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의 신구 보수주의 비교⓷ ㅡ 반공친미로서 뉴라이트의 탄생

한국의 극우단체와 보수단체의 이념은 표현방식과 과격함의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본질적으로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하기 어렵다. 보수단체의 자유시장과 자유민주주의 강조는 극우단체의 반공의 다른 표현이고, 보수주의의 기업활동의 자유는 극우단체의 반노조와 같은 내용이다. 


한국 우익의 실체는 반공주의다. 민주화 이전 반공주의는 국가이데올로기였다. ‘재향군인회’, ‘새마을운동본부’, ‘자유총연맹’ 등 관변 단체가 융성했기 때문에 자발적인 민간단체로서 반공단체가 불필요했다. 이처럼 민주화 이전 과거의 반공파쇼는 주로 어용단체이기 때문에 자발성과 대중성이 부족하다. 


민주화 이후 노동자민중의 저항과 통일운동이 거세지자, 우익엘리트들이 세력화를 추진하면서 우익 대중의 각성을 촉구했다. 6월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뤄진 직후인 87년 10월 박정희 정권 이후 첫 재야 우익 단체인 ‘자유민주총연맹’이 등장했다. 그 주도자는 이철승 신민당 의원, 이용택 무소속 의원 등 정치인이었다.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모임(회장 정기승)은 1988년 4월에 창립되었다. 구성원은 전직 국회의원, 검찰, 안기부장, 시장, 정관계 출신 변호사들로서 주로 보수층을 대변해온 원로 변호사 들이 주축이 되고 있다. 


1988년 김용갑 총무처 장관이 보수세력의 연합을 촉구했고, 양동안 정신문화연구원 교수가 “이 땅에 우익은 죽었는가”라고 격분했다. 1989년 10월에는 대학총장, 학장을 역임한 박사급 원로, 장관, 차관, 경제계, 법조계 인사, 국회의원, 공익단체장 등 각계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자유지성 300인회’를 만들었다. 1990년 복거일 소설가가 “보수주의 논객을 기다리며”라는 칼럼을 발표했다.


자유민주민족회의(상임의장 이철승)은 1994년 7월 16일에 창립되었다. 자유민주총연맹, 건국청년협의회, 대한반공청년회, 자유민주수호애국연합, 한국기독교교회청년협의회 등 33개 보수단체들이 결성한 보수연합체로서 결성 계기는 김일성 조문 발언과 한총련 분향소 설치 반대이다. 


민주화 이후 최초의 자발적인 보수매체는 1989년 창간한 [한국논단]이다. 이 잡지는 [월간조선]보다 더 보수적으로 평가받았다. [한국논단]은 자유와 시장이라는 보수주의 가치를 다루기보다는 현대사의 민감한 문제를 반공의 시각에서 재해석하고 반공과 반북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면서 진보진영을 친북세력으로 규정했다.


1992년 김영삼의 문민정부, 97년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 2002년 노무현의 참여정부로 이어지면서 보수세력의 위기의식은 더욱 깊어갔다. 이들 중도 자유주의 정권이 기존의 반공단체에 대한 지원을 축소하고, 반공단체는 정권의 눈치를 보면서 과거의 영향력이 감소했다. 반면 야당으로 정권교체가 된 후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는 자발적인 반공단체들이 발생했다. 자유시민연대(2000년),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2002년) 등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2000년 11월 자유시민연대(공동의장 정기승 변호사, 류기남 대한참전단체연합회 회장)가 창립됐다. 자유시민연대는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한민국건국회, 헌변, 대한참전단체연합회, 전쟁방지국민협의회, 한국기독교교회청년연 합회, 실향민중앙협의회, 월남참전전우회 등 50여개 단체 소속 5000명으로 구성됐다. 


2002년 4월 26일 자유수호국민운동(상임의장 장경순 헌정회 원로회의 의장)이 김대중 정권 퇴진 등을 주장하면서 발족됐다. 이 단체의 중심인물들은 군 및 정계 원로, 보수 시민단체 대표 등 각계인사 150여명이다. 


2001년 서정갑이 주도하여 창설된 국민행동본부는 육해공군해병대 예비역 대령 연합회, 육사총동창회, 갑종동기회, 공군전우중앙회, 대한민국해군동지회, 베트남참전전우회 등 전역 군인단체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 단체에는 이밖에도 독립신문, 북한민주화협의회, 북핵저지시민연대 등의 극우파 단체들이 가입되어 있다. 서정갑은 조갑제와 밀접한 관계이며 이미 1995년 4월 7000여 명으로 이루어진 육해공군해병대 예비역 대령연합회를 창설한 바 있다.


자발적인 극우단체와 기존의 관변단체는 구별된다. 극우단체는 자유주의 정권에 대해 반정부적 성격을 분명히 하지만 관변단체는 그렇지 못하다. 극우단체는 김대중 정권 출범이후 인터넷에서 주로 햇볕정책을 비난하다가 2000년 남북정상회 담이 성사된 후 노골적으로 본색을 드러냈다. 특히 북핵문제 대두를 계기로 현재 활동 중인 대다수 보수단체가 창립되었다(신동아 2003. 10). 


노무현 대통령은 출범 직후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과거사 진상 규명법, 언론관계법 등 4대개혁, 세종시로의 수도이전을 추진했고, 이에 저항하는 보수정당은 국회에서 우위를 이용하여 대통령탄핵소추를 결정했다. 하지만 국민여론이 반발하면서 2004년 총선에서 보수정당은 참패하고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소추도 기각됐다. 각 분야에서 진보 대 보수 대결이 극심해지면서 이 시기에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대표적인 보수신문이 [한국논단]의 보수적인 기조를 수용했다. 2004년 11월부터 동아일보가 ‘뉴 라이트, 침묵에서 행동으로’라는 대형 연재 기획을 시작했고,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유사한 기획 기사를 연재했다. 


[신동아] 2008년 9월호에 따르면 2004년 말, 나중에 이명박 정부에서 청와대 대변인, 윤석열 정부에서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당시 이동관 동아일보 정치부장과 우익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유주의 운동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자유주의’가 어려우니 ‘뉴 라이트’라고 작명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이를 받아 동아일보가 뉴라이트를 다루는 기획기사를 실었다.


또한 2004년 10월부터 과거 민주화운동 경력이 있었던 전 조선일보 주필 유근일, 김진홍 목사, 신지호 서강대 겸임교수 등 10여 명이 수차례 모임을 가졌다. 이들은 과거 운동권 인사 중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조직화하여 김대중 -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좌파정권에 대항하고자 했다. 이중 신지호 교수가 2004년 11월 「자유주의연대」를, 김진홍 목사가 2005년 「뉴라이트 전국연합」을 주도적으로 창설했다. 


[한국논단] 그리고 조중동의 ‘뉴 라이트 기획’의 핵심은 ‘현대사 바로 세우기’였다. 이승만, 박정희의 업적을 강조하면서 긍정적으로 재평가했으며, 이는 역사 논쟁으로 이어져 국정교과서 사태, 전교조 탄압을 불러일으켰다. 


뉴라이트 지식인들은 우익대중들을 조직화하고자 의도적으로 자극했다. 2009년 9월 이도형은 한국논단 20주년 기념식에서 “반공이라는 말도 꺼낼 수 없는 나라”가 됐다면서, “젊은 서북청년이 기대되는 바입니다”라고 주장했다.


[한국논단] 등 일부 공간에서 진행되던 엘리트들의 역사논쟁, 종북논쟁이 조중동과 종편을 통해 대중들에게 확산됐다. 초기에는 엘리트가 선동했지만 지금은 엘리트가 선동하지 않아도 우익 대중이 뭉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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