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레타리아트 개념의 형성

김장민 『마르크스의 실천과 이론(2020, 공생공락)의 일부 내용입니다.

신바뵈프주의자는 무산대중의 봉기와 혁명독재라는 바뵈프의 사상을 계승하고 기존의 무산대중을 프롤레타리아트 즉 노동자로 대치하였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주었다(Mason, 1929: 509-511). 이를테면 당시 헬리 셀리츠(Henri Celliez)는 루소의 사회계약과 인민주권을 혁명적으로 계승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1840혁명가의 의무(Devoir des révolutionnaires)에서 프랑스대혁명을 탄생시킨 부르주아 계몽주의 대신 프롤레타리아 계몽주의를 주창하였다(Roza, 2018: 141-142). 또한 마르크스는 1843년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주적인 조직결성을 선동하는 플로라 트리스탕(Flora Tristan)노동조합(l’Union ouvriere)을 읽었다.

마르크스는 184312월 파리에서 씌여진 헤겔법철학비판 서설에서 처음으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그 전까지는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단어 대신 가난한 계급혹은 고통 받는 계급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마르크스는 184210월 독일에 프롤레타리아트의 개념을 소개한 로렌츠 폰 슈타인(Lorenze von Stein), 프란츠 폰 바더(Franz von Baader), 로베르트 폰 몰(Robert von Mohl)의 영향을 받았다(柴田隆行, 1992 ; Marcel, 2016 : 178-179).

이중에서 로렌츠 폰 슈타인은 1842오늘날 프랑스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Der Sozialismus und Communismus des heutigen Frankreich)를 저술하였으며 헤겔법철학에 영향을 받아 국가에 의한 사회정책을 강조하고 독일과 일본의 국가사회주의 학파를 양성하였다.

바이틀링은 마르크스에게 좀 더 구체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개념을 제공해주었다. 바이틀링은 184212조화와 자유의 보장(Garantien der Harmonie und Freiheit)을 통해 사회적 폐해의 기원을 밝히고 사회를 새롭게 재조직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그는 경제적 해방이 없는 정치적 혁명에 반대하였다(Wittke, 1950: 56). 마르크스는 1879919일자 조르게에게 보낸 서간에서 이 책의 1849년 신판을 언급하였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 발전은 노동계급 활동의 결과이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가 역사의 주체이며, 동시에 혁명의 주체이다. 존스(2018)에 따르면 기독교공산주의를 세속화된 공산주의로 발전시킨 조화와 자유의 보장은 포이어바흐, 바쿠닌,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미쳤다. 공장노동자의 봉기를 목격한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개념을 더욱 구체화시켰다. 자본가와 정부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폭동이 프랑스의 경우 1831년 리옹에서, 독일의 경우 1844년 슐레지엔에서 발생하였다. 마르크스는 슐레지엔 폭동 직후 184487일과 10일자 포어베르츠(Vorwärts)에서 봉기의 직접적인 상대는 프로이센 국왕이 아니라 부르주아였다.”면서 이 폭동을 독일 최초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으로 평가하였다(Marx, 1975; Grandjonc,1974 ).

 

 

2) 신바뵈프주의를 극복한 마르크스의 혁명관

 

(1) 공산당의 개념

 

프랑스대혁명에서 혁명적 지식인과 상퀼로트의 결합은 사회주의 지식인과 혁명적 노동계급의 결합이라는 마르크스의 당 개념과 유사하다(최갑수, 1992: 50-52). 마르크스는 이러한 조직원리를 공산당선언과 국제노동자협회 규약을 통해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의 원리로써 정립하였고 이것이 레닌의 사회민주당의 조직원리로 발전하였다. 마르크스는 신성가족에서 자크 룩스(Jacques Roux), 바뵈프, 블랑키, 부오나로티를 프랑스 공산주의의 원류로서 파악하였으며 역사적 유물론을 정립한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신바뵈프주의를 극복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제시하였다(Achcar, 1999: 67-69).

특히 1793년 파리시 의원으로 선출된 자크룩스는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모든 시민에게 생필품을 지급할 것을 주장하는 등 상퀼로트의 이익을 대변하였다. 그는 분노자들(Enrag?s)”를 결성하고 분노자들의 선언문(Manifesto of the Enrages)을 통해 사유재산의 폐지 등을 주장하였고, 생팔품을 얻고 프랑스대혁명의 반동세력을 척결하기 위한 파리 민중의 폭동을 지지하였다. 자크룩스의 주장은 훗날 마르크스에게 공산주의에 대한 영감을 구체화시켰다.

마르크스의 신성가족에 따르면 자코뱅 즉 혁명적 부르주아는 노예제를 기반으로 하여 성립한 고대의 민주주의공화국을 봉건노예가 해방된 근대의 대의공화국과 혼동하였기 때문에 자기모순에 빠져 파탄하였다(Marx, 1975: 122). 다시 말하면 로베스피에르, 바뵈프, 부오나로티 등 혁명적 부르주아는 자신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부르주아공화국을 단지 개선하는 한도 내에서 민중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자 하였다(Higonnet, 2006: 143 ; Löwy, 1989 : 111-112).

바뵈프에서 바이틀링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가 제기한 대중적 혁명정당은 형성되지 못하였다. 바뵈프, 블랑키에 따르면 혁명적 대중은 직업적 혁명가와 달리 사전에 당의 형태로 조직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혁명가 조직이 봉기를 결행할 때 혁명가들의 선동에 의해 임시적으로 동원되는 수동적 대상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혁명적 대중이 당면한 봉기에 결합하는 것은 봉기 당시의 정세와 조건에 따라 유동적이었다. 물론 이러한 한계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미성숙되고 지배계급이 정치적 결사를 금지하였던 시대적 상황에서 기인한다.

의인동맹의 바이틀링은 '도탈(盜奪, Stehlenden Proletariats, Thieving Proletariat)'을 주장하였다(Bluntschli, 1843 : 99, 122, Marx, 1976 : 226). 이에 따르면 사회적 비적(Sozialbandit)’이 봉기를 주도하여 부르주아의 사유재산을 장악하여 공산주의를 실현해야한다(Wittke, 1950: 44, 80). 여기서 사회적 비적은 공산주의자와 노동자들의 결합을 의미한다.

의인동맹의 지도자인 샤퍼는 의인동맹이 계절협회의 비밀 봉기에 가담한 후 정부에 의해 조직이 와해될 위기에 처하자, 바이틀링이 주장하는 음모적인 봉기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으로 전환하였다. 나아가 샤퍼, , 마르크스는 의인동맹에서 이런 바뵈프주의적인 유산을 청산하기로 합의하였다(, 2001: 165).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이 소속된 공산주의통신위원회구성원들과 함께 의인동맹을 총회와 대의기구를 갖춘 민주적인 혁명가조직으로 전환시키고자 하였다. 새로운 강령과 규약에 의해 탄생한 공산주의자동맹은 비록 비밀지하조직이었지만 혁명적인 노동자들에게 개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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