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냉전시대 미국의 남미 좌익정권 전복

미국은 현지 정부가 불안정해지거나 다른 나라가 침략하면 이런 경제적 이익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사적으로 개입하였다. 미국은 현지의 백인지도층을 조종하여 군정을 실시하였는데, 이러한 백인지도층들은 대부분 군사독재를 실시하였다. 이런 역사가 20세기 말까지 중남미에서 쿠데타와 군정이 반복된 배경이다. 1933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선린외교로 중남미에 대한 불개입을 선언하였다. 이러한 군사개입을 자제한 것은 먼로주의의 일정한 후퇴였으나 냉전 이후 다시 소련의 영향과 좌익을 차단한다는 명분으로 중남미에 대한 개입을 강화하였다. 2차 대전 전까지 독일의 나치가 중남미에 진출하며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자 미국은 중남미에 대한 경제지원을 강화하여 독일의 영향력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2차대전 직후 출범한 유엔헌장 제 51조는 1947년 리우조약 즉 중남미국가와 미국의 상호방위조약의 근거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미국은 남미문제에 유엔안보리결의가 없더라도 군사개입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1958년 닉슨부통령은 남미순방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반미시위를 겪고 나서 대통령에 당선된 후 독재정부를 지원하는 정책을 일부 수정하고 경제지원을 늘렸다. 케네디는 이런 정책을 19618월 회의를 계기도 진보동맹으로 확대하였으나 남미를 빈곤에서 탈출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83년 멕시코 등 중미국가들은 콘타도라 회동을 통해 자유선거, 외국군의 개입 거부와 외국군 기지의 퇴출, 반군지원의 중단 등으로 합의하여 미국의 반공정책에 저항하였으나 미국이 경제지원과 군사개입으로 대항함으로써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케네디 대통령은 경제적 안정을 통해 쿠바혁명이 중남미에 파급되는 것을 막고자 1961년 미주기구에서 22개 중남미 국가들과 푼타델에스 헌장을 채택하고 중남미에 10년 동안 200억 달러의 경제원조와 민간투자를 제공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진보를 위한 동맹으로 불러지며, 생활수준의 향상, 물가 안정, 문맹 해소, 공업화, 주거 등 복지 향상을 통해 좌익사상과 좌익세력이 중남미에 침투하지 못하도록 할 목적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중남미에서 좌익혁명이 빈발하였다.
 
쿠바에서 친미독재정권의 붕괴와 좌익혁명은 미국의 대외정책에 큰 변화를 갖다 주었다. 미국은 쿠바 혁명 이후 친미정권이라도 지나치게 독재를 하여 민심이 반미, 좌경화될 우려가 있는 경우 친미정권을 친미쿠데타 등으로 교체하였다. 또한 미국은 카스트로를 초기에 진압하지 못한 것을 반성하고 좌익게릴라에 대해서 초반부터 강경한 대응을 하였다. 미국의 해병대, 특수부대, CIA는 친미 반공국가에 파견되어 현지 군인들을 훈련시키고, 자신들이 직접 좌익게릴라를 색출하거나 소탕하였다. 특히 소련뿐만 아니라 쿠바의 체게바라 등 좌익인사들이 좌익혁명을 다른 나라에 전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미국의 태도는 더욱 강경해졌다.
 
a) 쿠바 전복 시도
 
쿠바의 바티스타 정권이 독재로 치닫자카스트로가 주도하는 혁명이 발생하였다혁명 당시 카스트로는 좌익적 성향이 극명하지 않았고 바티스타가 더 이상 민심을 얻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바티스타 정권이 무너지는 것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카스트로는 혁명 직후 친소적인 노선을 걷지 않았으며오히려 1959년 미국을 방문하여 닉슨 부통령과 면담하고 비밀리에 CIA를 만났다하지만 카스트로를 만난 정보기관 관계자들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카스트로가 미국의 중남미 정책에 지장을 줄 것이라며 경고하였다.

이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9년 NSC에서 카스트로 정권 전복을 위해 25명의 쿠바 망명객들을 훈련시킨다는 CIA 계획을 승인했다. CIA의 처음 계획은 쿠바 망명객들을 쿠바에 침투시켜 내부 저항세력과 협력하여 봉기를 한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카스트로의 군대에 비해 저항세력이 미미하였기 때문에 CIA는 대규모 침공계획으로 수정하였다. 1959년 가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개 함대공군그리고 1,400명의 병력을 투입하는 쿠바 침공계획을 승인하였다합동참모본부의 노스우즈 작전에 따르면 CIA가 미국의 선박이나 비행기에 쿠바가 한 것처럼 테러를 꾸며 이를 명분으로 쿠바와 전쟁을 하자는 것이었다.

쿠바 침공을 실행에 옮긴 것은 케네디 대통령이었다미국은 공수부대나 쿠바반란군을 낙하산으로 침투시키는 것을 고려하였으나 케네디 대통령은 정규군을 투입하는 것을 반대하였다반란군이 상륙하기 전인 1961년 4월 15일 쿠바 망명인들이 한 것처럼 위장한 미국의 B26 6대가 쿠바의 공군기지를 공습하였다. 17일에는 미국의 함정과 비행기가 쿠바 연안에 대기하고 있는 상황에서 쿠바 망명인으로 구성되고 미군이 훈련시킨 1500명이 피그만에 상륙하였다그런데 함정은 암초에 걸려 2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살아남은 1,209명은 침공 사실을 알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20만 명의 쿠바 정규군과 민병대에 의해 전원 생포되었다군부와 CIA는 추가적인 공습과 침공을 요청하였으나 국내외 비판을 두려워 한 케네디는 이를 거부하였다.

피그만 침공 이후 미국이 원하였던 쿠바 내부의 반란은커녕 카스트로가 반군을 소탕하였다. 1962년 카스트로는 1,179명의 포로들에 대해 미국으로부터 5,300만 달러 상당의 식품과 의약품을 받고 교환했다카스트로는 미국의 압박에 대응하고자 소련에 접근하였고 소련은 쿠바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였다소련의 베를린 장벽 건설과 쿠바침공 실패로 지도력을 훼손당한 케네디는 미사일 사태에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훗날 피그만 침공에 관여한 로버트 케네디가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고한 전화 녹음이 공개되었다미국이 피그만 침공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하게 된 원인을 제니스(Irving L. Janis)는 정책결정권을 장악한 엘리트들의 자기몰입적인 집단사고(Group Think)의 무모함으로 설명하였다미국은 피그만 침공 이후에도 공작부대를 침투시켜 사탕수수 공장이나 군부대도로 등을 파괴하였다또한 카스트로를 제거하기 위해 카스트로의 구두시가 등에 독극물을 뿌리는 계획을 세웠다. 1964년 공작부대가 스페인 선박을 쿠바 선박으로 오인하여 침몰시킨 이후 미국은 외교 문제로 쿠바에 대한 파괴공장을 중단하였다.


1975년 미 상원 처치위원회가 밝혀낸 바에 따르면 1960년부터 1965년 기간 동안 CIA는 적어도 8번에 걸쳐 카스트로 암살을 시도했다이러한 카스트로 암살계획의 전모는 2007년 6월 26일 CIA가 가족보석(Family Jewel)’이라는 명칭으로 보관하고 있던 기밀문서를 공개하면서 밝혀졌다이 문서에 따르면 CIA는 FBI의 지명수배자 명단에 있는 10명의 인물 중에서 두 명의 마피아 조직 거물을 15만 달러에 매수하여 카스트로 암살을 제안했던 것으로 드러났다쿠바혁명 이후 쿠바의 도박장을 폐쇄당한 마피아는 카스트로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마피아는 쿠바의 관리를 매수하여 독약으로 카스트로를 독살하려고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처치위원회는 미국 대통령이 카스트로 제거 공작을 승인하였는지 밝혀내지 못하였다하지만 2017년 공개된 록펠러위원회의 문서에 따르면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은 CIA가 카스트로를 암살하려는 계획에 대해 알고 있었다.

b) 칠레 전복
 
미국 입장에선 1959년 쿠바에서 무장혁명을 통해 좌익정권이 들어선 점도 놀랍지만 1970년 칠레에서 선거를 통해 좌익정권이 탄생한 것은 더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미 상원 처치위원회1975CIA1963년 이후 10년 동안 칠레에서 추진한 비밀공작의 내용을 공개하였다.
미국은 제3세계에 비밀리에 개입하기 위해 1950년대부터 정부기관의 합동대책반인 ‘5412 패널’, ‘특별그룹(Special Group)’, ‘303 위원회등을 운영해왔는데. 아옌데 대통령의 전복 당시에는 ‘40인 위원회가 활동하였다. 이 기구는 대통령 안보담당보좌관이 의장을 맡고, 정무 담당 국무차관, 국방차관, 합참의장, 그리고 CIA 국장 등으로 구성되었다.
1964년 선거 당시 CIA는 아옌데의 당선을 막기 위해 기독사회민주당 선거운동 자금의 절반이 넘는 260만 달러를 지원하였다. CIA1970년 선거기간 동안 아옌데에 대한 흑색선전을 하였으며 아옌데의 경쟁자에게 제3자를 통해 선거자금을 제공하였다.
아옌데 대통령이 취임 이후 합법적으로 미국 등이 장악한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였다. 아옌데는 미국의 반대를 무시하고 쿠바와 외교관계를 복원하였다. 비록 쿠바의 카스트로가 두 번이나 칠레를 방문하여 지지의사를 밝혔으나 아옌데는 칠레는 선거와 합법적인 방법으로 사회주의의 길을 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아옌데는 소련에 가서도 같은 입장을 천명하였으나 소련은 아옌데의 방식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차관 제공에도 소극적이었다.
1998년 비밀문서에서 해제된 CIA, 국무부, 국방부 문서에 따르면 리처드 헬름스 CIA 국장은 천만 달러 이상을 쓰더라도 칠레 경제를 파탄시키고 쿠데타 전문가를 총동원하라.”는 닉슨 대통령의 지시사항을 친필 메모로 남겼다. 당시 헨리 키신저 백악관 안보담당보좌관 역시 정부의 합동 비상대책반에 군사쿠데타와 미국의 개입을 감추기 위해 필요한 사항을 지시하였다.
1973911일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Jose Ramon Pinochet Ugarte) 장군이 미국의 사주를 받고 가톨릭과 야당의 지지를 얻어 쿠데타를 주도하였다. 대통령 집무실은 쿠데타에 가담한 육해공군과 경찰에 포위되었고, 쿠데타군의 전폭기가 대통령궁에 로켓탄과 폭탄을 투하했다. 쿠데타군이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모네다 궁으로 진입하자 민간인과 대부분의 경호 인력을 피신시킨 아옌데 대통령은 최후를 맞이했다. 1973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다음날 닉슨 미 행정부는 국무성 논평을 통해 쿠데타가 자신들과 무관함을 강조하였다.
c) 과테말라
과테말라는 바나나 등 과일을 미국에 공급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런 단일 대규모 농장은 미국 자본에 의해 지배되었고 과테말라 국민들은 이 농장에서 저임금에 시달렸다. 195065%의 지지로 민주적으로 당선된 아르벤스 대통령은 대농장을 분할하여 농민들에게 배분하는 토지개혁을 강행하였다. 아르벤스 구즈만(Jacobo Arbenz Guzman) 정권은 과테말라 공산당을 합법화하여 정권에 참여시키고, 미국계 회사인 유나이티드 과일 회사(United Fruit Company, UFC)가 소유한 40만 에이 커의 비업무용 바나나 농장을 압수하였다. 유나이티드는 CIA에게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정권을 전복해달라는 로비를 하였다.
미국의 다국적 과일회사를 대변하는 변호사 출신인 달라스 국무장관은 CIA를 시켜 아르벤스 대통령을 쿠데타로 몰아내기로 하였다. 결국 1954627일 아르벤스는 사임하고 카스티요-아르마스는 미국 대사 존 포리포리가 제공해 준 대사관 전용 비행기를 타고 입성해 권력을 장악했다. 집권한 아르마스는 친미 독재를 하면서 농민들의 농지를 빼앗아 초국적 자본의 대농장에 넘겼다.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과 좌익들은 무장투쟁을 하였고 전국에 반미 감정이 높아졌다.
 
d) 도미니카
 
도미니카의 라파엘 트루히요(Rafael Trujillo)1930년 대통령 선거에 승리한 이후 대통령과 대원수를 번갈아 가며 장기 집권하였다. 트루히요는 친미정책을 고수하였지만 부패하였으며 반정부인사들을 살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친미 노선을 유지하는 그를 방관했다. 19560년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폭사시키려다 실패하는 등 이웃나라의 내정에도 간섭하여 미국에 부담이 되었다. 미국은 트루히요의 지나친 독재가 쿠바 사례에서 보듯이 좌익정권 탄생의 배경이 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1961CIA는 현지인을 고용하여 트루히요가 탄 자동차에 기관총을 난사하도록 하여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독재자를 제거하였다.
이후 케네디 대통령은 1961111,800명의 해병대 병력을 도미니카에 파병하여 친미주의자로 알려진 발라구어(Joachim Balaguer)가 정권을 장악하도록 지원했다. 그러나 19632월 총선에서 승리한 보쉬(Juan Bosch)는 미국의 기대와는 달리 보다 강력한 사회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미국 CIA19639월 도미니카 군부의 쿠데타를 지원하여 보쉬 정권을 퇴진시켰다.
 
e) 그레나다
 
그레나다는 1974년 독립하여 영연방국가가 되었으나 외국 자본과 결탁한 독재국가로 전락하였다. 1979년 민중혁명이 일어났고 지도자 모리스 비숍이 수상이 되었다. 그레나다는 소련, 쿠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과 가까워졌고 민중혁명의 확산을 두려워 한 인근 국가들과 미국은 그레나다를 고립하고 제재하였다. 또한 미국은 그레나다가 건설하는 민간공항을 소련이나 쿠바가 사용할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나 미국 하원의 조사에 따르면 민간용으로 밝혀졌다.
마침 그레나다에서 1983년 좌익 세력 간에 내전이 발생하여 친공산주의 강경파가 온건 좌파이자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고려하는 비숍 수상 등을 처형하여 내전상태에 빠졌다. 이에 레이건 대통령은 자국민들에게 테헤란 미대사관 인질사건을 거론하면서 그레나다에 있는 미국 대학생들의 안전을 이유로, 외교적으로는 좌익정권의 전복을 위해 그레나다를 침공하였다. 미국은 특수부대 7천명과 인근 국가의 부대 등 8천여명을 동원하여 그레나다를 점령하였다. 인구 10, 군인 1300여명에 불과한 소국을 점령한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절망감을 치료받았으며, 이듬해 레이건이 그레나다를 방문하였다.
f) 자메이카
 
미국은 자메이카의 알루미늄, 다이아몬드 등의 광산과 사탕수수 산업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메이카의 인민국가당이 1972년에 집권하여 미국의 대자본에게 불리한 국유화 정책을 펼쳤다. 인민국가당의 마이클 맨리는 좌파정권을 전복하려는 앙골라 사태에서 미국의 입장에 반대하면서 쿠바를 지지하였다. 미국은 인민국가당 정부를 전복하려고 친미우파인 노동당을 지원하였다. 미국은 결국 1980년 중상모략과 파괴를 통해 인민국가당 정부가 선거에서 패배하도록 하는데 성공하였다.
g) 베네수엘라
 
201899일 뉴욕타임즈 보도에 따르면 미국이 유럽의 미국 대사관에서 2017년부터 베네수엘라 전직 지휘관과 쿠데타 계획을 수차례 논의하였다.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전현직 미국 관리 11명이 수백 명의지지 세력을 거느리고 있는 반정부인사와 접촉했다. 백악관은 <뉴욕 타임스>의 보도에 대해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고 긍정적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을 보이는 베네수엘라인들과의 대화는 중요하다고 밝혔다. 한편 <시엔엔>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이 20178월 외교·안보 정책 참모들에게 베네수엘라를 침공하는 안을 제시했지만, 허버트 맥매스터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이 라틴아메리카 전체에서 역풍이 불 것이라며 만류했다.

한편 베네수엘라와 인접한 미국의 식민지인 푸에르토리코 주지사는 베네수엘라 정부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미국을 중심으로 한 40여척의 함대가 베네수엘라를 압박하는 해상훈련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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