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과 제국주의의 관계 변화(봉쇄정책의 형성)

 1차 대전 중 서로 전쟁 중이던 협상국과 동맹국 모두 군대를 파견하여 러시아 적군과 싸웠다. 1917년 윌슨 대통령은 러시아 제국과의 동맹을 포기하고 러시아공화국의 케렌스키의 임시 정부를 지원하였다, 

그런데 영국과 프랑스가 윌슨 대통령에게 러시아공화국을 전복시키기 위한 파병을 요청하자, 윌슨 대통령은 1918년 6월 전쟁장관의 반대를 무릅쓰고 5천여 명으로 구성된 북러시아원정대(American North Russia Expeditionary Force)를 러시아 북부 아르칸젤스크(Arkhangelsk)에 보냈다. 미국의 개입 명분은 1차 대전 당시 러시아 제국에게 제공한 전쟁물자의 회수와 러시아공화국 군대에 포위된 체코군의 구출이었다. 윌슨 대통령은 “사회주의혁명은 시간이 지나면 쇠약해져 민주주의가 회복될 것”이라고 봤다, 윌슨은 러시아 적군과의 전쟁은 러시아공화국 내부를 더 단결시킬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적군과의 전투를 회피하였다. 

윌슨 대통령은 북러시아원정대와 별도로 미군 8천여 명으로 구성된 시베리아원정대(American Expeditionary Force Siberia)를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시켰다. 윌슨은 겉으로는 “적군에게 점령당한 지역의 민족자결과 독립을 위해 개입한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시베리아의 자원과 철도를 일본이 독차지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두 지역의 미군은 적군과 직접적인 전투를 하지 않은 채 연합군과 함께 1920년 철수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1922년까지 시베리아 일부와 사할린 북부를 지배하였으며 1925년 사할린 북부를 소련에게 돌려주었다. 

이와 같은 미국의 러시아혁명 개입으로 미국과 소련은 당분간 냉랭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후버 대통령은 국내의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대기근에 대한 인도적 목적으로 1921년 소련에게 대규모 식량 지원을 하였다. 1차 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소련에게 소련에서 국유화된 미국 자산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였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1933년 미국의 자본가들과 언론인들이 소련 진출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소련과의 관계회복을 주장하였다. 이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소련과 협상하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교역 확대와 과거 러시아 제국의 채무 변제, 미국 자산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였다. 소련은 미국과 수교하였지만 미국이 원하는 교역이나 보상에 동의하지 않았다. 윌리암 불리트(William Bullitt)가 1933년부터 1936년까지 주소련 미국대사로 파견되었다. 불리트는 소련의 반자본주의정책을 목격하고 반소인사가 되었다. 이후 미소관계는 다시 냉랭해졌다. 

하지만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소련은 미국의 주요 우방이 되었다. 소련은 미국의 무기지원 프로그램(Lend-Lease program)에 따라 비행기, 함정 등의 지원을 받았다. 소련은 2차 대전에서 최대 2,700만 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독일을 항복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독일의 주력군인 소련 주둔군 총사령관 빌헬름 카이텔 원수가 항복한 이후, 독일은 동유럽에서 베를린까지 소련군에 의해 밀려났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동유럽에서 독일에게 치명타를 안기고 있는 소련에게 경제적 지원은 물론 전쟁 물자까지 지원하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소련과 협력해서 전쟁을 빨리 끝내고 자신의 구상인 유엔을 성시시키고자 하였다.

2차 대전의 결과 연합군이 승리하였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종래의 식민지를 상실하였다. 반면 소련은 동유럽과 아시아에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중국을 포함하여 사회주의 국가가 급속하게 팽창하자, 루스벨트 사후의 미국은 사회주의에 대한 공포심에 사로 잡혔다. 

2차 대전 직후 소련에 외교관으로 파견 나간 조지 프로스트 케넌(George Frost Kennan)은 본국에 미국의 대소련정책에 관한 비밀보고서를 보냈다. 그는 소련이 미국의 적국으로 부상한 점을 지적하고 “전쟁보다는 봉쇄를 통해 소련이 붕괴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케넌은 1947년 7월 미국 외교협회 기관지인 ≪포린어페어≫ 기고문을 통해 “공산주의는 틈만 있으면 새어 나오는 물”이라면서 이에 대한 ‘봉쇄전략’을 강조하였다. 영국의 처칠 역시 “소련이 동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철의 장막을 쳤다”면서 소련에 대한 공세적 정책을 주장하였다(케넌, 2013: 247 - 280). 

이러한 봉쇄정책은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수용되었다. 1948년 미국은 국가안전보장회의 결의문(NSC 48/48-2)을 계기로 미소협력을 통해 현상을 유지하는 정책에서 봉쇄정책으로 전환하였다. 그 내용은 유럽을 재건시켜 소련과 맞서도록 하는 한편 소련을 국제질서에 편입시켜 외교적 수단으로서 안보 위협을 완화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그 내용은 장기적으로 소련을 해체시키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조치를 강화하는 것이었다(Lor, 2001). 마침 중국 본토가 공산화된 직후 1950년 매카시 상원의원이 공산주의자 색출운동을 선동하면서 미국 내에서 반공여론이 불붙었다. 이러한 국내 정세로 인해 소련과 제3세계에 대한 봉쇄정책은 더욱 강경해졌다.

그런데 케넌(2013)이 주장한 소련에 대한 봉쇄는 이데올로기의 대립보다는 현실주의에 토대한 정치적 봉쇄를 기본으로 하였다. 하지만 트루먼독트린은 미국식 도덕주의와 이상주의에 입각하여 군사적 봉쇄를 기본으로 하였다. 케넌은 “소련이 서유럽을 정복할 의사가 없다”고 보고 군사적 대결을 격화시키는 나토와 같은 군사동맹에 반대하였다. 또한 케넌은 중요한 지역에서만의 제한적인 봉쇄를 의도하였으나 트루먼 독트린은 봉쇄의 범위를 전 세계로 확대하였다. 봉쇄정책을 입안한 케넌조차 트루먼의 군사적 봉쇄를 피하지 못하였다.

윌리엄스(1995)는 이미 1970년대 초에 미국의 이런 군사대결 정책을 제국주의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소련과 공산주의의 위협을 과장하면서 군비증강과 군사개입을 강조하는 미국의 대외정책을 수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소련의 핵무기는 단지 방어용에 불과하며 소련 역시 공존의 의사가 있으므로 군축협상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는 베트남전쟁의 실패를 교훈 삼아 미국이 사회주의 국가와의 공존의 길을 선택할 것을 주장하였다. 특히 그는 “잉여생산물을 수출하고 원자재를 수입하기 위해 제3세계를 희생양으로 삼는 무역정책을 중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외교정책의 혁명을 통해 미국이 민주주의, 시민들의 삶과 권리를 증진시키기 위한 노력에 집중할 수 있다고 보았다.

파쇼제국주의와 부르주아제국주의의 대결

1차 대전 직전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는 영국의 해군에 도전하고자 거대한 전함을 지속적으로 건조하고 있었다. 영국과 독일이 거함 건조 경쟁을 하는 가운데, 영국의 동맹인 일본은 프랑스와 미국의 양해아래 전함구축에 주력하였다. 미국 역시 독일뿐만 아니라 대서양과 태평양에서 영일동맹에 대응하고자 전함 건조에 나섰다. 그리하여 1차 대전에 즈음하여 영국, 독일, 미국, 일본은 모두 엄청난 해군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1차 대전이 끝난 직후 독일은 전쟁에서 패배하고 러시아는 혁명으로 인해 혼란한 상태였다. 따라서 미국의 경쟁자는 영국과 일본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 영국, 일본이 다시 전함구축 경쟁에 돌입하였다. 이들 나라의 전함 구축 규모는 단순한 1위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2위와 3위가 동맹할 것을 고려하여 상대방 두 나라의 해군력을 합한 규모 이상을 목표로 하였다. 

미국의 주력함 건조 계획은 1916년 8척이었다. 1918년에는 해군이 28척으로 계획하였으나 최종적으로 16척으로 결정되었다. 미국의 목표는 대서양에서 영국과, 태평양에서 일본과 동시에 전쟁을 하더라도 승리할 수 있는 전함의 규모를 가지는 것이었다. 영국 역시 상대방들을 압도할 수 있도록 4척의 전함과 4척의 순양함을 추가로 건조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 역시 1920년까지 전함 8척과 순양함 8척을 보유할 건조계획을 세웠다. 일본은 “세계 대양을 재패해야 한다”는 아키야마 사네유키와 사토 데츠타로의 주장에 따라 노후화된 전함을 포함하여 각각 8척의 전함과 순양함을 추가적인 예비전력으로 확보하고자 하였다. 일본은 이를 위해 재정의 30%를 전함 구축비용으로 책정하였다. 

특히 태평양에서 경쟁하고 있는 미국과 일본은 서로를 잠재적인 적대국가로 상정하고 군비경쟁을 가속화하였다. 당시 군비전문가들은 일본이 미국의 군사력에 접근하는 1921년 이후에 양국이 태평양에서 전쟁을 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영국은 미국과 일본의 군비 증강을 중단시켜 자신의 군사력 우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미국 역시 일본의 추격을 경계하였다. 이상주의자였던 미국의 윌슨대통령은 국제기구와 국제조약을 통한 국제평화를 주장하며 영국과 일본에 대해 군축을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1922년 워싱턴 조약에 의해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의 주력함 톤수는 5: 5: 3: 1.75: 1.75의 비율로 제한되었다. 

워싱턴 조약은 세계 패권을 놓고 경쟁하던 영국과 미국이 힘을 합쳐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일본의 군비증강을 견제한 것이었다. 워싱턴 조약에 불만을 품었던 일본은 계속해서 군비증강을 하였다. 결국 일본은 1934년 워싱턴 조약을 파기하고 본격적으로 미국과 영국에 대항하였다. 독일과 일본은 군비를 증강하면서 영불과 미국을 각각 유럽과 태평양에서 견제하기 위해 전략적인 협력관계에 돌입하였다. 

일본은 이미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정권 만주국을 세움으로써 최혜국 동등대우라는 문호개방정책을 위반하여 미국과 태평양전쟁의 불씨를 만들었다. 나아가 독일과 일본의 전쟁분담 계획에 따라 1939년 일본은 만주를 점령하였고, 독일은 체코를 병합하고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양국은 1940년 공식적인 동맹을 맺고 유럽과 태평양에서 각각 전쟁에 돌입하였다.

미국이 영국과 전쟁을 하지 않고 패권을 승계한 이유는 독일과 일본이 양차 대전을 일으키면서 미국과 영국이 동맹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공동의 적과 싸우면서 영국은 자연스럽게 미국에 굴복하였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 난 직후 영국과 프랑스에 전쟁 물자를 지원하는 등 이미 경제적으로는 전쟁에 참여한 상태였다. 그런데 독일에 밀리던 연합군이 파병을 요청하자 윌슨 대통령은 내심 참전을 원하였지만 도덕적 명분을 필요로 하였다. 독일은 이미 연합군에 전쟁 물자를 수출하는 미국의 상선에 대해 “잠수함 U보트를 통해 무제한 공격을 하겠다”고 경고한 상태였다. 1915년 영국 여객선 루시타니아호가 독일 잠수함 U보트에 의해 격침되어 124명의 미국인 승객이 죽자, 윌슨 대통령은 참전할 것을 대비하여 군비를 증강하였다. 하지만 노동조합 등 민주당의 지지세력들이 전쟁에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윌슨 대통령은 1916년 대선에서 사실상 전쟁 불참을 약속하는 평화강령을 선언하였다.

1917년 독일은 멕시코의 카란사 대통령에게 “멕시코가 독일 편에 서면 전쟁에서 이긴 후 1848년 멕시코 전쟁에서 미국에 빼앗긴 영토를 다시 멕시코에 돌려주겠다”는 ‘짐머만 비밀전보‘를 보냈다. 그런데 미국이 암호를 해독하여 그 내용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 해 3월 3척의 미국 선박이 독일 해군에 의해 격침되었다. 같은 해 4월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가 연합국에서 탈퇴하였다. 독일이 승리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확산되자 여론은 전쟁 참여로 기울어졌다. 윌슨은 1917년 4월에 상하 양원 합동 회의에서 독일에 전쟁을 선포하였고 그 해부터 50만 명의 미군이 유럽에 파견되었다.

1차 대전이 끝난 후 1923년 체결된 영국-미국 채무협정으로 확정된 영국의 전쟁 부채는 46억 달러, 1926년 4월 26일 체결된 미국-프랑스 채무협정에 의해 확정된 전쟁 채무는 40억 달러였다. 영국은 독일로부터 전쟁배상금을 받아 그 돈으로 미국에게서 빌린 전쟁차관을 갚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독일의 경제가 붕괴되면서 영국은 미국에게 전쟁차관을 제때에 갚을 수 없었다. 영국은 이러한 전쟁차관을 미국이 감면시켜 주길 원하였으므로 미국의 외교정책에 협력하였다.

히틀러는 1928년 『신질서(Neuordnung)』라는 저술을 통해 독일이 세계를 지배하는 미래의 세계질서를 제시하였다(Hitler, 1941). 히틀러는 일본이 장래 게르만의 세계지배를 위협할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히틀러는 먼저 일본과 협력하여 미국까지 굴복시킨 후 일본과 최후의 대결전을 통해 전 세계를 지배하는 전략을 구상하였다. 

신질서에 따르면 먼저 독일이 게르만계 국가들을 통합하여 게르만제국을 건설한 후 유럽과 아프리카를 점령한다. 히틀러의 신질서의 일부인 ‘동방대계획(The Generalplan Ost)에 따르면 독일은 중앙유럽과 동유럽을 정복하여 폴란드인과 러시아인을 노예로 삼는다. 독일은 나머지 서부유럽과 남부 유럽에 독일인을 이주시켜 식민통지를 한다(Norman, 1974).

히틀러는 게르만족의 세계지배를 위하여 일본과 협력하여 소련, 중국, 서방국가들을 굴복시키고자 하였다. 히틀러는 소련에 대해 우랄산맥을 기준으로 서쪽은 독일이 동쪽은 일본이 지배하는 것을 구상하였다. 독일과 일본은 1942년 비밀회담을 통해 중국의 영토를 양자강을 기준으로 양국이 분할하기로 하였다. 히틀러는 중동과 인도 역시 일본과 분할하여 점령하고자 하였다. 다만 히틀러는 아프리카 전부를 독일의 식민지로 삼는 대신 일본과의 협상을 통해 태평양과 호주, 뉴질랜드 등 동아시아는 일본의 지배로 남겨주기로 하였으며, 그에 따라 일본은 아시아를 지배하는 대동아경영계획(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을 수립하였다.

히틀러는 유럽과 러시아 및 중국을 먼저 점령하는 유라시아 우선 정책을 구사하였다. 1차 대전 이후 독일은 패전국이라서 해군력을 증강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히틀러는 2차 대전에서 주로 지상전에 의존하였다. 독일이 대서양에서의 전면전을 피하고 유라시아에서 지상전에 주력함으로써 미국과 독일의 전면전은 그만큼 늦추어졌다. 히틀러는 해양세력인 일본과 동맹을 맺어 일본이 태평양에서 미국과 대립하도록 하였다. 또한 히틀러는 남미를 직접 정복하지 않고 당분간 독일의 경제적 식민지로 남겨두되 장기적으로 남미의 나치세력을 키워 나치 정권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히틀러는 유럽을 전부 정복할 때까지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고자 하였다. 히틀러는 먼저 영국을 굴복시킨 후 영국의 해군과 일본의 해군을 이용하여 미국과 해상 전쟁을 벌이고자 하였다. 히틀러는 영국이 독일에 패배하면 미국이 캐나다를 병합할 것이고 이에 반발한 영국이 자신에게 협조할 것이라고 믿었다. 히틀러는 유럽 정복 이후 일본과 함께 미국에 대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1941년 비밀회담을 하였다.  

히틀러의 신질서는 실제로 독일의 전쟁계획에 반영되었다. 히틀러는 유럽을 정복 중이던 1941년 1월 31일 연설에서 “올해는 유럽의 신질서가 도래할 것이며, 이는 새로운 세계를 여는 서막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2차 대전 당시 미국은 히틀러의 신질서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으며 특히 히틀러가 애초부터 미국과 전쟁할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기 9개월 전인 1941년 3월 15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히틀러의 신질서는 유럽정복뿐만 아니라 미국을 포함한 모든 선거체제를 전복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또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해 10월 27일 “독일은 대서양 건너편을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하지만 그들의 잠수함과 레이더를 보면 그렇지 않다”고 강조하고 “미국이 획득한 히틀러의 전쟁 계획 지도에 따르면 히틀러는 파나마를 포함한 중미를 점령하고 재분할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독일과 일본이 전쟁 준비에 전념하자 미국은 1939년 독일과 일본 등 여러 나라와 동시에 전쟁을 하는 무지개 전쟁계획을 수립하였다. 무지개 전쟁계획은 미국이 영국이나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 경우와, 맺지 않는 경우에 독일, 일본과 동시에 전쟁을 하는 계획이었다(Steven, 2002).

1차 대전 종전 이후 국제연맹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분할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게르만민족의 자결과 게르만인의 '생활공간' 확보를 명분으로 게르만계 국가를 병합하여 게르만 대제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이에 1935년 프랑스와 소련은 히틀러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체코를 보호한다는 조약을 체결했다. 

히틀러는 1938년 3월 게르만 국가인 오스트리아를 합병했으며 이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독일인 거주자 지역인 주데텐란트 할양을 요구했다. 영국과 프랑스 및 이탈리아는 유럽전쟁을 피한다는 명분으로 1938년 뮌헨 협정을 통해 독일이 주데텐란트를 합병하도록 승인했다. 체코는 국토의 30%를 잃고, 500만 명의 인구를 잃었다. 뮌헨 협정 직후 체임벌린 영국수상은 히틀러와의 협정으로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 지켜냈다고 선언했다.

1939년 8월 독일과 소련은 불가침조약을 맺으면서 두 나라 사이에 완충지대를 만들기 위하여 폴란드와 발트3국을 각각 점령하기로 하였다. 독일은 그 다음달 9월에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하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7년 「격리연설」에서 “미국이 국제정치의 무법성을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며 윌슨주의가 추구하는 평화추구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임을 밝혔다. 1938년 미국은 중국에 무기판매를 결정했고, 일본에 대한 금수조치를 권고하였다. 

영국과 프랑스 등 연합군은 미국에게 참전을 요구하였고, 프랑스가 1940년 6월 독일에 항복하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를 설득할 수 있는 전쟁 참여 명분을 찾았다. 미국은 태평양 전쟁 중에 일본에 대해 원유 등 금수조치를 함으로써 일본의 공격을 유발하였다. 미국은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과 일본의 동맹인 독일에 대해 동시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양차 대전 사이의 제국주의 경쟁(국제연맹의 실패와 국제연합의 출범)

미국은 먼로주의 정책을 통해 중남미를 독점할 수 있었다. 또한 미국은 문호개방정책을 통해 태평양과 아시아 지역에서 유럽 열강들과 동등한 지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미국은 1차 대전에 즈음하여 영국을 포함하여 어떤 유럽의 강대국 보다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따라서 미국은 전 세계에 걸쳐 개입정책과 고립정책을 구사할 수 있는 외교적 자유를 획득하였다. 

또한 이 시기 미국의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미국은 자신의 생산물을 팔 시장과 원자재를 공급받을 지역을 찾아야 할 입장이었다. 하지만 인도, 중동, 극동,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는 이미 유럽의 식민지로 전락되어 미국이 진출하기 어려웠다. 결국 미국이 유럽 열강의 식민지에 진출하려면 유럽 열강의 식민지 지배를 균열시켜야만 하였다.  

1차 대전에 참전한 윌슨 대통령은 이러한 미국의 고민을 해결하고자 문호개방주의를 민족자결주의로 더 구체화시켰다. 민족자결주의는 중남미 대륙에 대한 유럽의 개입을 차단한 먼로주의나 중국의 식민화에 반대하고 영토 보존과 자유무역을 주장한 문호개방정책과 일맥상통한다. 이는 해당 지역에서 유럽의 지배권을 약화시키고 미국의 영향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은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유럽 열강들이 새로운 식민지를 획득하는 것에 반대하였으며, 기존의 식민지도 식민지의 요구에 따라 독립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민족자결주의에 따르면 신생국이 바로 공화국을 세울 문명적 능력이 없다면 열강의 후견 기간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미국은 이러한 신탁통치 기간에 신생국에게 미국식 공화주의와 자유무역 제도를 이식시키고자 하였다.

1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윌슨 대통령은 ‘평화에 관한 14개항’을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민족자결, 민주주의, 중립국의 권리, 항해의 자유, 자유무역 등이었다.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에 토대하여 세계의 패권질서를 재편하고자 국제연맹의 창설을 주장하였다. 윌슨 대통령의 제안을 수용한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정작 미국의 상원은 임기 말의 병약한 윌슨 대통령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이 조약의 가입을 거부하였다. 

미국은 1차 대전에 패배한 독일제국에게 민족자결과 내정불간섭을 내용으로 하는 14개조를 항복조건으로 내세웠다. 독일제국의 황제가 전쟁 패배의 책임을 지고 독일 사민당에게 정권을 내 준 후 사민당 정부는 이러한 항복조건을 수용하였다. 하지만 항복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이 14개조를 독일에 적용하는 것을 거부하고 가혹한 배상을 요구하여 독일이 분개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1차 대전 직후 민족자결주의라는 명분에 의해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이집트 등 대부분의 식민지를 상실하고 현재의 터키로 축소되었다. 당시 중동은 페르시아, 즉 이란을 제외하면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는 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에 오스만 제국을 해제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은 1차 세계대전 직후의 전후 문제를 다룬 1920년 세브르 조약에 의해 실현되었다. 먼저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오스만 제국에 대한 모든 이권을 박탈당하였다.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는 비밀리에 ‘삼자 조약’을 체결하여 영국에게 오스만 제국에 대한 독일의 이권을 넘겼다. 

상원에 의해 거부된 윌슨의 구상은 2차 대전 직후 루스벨트의 신생독립국에 대한 신탁과 유엔구상에 의해 실현되었다. 1차 대전 직후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사실상 독일과 오스만 제국과 같은 패전국에 국한되어 적용되었다면, 2차 대전 직후의 루스벨트의 신탁은 일본과 독일의 식민지에는 물론, 미국과 영국 및 프랑스 등 연합국이 점령한 식민지에서도 적용되었다. 루스벨트는 2차 대전이 끝나갈 무렵 전후 세계체제의 구상에 있어 식민지 시장에 대한 미국의 접근을 보장받고자 하였다. 이에 미국은 식민지의 독립을 영국과 프랑스에 요구하였다. 

2차 대전의 승전국인 영국 역시 민족자결주의라는 명분으로 인도를 상실하였다. 인도인들은 20세기 초부터 대거 미국으로 건너가 공장노동자와 철도노동자로 일하였다. 1차 대전 이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인도계 미국인들을 자극하여 인도의 독립을 주장하는 인도계 미국인들의 단체가 생겼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인도계 미국인들이 ‘가다르 당(Ghadar Party)’을 조직하였다. 인도의 독립에 동조하는 미국인들이 ‘인도의 해방을 위한 친구들(Friends for the Freedom of India)’을 결성하였다. 2차 대전 중에 버마와 가까운 인도 국경에 수천 명의 미군들이 주둔하면서 미국은 인도의 독립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루스벨트는 처칠에게 인도를 독립시킬 것을 여러 차례 요구하였다. 간디는 루스벨트에게 인도의 독립을 위해 미국이 개입해달라고 청원하였다. 영국이 ‘인도해방운동(Quit India movement)’ 관련자 수천 명을 체포하자 루스벨트는 다시 처칠에게 압력을 행사하였다. 루스벨트는 인도의 독립을 지원하던 장제스의 주장에 동조하여 1942년 3월 10일 처칠에게 “우선 인도에 임시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허용하고 향후 1년 안에 인도를 독립시키자.”고 제안하였지만 영국은 거부하였다. 

인도가 하나의 나라로 형성되면서 독립을 요구하자, 영국은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을 이용하여 분리 지배 정책을 강화하였다. 그 결과 파키스탄이 1947년 인도에서 분리되어 독립하였다. 하지만 벵골어를 사용하는 동파키스탄은 서파키스탄 중앙정부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인도가 동파키스탄을 지원하면서 1947년과 1965년에 이어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생하였다. 인도의 승리 후 1971년에 방글라데시의 독립이 확정되었다. 한편 70%가 불교계 주민인 실론은 인도와 함께 영국의 식민지였으나 1948년 스리랑카로 독립하였다.

8월 18일 캠프 데이비드 정신(한미일 정상회의 공동성명) 해설

김장민 정치경제학연구소 프닉스 연구위원(정치학 박사)


미국의 새로운 지배전략에 한일을 종속시키는 노예 선언

중국의 지위는 세계분업 체제에서 미국의 협력자였으나 현재 협력자 및 경쟁자로 전환됐으며 미래의 잠재적인 적국이다. 러시아 역시 미국의 협력자였지만 현재 협력자, 경쟁자, 적국의 지위를 겸하고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미국의 세계전략은 군사적으로 중러와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는 것이며, 경제적으로 협력하면서도 중러의 추격을 따돌리는 것이며, 정치적으로 중러를 고립시키는 한편 미국식 체제를 수용하도록 유도 및 강요하는 양면책이다. 

미국이 중러를 고립시키려면 중러가 인접국가와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대립을 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미국의 전략에 따르면 미중러 관계는 협력 및 경쟁관계이지만 중러와 제3국 관계는 적대적이어야 한다. 즉 미중러 사이는 냉전이 아니지만 중러는 주변 국가와 냉전상태가 되야 한다. 나아가 미국이 직접 개입하는 세계대전으로 발전하지 않는다면 중러가 인접국가와 지역전쟁을 하는 것도 미국 입장에선 용인할 수 있다. 유럽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아시아에서 한반도와 대만전쟁이 그런 경우이다. 이번 한미일정상회담은 이런 미국의 새로운 세계지배전략에 한일을 종속시킨 결과물이다. 


한반도 내에서 한미일 군사훈련을 정례화하여 한일동맹 추진으로 한미일동맹 완성

첫째 바이든 시대에 와서 한일군사동맹을 성사시키려는 미국 역대 대통령의 염원이 결실을 맺게 됐다. 재선을 앞둔 바이든에게 최대 외교성과인 셈이다. 한일군사동맹은 겨우 군사정보 공유체계에서 첫발을 디딘 수준이었다. 비록 한반도 밖에서 한미일 군사훈련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한반도 영역에서 한미, 미일 군사훈련이 통상적이었다. 이제는 한반도 내에서 한미일 군사훈련이 일상화되는 셈이다. 처음에는 북의 미사일에 대응하는 해상훈련으로 시작하지만 점차 육상 방어훈련 종국에는 북에 상륙하는 육상훈련으로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성명서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은 한일 관계를 변화시킨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용기 있는 리더십을 평가하였다. 바이든 대통령은 군대위안부, 후쿠시마 핵 폐수 방출 등 한일 간의 과거사와 현안에 있어 한국이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을 강요해왔고 윤석열 대통령은 실제로 그런 방식을 수용함으로써 미국을 아버지로 일본을 형님으로 모셨다. 


한일은 전 분야에서 미국의 가치와 기준, 체계를 수용해 식민지적 지위로 전락

둘째 한일은 최고수준에서 모든 분야에서 미국과 포괄적인 동맹을 추진함으로써 한일이 미국체제에 전반적으로 종속되는 식민지적 지위로 전락했다. 성명서에 따르면 한미일은 최소한 연례적으로 정상회담뿐만 아니라 수시로 외교, 국방, 정보감시, 국가안보보좌관, 재무, 산업, 상무 분야의 최고회담을 정레화하기로 했다. 한일은 민주주의동맹, 인권, 외환금융(수출입은행), 사이버 전쟁, 기후환경, 전염병 및 보건 관리, 청년 및 차세대 지도자 개발, 자원, 과학기술 표준 시스템, 우주 개발과 관리 등 전 분야에 걸쳐 미국식 가치와 기준, 체계를 수용하기로 했다. 


한일은 중러와 군사, 정치, 경제, 정보 등 전 분야에서 적대관계로 전환

셋째 한일은 한반도와 동북아, 아세안, 인도태평양은 물론 유럽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세계지배전략에 복무할 것을 맹세함으로서 중국 및 러시아와 군사, 정치, 사이버전쟁, 무역, 에너지와 자원 공급망, 첨단기술 등 전 분야에서 적대적 관계로 진입했다. 미국의 의도는 한미일 동맹이 오커스와 쿼드와 연합하면서 인도태평양에서 중러를 봉쇄하는 아시아 나토가 탄생하고 다시 이 아시아 나토와 유럽 나토와 연합하여 세계사령부를 완성하려는 것이다. 성명이 아세안과 메콩강을 언급하는 것에서 보듯이 미국은 한일을 내세워 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몰아내고 자신의 지배권을 확장 강화하려는 의도이다. 

성명은 한미일이 남중국해와 대만에서 중국과 맞설 것을 최초로 명시적으로 선언했다. 특히 한국은 한반도에서 북과의 전쟁 위험이 상존하고 있는 조건에서 대만과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대결하고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지원함에 따라 러시아와도 대결하게 됐다. 윤석열은 자신의 조국에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수 있는 전쟁을 끌어들이는 한미일 정상회담을 최대 외교성과로 자랑하고 있다.

1928년 코민테른 6차 대회와 7차 대회

자본주의는 오늘날 모든 전쟁의 원인이다. 제1차 대전 당시 자본주의 국가들은 경제전체를 전쟁 수행에 종속시키고, 노동자, 농민, 식민지 인민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국가자본주의 정책을 유지했다.

세계혁명은 독일과 같은 선진국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성장해가는 중진국의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 식민지의 민족해방 전쟁으로 분류된다. 선진국의 노동계급은 자신의 혁명을 시도하면서 식민지의 민족해방과 소련과 같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를 지원해야 한다. 

대회는 “제국주의, 계급투쟁의 격화, 내란의 두려움은 과두지배로 나타나 결국 의회주의가 파산했다”고 진단했다. 파시즘은 불안정한 자본주의 관계, 다수의 계급 탈락분자, 도시의 소부르주아와 지식인의 빈곤, 농촌 소부르주아의 불만, 노동자 투쟁의 격화에 직면한 부르주아 제국주의의 반동적 공세이다. 

파시즘은 대중의 불만을 이용해 유급 파시스트 무장세력을 육성하며, 정당들에 침투하여 직계조직을 설치하고 선동가가 대중을 선동하여 백색테러를 유발하고,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을 주장한다. 파시즘은 처음에는 반자본주의적 태도를 취하지만 국가권력을 장악하면 대자본의 테러독재를 노골화한다(동녘, 1989 1: 93~94).

이 시기 1918년 핀란드 노동자 혁명, 1918년 일본 쌀 폭동, 1918년 오스트리아와 독일 혁명, 1919년 헝가리의 노동자 혁명과 조선의 독립운동 및 독일 바이에른 소비에트 권력 수립, 1920년 터키 부르주아 민족혁명과 이탈리아 노동자의 공장 점거, 1921년 인도 노동자 봉기, 1923년 불가리아 봉기와 독일 위기, 1924년 에스토니아 봉기, 1925년 모로코 봉기 및 시리아 봉기, 1926년 영국 총파업, 1927년 빈 노동자 봉기, 인도네시아 봉기와 중국혁명 등이 이어졌다.

식민지 노동계급은 공산당의 지도 아래 독자조직을 건설하여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공격에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다양한 민족혁명을 조정하고 민족 소부르주아의 동요를 비판하고 폭로해야 한다. 

대회는 12차례 회의 끝에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에서의 혁명운동에 대하여” 테제를 채택했다. 식민지로의 자본수출은 식민지에서 자본주의적 관계를 발전시켜 노동계급을 형성한다. 하지만 잉여가치의 대부분이 본국으로 보내지기 때문에 식민지 발전을 방해한다. 교통수단 등의 발전은 식민지 종속성을 심화시킨다.  

식민지로 수입된 자본은 대부분 원료의 취득과 1차 가공에 집중돼 농업의 다양성을 파괴하고 가난한 농업노동자와 빈농을 양산시켰다. 식민지는 제국주의 전쟁과 혁명적 대중운동의 원천이다.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는 경제외적 강제에도 바탕을 둔 부르주아의 독점이다. 상업부르주아는 제국주의에 직접 봉사하는 매판 부르주아이며, 토착 산업부르주아는 개량적인 부르주아이다. 반제국주의 해방투쟁은 국내 계급투쟁, 나아가 제국주의 내 계급투쟁과도 결합된다.

동양서기국 책임자 쿠시넨이 인도의 사례를 들어 제국주의의 식민지 정책이 식민지의 공업화를 촉진한다는 탈식민지화론을 비판했다. 탈식민지화론에 따르면 식민지 인도에서 봉건계급이 몰락해 인도 부르주아와 제국주의의 정치적 불일치의 근거가 소멸했다. 하지만 쿠시넨은 인도의 예속화가 심화되고 있는 점, 토지혁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조건에서 농촌의 빈곤화가 공업 발전의 장해가 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1919~1923년 식민지에서 소부르주아에 의해 노동운동이 조직됐으나 노동계급의 이익은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토착 민족부르주아의 이익에 종속됐다. 1924년 코민테른 제5회 대회 이후 노동계급이 민족부르주아와 주도권을 다툴 정도로 성장했다. 

1928년 이후 경제위기가 심화되자 노동계급과 공산당은 개량주의와 분리됐으나 제6회 대회를 기점으로 코민테른에 대한 무비판적인 복종이 요구됐다. 유럽 지식인들은 서유럽의 혁명 실패, 파시즘의 승리, 스탈린주의에 직면하여 수동적인 태세로 후퇴했다(일리, 2008: 476~477). 핼러스에 따르면 이 시기 각국의 공산당들은 좌경화로 인해 소련에 종속되거나 반대로 기권주의 경향을 보이며 노동계급 대중으로부터 고립됐다. 

1928년 이후 코민테른은 스탈린에 의해 지배됐으며 소련 외교정책에 종속되기 시작했다. 스탈린에 대항하여 트로츠키 등은 1938년에 제4인터내셔널을 창설했으나 분열을 거듭했다. 

1935년 제7차 대회는 기존의 반파쇼 노동자 통일전선을 반파쇼 인민전선으로 더욱 구체화시켰다. 대회는 공산당은 노동자정당뿐만 아니라 파시즘에 반대하는 모든 정당과 함께 인민전선을 형성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파시즘은 가장 반동적인 제국주의로서 노동자를 약탈하고 전쟁을 획책하고 소련을 침략하고 중국을 분할하려고 한다. 
스페인에서 1931년에 왕정이 폐위되고 공화파, 파시스트, 인민전선이 각축을 벌렸다.  노동자들의 총파업 투쟁을 거치면서 1936년 인민전선이 집권하나 파시스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내전 상태에 빠졌다. 1937년 “이탈리아 사회당-공산당의 행동통일 신협정”이 발표됐다. 
프랑스에서 1934년 2월 공산당과 사회당이 반파쇼 총파업에 나섰고, 공산당은 5월부터 사회당에 반파시즘 행동통일을 제안했다. 7월 사회당-공산당 행동통일 협정이 체결됐으며, 공산당은 10월 인민전선 슬로건을 내걸었다. 1935년 6월 공산당, 사회당, 급진사회당등 50개의 단체가 참가하는 “인민연합 전국위원회”가 결성됐다. 1936년 1월 “프랑스 인민전선강령”이 선포되고 4월 총선거에서 인민전선이 승리했으며 사회당의 블룸을 수반으로 하는 사회당-급진사회당 정부가 성립했다. 공산당은 내부결정에 따라 입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1938년 인민전선 내 급진당의 달라디에 총리는 사회당과 함께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란트를 독일에 할양하는 뮌헨 협정에 서명했다. 공산당이 이 협정에 반대하자 급진당은 1938년 10월 마르세유 대회에서 인민전선에서 이탈했다.
1939년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체결되고 전쟁이 발생하자 전쟁에 반대한 코민테른에 속해 있던 공산당은 불법화된다. 독소조약에 따라 코민테른 지부들은 소련의 동부 폴란드 합병을 지원해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심지어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10월 31일 침략자로 간주되는 것은 히틀러의 독일이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라고 선언했다. 이는 결국 반파쇼 인민 전선 정책의 파탄을 의미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코민테른이 연합국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으로 입장을 바꾸면서 독일을 옹호해야 하는 상황이 극복됐다. 하지만 그 사이 코민테른과 각국의 공산당은 신뢰를 상실했다. 소련이 미국, 영국, 중국과 연합군을 구성하고 협력하면서 코민테른이 연합국 내에서 혁명활동을 할 명분이 사라졌다. 반파쇼전쟁에 더욱 집중하고 자본주의 국가의 우려를 고려하여 집행위원회는 1943년 5월 15일 사실상 사망상태에 있던 코민테른의 해산을 선언했다. 
그후 코민테른의 일부 업무는 비밀리에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부로 이관됐다. 스탈린은 1947년 코민포름(공산당 정보국)을 설립했으나 정보네트워크에 불과해 스탈린 사망 이후 유명무실화됐다. 코민포름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과 사회주의 종주국 논란으로 인해 1956년 해산됐다. 이후 모스크바에서는 국제공산당 및 노동당 대회가 1969년까지 3차례 열렸다. 이후 중단된 국제공산당 및 노동당 대회는 소련이 붕괴된 이후 그리스공산당의 주도로 1998년부터 2022년까지 이어지고 있다. 

1922년 코민테른 4차 대회와 1924년 5차 대회

코민테른 자격심사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이 당시 각국 공산당의 대열에는 125만 3,000명의 당원이 있었고, 그 가운데 당원 82만 5,000명이 자본주의 국가의 공산당에 소속하고 있었다. 다만 17개 당은 당원 수에 대한 자료를 제출하지 않았다(김성윤, 1986 Ⅰ: 183).

대회는 국제파시즘을 노동자계급의 혁명과 부르주아민주주의 일반을 폭력적으로 억누르고자 하는 거대 부르주아지의 방편이라고 특징지었다. 따라서 반파시즘 통일전선에 노동자가 선두에 서야 하며 중간층까지 끌어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체트킨이 ‘파시즘에 반대하는 투쟁’을 통해 파시즘이 소부르주아, 계급 내 몰락한 분자,  계급의식이 열악한 노동자에 기반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부르주아 독재와는 구별된다고 지적했다. 파시즘에 대응하는 노동자의 방어투쟁이 필요하고 나아가 노동자·농민정부를 구호로 내걸어야 한다. 

집행위원회는 부르주아가 ‘합법적인’ 방법으로 노동대중의 투쟁을 탄압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민주주의적인 통치제도를 파시스트적인 지배체제로 바꾸려 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노동자정부에 대해 지노비에프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다른 이름이라고 했지만 대회는 노동자정부를 통일전선 정부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발전해 가는 과도기적 형태로 규정했다. 노동자정부는 대중투쟁을 전제로 한다면 의회를 통해서도 성립될 수 있다. 노동자정부의 임무는 노동자계급을 무장시키고 생산을 통제하고 부르주아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등 부르주아지의 반혁명적 반항을 진압하는 것이다. 

나아가 대회는 ‘농업 행동강령 개요’는 러시아와 동유럽 등의 사례를 반영하여 노동자계급과 근로농민의 동맹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노동자·농민정부를 슬로건으로 정했다. 

‘반제국주의 통일전선’ 강령은 반제·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의 실현을 그 내용으로 했다. 식민지·반식민지 국가의 노동운동은 전체적인 반제전선 속에서 독자적인 지위를 갖는다. 식민지·반식민지의 노동자계급은 제국주의와의 투쟁을 통해서만 혁명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김성윤, 1986 Ⅰ: 194). 

대회는 민족부르주아지의 불철저성을 비판하면서도 민족혁명의 범위 내에서 반제투쟁을 실현하려는 민족 부르주아지를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정치적 독립성이 유지되는 경우에만 민족 부르주아와 세일시적인 연합이 가능하다. 

레닌이 참여한 마지막 대회였으며, 레닌이 제출한 ‘러시아 혁명 5개년과 세계혁명의 전망’은 러시아의 경험을 다른 나라에 교조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경계했다.

1922년 11월19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제2회 대회 역시 노동자 통일행동 전술을 구체화했다. 1922년 12월10일 헤이그에서 열린 ‘경제회의’에 맞춰 같은 도시에서 제2인터내셔널과 제2반 인터내셔널이 함께 국제평화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서 소비에트 러시아 노동조합 대표자는 전쟁 위험 반대 투쟁을 위한 국제위원회 창설, 반군국주의 선전주간 실시, 24시간 시위 총파업에 의한 투쟁주간 등 노동자 통일전선의 구체적 행동강령을 제안했으나 거부당했다. 

한편 1922년 13개국의 무정부주의적 생디칼리스트는 1922년 12월25일 독일 베를린에서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men’s Association)를 창립하고 제1인터내셔널의 상속자를 자임했다. 이들은 ‘자주관리생산자’ 제도의 옹호자라고 자처했다. 


5차 대회에서 채택된 ‘코민테른 당들의 볼셰비키화에 관한 테제’는 올바른 이론과 대중성 모두를 강조하며 레닌주의를 각국의 조건에 따라 적용할 것을 요구했다. 

1926년 10월26일 열린 제15회 전연방공산당 대표자회에서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는 일국 사회주의를 비판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영구혁명론에 따라 유럽혁명 없이 소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은 불가능하며, 일국사회주의는 세계혁명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방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구혁명론은 세계적 차원의 생산력 발전과 계급투쟁에 기반하고 있으며 세계혁명을 진퇴를 거듭하는 영구적인 과정으로 본다. 트로츠키에 따르면 영구혁명론은 첫째 민주주의혁명에서 시작해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로 발전하는 과정이며, 둘째 정치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과학기술, 가족, 나아가 일상생활들이 상호작용하며 발전하는 과정이며, 셋째 혁명은 일국에서 시작되지만 일시적일 뿐이며 일국에서 완성될 수 없다. 일국혁명은 국제적인 사슬의 한 고리일 뿐이므로 러시아혁명과 같이 고립된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유일한 출구는 유럽과 같은 선진국에서 혁명이 성공하는 것이다(트로츠키, 1989: 135~138).

트로츠키는 세계혁명이 승리하지 못하면 소련은 변질과 부패를 극복할 수 없으며, 사회주의경제도 제국주의 압력에 의해 붕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 결과 소련에서 자본주의가 부활될 수 있다. 트로츠키는 소련의 고립을 극복하기 위해 유럽혁명을 추동해야 하고 필요하면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일국사회주의를 위해) 국제평화를 추구하는 외교정책을 비판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150).

트로츠키는 세계혁명의 추동이라는 좌경노선에 기울어져 지노비예프와 함께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에서 탈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공산당은 좌경화돼 1927년 4월 국공합작에서 이탈해 도시봉기 노선에 따라 상해에서 봉기를 일으켰으나 국민당의 좌파까지 나서 강경진압에 나섰다. 

반면 집행위원회는 1926년 영국 탄광노동자들의 총파업을 지지하기 위해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에 연대를 제안하는 등 노동자통일전선을 견지했다. 

집행위원회는 현재의 자본주의가 비록 안정적이지만 소련의 발전, 영국에서 자본주의 쇠퇴와 계급투쟁 심화, 중국의 민족혁명 등으로 인해 언제든지 자본주의의 일시적인 안정이 깨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집행위원회는 소련이 국제혁명의 중심으로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실현해왔기 때문에 일국사회주의가 민족적 편협이 될 수 없다고 선언하며 트로츠키파를 비판했다. 집행위원회 간부회의는 트로츠키파에 동조하는 지노비예프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의장 직무에서 해임하였다(김성윤, 1986 Ⅰ: 267). 


1921년 코민테른 3차 대회

많은 사회주의정당들이 코민테른의 방침에 따라 공산당으로 개칭했으며 신생국에서도 공산당이 창당됐다.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의 좌파 세력이 1920년 10월에 열린 당 대회에서 코민테른 가입했으며, 이듬해 독일 공산당과 통합하여 독일 통일공산당(VKPD)을 창립했다. 1920년 12월에 프랑스 사회당 대회가 투르에서 열렸는데, 대회는 코민테른 가맹을 결정했다. 이탈리아 사회당이 1920년 코민테른에 가입했지만 1921년 1월 당 대회에서 중앙파와 개량주의자에 맞서 소수의 그룹이 퇴장하여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립했다.

그런데 자본가들이 탄압과 함께 양보정책을 구사하자 계급평화, 평화적 이행을 강조하는 개량주의자들이 득세했다. 1919년 2월 베른에서 제2인터내셔널을 재건하기 위한 회의에는 카우츠키 등 26개국으로부터 102명의 대표가 참가했다. 제2인터내셔널은 전쟁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독일 측에 돌리고,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을 승인했다.

1920년 12월과 1921년 2월에 중앙파에 속하는 각 당이 오스트리아의 베른과 빈에서 열린 두 차례의 회의를 통해 ‘사회주의 정당 국제활동연합’(International Working Union of Socialist Parties)을 결성했다. ‘빈연합’ 또는 ‘제2.5 인터내셔널’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조직은 독일 독립사회민주당, 체코 사회민주당,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 발칸 반도의 모든 사회민주당 그룹 등을 규합했다. 1919년 여름에는 제3인터내셔널에 가입했다가 탈퇴한 스위스 사회민주당,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좌파 등의 러시아 비(非)볼셰비키파, 영국의 독립노동당 등도 여기에 합류했다.

사회개량주의와 ‘좌파’ 공산주의, 중앙파 그리고 제3인터내셔널 등의 분열은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약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좌파’ 공산주의의 선동에 따라 개량주의적 노동조합을 탈퇴한 노조들은 혁명 지향 노선을 내걸었으나 개량주의적인 노동조합에 남아있던 광범한 노동자 대중으로부터 고립됐다.

이런 조건에서 노동자통일전선이 다시 부상했다. 1921년 1월7일 독일 통일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독일 사회민주당, 독일 독립사회민주당, 독일 공산주의노동자당과 독일의 모든 노동자 조직(독일 노동총연맹, 자유직원조합연맹, 일반노동자연맹, 자유노동자연맹 = 생디칼리스트 조직) 앞으로 「공개장」을 발표하고, 거기서 노동자와 노동대중의 긴요한 요구를 위해 반동 공세에 대항하는 공동투쟁의 전개를 호소했다. 이 공개장은 프롤레타리아 통일전선 수립을 위한 투쟁에서 최초의 중요한 사례가 되었다.

공개장은 “자본주의 해체의 진행, 개시된 세계공황이 독일의 특수한 공황에 미치는 반작용, 화폐가치의 계속적 저하, 독일에서 역시 높아가고 있는 모든 식료품과 생활필수품의 가격 등귀, 실업의 증대, 광범한 대중의 빈곤화 등은 전체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방위에 나설 것, 즉 그들이 공업프롤레타리아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제 점차 자기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자각해 가는 모든 층들을 고려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공개장은 임금·연금·은급·실업자의 급료 인상, 모든 임금생활자와 하급 봉급생활자에 대한 식료품 공급, 빈집의 징발과 노동자 주택조건 개선, 보유 원료와 석탄 그리고 비료의 경영평의회 관리, 생필품을 생산하는 유휴경영의 조업재개, 농장평의회와 소농평의회의 모든 농산물 경작·수확·판매 관리 등을 요구했다. 또 모든 부르주아적 자위단의 무장해제와 해산, 프롤레타리아 자위단 결성, 정치범과 생활 곤궁으로 인한 범죄인의 석방 및 사면, 파업 금지령 폐지, 소비에트 러시아와 통상·외교관계의 즉시 수립을 위해 공동행동을 전개하자고 호소했다.

사회민주당, ‘독립파’, 개량주의적 노동조합, 독일 공산주의노동자당과 같은 ‘극좌파’도 공개장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의장 지노비예프와 집행위원 부하린이 ‘좌파’의 견해를 옹호하여 공세이론을 들고 나와 공개장 제안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와는 반대로 레닌은 「공개장」을 프롤레타리아 통일전선을 수립하기 위한 올바른 시도라고 평가했다.

대회는 「노동자통일전선에 관한, 그리고 제2인터내셔널과 제2반(半)인터내셔널 및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에 소속된 노동자와 무정부주의적 생디칼리즘 조직들을 지지하는 노동자에 대한 태도에 관한 테제」를 채택하고 좌파의 공세이론을 거부했다. ‘국제정세와 코민테른의 임무’에 따르면 대중의 자연발생적인 봉기, 불확실한 투쟁방법과 목표, 그리고 지배계급의 극단적인 혼돈상태를 특징으로 하는 전후 혁명운동의 제1기가 종료했다. 대회는 광범한 일반 민주주의적 전선을 결성하기로 했으며 노동자 통일전선의 실시, 즉 “대중 속으로!”라는 전술을 채택했다. 노동조합, 협동조합, 여성단체, 청년단체 내에서의 당 활동 문제를 다루었다. 7월9일부터 23일까지에 걸쳐 제2회 공산주의청년인터내셔널 대회가 열렸으며, 6월에는 국제공산주의여성대회가 열렸다. 대회는 협동조합 내에서의 당 활동에 대한 테제를 채택했다.

집행위원회는 제2인터내셔널에 1921년 10월 헝가리와 스페인의 백색 테러를 규탄하는 공동행동을 제안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하지만 자본가의 노동자경제투쟁에 대한 공세, 파시스트의 태동, 군비증대와 전쟁 위험 등으로 인해 사회민주주의 조직이나 개량주의적 노동조합도 노동자통일전선에 관심을 지니게 됐다.

제2반(半)인터내셔널 내 프랑스 사회당은 코민테른을 포함한 국제회의를 주장했으나 영국노동당이 반대했다. 논란 끝에 제2반 인터내셔널 정치국은 1월14일 베를린 회의에서 “1월19일 유럽의 경제정세와 반동의 공격에 대항하는 노동자계급의 행동에 관한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3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와 공동으로 국제회의를 열자”고 제안했다.

1922년 2월21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1회 확대집행위원회는 노동자통일전선에 대한 12월 테제를 승인하고 세계대회에 모든 노동조합, 전국적 연합체와 국제적 연합체를 참가시키자고 결정했다.

반면 사민주의와 대립하는 기존의 노선도 유지됐다. 국제노동조합연맹(International Federation of Trade Unions =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은 코민테른 경향보다 거의 3배가 되는 약 2,200만 명을 포괄하고 있었다. 1921년 7월3일 모스크바에서 혁명적 산업별 노동조합의 제1회 국제대회가 열렸으며 이 대회는 국제연맹에 부속되어 있는 국제노동기구(ILO)와 암스테르담 노동조합 인터내셔널(국제노동조합연맹)에 반대하는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Profintern)을 창립했다.

프로핀테른은 소련과 아프리카의 노동조합, 사민주의 경향의 국제노동조합연맹의 반대파와 제명된 노조 들이 모여 결성됐으며, 반파쇼 인민전선에 따라 사민주의와 협력노선이 강조되면서 1937년 12월에 해체되었다. 프로핀테른은 서방의 제국주의에 반대했기 때문에 식민지나 종속국의 노동 운동을 지원했다. 프로핀테른은 일국 1노조 방침에 따라 재일 조선인은 일본인과 단일한 노조를 결성할 것을 지시했다.

이밖에 레닌의 「러시아 공산당의 전술에 관한 보고」는 네프를 설명하고 노농동맹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코민테른 제2차 대회

규약은 프롤레타리아 세계혁명운동의 지도자이자 조직자로서, 공산주의의 원칙과 목적의 담지자로서 코민테른은 노동자계급의 다수와 광범위한 무산농민층을 획득하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의 세계독재를 수립하기 위하여, 사회주의 소비에트공화국의 세계연방을 창설하기 위하여, 계급을 완전히 폐지하고 공산주의 사회의 제1단계인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투쟁한다”고 규정했다.

규약 제1조에서 “코민테른은 모든 나라의 공산당이 단일한 공산주의적 세계당으로 결합한 것이다. 코민테른에 가입한 각 당은 코민테른 지부가 되며, 지부인 당은 각국에 하나만 존재할 수 있다. 코민테른 지부의 당원 개인이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옮기는 것은 소속 지부 중앙위원회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세계대회는 2년마다 한 번씩 열리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와 국제통제위원회를 선출하는 기능을 갖는다. 집행위원회는 각 지부의 강령을 승인하고, 각 지부에 수임자를 파견할 권리를 갖는다. 그리고 집행위원회는 월 1회 이상 개최하도록 했다. 국제통제위원회는 코민테른 소속 지부의 통일과 단결 및 여러 지부의 당원 개개인에 대해 공산주의자로서 행동을 평가하는 것에 관한 문제들을 검토한다.

대회는 「코민테른의 가입조건」즉 ‘21개 조’를 확정했다. 주요 조건은 노동운동 내의 책임 있는 부서에서 개량주의자와 ‘중앙파’ 지지자들을 배제할 것, 합법적인 투쟁방법과 비합법적인 투쟁방법을 결합시킬 것, 식민지와 피억압 민족 문제에 대해 정확하고 명백한 방침을 정할 것, ‘어용노동조합’의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과 투쟁할 것, 당은 민주적 중앙집권제 원칙에 따라 건설되어야 하고 소부르주아 분자들을 당에서 배제할 것, 각 당은 가입을 위한 대회를 개최하고 공산당이라는 명칭을 명명할 것, 각 대회의 모든 결정과 집행위원회의 모든 결정은 코민테른에 가입한 모든 당을 구속한다는 것 등이다.  다만 코민테른과 집행위원회는 각 당이 처한 다양한 조건과 다양한 활동을 충분히 고려하여, 전체를 구속하는 결정은 그 결정이 가능한 문제에 한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김성윤, 1986 Ⅰ: 104).

1차 대전에 협조한 사민주의를 비판하고 러시아혁명 방식을 감행한 독일 공산주의 세력의 투쟁이 강조됐으며 이러한 배경에서 대회 기간 중 페트로그라드 우리츠키 광장에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 기념비의 초석이 세워졌다. 이러한 정세를 반영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의 공산당 역할에 관한 테제」에 따르면 노동계급은 내란의 시대를 맞이해 무장투쟁을 준비해야 한다. 

테제는 당, 소비에트,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전환할 것을 제시했으며 민주집중제의 레닌주의 정당을 강조했다. 또한 두 테제는 당과 노동계급 및 대중과의 관계를 정립했다. 

「코민테른의 기본적 임무에 관한 테제」는 부르주아 타도, 노동계급의 지도적 역할, 농업과 상업 및 사무직 등 중간층의 중립화 등 3가지 임무를 제시했다. 

레닌이 기초한 「농업문제에 관한 테제」는 노·농 동맹을 강조했다. 동맹의 대상은 농업노동자, 자영농, 반고용상태의 영세농이다. 공업노동자가 직업적 이익에 사로잡혀 자신의 경제적 상태를 개선하는 데만 관심을 갖고 개량적 결과에 대한 자기만족에 빠져버린다면 인류를 자본의 압제나 전쟁으로부터 해방시킬 사명을 이룰 수 없다. 중농은 차지료 폐지, 생산도구 지원, 채무 탕감 등의 정책을 통한 중립화 대상으로 분류됐다. 대농에 대해 점진적인 사회화를 제시했다. 무노동 지주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몰수를 강조했다. 

레닌을 의장으로 하는 특별위원회가 레닌의 ‘민족·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 원안’을 수정했다. 이 테제는 민족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각 정세를 고려할 것, 피착취자의 이익과 기만적인 전 국민의 이익을 구별할 것, 제국주의와 그 종속국의 민족주의를 구별할 것 등을 강조했다. 발전한 자본주의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와 피억압민족의 민족해방투쟁을 단일한 반제국주의적 조류로 융합시킬 임무를 강조했다. 

이 테제에 따르면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본성적으로 민족의 평등을 포함한 평등 일반의 문제를 추상적 또는 형식적으로 제기하는 것이 그 고유한 특징이다. 다만 코민테른은 식민지나 후진국의 부르주아 민주주의파와 일시적 협정을, 때로는 동맹도 맺어야 하지만 그것과 융합해서는 안 되며, 비록 맹아적 형태일지라도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자주성을 무조건 유지해야 한다. 소비에트, 자본주의 노동운동, 민족해방운동이 단결해야 하며 특히 소비에트가 제국주의를 제압하는 것이 민족해방의 유일한 길이다. 

인도의 로이의 「민족·식민지 문제에 대한 보완 테제」에 따르면 외국 제국주의는 동양 민족들이 자신들과 동등한 수준으로 사회적·경제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저지했다. 제국주의 정책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최근까지 성립할 수 없었다. 토착 수공업은 파괴되어 제국주의 국가들의 집중화된 공업 생산물에 의해 자리를 빼앗겼다. 그 결과 인구의 대다수는 외국으로 수출할 곡물이나 원료를 생산하기 위해 농촌으로 몰려 들어갔다. 그 결과 다른 한편으로는 대지주, 금융자본가, 국가의 수중에 토지가 급속히 집적되고, 이에 따라 엄청난 수의 토지 없는 농민이 창출되었다.

로이의 테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적인 민족주의운동을 농민과 노동자의 대중행동과 구별했다. 대부분의 동양 제국에서는 순수 공산주의 원칙에 기초하여 농업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상당한 오류이다. 

식민지에서의 혁명은 그 초기 단계에서는 토지 분배 등과 같은 소부르주아적·개량적 조항을 많이 포함하는 강령에 기초해서 수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혁명의 지도권을 부르주아 민주주의자에게 양도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부르주아 민족주의적인 혁명 분자와의 협력도 유익하다면서, 그러나 가장 필요한 임무는 농민과 노동자를 조직하여 혁명과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을 향해 그들을 인도할 수 있는 전위당을 창설하는 것이다.

제3인터내셔널 코민테른의 개요와 창립대회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노동사회가 연재한 세계노동운동사와 기타자료를 참조했습니다. 참조목록은 최종본에 수록될 예정입니다.

http://klsi.org/bbs/board.php?bo_table=B07&wr_id=1605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914년 7월 28일 세르비아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이에 세르비아의 지원국인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내렸고, 역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원국인 독일이 총동원령을 내렸다. 양국이 대립하다 결국 독일이 1914년 8월 1일 러시아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앞서 제2인터내셔널은 1912년 제9차 대회까지 전쟁협조 거부 노선을 유지했다. 하지만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자 제2인터내셔널을 주도했던 독일사민당의 다수는 전쟁에 협력했다. 심지어 독일사민당의 필립 샤이데만 제국의회 부의장은 러시아가 전쟁가 유발했으나 방어전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사회당, 영국 노동당 등 대부분의 제2인터내셔널 소속 정당들은 전쟁에 협력했다. 

이에 레닌은 1914년 11월 겉으로만 사회주의를 외치면서 개량주의로 흐르는 사회배외주의(Social Chauvinism)의 제2인터내셔널과 결별하기로 했다. 한편으로 당시 사회배외주의 주창자와 중앙파는 공산주의운동에 대응하기 위해 제2인터내셔널 사무국을 중립국인 네덜란드로 이전하는 등 개량주의로 전락한 제2인터내셔널을 부활하고자 했다. 

이에 대응하여 1918년 1월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간부들의 대표 회의에 스웨덴, 노르웨이, 영국, 미국,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의 대표들이 결합했다. 참가한 정당들은 1차 대전에서 본국 정부에 반대하고 즉시 강화를 목표로 혁명적 투쟁의 길로 나아가기로 했다. 1919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공산당 좌익 조직 대표회의에서 제3인터내셔널을 조기에 창설하자는 레닌의 주장이 수용됐다.  이 대회에서 채택된 호소문은 러시아 공산당과 독일 스파르타쿠스단의 강령에 기초해 국제공산주의운동의 목표·전술 및 조직원칙을 제시했다. 드디어 같은 해 3월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 Comintern)이 창설됐다. 


1919년 3월 2일 레닌 30개 나라의 35개 공산당 및 공산주의 단체가 창설

1920년 7월 19일 2차 대회

1921년 6월 22일 3차 대회

1922년 11월 5일 4차 대회

1924년 6월 17일 5차 대회

1928년 7월 17일 6차 대회

1935년 7월 25일 7차 대회

1943년 5월 15일 집행위원회의 해산 선언

1947년~1956년 코민포름(사회주의국가 정보공유기구)

1957년. 1960년. 1969년 세계공산당 및 노동당대회

1955~1991년 바르샤바조약기구


1935년까지 7차 대회 전부 모스크바에서 열렸으며, 2차와 4차는 페트로그라드에서도 분산돼 열렸다. 4차 대회 당시 최대 규모로 340명의 대표와 48명의 자문위원이 참여했다. 코민테른의 최고기관은 코민테른 대회이고 대회와 대회사이의 지도기관은 집행위원회이며, 당의 일상사업은 집행위원회가 선거한 상무위원회가 지도하였다. 매개 나라에는 일국일당의 원칙에 따라 코민테른 지부를 두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총회(Plenums of Executive Committee of the Communist International)는 대회의 대행기관으로서 1922년부터 1933년까지 매년 13차례 열렸으며 1922년과 1926년엔 두 번 열렸다. 단 1930년 회의는 정식회의가 아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산하에 암스테르담, 극동, 스칸디나비아, 발칸, 비엔나, 남부(Scandinavian Bureau of the Communist International) 등 6개의 비서부가 있었다. 

코민테른 초대 의장 그레고리 지노비예프가 7년 동안 역임했으나 트로츠키를 지지하다가 스탈린에 의해 해임됐다. 니콜라이 부하린이 후임으로 선출됐으나 1928년 소련공산당의 서기장(General Secretary) 스탈린으로 교체됐다. 레닌은 1922년 4차 대회까지 참석했다.

코민테른에서 채택된 결정이나 결의의 주제를 분류해보면 주로 초기에 신경제정책과 같은 소련 문제, 공산주의인터내셔널과 각국 공산당, 노동조합의 조직과 전략을 다루었으며 농업 및 농민 문제, 청년, 여성 등 부문 대중에 대한 것도 논의했다. 

1920년 제2차대회에서 후진국과 종속국에서 노농동맹, 부르주아민주파와의 연합이 제기됐다. 노동자통일전선은 주로 노동자정당과 노동조합이 활성화된 유럽에 관련된 것으로서 1921년 제3차대회부터 끝까지 중요한 문제였으나 각 시기 별로 단결해야 할 대상과 전선의 목표는 정세에 따라 변해돼 왔다. 초기 반제국주의 노동자통일전선 혹은 반제국주의 인민전선을 강조할 경우 제국주의 전쟁에 협조한 사민주의 세력을 통일전선의 대상에서 제외해야 했다. 노동자통일전선이 부각되기 직전인 1921년 사민주의 노조에 대립하여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 설립이 추진됐다. 

1930년을 전후로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파시시트가 성장함에 따라 사민주의 세력을 포함한 반파쇼 인민전선으로 발전했다. 반파쇼인민전선이 독소불가침조약으로 파탄된 것은 코민테른이 해산되는 중요한 원인이다. 반파쇼인민전선은 코민테른 차원에서는 와해됐지만 독일에 점령된 유럽국가 특히 동유럽에서 인민민주주의 노선으로 발전했다. 이들 나라에서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인민정부가 출범하였다. 

민족 문제와 식민지(종속국) 문제 역시 코민테른 전 기간 동안 논의돼 왔던 것으로서 제국주의 국가의 민족 문제와 사회주의운동과의 관계까지를 포함한다. 관련하여 1927년에는 식민지 압제와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세계대회(World Congress Against Colonial Oppression and Imperialism), 1929년에는 제국주의 반대동맹대회, 1930년에는 국제흑인노동자대회(International Conference of Negro Workers)가 열렸다. 특히 비서국이 설치된 동양 문제가 지속적인 주제였으며, 1920년 동방인민대회, 1922년 극동인민대표대회 등 관련 대회가 열렸다. 식민지 문제가 노동자통일전선과 결합돼 민족해방 통일전선, 반제민족해방통일전선 등으로 발전했다. 코민테른에서 인민전선 문제가 본격 논의되면서 식민지에서 반제민족해방인민전선이 부각됐다. 식민지에선 파쇼 제국주의나 부르주아 제국주의나 모두 축출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코민테른이 해산된 이후 반제민족해방통일전선은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론으로 발전하였으며, 중국에선 신민주주의 혁명이론으로 구체화됐다. 2차 대전 종결 이후 많은 식민지가 해방된 후 이러한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이론 따른 인민정권이 들어섰다.

식민지 조선과 관련된 것이 극동비서국이다. 코민테른 극동비서부는 1921년 2월 러시아 이르쿠츠크주에 설치됐으며, 1920년 7월 설치된 러시아 공산당 시베리아국 산하 동양국이 개편된 조직이다. 설립 당시 93명의 임직원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극동비서부장에 슈먀츠키(Boris Zakharovich Shumyatsky)가, 책임 비서에 보이친스키(Voytinskiy)가 선임되었다. 한국, 중국, 일본, 몽골·티베트 네 개의 민족별 지부가 조직되어 있었다. 

코민테른 초기에는 극동비서국과 러시아연방 내 극동공화국(치타공화국)이 동양의 민족 문제를 담당했다. 1920년 러시아연방의 공산당 시베리아국 동양민족부는 시베리아에서 극동공화국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코민테른이 러시아 동양민족부를 코민테른의 기구로 편입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1920년 9월 15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극동비서국을 두기로 결정했다. 1921년 1월 15일에 열린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무국은 러시아 공산당 시베리아국 동양민족부를 코민테른에 이관할 것과 슈먀츠키를 극동 주재 코민테른 대표자로 임명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극동비서국의 설치로 인해 극동에서 한인사회주의 운동은 과거와 달리 러시아나 극동공화국의 간섭에서 벗어나 코민테른의 일원적 지도를 받게 됐다. 


1919년 코민테른 창립대회

크레믈린에서 열린 창설대회에서  대회 의장단으로는 레닌, 에벨라인(독일), 플라텐(스위스)이 선출되었고 이어 코민테른 의장으로서 그리고리 지노비예프가 선출됐다. 집행위원회 내 간부회는 지노비에프 의장과 발라바노바, 제르긴 서기 등 5명이었다. 당시 러시아 공산당과 다른 소비에트 공화국 공산당 외에 유럽에 존재했던 공산당은 6개 국가뿐이었다. 식민지나 종속국에서 온 대표가 대표자 52명 가운데 이란, 중국, 조선, 터키 등 12명이었다.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지침」은 “자본주의 해체의 시대, 프롤레타리아트 공산주의 혁명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밝혔다. 지침에 따르면 노동자계급이 주도하여 정치권력을 획득하고 부르주아 국가기관을 철폐함과 동시에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소비에트 체제로 대체해야 한다. 

레닌은 「부르주아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테제와 보고」를 통해 민주주의가 피억압계급의 과제라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또 “역사의 교훈은 무릇 피억압계급이 독재의 시기를 거치지 않고 지배의 지위에 올랐던 예는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레닌은 “지주나 부르주아의 독재가 주민의 대다수 즉, 근로대중의 반항을 무력으로 탄압하는 반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착취자 즉, 주민 중에서 극소수인 지주와 자본가의 반항을 무력으로 탄압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레닌에 의하면 러시아에서 혁명 초기의 타 정당들이 반혁명에 가담함으로써 일당제로 귀결됐다. 반면 폴란드 체코 등은 여러 정당들이 함께 파시즘에 대항하고 민주주의 개조에 참여했기 때문에 일당제로 귀결된 러시아와 다르다.

러시아혁명 확산을 막으려는 유럽과 미국 정부의 방해로 인해 해외를 대표하는 상당수는 실제로 러시아 거주자였으며, 해당국 노동계급의 공산당 대표가 아니라 소그룹 출신자였다. 대회는 제2인터내셔널을 부정했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자뿐만 아니라 중앙파(카우츠키파)와 결별하기로 했다. 같은 취지로 사민주의 노조와 구별되는 적색노조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즉 아직은 노동자통일전선이 첨예하게 부각되지 않았다.

대회는 제국주의 각국의 프롤레타리아트 투쟁과 식민지·반식민지 민족해방투쟁과의 밀접한 결합을 끊임없이 실현하고, “제국주의 세계체제의 종국적인 붕괴를 촉진하기 위하여” 피억압 민족의 투쟁을 지지할 것을 자신의 의무로 내걸었다(김성윤, 1986 Ⅰ: 76). 

제2인터내셔널과 제국주의

 제1차 (1889년) 파리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


1876년 제1인터내셔널은 필라델피아에서 해산되었지만 그 이후 각국에서 노동조합과 사회주의정당이 성장했다. 이에 마르크스주의를 계승한 독일사민당의 제안으로 제2 인터내셔널은 1889년 7월 14일 열린 국제 노동자 회의에서 설립되었다. 제2 인터내셔널은  당과 노동조합의 연합조직이었다. 영미의 실리주의, 프랑스의 생디칼리즘, 마르크스주의 노동조합주의가 혼재돼 있었다. 1908년 가입한 영국 노동당을 제외하면 마르크스주의정당들이다. 1893년과 1896년 총회에서 아나키스트들이 추방됐다. 1904년 대회 참가국 기준으로 21개국이 선거에 참여하여 660만표를 획득하였으며 의회에서 261석을 얻을 수 있었다. 1914년에는 400만명의 당원을 확보하였으며 유권자는 1200만이 되었다. 

대회는 사회주의 정당의 원칙과 독립성을 파괴할 수 있는 타협은 용인될 수 없으며, 부르주아 정당과는 별개의 노동자계급의 정책을 제기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노동조합을 경시하는 독일사민당의 라쌀주의 전통, 그리고 이미 각국의 총연맹이 각 정당들과 연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조합에 대한 정치사업은 활발하지 못했다. 제2인터내셔널은 총파업 투쟁을 강조했으며 주기적으로 8시간 노동을 요구하면서 노동절 시위를 조직했다. 



제2차 (1891년) 브뤼셀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

부르주아 정당의 지배에 반대하는 노력을 결합하고, 노동자가 정치 권리를 갖고 있는 나라에서는 어느 나라에서든 이 권리를 임금노예제로부터 해방을 이룩하기 위해 이용해야 한다


제3차 (1893년) 취리히 사회주의 노동자 대회

사회주의 운동의 정치권력 장악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한 노동자계급 조직의 필요성에 대해 결의했다. 노동조합의 전국 연합체를 모든 나라에서 결성하고, 산업별 국제노동조합회의 소집을 제안했다.



제4차 (1896년) 런던 인터내셔널 사회주의 노동자 무역 동맹 대회

회원 자격문제를 둘러싸고  아나키즘의 가입을 제한했다.  "자본주의 소유와 생산을 사회주의 소유와 생산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고, 동시에 입법 및 의회활동을 그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의 하나로 인정하는 조직의 대표"와 "비록 정치투쟁에서 일정한 지위를 갖지 못하고 있지만, 입법과 의회활동의 필요성을 인식한다고 천명하는 노동조합"으로 결의했다. 노동자계급은 최종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투쟁수단을 이용해야 하고, 이 경우 의회전술 문제에 대해서도 크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경제투쟁과 관련하여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강조했다.


제5차 (1900년) 파리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


프랑스에서 1895년에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으로 1898년 선거가 치러졌고, 선거에서 승리한 민주공화파는 왈덱 루소(Waldeck Rousseau)내각을 출범시켰는데 이 내각에 사회주의자 알렉상드르 밀레랑(Alexandre Millerand)이 상공장관으로 들어갔다. 밀레랑 옹호 진영은 입각이 기존체제 내에서 부분적인 개량 성과를 얻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조레스(Jaurs)는  '새로운 전술'의 모범, '부르주아지에 대한 정치적 탈취'로 평가했다. 이에 반해 게드(Guesde)는 당의 목표를 희석시키고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계급투쟁과 사회주의 원칙에 배치된다고 비난했다. 인터내셔널에서 당이 승인만 하다면 일시적이며 예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카우츠키의 타협안이 채택되었다.

한편 프랑스 게드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철폐와 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위한 혁명 수단으로서 세계 규모의 총파업을 제안했다. 각국 대표들은 총파업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국 이 제안은 대회에서 부결되었다.



제6차 (1904년)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


독일 드레스덴 사회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부르주아 내각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과 의회주의를 주장하는 베른슈타인에 대한 비판 결의문이 통과된 이후 열린 대회에 이 문제로 베벨과 조레스가 대립했다. 조레스는 프랑스의 경우 왕정을 복구하려는 왕당파를 견제하기 위해 공화파 부르주아 내각에 참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총회는 드레스덴 결의문에 25:5의 지지를 보냈고 12명은 기권하였다. 그러나 수정주의자들은 독일 대표자로서 인터내셔널에 남아 있었다.

또한 대회에 상정된 안은 먼저 총파업과 대중파업을 구분했다. 총파업은 체제전복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서 사회 전체의 운명이 걸린 일이라 '무정부주의적'인 행동으로 규정되었다. 정치적 대중파업은 일정한 조건에서만 즉, 노동자들의 권리와 이익에 어긋나는 반동적인 조치에 대항하기 위해 혹은 중요한 사회변화를 이끌기 위한 조건에서만 승인될 수 있는 최후 수단으로서 인정되었다. 그리고 대중파업도 그것이 일정한 조직 발전을 통해서, 계급투쟁에서 노동자들 사이의 단결과 세력 강화에 기여하는 경우에 한해서 허용된다고 강조됐다. 


제7차 (1907년) 슈투트가르트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


논란 끝에 전쟁반대 결의안이 통과됐다. 나아가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 그리고 마르토프가 제출한 수정안이 포함됐다. 이 수정안에 따르면 '어느 곳에서든 전쟁이 발발한 경우에는 전쟁의 빠른 종식을 위해서 개입해야 하고, 대중들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전쟁에 의해서 생기는 모든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위기를 전력을 다하여 활용해야 하며, 자본주의적 계급지배를 하루라도 빨리 종식시키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바로 "노동운동"의 임무이다.' 이러한 입장은 전쟁 1년 전인 1912년 바젤 대회까지 매번 확인됐다. 

식민주의는 보어전쟁 당시인 1900년의 인터내셔널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7년 후에 열린 슈투트가르트 회의에 참석했던 식민지 대표들 대부분은 '어떤 상황 하에서나 모든 식민지 정책을 일률적으로 거부할 수만은 없다.'고 주장했다. 즉 여기에는 베른슈타인의 주장처럼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개화를 목적으로 한' 식민정책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이 제안은 논쟁 끝에 127:108로 부결되었다. '자본주의적 식민지 정책은 그 본질상 토착민들을 노예화시키고 노동을 강요하며 뿌리를 근절시킨다.'는 결의문이 통과되었다.


제8차 (1910년) 코펜하겐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


제9차 (1912년) 바젤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 (긴급 대회)

평화를 위한 시위가 되었으며 또 다시 만장일치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혁명적 투쟁을 하기로 결의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자 제2인터내셔널의 주축이 되었던 정당들은 자국의 정부에 의해 수행되는 전쟁을 지지했다. 인터내셔널의 붕괴는 자본주의 팽창의 절정이며 노동운동의 민족적 통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러시아, 세르비아, 헝가리 등의 당들만이 반전 노선을 견지했다. 

전쟁 중에, 중립국에 있는 당들을 중심으로 제2인터내셔널을 부활하려고 인터내셔널 사무국은 네덜란드로 옮겨졌다. 전쟁 직후 1919년의 베른 회의는 성과가 없었으며, 다음해에 제네바에서 17개국이 참가한 총회가 개최되었고 1923년에 함부르크 총회에서 제대로 부활됐다. 

이와 별도로 1921년에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SPÖ) 그리고 영국 노동당을 포함한 10여개국의 좌익 사회주의자들이 비엔나에 모여 '제2.5인터내셔널'이라는 별칭이 붙은 사회당 국제 노동동맹('비엔나 동맹')을 결성하였다. 비엔나 동맹은  제2인터내셔널과 통합하여 노동자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을 결성했고, 이것은 1940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조직은 1951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로 이어졌으나, 이는 세계에 퍼져있는 사회주의 정당 및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느슨해진 연합으로서 런던에 본부를 설치했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은 1951년 6월 30일 창립대회에서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발표하여 무장혁명을 거부하고 사회민주주의노선을 천명하면서 소련을 비판했다.  2013년 주도국인 독일사민당이 탈퇴하여 진보동맹을 출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