 이후의 노동계급 자기해방 원리의 발전

1871318일 파리의 노동자봉기가 성공하였으며, 26일 선거를 거쳐 28일 파리코뮌이 선포되었다. 하지만 파리코뮌은 3개월도 견디지 못하고 부르주아 진압군에 의해 전복되어 부르주아국가기구를 파괴하고 노동자정부를 수립하는데 종국적으로 실패하였다. 애초에 노동자봉기는 강력한 구심력이 없었기 때문에 부르주아 군대와 부르주아 의회를 파괴하지 못하였고, 파리코뮌이 성립한 이후 프랑스 정부가 도피한 베르사유로 진격하여 혁명을 전 프랑스로 파급하려는 의지도 없었다. 독일군의 지원을 받는 진압군이 파리로 진격하자, 파리코뮌의 지휘 하에 있던 군대는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였으며, 그 결과 노동자봉기는 진압되었다. 파리코뮌이 성공하려면 파리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체가 노동자정부로 전환되어야 했다. 하지만 다른 코뮌을 실현하고자 하는 노동자봉기가 리용, 마르세유, 보르도 등에서 발생하였으나 지도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실패하였다.

마르크스는 프랑스 내전을 통해 파리코뮌의 교훈으로 혁명을 지도할 노동자당과 사회주의 강령의 필요성, 농민과의 동맹, 노동자정부의 수립 등을 제시하였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책에 대한 논란이 거세지자, 총평의회의 뒤에 숨지 않기로 하고 자신이 그 선언문의 저자라고 공개하였다(Marx, 1878).
이처럼 국제노동자협회가 파리코뮌을 옹호하고, 마르크스가 프랑스 내전을 통해 노동자정부를 주장하고 파리코뮌을 그 모델로 선언하자, 각국 정부의 탄압이 거세졌다. 이에 마르크스는 총평의회의 권한을 강화하여 위기를 극복하고자하였다.
 
 
노동자당 건설 추진
 
첫째, 마르크스는 파리코뮌이 실패한 원인을 민중을 이끌어 나갈 혁명적인 노동자정당이 없었다는 점에서 찾았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정당의 필요성을 국제노동자협회의 노선으로 제기하였다. 마르크스는 18719월 런던 회의(Conference)에서 정치적 행동과 노동자계급라는 연설을 통해 정당의 필요성, 노동자의 선거와 의회 참여를 강조하였다. 엥겔스 역시 같은 회의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행동에 대하여라는 연설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행동을 제기한 파리코뮌 이후에 정치의 거부는 전혀 불가능하게 되었고, 실시하여야 할 정치는 노동자정치이다라고 강조하였다.
1871923일 폐막한 런던 회의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행동에 관한 결의를 통해 노동자계급은 유산계급의 정당에 대립하여 스스로를 특별한 정당으로 조직함으로써 유산계급의 폭력에 대하여 계급으로서만 행동할 것이다고 선언하였다.
당시 영국의 노동조합들은 노동조합운동을 경제적 요구에 한정하는 대신, 정치투쟁은 선거권 확대운동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프루동 역시 정치투쟁과 노동자당 건설에 소극적이었다. 바쿠닌은 노동조합의 경제적 요구나 제도개선 투쟁을 경시하고, 노동조합을 정치적 봉기의 수단으로만 이용하려고 하면서 노동자계급의 당을 독자적으로 건설하는데 소극적이었.
바쿠닌은 노동자계급이 정당을 조직하는 것은 부르주아가 정치활동을 벌이는 것과 똑같은 성질의 것이다고 마르크스의 입장을 비판하였다. 바쿠닌은 자본주의에 대한 단지 일상적인 투쟁을 통해 미래의 자유로운 사회가 가능하다면서 노동자당 건설에 반대하는 입장을 국제노동자협회에 제출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김금수, 2002: 103).
1872년 제5차 헤이그 대회에서 블랑키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위한 유일한 무기는 거리의 바리케이드라고 주장하면서 노동자의 혁명적 무력을 실현할 수 있는 군사조직에 관한 사항을 다음 대회에서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당결성에 반대하였다(Stekloff, 1928). 이에 마르크스는 정당 조직은 정치권력의 탈취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고, 무정부주의는 정치권력의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헤이그 대회는 런던 회의결의를 노동자계급정당 건설에 관한 결의로 승인하고 나아가 규약 7조에 노동자계급을 정당으로 조직하는 일은 사회혁명의 승리와 계급철폐를 위해 필요하다라는 내용을 삽입하였다(Marx, 1988d: 203). 국제노동자협회가 노동자당 건설을 확고한 방침으로 삼은 것은 파리코뮌의 실패를 경험한 블랑키주의자, 프루동주의자, 영국의 노동조합주의자 일부가 입장을 바꿔 노동자당 건설의 필요성을 인정하였기 때문이었다.
둘째, 마르크스는 자신의 당 개념을 사회주의이론과 노동자운동의 융합으로 설명하였으며, 노동자당은 이러한 결합의 결과물로서 노동자들의 자주적 활동이라는 점에서 노동계급 자기해방 원리와 모순되지 않는다(Johnstone, 1967; Draper, 1971).
마르크스는 이미 공산당 선언에서 혁명적 지식인이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운동과 결합하는 것을 역사적 필연으로 보았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계급투쟁이 절정에 이르면 부르주아 사상가의 일부는 이러한 역사운동을 각성하고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의 편으로 넘어온다(Marx, 1989b: 471). 같은 맥락에서 엥겔스는 공산주의자동맹을 순수한 노동자운동이 헤겔철학의 해체로부터 유래한 마르크스의 이론적 운동과 융합하여 나타난 결과물로 보았다(Engels, 1989b: 248).
마르크스는 국제노동자협회 활동에서도 혁명적 지식과 노동운동의 결합이라는 입장을 고수하였는바, 마르크스가 작성한 국제노동자협회 창립선언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이미 성공의 한 요소인 다수의 숫자를 지니고 있지만, 이 다수는 조직되고, 지식에 의하여 지도되는 때에만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다(Marx, 1988c: 12).
 
셋째,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동맹이나 국제노동자협회 그리고 독일 사민당의 건설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만의 정당이 아니라 대중정치조직으로서 노동자당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루벨(M. Rubel)은 사회학적 개념의 노동자당과 윤리학적 개념의 공산주의자당이라는 두 개의 프롤레타리아 정당 개념을 구별하면서, “마르크스는 이론적이며 계도적인 공산주의자들의 조직과 노동자당을 구별하였다고 주장하였다(Johnstone, 1967: 142).
실제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생전에 공산주의자들로만 구성된 공산당을 독일에서 구현하고자 한 적이 없으며, 이러한 공산당은 러시아혁명 시기에 비로소 레닌에 의해 출현하게 된다(Laski, 1948: 39).
공산주의자동맹 시기에 마르크스는 선진적인 프롤레타리아가 봉기를 통해 국가를 장악하여 부르주아들이 중단한 정치혁명을 사회혁명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바뵈프나 블랑키의 영속혁명론에 영향을 받았으며, 또한 노동자대중의 정치운동으로서 영국의 차티즘에도 동시에 영향을 받았다. 그 당시 차티즘이 노동자의 입장을 프티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종속시키는 경향이 있는 반면, 블랑키주의는 종파와 고립적 봉기주의에 빠지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점차 고립적 봉기보다 경제적 목표와 정치적 목표를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 대중운동에 더 무게중심을 두기 시작하였다(발리바르, 1993).
마르크스는 국제노동자협회 활동을 통해 공산주의자들만이 아니라 다양한 노동자정치조직을 연합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국제노동자협회의 목적은 특별한 강령을 각 나라의 노동자당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노동자운동을 결합하는 것이었다(Johnstone, 1967: 133). 18861129일 조르게(Sorge)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엥겔스는 노동자당이 마르크스의 이론에 얼마나 충실한지가 아니라 노동자당으로서 노동자 대중과 노동자 운동을 얼마나 포괄하면서 자신의 운동을 전개하느냐를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18698월 아이제나흐에서 마르크스파의 리프크네히트, 베벨 등에 의해 독일사회민주노동당(Sozialdemokratische Arbeiterpartei Deutschlands)이 결성되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자동맹이 해체된 이후 최초로 순수한 프롤레타리아 정당이 나왔다고 보았다(Johnstone, 1967: 136). 마르크스는 1871년 런던 회의에서 정치적 행동과 노동자계급라는 연설을 통해 의회는 우리의 원칙을 세상에 선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으며 바벨과 리프크네히트가 의회 연단에 올라 연설할 때 전 세계가 주목한다면서 독일사회민주노동당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Marx, 1871).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라쌀주의자들과 통합한 독일 사회민주당을 기본적으로 지지하였으며, 말년에 이르러 각 나라 안에서 출발점이 다른 노동자당들이 독일의 사례처럼 하나의 전국적인 노동자당으로 통합되어 가고 나아가 공산주의자 대중정당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발전된 프롤레타리아 정당에서는 사회주의 이론이 공산주의자동맹처럼 소수의 선진노동자에게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거대하고 증가하는 부분에서 수용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Johnstone, 1967: 143).
넷째, 마르크스는 노동자당과 노동조합이 연대하여 정치투쟁을 전개할 것을 강조하였다. 마르크스는 가치, 가격, 이윤에서 경제투쟁이 자동적으로 정치투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고 지적하고 노동조합은 경제투쟁을 뛰어넘어 빈곤의 축적을 낳는 모든 원인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Marx, 1969: 29).
마르크스는 노동조합 - 그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 노동조합은 자본주의의 폐지를 위한 정치투쟁을 수행하는 중심부대가 되어야 한다 강조하였다. 1871년 런던 회의(Conference)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행동에 관한 결의를 통해 노동자계급은 경제투쟁 속에서 결집시켜 온 총력을 지주와 자본가계급에 대항하는 정치투쟁을 위한 지렛대로 사용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Marx, 1988j: 426).
하지만 18691117일자 인민국가(Volksstaat)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독일금속노동조합의 회계담당인 하만(J. Haman)과의 대담에서 노동조합이 사회주의를 위한 학교임을 강조하면서도 노동조합이 그 임무를 다 하려 한다면 결코 정치적 단체와 관계하거나 그러한 단체에 종속되어서는 안 되며, 그러한 일이 일어나면 노동조합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것이다고 밝혔다(마르크스·엥겔스, 1988: 66).
1900년 사회민주당의 지도자 베벨은 당은 노동조합을 사회민주주의자의 충원지로 보고 있었으며, 노동자는 사회민주당 소속이어야 하지만 노동조합은 일체의 정치투쟁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 지배적 견해였다고 술회하였다(포스터, 1986: 97).
다만 노동조합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마르크스의 입장은 절대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라쌀주의가 독일 노동조합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이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또한 당시의 영국의 노동조합은 자유당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면서 독자적인 노동자정당을 건설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영국의 노동조합 내 자유당의 영향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국가 파괴에서 노동자정부 수립으로
 
파리코뮌은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국가를 접수하여 그것 자체를 자신들의 목적을 위하여 사용할 수 없다는 보여주었다. 마르크스는 1871412일 쿠겔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파리코뮌은루이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해방을 위해 부르주아국가의 통치기구를 해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는 결론을 실천적으로 확인시켜 주었다고 밝혔다(Marx, 1988g: 131).
하지만 파리코뮌은 비록 파리에 국한되었지만 최초로 노동자정부를 건설하려고 시도하였다. 따라서 파리 코뮌은 모든 형태의 국가를 청산해야 한다는 바쿠닌의 주장이나 국가를 폐지하고 생산자연합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프루동의 주장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마르크스는 프랑스 내전에서 낡은 정권의 억압적인 기구는 제거돼야 하지만 그것의 합법적인 기능은 (혁명 직후) 사회의 책임 있는 대리기구에 되돌려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나아가 마르크스는 코뮌은 본질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정부였으며, 노동자의 경제적 해방이 완성될 수 있는 정치형태였다고 주장하였다(Marx, 1977: 74).
엥겔스 역시 1872권위에 대하여(Von der Autoritat)를 통해 반귄위론자들은 정치적 국가를 낳은 사회조건을 폐기하기 전에 국가를 일격에 폐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면서 바쿠닌주의자들을 비판하였다(Engels, 1989: 308).
반면 바쿠닌주의자들은 프루동적인 연합주의야말로 파리코뮌이 내건 이상이었다고 주장하면서 파리코뮌을 노동자정부로 보는 마르크스의 분석에 반대하였다.
고타강령비판에 따르면 국가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정치적 과도기에 있어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독재 이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프롤레타리아독재가 고타강령비판이전에는 주로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해방을 위해 착취계급을 억압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고타강령비판속에서는 자본주의사회와 공산주의사회 사이의 정치적 이행기로 상정되었다.
마르크스 입장에서 프롤레타리아독재국가는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사회주의 사회로 이행함에 있어서 거대한 정치경제적 과제를 설정하고 수행해야 하며 또한 프롤레타리아 권력은 혁명 이후 반혁명을 억누르기 위해 강력하고 투쟁적인 중앙집권적인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로젠베르크, 1990: 190). 레닌 역시 국가와 혁명에서 파리코뮌이 프루동주의적인 연방주의와 흡사하다는 베른슈타인의 주장에서 대해 파리코뮌이 중앙집권적인 프롤레타리아독재 국가형태임을 강조하였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독재라는 개념을 설정함으로써 국가의 즉각적인 폐지라는 프루동주의자와 바쿠닌주의들의 주장을 누를 수 있었지만,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국가를 이용할 수 있는 지의 문제가 후일 마르크스주의 국가이론의 전개에 상당한 혼란을 초래했다(정운영, 199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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