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침범한 미국의 정찰기와 전략전폭기

1. 냉전시대 미국의 조선영공 정기 정찰

기밀 해제된 미 중앙정보국(CIA) 문서에 따르면 미 공군의 초고속 고공정찰기 SR-71 블랙버드는 1969년부터 동해에서 서해로 조선 상공을 여러 번 횡단하는 정찰비행을 반복적으로 수행해왔다. 1981년 8월 26일 블랙버드가 DMZ를 따라 조선인민군의 대규모 군사훈련을 감시하던 중 한강 하구의 조선 북안의 촉대리 부근 기지에서 소련제 SA-2(S-75) 지대공 미사일 2발의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정찰기의 전자 방어시스템(DEF)이 조선의 레이더 신호를 탐지해 즉각 자동 전자 교란(Jamming)을 시작했다. 요격미사일은 마하 3 이상 속도로, 8만 피트(약 24km) 고도로 비행하던 SR-71을 쫓아가지 못하고 정찰기에서 수  마일 떨어진 공중에서 자폭했다.

1983년 3월에도 조선은 격추를 시도했지만 요격용 미사일이 민가로 떨어졌다. SR-71은 1998년 고비용, 최신 미사일에 의한 격추 위험, 인공위성의 발전 등의 이유로 퇴역할 때까지 4천 번의 미사일 공격을 받았지만 단 한 대도 격추되지 않았다.

U2 고고도정찰기는 1976년 오산기지에 배치돼 50년 넘게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이 정찰기는 글로벌 호크와 달리 전자장비 이외에도 광학카메라까지 장착하고 있으며 0.1미터의 물체를 식별할 수 있다. 또한 최고 25킬로 상공까지 오를 수 있어 보통의 대공미사일로 격추하기 힘들다. 다만 최고속도가 마하 0.7에 불과하고 동체가 약해 소련, 중국, 쿠바의 영공을 침범했다가 최신 S-75(SA-2) 지대공 미사일에 의해 격추된 적이 있다. 한국에선 단순 사고로 3차례 추락했다. 

조선은 2023년 7월 10일 국방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이 정찰기가 조선의 동해와 서해 상공의 영해를 침범해왔다고 주장했다. 반면 미군은 이 정찰기가 휴전선 이북에서 200킬로 내의 평양과 원산까지 정찰할 수 있어 조선의 영공에 진입할 이유가 없다고 반박했다. 

2026년 현재 미국과 한국은 고고도 무인정찰기인 RQ-4 글로벌 호크를 운영하고 있다. 글로벌 호크는 야간이나 기상악화에 영향을 받지 않고 최장 36시간 동안 최고 20km 고도에서 전자장비로 반경 200km 내의  0.3m 크기의 지상 이동 목표물(MTI)을 정찰할 수 있다. 미국은 이 무인정찰기의 성능으로 인해 조선의 영공에 진입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다만 글로벌 호크는 조선의 도발 징후가 있을 때 의도적으로 위치식별 장치(트랜스포더)를 켠 채 군사분계선 인근을 정찰하면서 조선을 압박한다. 조선은 2023년 7월 10일 담화를 통해  미군의 RC-135, U-2S 정찰기, 글로벌 호크 등이 조선의 영해 위 영공을 침범해왔다고 주장하며 격추하겠다고 위협한 바 있다. 


2. 북핵 개발과 미군전폭기의 조선 침투

2004년 2월과 6월 베이징에서 6자회담 및 실무회의가 열렸으나, 미국의 선(先)핵포기와 조선의 선(先)동결-보상 요구가 맞서며 성과 없이 중단됐다. 9월 최수헌 조선 외무성 부상은 유엔 총회 연설을 통해 “영변 원자로의 폐연료봉 재처리를 완료했으며, 이를 이미 핵무기화 했다.”고 선언했다. 

9월 9일 조선의 양강도 일대에서 대규모 폭발과 버섯구름 모양의 연기가 관측되어 국제사회가 핵실험 가능성을 제기했으나, 조선 측은 삼수발전소 건설을 위한 발파 작업이라고 해명했다.

2005년 2월 10일 조선 외무성은 성명을 통해 자위권을 위해 핵무기를 제조·보유하고 있음을 전 세계에 공식 선언하고, 6자회담 참가 중단을 발표했다. 조선은 4월 영변원자로 가동을 중단한 후, 핵폭탄 수 개를 만들 수 있는 분량의 사용후 핵연료봉을 인출하여 재처리에 들어갔다. 

7월 6자회담이 재개돼 9월 19일 조선이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계획을 포기’하는 대신 체제 안전 보장과 에너지를 지원받는 9·19 공동성명이 타결됐다. 하지만 미국 재무부가 조선의 통치 자금이 묶인 마카오의 BDA 은행을 돈세탁 우려 기관으로 지정하고 자금을 동결하자 조선이 반발하면서 9·19 성명의 이행은 곧바로 중단됐다. 

미국은 조선에게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는 협상에 나서도록 최첨단 무기를 통해 압박해왔다. 특히 미국의 스텔스 전투기 F-117 나이트호크는 군사훈련 기간 중 수 차례 조선 영공에 침투했다. 일본의 극우 잡지 ‘사피오’(SAPIO) 2005년 8월 24일자 기사에 따르면 2005년 6월 F-117 전투기 15대가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머물고 있는 ‘특각’ 상공에서 급강하와 급상승을 반복했다. 2004년 일본의 문예춘추도 F117이 조선 영공을 침입한 적이 있다고 보도했다. 

특히 F-117 조종사 마이클 드리스콜(Michael Driscol) 대위가 2008년 4월 23일 ‘에어포스타임스’(Airforcetimes)와의 인터뷰에서 “2007년 F-117를 조종하면서 조선 영공을 휘젓고(buzzing) 다녔다.”고 밝혔다. 

미국이 스텔스 전폭기를 침투할 때마다 조선은 긴급대응에 나섰지만 탐지가 어려워 격추할 수 없었다. 조선은 경비 문제로 스텔스 전투기를 탐지할 수 있는 고성능 레이더를 비상시에만 작동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이 영공 침입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가의 체면 때문에 공식적으로 항의하지 못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2008년 에어포스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F-117 퇴역 이후 F-22 랩터가 조선의 영공을 침입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2007년 7월 26일 자유아시아방송(RFA)이 인용한 홍콩 봉황 TV의 보도에 따르면 F-22 전투기가 8대가 괌 기지를 떠나 일본 상공에서 공중급유를 한 다음 북한 북쪽 영공에 들어갔다 안전하게 돌아왔다. 

홍콩 봉황 TV는 정확한 날짜까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이 보도의 취재원인 대만 삼군대학 교관 송조문에 의하면 F-22 전투기가 군사 목표물 위에서 선회를 했고 모의 공격을 시도했다. 당시 한국군 관계자의 증언에 따르면 미국의 스텔스기가 한국에도 사전통보를 하지 않고 갑자기 나타난 적이 몇 번 있었고 그때마다 조선에서 예민한 보도가 나왔다.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의 조선 자금 동결 문제가 다뤄진 2007년 2.13 북미협상 당시에도 미국은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일본의 오키나와 가데나 공군기지에 F-22전투기 12대를 전진 배치해 조선을 압박했다. F-22가 미 본토 이외의 장소에 배치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랩터는 미국 본토  랭글리 기지, 알래스카, 하와이를 모기지로 하여 상시 배치돼 있으며, 이 랩터들이 괌이나 가데나 기지에 전진 배치되고 있다. 한국에는 2016년 오산기지, 2018년 광주기지, 2024년 군산기지에 임시로 배치됐지만 최대 2주 이내로 국한됐다.

현재 괌에 F-22 18기가 전진 배치되어 있으며, 유사시에는 공중급유를 받아가며 초음속 순항으로 다른 전투기나 전략폭격기 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조선을 타격할 수 있다. 

조선의 핵무장 이후 미국의 전략폭격기가 한반도 상공에 자주 진입하고 있다. 2017년 북미 간에 핵전쟁 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9월 23일 미국 국방부의 발표에 따르면 B-1B 재래식 무기 전략폭격기 랜서(죽음의 백조)가 동해상의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조선 쪽 국제공역을 비행했다. 이 비행에는 호위용 F-15C 외에도 급유기·전자전기·구조헬기 등 실제 타격 임무를 수행하는 공격 편대군이 참가했다. 다만 공격 편대는 조선의 방공용 지대공미사일 SA-5(S-200)의 최대사거리 (250~300㎞) 밖에서 비행했다.

한반도에 자주 나타나는 랜서와 달리 미 공군의 B-2 스피릿(Spirit) 스텔스 전략 폭격기(침묵의 암살자 혹은 유령)가 공식적으로 한반도 상공에 출격하여 훈련을 수행한 것은 2013년 3월 28일 단 한 차례이다. 이날 두 대의 스피릿이 미 미주리주 화이트맨 공군기지에서 이륙해 공중급유를 받으며 만 km 이상을 날아와 서해 직도 사격장에 모의 핵폭탄(inert munitions)을 투하하는 훈련을 마친 뒤, 미국 본토로 복귀했다. 

당시 조선의 3차 핵실험 및 정전협정 백지화 선언 등으로 한반도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자, 미국이 강력한 확장억제 의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이례적으로 출격 사실을 공개했다. 스피릿은 핵무기 전략폭격기이므로 한미가 한반도비핵화를 추구하고, 이 핵전략폭격기가 한반도에 진입하면 조선이 이에 대응하는 핵무기 개발이 정당화되기 때문에 한반도 근처에는 오지 않는다. 특히 미국이 고도의 비밀을 유지하는 가장 비싼 군용기이다. 

반면  B-52H 핵무기 전략폭격기 스트래토포트리스(하늘의 요새)는 수차례 한반도에 진입했으며, 특히 2023년 청주기지에 착륙하고 경기 성남 서울공항에서 열린 항공우주·방위산업 전시회 개막식에서 낮은 고도로 축하 비행을 선보이며 비행 모습이 공개됐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의 조선 침투와 미군의 사상자

2025년 8월 18일 한미동맹재단과 주한미군전우회는 한국전쟁 이후 조선(북한)과의 전투로 사망한 주한미군 103명을 추모하는 도서 『6·25전쟁 이후 전사한 주한미군 공훈록』을 출판했다. 

미군과 조선인민군은 1955년 미군 훈련기 격추사건부터 1994년 헬기 격추사건까지 10여 차례 교전했으며, 1968년 한 해만 군사분계선 부근에서 조선인민군과의 전투로 미군 13명이 전사하고 42명이 부상을 당했다. 전투는 미군의 도발에 의한 것과 조선인민군의 도발에 의한 것으로 분류된다. 조선의 도발에 의한 것들에 비해서 미군의 도발에 의한 것들은 냉전구조 아래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미군의 도발은 대부분 항행의 자유라는 명분을 내세워 해상과 공중에서 조선의 영토 코 앞까지 진출하여 조선을 압박하다가 발생한 사건들이다. 

1955년 8월 17일 미 공군 소속의 소형 훈련기(LT-6)가 비무장지대 남측 선을 따라가다 중부전선 김화 동쪽 약 12마일 지점 상공에서 조선 영공을 침범하여 조선인민군의 대공포에 의해 격추됐다. 

조종사 범퍼스 중위(Guy H. Bumpus)는 머리에 부상을 입고 조선인민군에 잡혔으나 관측관 찰스 브라운 대위(Charles W. Brown)는 격추 당시 사망했다. 조선인민군은 유엔사령부와 협상 끝에 8월 23일 시신과 포로를 비무장지대를 통해 돌려줬다. 

1965년 4월 28일 미 공군 소속의 RB-47 정찰기가 신호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동해의 조선 원산항에 접근했다가 조선 공군 MiG-17 전투기 두 대로부터 기관총 사격을 받았다. 이에 정찰기는 기체 후방에 장착된 20mm 원격 제어 기관포(Tail Cannon)로 반격했다. 

미군 정찰기는 동체와 날개 등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으나 탑승자 6명 전원이 부상 없이 일본의 요코다 공군기지로 귀환했다. 조선은 미군기가 영공을 침범했다고 주장했으나 미군은 원산으로부터 약 80마일 떨어진 공해상에 있었다고 반박했다. 

당시 미국과 한국은 베트남 전쟁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기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과의 전쟁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미국은 이례적으로 조선인민군에 대해 보복을 하지 않고 오히려 정찰노선을 원산으로부터 150마일 밖으로 후퇴했다. 

1968년 1월 23일 미 해군 정보수집함 USS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바다에 접근했다가 조선 해군 초계정 4척과 미그기 2대의 공격을 받았다. 미군 승조원 1명이 사망하고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으나 푸에블로호는 50구경 기관총 2정만 갖추고 있었지만 저항하지 못하고 나포됐다. 

미국은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동해에 전개하고 공군 전폭기를 한반도 주변에 배치했지만 결국 28차례에 걸친 협상 끝에 결국 영해 침범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사건 발생 11개월 만인 1968년 12월 23일, 승조원 82명과 시신 1구가 판문점을 통해 미국 측으로 인도됐다. 

푸에블로호 선체는 조선에 의해 해체 후 육지도로로 운송돼 평양 대동강 변의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다. 푸에블로호는 미 해군 역사상 유일하게 외국에 나포된 현역 군함(USS)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1969년 4월 15일 미 해군 소속의 EC-121 정찰기가 조선과 소련 지역의 전파정보를 수집할 목적으로 일본 아쓰기 해군 비행장에서 이륙해 동해 조선의 청진시 남동쪽 해상으로 접근했다. 정찰기는 조선인민군의 MiG-21 전투기로부터 미사일 공격을 받아 해상에 추락했다. 

격추 지점에 대해 조선은 영공이라고, 미국은 공해상이라고 주장하며 서로 비난했다. 하지만 당시 베트남 전쟁에 전력을 집중하던 닉슨 행정부는 군사보복 대신 기동부대 파견과 정찰기 호위 조치만 취한 채 사건을 마무리했다.

이 사건으로 오버스트리트 해군소령 외 탑승자 31명 전원이 사망하여 냉전 시기 미군과 공산권의 군사적 충돌 중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미군 사망자가 발생했다. 

단일사건으로 가장 많은 사망자가 나온 전투는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 중이던 1967년 6월 8일 일어났다. 이날 이스라엘 공군 전투기와 해군 고속어뢰정이 국제수역에 있던 미 해군 정보수집함 USS 리버티호를 기습 공격해 미 해군 승조원 34명이 사망하고 171명이 부상했다.

1977년 7월 14일 미 육군 CH-47 치누크 헬기가 평택의 캠프 험프리스를 이륙해 비무장지대에서 정찰 중 비무장지대 동쪽 끝자락에서 북쪽으로 기수를 틀었다. 한국군 초소에서 항로를 이탈했음을 알리기 위해  경고사격을 했으나 헬기는 조선 영공으로 진입했다. 

조선인민군이 사격을 하자, 헬기는 기체 점검을 위해 조선영토에 잠시 착륙했으나 조선인민군이 접근하자 남쪽으로 이륙했다. 헬기는 조선인민군의 대공사격으로 군사분계선 북방 약 4km 지점에서 격추됐다. 승무원 3명이 사망하고 부조종사 글렌 슈완케(Glenn M. Schwanke) 준위는 부상을 입은 채 생포됐다. 카터 대통령은 사고 직후 조선에 사과했고 조선은 7월 16일 판문점을 통해 생존자와 승무원 3명의 유해를 송환했다.

1979년 12월 판문점 부근 군사분계선에서 정찰임무를 수행 중이던 미군 병사가 짙은 안개로 북쪽 지역으로 넘어가 북이 설치한 지뢰를 건드려 부상당했다. 이를 구하려다 동료도 지뢰폭발로 사망했다.

1994년 12월 17일 주한미군 OH-58C 카이오와 헬기가 강원도 인제군 비무장지대(DMZ) 인근에서 정찰 비행 중 조선의 강원도 금강군 지역으로 침범했다. 조선인민군이 휴대용 대공 미사일 또는 고사포를 발사하여 헬기를 격추했다. 헬기 불시착 과정에서 조종사는 사망하고 부조종사는 생포됐다. 

조선은 12월 22일 조종사의 유해를 판문점을 통해 송환했으나 부조종사를 간첩 협의로 억류했다. 미국 정부는 토마스 허버드 국무부 부차관보를 평양에 특사로 파견했다. 특사가 조선에 영공침범 사실을 인정하고 유감의 뜻을 표명하는 합의서에 서명한 후 부조종사는 2월 30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베트남 전쟁과 제2한국전쟁, 대만전쟁과 제3한국전쟁

1. 조선의 특수부대 양성과 베트남에서 남북 간의 대리전쟁

1956년 8월 조선 내의 친중파와 친소파가 손을 잡고 김일성 수상을 숙청하려다 김일성의 빨치산 세력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이 8월 종파사건 이후 조선은 친중파와 친소파를 제거하고 중국군을 철수시키는 등 주체노선을 정립했다. 

특히 1950년대 말부터 중소분쟁으로 조선은 중소 어느 쪽에도 의존하지 않는 자주국방을 추구했다. 또한 쿠바 미사일 위기로 소련군이 쿠바에서 전면 철수하자 쿠바와 비슷한 처지에 놓일 수 있는 조선은 더욱 위기감을 느꼈다. 이에 1962년 12월 조선로동당 제4기 제5차 전원회의는 전 인민의 무장화, 전국의 요새화, 전군의 간부화, 전군의 현대화를 내용으로 하는 '4대 군사 노선'을 채택했다. 조선은 새로운 군사노선에 따라 한국을 기습공격할 수 있는 대규모 특수부대를 양성했다. 

한편 한국은 미국의 요청으로 1965년 10월부터 1973년까지 8년 동안 해병 청룡부대와 육군 맹호부대, 백마부대 등 연인원 약 32만 5,000여 명의 정예부대를 파병했다. 한미가 베트남 전쟁에 주력부대를 투입함에 따라 조선과의 전면전이 사실상 곤란한 상황에 놓였다. 반면 조선이 북베트남을 지원하는 공산권에 합세하여 한국과 주한미군을 교란하고 한국군의 추가파병을 막고자 소규모 침투를 반복했다. 

한국과 조선은 베트남에서 대리전쟁을 치렀다. 조선은 1966년부터 1973년까지 북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공군 조종사와 공병부대 등을 비밀리에 파병했다. 약 60~80명의 전투 조종사와 40여 명의 정비·지원 병력이 파병됐다. 조선인민군 조종사들은 미그(MiG)-17, 미그-21 전투기를 몰고 주로 하노이 영공을 방어했으며 미군 전투기와 공중전을 치렀다. 

최소 14명에서 수십 명의 조선인민군 조종사가 사망했고 유해는 조선으로 송환됐지만 베트남 하노이 인근 박장성에 조선인민군 전사자 묘지가 조성됐다. 2019년 김정은 위원장의 베트남 방문에 앞서 2월 17일 조선의 실무 대표단이 박장성의 전사자 묘역을 참배했다. 

또한 조선은 2개 공병여단 약 3,000~4,000명을 보내 북베트남 군사기지와 지하 갱도 건설을 지원했다. 이 밖에도 심리전 부대를 보내 한국군을 대상으로 한 투항 권고 방송을 진행하기도 했다. 조선은 소총과 각종 무기 10만여 정과 군복 100만 벌 등 전쟁 물자를 제공했다. 조선이 파병한 이유는 공산권 국가들과의 협력을 강화해 이들의 지원을 받는 한편 파병을 통해 현대전 전술을 익히고 미군의 전술을 파악하고자 했다. 


2. 베트남 전쟁의 한미전력을 분산시키려는 조선의 게릴라 침투

‘제2의 한국전쟁(The Second Korean War)’은 미군이 인정한 것으로서 1966년 10월부터 1969년 12월까지 비무장지대(DMZ)와 후방 지역에서 발생한 교전을 말한다. '제2의 한국전쟁' 중 한국군 299명, 미군 75명이 전사했으며 국군 550명, 미군 111명이 부상당했다.​ 당시 조선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저지하고 미국의 전력을 분산시키고자 했다. 

조선은 소규모 특수부대를 침투시켜 청와대를 습격하거나 울진·삼척 지역에서 게릴라 전투를 감행했다. 또한 미군의 푸에블로호 나포와 정찰기 공격 등 해상과 공중에서 미군의 도발에 대해 강경한 대응을 유지했다.

한국은 1·21 사태에 보복하려고 실미도 684부대를 비밀리에 운영했다. 이외에도 한국은 준전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향토예비군 창설, 육군3사관학교 개설, 남산터널과 같은 대규모 방공호 건설, 간첩을 색출하기 위한 주민등록제도 도입, 고교와 대학에 교련 과목 신설 등을 시행했다. 

1963년 7월 29일 새벽 5시 40분경에 군사분계선 남방 100m 지점에 매복한 조선인민군이 휴전선을 경비하던 미 2사단 병력을 기습하여 2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당했다. 1966년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방한에 맞춰 11월 2일 조선인민군이 순찰을 돌던 미 2사단 병력들에게 총격을 가해 미군 병사 6명과 카투사 1명이 사망했다.

1967년 5월 22일 조선인민군이 서부전선의 미 2사단 초소 2곳을 공격하여 미군 2명이 전사하고 19명이 중상을 입었다. 1967년 8월 7일 야간에 판문점 남방 대성동 자유의 마을 앞에서 미군 군용 트럭이  침투한 북한군의 매복 공격으로 미군 3명이 전사하고 17명이 부상당했다. 1967년 8월 28일 판문점 인근에서 지원임무를 맡던 미 제76공병대 병력이 기습을 받아 미군 2명, 국군 2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을 당했다.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인근에서 군경과의 교전 후 뿔뿔이 흩어진 조선인민군 124군 소속 부대원들이 비무장지대(DMZ)를 통해 북측으로 탈출하고자 했다. 이에 주한미군 제2사단의 책임구역인 서부전선 DMZ 철책 지대에 퇴로차단 및 소탕 작전명령이 내려졌다. 

124군 소속 부대원들은 자신들이 남침한 미 제2사단 담당 철조망 구역을 통해 월북을 시도하면서 임진강과 DMZ 일대에서 미군 순찰조 및 매복조와 여러 차례 교전이 발생했다. 1월 26일 124군 소속 부대원들은 미 2사단 72기갑연대 소속 중대와 교전했으며, 이때  살바도르 모히카 이병(18세)가 전사했다. 모히카 이병 외 총 3명의 미군이 전사했다. 

1968년 4월 14일 야간에 판문점 경비교대를 위해 트럭을 타고 이동하던 미군이 대성동 마을 입구에서 매복 중이던 조선인민군의 기습을 받아 미군 2명과 카투사 한국군 2명이 전사하고 2명이 중상을 입었다.

1969년 3월 15일 비무장지대 내에서 군사분계선 표식 작업을 하던 미 2사단 23연대 소속 병사들이 조선인민군의 총격으로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 이 전투 직후 미군 사상자를 구조한 헬기는 이륙 후 조선인민군의 공격으로 추락했다. 군의관인 벤자민 스펜서 박 주니어 대위를 포함한 탑승자 7명 전원이 사망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조선의 소규모 침투가 이어졌다. 남침용 땅굴이 연달아 발견되는 가운데 1974년 11월 20일 경기도 연천군 비무장지대 내 제1 땅굴을 수색하던 한·미 공동조사반이 부비트랩(위장 폭발물)을 건드려 미군 중령과 한국군 소령이 사망했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관측 시야 확보를 위해 미루나무를 제거하던 미군 소령 등 2명이 조선인민군의 폭행으로 사망했다. 미국이 데프콘 3를 발령하고 항모전단과 전략폭격기를 한반도 인근에 배치했다. 미군이 삼엄한 경비 아래 미루나무를 제거하는 폴 바니 작전을 감행하자 조선이 사과문을 보냈다. 사건 이후 남북 공동경비구역 내 군사분계선(MDL)이 설치되어 남북 공동경비구역이 사라지고 남북이 각자 영역을 담당했다. 


3. 대만전쟁과 제3한국전쟁 가능성

베트남 전쟁에 남북 모두 파병했듯이, 대만전쟁에 남북이 각각 미국과 중국을 위해 파병한다면 남북은 베트남 전쟁 때처럼 대만에서 대리전쟁을 하게 된다. 다만 미국은 한국군 주력이 대만전쟁에 참전하게 되면 대북방어에 구멍이 생겨 조선이 도발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미국은 대만과 한국에서 두 개의 전쟁을 치룰 수 없기 때문에 조선의 도발을 유발할 한국군의 파병에 소극적이다. 미국은 한국이 직접 파병하기보다 후방의 지원기지를 제공하기를 선호한다. 한국군이 직접 파병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조선은 한국군과 주한미군을 한반도에 묶어 두기 위해 베트남 전쟁 때처럼 국지적인 소규모 전투를 감행할 우려가 있다. 

중국 역시 대만전쟁이 일어나면 조선이 한국에서 군사적 긴장을 조성해 미군의 전력을 분산시키길 원할 수 있다. 특히 중국과 조선은 상대방이 침공받으면 자동적으로 참전하는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있다. 조선은 대만전쟁이 일어나면 한국에서 전면전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핵무기를 통해 전면전을 억제할 수 있다고 자신하면 소규모 침투를 시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