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세계 공산당·노동자당 회의

1957년 11월 공산주의 12개국의 공산당·노동자당 지도자회의와 64개국의 공산당·노동자당 회의(International Meeting of Communist and Workers Parties)가 연이어 개최되었고 모스크바 선언(Moscow Declaration)이 채택됐다.

이에 앞서 1956년 2월 25일 소련공산당 20차 대회에서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과 미국의 선동에 영향 받아 1956년 10월 헝가리에서 민중봉기가 발생했으나 소련군이 진압했다. 1956년 6월 폴란드에서 발생한 노조파업은 반소봉기로 악화됐다. 당시 유고는 이미 스탈린 시대에 독자노선을 걸으며 소련의 사회주의 종주권에 도전하고 있었다. 흐루쇼프는 스탈린 세력에 대한 숙청을 정당화하면서 스탈린 시대의 고압적인 외교노선을 수정할 것을 약속했다. 

이런 정세 속에서 1957년 처음 열린 ‘각국 공산당·노동자당회의’는 1956년 코민포름이 해소된 이래 국제공산주의 세력의 단결을 도모하면서도 소련의 종주권을 최초로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즉 과거 코민테른과 다른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성격을 지녔다. 사회주의국가 상호간에 자주권과 상호원조의 사회주의국제주의를 정립한 셈이다. 

따라서 모스크바 선언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건설, 자본주의나라의 노동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이 각각 동등한 운동으로서 상호 연결돼 있음을 확인하고 연대와 연합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과거 소련이 공산주의 운동의 세계적 진지이기 때문에 소련을 옹호해야 한다는 입장이 수정된 것이다. 

모스크바 선언은 스탈린주의를 고수하려는 마오쩌둥과 같은 강경파와 탈소련을 외치는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수정주의 모두를 경계하면서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 운동의 단결을 강조했다. 모스크바 선언의 초안을 입수한 티토는 이 회의에 불참했다. 

회의에서 마오쩌둥은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집중을 주장한 반면 이탈리아 공산당 서기장 팔미로 톨리아티는 각국 공산당의 자주성을 강조했다. 루마니아와 조선은 스탈린식 통치를 종식하라는 흐루쇼프의 압박에 반발하면서 유고와 이 회의 내용에 영향 받아 자주노선을 강화했다. 

모스크바 선언은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의 2단계(사회주의 공동체의 수립과 식민지 체제의 해체 시작)를 선언했으며 1960년 모스크바 성명은 자본주의 전반적 위기의 3단계(식민지 체제의 완전붕괴)를 선언했다. 두 회의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두 체제의 역관계가 사회주의에 유리하게 변화되고 있음이 확인됐고, 강력한 사회주의 진영의 존재로 자본주의와의 전쟁이 회피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평화옹호론, 두 체제의 평화공존, 미소 평화공존, 유럽에서 의회 혹은 국가를 통한 사회주의로서 평화적 이행과 같은 선진국혁명론이 제기됐으며 이는 소련공산당 20차 대회에서 이미 선언된 것을 확인한 것이었다. 사회주의혁명의 평화적 실현을 위한 필요조건에 대해 1957년 모스크바 선언은 거대 독점자본과 반동세력에 대한 계급투쟁을 확대할 것을 요구했다. 나아가 1960년 모스크바 성명은 국가독점자본주의하에서 반독점의 강령(선진국 평화, 제3세계 해방, 민주주의 확대, 주요 경제부문 국유화 및 민주적 관리, 인민의 삶 개선, 노농동맹을 위한 농업개혁)을 강조했다. 

이러한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론은 1956년 소블레프, 1958년 콘스탄티노프, 1960년 쿠시넨의 민주적 개혁론 혹은 개량론과 맥을 같이 한다. 반면 1947년 식민지에서 인민민주주의혁명론은 중국식 무장혁명론 즉 신민주주의혁명론으로 구체화됐다. 결론적으로 선진국과 제3세계는 사회주의로 가는 방식이 다르다는 “사회주의로의 민족(국가)적 길”이 원칙으로 정립됐다. 

특히 1960년 성명은 식민지 체제를 벗어난 신생국에 대해서 비자본주의적 발전을 포함한 민족적, 민주적 혁명을 선언했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민족부르주아지 체제가 당시 정세 속에서 진보적이라고 평가했으며, 이 체제의 진보성을 활용한다면 과거 반동적 토대의 종속성·후진성을 극복하고 궁극적으로 사회주의에 이를 수 있다고 전망했다. 

제국주의에 의해 형식적으로 독립된 것에 불과한 신식민지에 대해서도 그 지배계급이 민족부르주아라도 완전한 해방과 독립을 얻으려는 한도 내에서 진보성을 인정한 점에서 장개석의 부르주아 정부를 타도한 중국의 인민민주주의혁명론과 다른 지점이다. 

두 회의는 평화공존론과 선진국혁명론에 비판적인 중국의 입장을 고려하여 각 국가와 민족의 특성에 따른 사회주의로의 다양한 경로를 강조했다. 즉 사회주의 혁명과 공산주의 건설의 공통의 원칙을 정식화하고, 각국의 당이 이를 각국의 구체적인 여러 조건에 응해서 자주적으로 적용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흐루쇼프의 이러한 노선은 1968년 소련군이 체코 정부와 인민의 자유화 정책을 탄압한 이후 사회주의 국가의 자본주의화를 막기 위해 소련이 개입할 수 있다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에 의해 사실상 사문화됐다.


프롤레타리이 독재, 과도기 논쟁 

1957년 세계공산당노동당 대회에서 프롤레타리아독재 시기에 대한 논쟁이 소련과 중국 중심으로 전개됐고 북 등 다른 사회주의국가도 가세했다. 1967년 5월 25일 김일성의 교시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에로의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독재 문제에 대하여”가 나오게 된 배경은 황장엽이 인간 중심의 철학을 고안하게 된 것과 관련이 있다. 당시 중국은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독재가 지속되는 과도기를 공산주의가 완전히 실현된 때로 보았으며, 김일성 주석의 동생이자 모스크바 유학파인 김영주가 이를 지지했다. 

반면 스탈린의 공포정치를 비판해온 흐루쇼프의 소련은 과도기를 사회주의 경제제도가 실현된 때로 보면서 당시의 소련이 이제는 과도기를 지났으므로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완화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황장엽은 “사회발전의 동력“이라는 논문을 통해 과도기를 사회주의 경제제도가 실현되고 동시에 사회주의 생산력이 발전하여 사회주의 경제제도의 우월성이 입증될 때까지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황장엽은 같은 논문에서 인텔리의 진보성은 출신 성분이 아니라 사회발전에 기여한 여부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선우현, 2000: 74-75). 

김영주는 황장엽의 논문이 소련의 입장을 따르는 수정주의라고 비판하였으며, 이에 김일성이 김영주와 황장엽을 동시에 비판하면서 5.25교시를 발표하였다. 5.25교시는 황장엽을 비롯한 인텔리의 혁명화를 강조하였으며, 이에 따라 황장엽은 1년 동안 사상검열과 총화에 시달렸다. 특히 이때 자신의 논문으로 인해 김일성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비판을 받았다. 

5.25교시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과도기뿐만 아니라 모든 제국주의가 소멸되어 사회주의의 종국적 승리가 이뤄질 때까지 지속되어야 한다. 북이 말하는 과도기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을 세울 때부터 정치, 경제, 사상, 문화 등의 모든 분야에서 자본주의를 완전히 타승하고 사회주의의 전면적 승리를 이룩해 무계급사회를 실현할 때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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