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의 특수부대 양성과 베트남에서 남북 간의 대리전쟁
1956년 8월 조선 내의 친중파와 친소파가 손을 잡고 김일성 수상을 숙청하려다 김일성의 빨치산 세력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이 8월 종파사건 이후 조선은 친중파와 친소파를 제거하고 중국군을 철수시키는 등 주체노선을 정립했다.
특히 1950년대 말부터 중소분쟁으로 조선은 중소 어느 쪽에도 의존하지 않는 자주국방을 추구했다. 또한 쿠바 미사일 위기로 소련군이 쿠바에서 전면 철수하자 쿠바와 비슷한 처지에 놓일 수 있는 조선은 더욱 위기감을 느꼈다. 이에 1962년 12월 조선로동당 제4기 제5차 전원회의는 전 인민의 무장화, 전국의 요새화, 전군의 간부화, 전군의 현대화를 내용으로 하는 '4대 군사 노선'을 채택했다. 조선은 새로운 군사노선에 따라 한국을 기습공격할 수 있는 대규모 특수부대를 양성했다.
한편 한국은 미국의 요청으로 1965년 10월부터 1973년까지 8년 동안 해병 청룡부대와 육군 맹호부대, 백마부대 등 연인원 약 32만 5,000여 명의 정예부대를 파병했다. 한미가 베트남 전쟁에 주력부대를 투입함에 따라 조선과의 전면전이 사실상 곤란한 상황에 놓였다. 반면 조선이 북베트남을 지원하는 공산권에 합세하여 한국과 주한미군을 교란하고 한국군의 추가파병을 막고자 소규모 침투를 반복했다.
한국과 조선은 베트남에서 대리전쟁을 치렀다. 조선은 1966년부터 1973년까지 북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공군 조종사와 공병부대 등을 비밀리에 파병했다. 약 60~80명의 전투 조종사와 40여 명의 정비·지원 병력이 파병됐다. 조선인민군 조종사들은 미그(MiG)-17, 미그-21 전투기를 몰고 주로 하노이 영공을 방어했으며 미군 전투기와 공중전을 치렀다.
최소 14명에서 수십 명의 조선인민군 조종사가 사망했고 유해는 조선으로 송환됐지만 베트남 하노이 인근 박장성에 조선인민군 전사자 묘지가 조성됐다. 2019년 김정은 위원장의 베트남 방문에 앞서 2월 17일 조선의 실무 대표단이 박장성의 전사자 묘역을 참배했다.
또한 조선은 2개 공병여단 약 3,000~4,000명을 보내 북베트남 군사기지와 지하 갱도 건설을 지원했다. 이 밖에도 심리전 부대를 보내 한국군을 대상으로 한 투항 권고 방송을 진행하기도 했다. 조선은 소총과 각종 무기 10만여 정과 군복 100만 벌 등 전쟁 물자를 제공했다. 조선이 파병한 이유는 공산권 국가들과의 협력을 강화해 이들의 지원을 받는 한편 파병을 통해 현대전 전술을 익히고 미군의 전술을 파악하고자 했다.
2. 베트남 전쟁의 한미전력을 분산시키려는 조선의 게릴라 침투
‘제2의 한국전쟁(The Second Korean War)’은 미군이 인정한 것으로서 1966년 10월부터 1969년 12월까지 비무장지대(DMZ)와 후방 지역에서 발생한 교전을 말한다. '제2의 한국전쟁' 중 한국군 299명, 미군 75명이 전사했으며 국군 550명, 미군 111명이 부상당했다. 당시 조선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저지하고 미국의 전력을 분산시키고자 했다.
조선은 소규모 특수부대를 침투시켜 청와대를 습격하거나 울진·삼척 지역에서 게릴라 전투를 감행했다. 또한 미군의 푸에블로호 나포와 정찰기 공격 등 해상과 공중에서 미군의 도발에 대해 강경한 대응을 유지했다.
한국은 1·21 사태에 보복하려고 실미도 684부대를 비밀리에 운영했다. 이외에도 한국은 준전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향토예비군 창설, 육군3사관학교 개설, 남산터널과 같은 대규모 방공호 건설, 간첩을 색출하기 위한 주민등록제도 도입, 고교와 대학에 교련 과목 신설 등을 시행했다.
1963년 7월 29일 새벽 5시 40분경에 군사분계선 남방 100m 지점에 매복한 조선인민군이 휴전선을 경비하던 미 2사단 병력을 기습하여 2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당했다. 1966년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방한에 맞춰 11월 2일 조선인민군이 순찰을 돌던 미 2사단 병력들에게 총격을 가해 미군 병사 6명과 카투사 1명이 사망했다.
1967년 5월 22일 조선인민군이 서부전선의 미 2사단 초소 2곳을 공격하여 미군 2명이 전사하고 19명이 중상을 입었다. 1967년 8월 7일 야간에 판문점 남방 대성동 자유의 마을 앞에서 미군 군용 트럭이 침투한 북한군의 매복 공격으로 미군 3명이 전사하고 17명이 부상당했다. 1967년 8월 28일 판문점 인근에서 지원임무를 맡던 미 제76공병대 병력이 기습을 받아 미군 2명, 국군 2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을 당했다.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인근에서 군경과의 교전 후 뿔뿔이 흩어진 조선인민군 124군 소속 부대원들이 비무장지대(DMZ)를 통해 북측으로 탈출하고자 했다. 이에 주한미군 제2사단의 책임구역인 서부전선 DMZ 철책 지대에 퇴로차단 및 소탕 작전명령이 내려졌다.
124군 소속 부대원들은 자신들이 남침한 미 제2사단 담당 철조망 구역을 통해 월북을 시도하면서 임진강과 DMZ 일대에서 미군 순찰조 및 매복조와 여러 차례 교전이 발생했다. 1월 26일 124군 소속 부대원들은 미 2사단 72기갑연대 소속 중대와 교전했으며, 이때 살바도르 모히카 이병(18세)가 전사했다. 모히카 이병 외 총 3명의 미군이 전사했다.
1968년 4월 14일 야간에 판문점 경비교대를 위해 트럭을 타고 이동하던 미군이 대성동 마을 입구에서 매복 중이던 조선인민군의 기습을 받아 미군 2명과 카투사 한국군 2명이 전사하고 2명이 중상을 입었다.
1969년 3월 15일 비무장지대 내에서 군사분계선 표식 작업을 하던 미 2사단 23연대 소속 병사들이 조선인민군의 총격으로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 이 전투 직후 미군 사상자를 구조한 헬기는 이륙 후 조선인민군의 공격으로 추락했다. 군의관인 벤자민 스펜서 박 주니어 대위를 포함한 탑승자 7명 전원이 사망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조선의 소규모 침투가 이어졌다. 남침용 땅굴이 연달아 발견되는 가운데 1974년 11월 20일 경기도 연천군 비무장지대 내 제1 땅굴을 수색하던 한·미 공동조사반이 부비트랩(위장 폭발물)을 건드려 미군 중령과 한국군 소령이 사망했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관측 시야 확보를 위해 미루나무를 제거하던 미군 소령 등 2명이 조선인민군의 폭행으로 사망했다. 미국이 데프콘 3를 발령하고 항모전단과 전략폭격기를 한반도 인근에 배치했다. 미군이 삼엄한 경비 아래 미루나무를 제거하는 폴 바니 작전을 감행하자 조선이 사과문을 보냈다. 사건 이후 남북 공동경비구역 내 군사분계선(MDL)이 설치되어 남북 공동경비구역이 사라지고 남북이 각자 영역을 담당했다.
3. 대만전쟁과 제3한국전쟁 가능성
베트남 전쟁에 남북 모두 파병했듯이, 대만전쟁에 남북이 각각 미국과 중국을 위해 파병한다면 남북은 베트남 전쟁 때처럼 대만에서 대리전쟁을 하게 된다. 다만 미국은 한국군 주력이 대만전쟁에 참전하게 되면 대북방어에 구멍이 생겨 조선이 도발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미국은 대만과 한국에서 두 개의 전쟁을 치룰 수 없기 때문에 조선의 도발을 유발할 한국군의 파병에 소극적이다. 미국은 한국이 직접 파병하기보다 후방의 지원기지를 제공하기를 선호한다. 한국군이 직접 파병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조선은 한국군과 주한미군을 한반도에 묶어 두기 위해 베트남 전쟁 때처럼 국지적인 소규모 전투를 감행할 우려가 있다.
중국 역시 대만전쟁이 일어나면 조선이 한국에서 군사적 긴장을 조성해 미군의 전력을 분산시키길 원할 수 있다. 특히 중국과 조선은 상대방이 침공받으면 자동적으로 참전하는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있다. 조선은 대만전쟁이 일어나면 한국에서 전면전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핵무기를 통해 전면전을 억제할 수 있다고 자신하면 소규모 침투를 시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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