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풍모방 박순희, 풀은 밟혀도 다시 일어선다

김장민(정치경제학연구소 프닉스)

 

노동조합은 해산됐지만 원풍동지회는 지금도 굳건

 지난 1213일 토요일 오전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이사장 김명환 전 민주노총 위원장)1970년대 원풍모방 여성노동자들의 투쟁과 삶을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영등포구 도림동 원풍노동자의 집에서 열린 이번 좌담은 노동기본권 봉쇄하의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발자취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의 한국노동운동사 세미나팀이 주관했다.

 좌담은 김명환 이사장의 사회로 진행됐으며, 원풍모방노동조합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박순희 민주노총 지도위원 등 원풍모방동지회 회원들이 참석하여 유신시절과 전두환 시절의 생사를 건 민주노조 건설과 사수 투쟁의 생생한 사연들을 들려주었다.

 원풍모방동지회는 아직도 매년 조합원총회를 하고 있으며 보통 120명 정도 참석한다고 한다. 동지들의 우애는 지금도 굳건해 자녀들끼리도 모임을 가질 정도이고 동지들의 자녀들이 서로 결혼한 사례도 있다고 한다. 원픙모방노동조합이 해산된 이후에 조합원들이 적립한 투쟁기금을 다시 원풍모방동지회에 출자하여 원풍노동자의 집이 자리잡은 연립주택을 1984년 구입해 현재까지 사무실로 쓰고 있다.


 소모임 조직력과 사회단체와의 연대를 통해 민주노조 건설

 이날 양승화 원풍동지회 초대회장이 박순희 지도위원이 원풍모방에 입사하기 전의 민주노조 건설에 대해 구술했다. 양승화 전 초대회장은 15살의 나이를 속이고 원풍모방에 입사했다.

 1974년 원풍그룹에 인수된 한국모방은 1953년 설립됐으나 노조민주화투쟁이 발생한 1972년까지 한국노총 소속의 어용노조가 사측의 노동자 착취에 협조해왔다. 1970년대 가난한 집안의 여성들은 대부분 초등학교나 중학교만 졸업하고 생계를 위하여 혹은 오빠나 남동생들의 학비를 지원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당시 원풍모방은 최대 2천여 명의 직원을 거느린 대기업이었으며, 기숙사에서 숙식을 제공하는 등 상대적으로 대우가 좋은 편이었다. 많은 미성년 여성들이 다른 사람의 주민등록증으로 나이를 속여 입사하기도 했는데, 당시 가장 막내는 14살이었다고 한다. 이 막내는 시골에서 밥을 지을 쌀이 없어 쌀처럼 생긴 아카시아 꽃을 쌀 위에 얹히고 밥을 졌는데, 막상 밥을 하니 아카시아 꽃이 다 시들어 펑펑 울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공장에서 자기만 배부르게 먹어 항상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한국모방은 모든 직공이 노동조합에 자동적으로 가입하는 유니온샵을 적용하고 있어 노동조합이 직공들에 대한 장악력이 높았다. 어용노조에 대항하는 민주파는 20여개의 다양한 소모임 활동을 통해 조합원들에게 민주노조의 필요성을 일깨웠다. 1970년부터 가톨릭신자 전체모임인 성우회가 조직되고 1971년부터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 등과 교류하면서 소모임은 확대되고 조합원의 의식도 높아졌다.

 1970년부터 퇴직금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이 각종 민원을 제기하여 한국모방이 사회문제로 대두됐으며, 가톨릭노동청년회 등 사회단체들이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한편 어용노조를 규탄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노동조합의 대의원 선거와 위원장 선거를 앞두고 사측이 미는 어용노조와 민주파의 대결이 심화됐다. 1972817일 사측의 협박과 어용노조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민주파의 지동진 조합원이 지부장(노조위원장)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사측은 다음날 14명을 해고하고 지동진 지부장을 구타해 이에 분노한 조합원 5백여 명은 822일 명동성당에 들어가 농성했다. 94일 노조간부 14명이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연행됐으나 경찰은 교선부장 방용석과 총무부장 정상범 2명만 구속하고 지부장 등 나머지 12명은 석방했다. 이후 조합원들은 파업보다 더 강력한 태업투쟁을 전개했다. 생산량이 50% 이하로 떨어졌지만 파업이 아니라 대응하기 어려웠던 사측은 임금인상과 단체협약체결이라는 노조의 요구를 수용했다.

 

 방용석과 박순희가 민주노조의 모범을 만들어

 1973년 한국모방은 부도위기에 처했으나 노동조합이 적극 나서 영업도 하고 경영에도 참여하면서 회사를 되살렸다. 구속됐다가 석방된 방용석 전 노동부장관이 1974년과 1975년 연이어 노조위원장에 당선됐고 한국모방이 원풍모방으로 이름을 바꾼 이후에도 노조는 더욱 강력해졌다. 단체협약에 따라 조합원 해고는 노사합의에 의하도록 했으며, 구속된 조합원도 석방 후에는 원직에 복직됐다.

 1947년생인 박순희 지도위원은 원풍모방에 민주노조가 정립된 이후 1974년 직포기능공 시험을 통해 입사했다. 박순희 지도위원의 집안은 대대로 가톨릭 집안이었고 선친은 당시 철도직 공무원으로 노동조합의 간부를 지냈다. 이런 배경으로 박순희 지도위원은 사회문제에 일찍 눈을 떠 1966년부터 가톨릭노동청년회에서 노동법을 공부하면서 남부연합회 회장을 지냈다.

 박순희 지도위원은 18살부터 학성모직, 대한모방에 근무했다.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접하고 추모미사에서 열사의 어머니와 친구들을 만난 후 수녀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하지만 원풍모방에서 노동운동을 하라는 가톨릭노동청년회 측 신부님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이후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등에서 교육을 받았고 구로공단에서 노동운동을 준비하는 공동체에 결합했다.

 박순희 지도위원은 입사 전에 이미 지동진 지부장으로부터 노동운동을 제안받았으며, 입사 1년 만에 1975년 방용석 지부장과 함께 부지부장에 당선됐다. 노조는 조합원교육, 소모임활동, 탈춤공연 등을 통해 조직력을 강화하고 다른 노조의 투쟁을 지원하기도 했다. 특히 탈춤반은 일제시대 조선방직의 투쟁사례를 연구하여 각본을 써 전국에 공연하러 다녔다. 31일 노동절에는 조합원들이 소모임 특성에 맞게 각종 공연을 했다.

 197910.26사태로 비상계엄이 발령된 후 계엄사와 경찰, 사측이 합동으로 정화조치라는 명분으로 민주노조를 탄압했다. 1980517일 비상계엄 확대 하루 전날엔 노조지도부의 조합원 자격을 박탈한 한국노총울 규탄하고 정한주 노동부장관의 퇴진을 요구하는 궐기대회를 열기도 했다. 다음날 비상계엄이 선포됐고 노조에 대한 탄압이 더욱 노골화됐다. 그해 10월 방 지부장과 김 부지부장이 해고되고 노조 간부 30여 명이 체포됐다. 하지만 노조는 비상계엄과 탄압 중에서 대의원대회를 열어 노조집행부를 다시 선출했다.

 방용석 지부장과 박순희 부지부장은 원주 가톨릭시설에 은신하였다가 지학순 주교의 중재로 자진출두했다. 두 사람은 남산의 중앙정보부에 끌려갔고 박순희 부지부장은 16일 만에 석방됐다. 두 사람은 자유총연맹 과장, 보건직 공무원을 제안받았지만 노조로 다시 돌아왔다. 노조집행부 중 남성 4명은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

 

 전두환 정권, 광주민주화운동 성금을 핑계로 노조 해체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을 학살했다는 광주민주화운동 소문이 노조원들에게도 퍼지자, 경상도 조합원과 전라도 조합원 사이에 다툼이 발생했다. 이에 노조는 감시를 피해 핵심간부들을 상대로 외부인사를 초빙해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에 대해 교육했다. 그리고 조합원들이 모은 성금 470만원을 천주교 광주교구를 통해 광주시민에게 전달했다. 서울시는 이를 문제 삼아 조합의 재정에 대해 감사를 했지만 회계가 투명해 더 이상 트집을 잡지 못했다.

 전두환 군부정권은 1982년 이른바 9.27사태를 통해 원풍모방의 민주노조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군부정권을 등에 업은 사측은 1981년에도 조합원 2명을 해고하는 등 노조를 압박했다. 당시 공안기관들은 대책회의를 통해 원풍모방 노조를 해체하는 세부계획을 세우고 사측을 앞세워 실행했다.

 1982927일 노동조합 모임 중에 폭력배가 섞여 있는 구사대들이 노조 사무실에 난입해 조합 간부들을 폭행하고 사직과 노조활동 포기를 강요하며 감금했다. 회사 사무실엔 사측과 안기부, 경찰이 대기하고 있었고 전경버스가 회사를 둘러싸고 있었다. 조합원의 연행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방송국 카메라들도 동원됐다. 경찰은 노사문제라며 구사대의 폭력을 방치했고 노조는 파업과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조합원들은 드럼통으로 대소변을 해결하면서 버텼고 사측과 공안기관은 가족들까지 동원하여 조합원에게 농성을 풀 것을 회유했다.

 노조의 강력한 투쟁에 구사대는 구타당한 노조위원장을 난지도 쓰레기장에 버렸으며, 경찰은 4명이 한조가 돼 노조원들을 한명씩 연행했다. 마침 추석명절이라서 경찰은 가족들의 보증을 받고 조합원들을 석방시켰다. 하지만 조합원들이 경찰의 출두요구에 불응하자, 지명수배를 하고 회사 인근에서 사측과 경찰들이 순찰을 돌면서 조합원들을 체포했다. 조합원들은 직장폐쇄에 맞서 회사진입투쟁을 감행했고 결국 200여 명이 연행됐고 조합원 559명이 해고되고 8명의 지도부들은 1112일 구속됐다.

 

 노동자가 꽃피는 삶을 쟁취하자

 해고된 조합원들은 결국 원풍모방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다른 기업에 취직하기도 힘들었다. 조합원들의 신분이 드러난 상태에서 이력서에 원풍모방을 안 쓰면 허위기재로 입사할 수 없었고, 쓴다면 당연히 뽑지 않았다. 결국 해고자들은 원풍모방의 경력을 숨기고 생계를 위해 전전하거나 공안기관과 가족의 압력에 마지못해 결혼으로 도피하기도 했다. 방용석 지부장, 박순희 부지부장 등 노조간부들 중 상당수는 노동운동, 환경운동, 여성운동의 길을 가기도 했다.

 민주화 이후 176명의 조합원들은 재판을 통해 민주화운동을 인정받았고 약간의 생활지원금도 받았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원풍모방 조합원들에 가해진 국가폭력을 인정했고 그 이후 일부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했다.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가 강제로 해고한 21명과 불법구금을 당한 조합원들은 5.18특별법에 따라 피해를 인정받았다. 실형을 받고 복역한 7명의 조합원들은 영장 없는 불법구금으로 인한 기소를 이유로 재심신청을 했으며, 재심개시결정을 받았다.

 이날 간담을 마치면서 박순희 민주노총 지도위원은 군부독재 아래 자신들의 험난한 투쟁을 뒤돌아면서 아직도 1970년대 원풍모방의 노사관계보다 더 열악한 사업장이 있다고 탄식했다. 박 지도위원은 노동인권이 보장받지 못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노동자가 꽃피는 삶을 쟁취하자라는 구호와 열정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참고문헌

 원풍모방 해고노동자 복직투쟁위원회. 1988. 민주노조10:원풍모방 노동조합활동과 투쟁풀빛.

 원풍동지회. 2019. 풀은 밟혀도 다시 일어선다 국가폭력에 맞선 원풍 노동자 이야기학민사.

 황선금(원풍동지회). 2016. 공장이 내게 말한 것들 - 민주노조의 전설 원풍노조 노동자들의 구술 생애사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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