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이후 미군의 조선 침투와 미군의 사상자

2025년 8월 18일 한미동맹재단과 주한미군전우회는 한국전쟁 이후 조선(북한)과의 전투로 사망한 주한미군 103명을 추모하는 도서 『6·25전쟁 이후 전사한 주한미군 공훈록』을 출판했다. 

미군과 조선인민군은 1955년 미군 훈련기 격추사건부터 1994년 헬기 격추사건까지 10여 차례 교전했으며, 1968년 한 해만 군사분계선 부근에서 조선인민군과의 전투로 미군 13명이 전사하고 42명이 부상을 당했다. 전투는 미군의 도발에 의한 것과 조선인민군의 도발에 의한 것으로 분류된다. 조선의 도발에 의한 것들에 비해서 미군의 도발에 의한 것들은 냉전구조 아래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미군의 도발은 대부분 항행의 자유라는 명분을 내세워 해상과 공중에서 조선의 영토 코 앞까지 진출하여 조선을 압박하다가 발생한 사건들이다. 

1955년 8월 17일 미 공군 소속의 소형 훈련기(LT-6)가 비무장지대 남측 선을 따라가다 중부전선 김화 동쪽 약 12마일 지점 상공에서 조선 영공을 침범하여 조선인민군의 대공포에 의해 격추됐다. 

조종사 범퍼스 중위(Guy H. Bumpus)는 머리에 부상을 입고 조선인민군에 잡혔으나 관측관 찰스 브라운 대위(Charles W. Brown)는 격추 당시 사망했다. 조선인민군은 유엔사령부와 협상 끝에 8월 23일 시신과 포로를 비무장지대를 통해 돌려줬다. 

1965년 4월 28일 미 공군 소속의 RB-47 정찰기가 신호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동해의 조선 원산항에 접근했다가 조선 공군 MiG-17 전투기 두 대로부터 기관총 사격을 받았다. 이에 정찰기는 기체 후방에 장착된 20mm 원격 제어 기관포(Tail Cannon)로 반격했다. 

미군 정찰기는 동체와 날개 등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으나 탑승자 6명 전원이 부상 없이 일본의 요코다 공군기지로 귀환했다. 조선은 미군기가 영공을 침범했다고 주장했으나 미군은 원산으로부터 약 80마일 떨어진 공해상에 있었다고 반박했다. 

당시 미국과 한국은 베트남 전쟁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기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과의 전쟁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미국은 이례적으로 조선인민군에 대해 보복을 하지 않고 오히려 정찰노선을 원산으로부터 150마일 밖으로 후퇴했다. 

1968년 1월 23일 미 해군 정보수집함 USS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바다에 접근했다가 조선 해군 초계정 4척과 미그기 2대의 공격을 받았다. 미군 승조원 1명이 사망하고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으나 푸에블로호는 50구경 기관총 2정만 갖추고 있었지만 저항하지 못하고 나포됐다. 

미국은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동해에 전개하고 공군 전폭기를 한반도 주변에 배치했지만 결국 28차례에 걸친 협상 끝에 결국 영해 침범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사건 발생 11개월 만인 1968년 12월 23일, 승조원 82명과 시신 1구가 판문점을 통해 미국 측으로 인도됐다. 

푸에블로호 선체는 조선에 의해 해체 후 육지도로로 운송돼 평양 대동강 변의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다. 푸에블로호는 미 해군 역사상 유일하게 외국에 나포된 현역 군함(USS)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1969년 4월 15일 미 해군 소속의 EC-121 정찰기가 조선과 소련 지역의 전파정보를 수집할 목적으로 일본 아쓰기 해군 비행장에서 이륙해 동해 조선의 청진시 남동쪽 해상으로 접근했다. 정찰기는 조선인민군의 MiG-21 전투기로부터 미사일 공격을 받아 해상에 추락했다. 

격추 지점에 대해 조선은 영공이라고, 미국은 공해상이라고 주장하며 서로 비난했다. 하지만 당시 베트남 전쟁에 전력을 집중하던 닉슨 행정부는 군사보복 대신 기동부대 파견과 정찰기 호위 조치만 취한 채 사건을 마무리했다.

이 사건으로 오버스트리트 해군소령 외 탑승자 31명 전원이 사망하여 냉전 시기 미군과 공산권의 군사적 충돌 중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미군 사망자가 발생했다. 

단일사건으로 가장 많은 사망자가 나온 전투는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 중이던 1967년 6월 8일 일어났다. 이날 이스라엘 공군 전투기와 해군 고속어뢰정이 국제수역에 있던 미 해군 정보수집함 USS 리버티호를 기습 공격해 미 해군 승조원 34명이 사망하고 171명이 부상했다.

1977년 7월 14일 미 육군 CH-47 치누크 헬기가 평택의 캠프 험프리스를 이륙해 비무장지대에서 정찰 중 비무장지대 동쪽 끝자락에서 북쪽으로 기수를 틀었다. 한국군 초소에서 항로를 이탈했음을 알리기 위해  경고사격을 했으나 헬기는 조선 영공으로 진입했다. 

조선인민군이 사격을 하자, 헬기는 기체 점검을 위해 조선영토에 잠시 착륙했으나 조선인민군이 접근하자 남쪽으로 이륙했다. 헬기는 조선인민군의 대공사격으로 군사분계선 북방 약 4km 지점에서 격추됐다. 승무원 3명이 사망하고 부조종사 글렌 슈완케(Glenn M. Schwanke) 준위는 부상을 입은 채 생포됐다. 카터 대통령은 사고 직후 조선에 사과했고 조선은 7월 16일 판문점을 통해 생존자와 승무원 3명의 유해를 송환했다.

1979년 12월 판문점 부근 군사분계선에서 정찰임무를 수행 중이던 미군 병사가 짙은 안개로 북쪽 지역으로 넘어가 북이 설치한 지뢰를 건드려 부상당했다. 이를 구하려다 동료도 지뢰폭발로 사망했다.

1994년 12월 17일 주한미군 OH-58C 카이오와 헬기가 강원도 인제군 비무장지대(DMZ) 인근에서 정찰 비행 중 조선의 강원도 금강군 지역으로 침범했다. 조선인민군이 휴대용 대공 미사일 또는 고사포를 발사하여 헬기를 격추했다. 헬기 불시착 과정에서 조종사는 사망하고 부조종사는 생포됐다. 

조선은 12월 22일 조종사의 유해를 판문점을 통해 송환했으나 부조종사를 간첩 협의로 억류했다. 미국 정부는 토마스 허버드 국무부 부차관보를 평양에 특사로 파견했다. 특사가 조선에 영공침범 사실을 인정하고 유감의 뜻을 표명하는 합의서에 서명한 후 부조종사는 2월 30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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