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직전 힐퍼딩의 금융자본론

마르크스부터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자본주의 제국주의론 8

루돌프 힐퍼딩(1877년 ~ 1941년)은 오스트리아 유대인 상인 집안 출신으로서 대학시절에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했다. 그는 이후 독일사민당의 초청으로 1906년 독일사민당 교육원의 국민경제학 강사가 되었고 1916년까지 사민당 기관지인 전진의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1914년에 그는 전쟁을 반대하는 SPD의 좌파에 가담했으나 1915년까지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의사로 강제징집 당했다. 

1918년부터 1923년까지 독립사민당 기관지 ‘자유’의 편집장으로 활동하였다. 사민당에 통합된 후 그는 제국의회의원을 지냈으며, 1929년 12월 말 뉴욕증시 폭락으로 재무부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1933년 나치스 정권 성립 후 추방되어 스위스를 거쳐 1938년부터는 프랑스에 머물렀으며, 망명사민당의 지도부로서 활동했다. 독일군의 프랑스 점령 후에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탈출하려다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어 파리에서 고문 받다가 사망했다. 나치 지도자의 명령으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1900년대 초반 독일은 물론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독점자본의 카르텔을 형성했다. 이를 목격한 힐퍼딩은 ‘금융자본론-자본주의적 발전의 최근 단계’(1910)를 저술했다. 이책은 경쟁적이고 다원적인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독점적인 '금융자본'으로 전환하는 것을 분석했다. 이 저서는 레닌과 부하린의 저서로 연결된다. 

금융자본은 최고로 발전한 자본 형태로 일종의 “삼위일체”를 이룬다. “왜냐하면 산업자본은 성부로서 상업자본·은행자본이라는 성자를 낳았고, 화폐자본은 성령이기 때문이며, 성자·성부·성령은 셋이면서 금융자본에서는 하나로 통일되기 때문이다. 이 삼위일체는 국내외적으로 자신의 이해관계를 보호하고 관철시켜 주는 강력한 국가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를 제외한 사회계급이 이 삼위일체와 연합한다. 이로써 국가독점자본주의가 형성되고 조직자본주의가 나타난다.

힐퍼딩의 이론적 논의는 화폐에서 시작하는데, 이는 화폐의 기능과 의미를 올바로 파악해야 가치의 문제와 이 가치를 통해 형성되고 유통되며 작동하는 각종 자본의 문제에 제대로 접근할 수 있다는 힐퍼딩의 기본입장을 반영한다. 이어서 신용, 주식회사, 산업자본과 은행자본, 증권거래소와 상품거래소, 카르텔과 트러스트, 공황 등에 대한 논의가 전개된다. 

실천적 논의는 이러한 금융자본의 발전이 주요한 사회계급에 미치는 영향을 다루고 있다. 힐퍼딩은 금융에 의한 경제와 산업의 지배, 산업과 금융 및 국가의 유착을 지적했다. 산업, 상업 및 은행 이해관계의 통합은 중상주의의 자유방임이 아니라 국가의 개입을 요구한다. 집중되고 독점이익이 누리는 자본은 과거 부르주아 일반을 위한 국가에서 독점자본을 위한 국가를 추구한다. 이러한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에서 독점자본은 농민과 소생산자들을 자신들에게 경제적으로 종속시켰다. 

힐퍼딩은 금융자본의 정책은 전쟁으로 나아가고 그리고 혁명적 폭풍을 촉발시킬 것이라고 봤다. 그는 대(금융)자본가들의 독재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대체되면서 사회변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국가권력을 장악한 노동계급이 독점자본을 자신의 소유로 만든다면 농민과 소생산자의 사적 소유 역시 간접적으로 사회적 소유로 전환된다. 즉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는 농민과 소생산자의 소유를 사회적 소유로 전환하기 위해 직접 몰수하지 않더라도 독점자본의 사회화를 통해 전체 사회를 사회주의사회로 전환시킬 수 있다. 

극소수의 독점자본을 타도하는 혁명경로는 독점자본에 의해 착취당하는 농민과 소생산자 등 다양한 계급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 이후 이러한 반독점사회주의혁명의 경로는 자본주의가 발전한 유럽식 혁명 즉 유로코뮤니즘으로 구체화됐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매우 성숙할 때 즉 농민과 소생산자들이 노동자로 몰락하거나 자본가로 성공하는 계급분화의 시기를 거쳐야 가능하다. 하지만 힐퍼딩에 따르면 이러한 자본주의 성숙 이전에도 독점자본이 국가권력을 좌지우지하는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성립할 수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와 달리 자본주의가 성속하지 않은 나라에서도 독점자본을 사회화하는 방식으로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 독점자본 이전의 마르크스의 혁명경로와 달라질 수 있다. 

힐퍼딩은 국가독점자본주의를 자본주의의 최근단계로 봤다. 다만 힐퍼딩의 국가독점자본주의는 미국과 서유럽 같이 성숙한 자본주의 단계에서뿐만 아니라 독점자본이 정치엘리트와 결탁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개발독재, 혹은 파쇼체제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레닌은 힐퍼딩의 이론을 참조하여 독점자본주의를 제국주의와 같은 것으로 보며 자본주의 최후 단계로 규정했다. 


독일 혁명 실패 이후 좌익공산주의(평의회주의)의 태동

마르크스부터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자본주의 제국주의론 7

1차 대전 직후 독일혁명에서 소비에트의 활약이 유럽의 평의회주의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독일황제는 항복하면서 러시아식 혁명을 두려워하여 제1당인 사민당의 당수를 수상으로 지명했다. 구체제와 의회주의자들의 화해와 연대 때문에 독일에서 광범위한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 불필요해지면서 혁명세력은 극좌세력으로 축소돼 고립됐다. 이점이 러시아혁명과 다른 점이다. 

1차대전에 협조하던 독일사민당을 비난하면서 전쟁반대 파업을 감행했던 조합원들이 독일 좌익공산주의의 기원이다. 이들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독일 공산당(KPD)을 창당했다. 로자의 스파르타쿠스단은 중앙집권화, 대중조직에서의 활동을 강조했고 독일국제공산주의자는 평의회 체제와 분권화된 협의체를 강조했다. 

독일국제공산주의자들에 따르면 사민당과 노조가 1차 대전에 참여한 독일의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혁명의 최초에 의회주의와 노동조합주의에 반대하여 노동자평의회와 쏘비에뜨가 제기된 것은 실질적 운동이었고 그것은 옳았다는 것이다. 독일혁명 당시 병사평의회가 Altona 주둔 제9군단, Hannover 주둔 제10군단을 장악하는 등 도시 지역까지 평의회가 구성돼 광역지방자치단체까지 통제했다. 제1차 전독일 노병평의회 총회(1918.12.16-20)는 독일 사회주의 공화국의 중앙평의회를 선출하고 이 최고의 평의회 기구에게 제국정부와 프로이센에 대한 의회적 감독의 권한을 위임했다. 1919년 봄 뭰헨에서 바바리아 레테공화국(R?terepublik)을 창설했다. 에센 노병평의회는 루르지방의 광산의 사회화를 독자적으로 개시토록 결의하고 임금, 가격 등 산업을 통제했다. 하지만 제국정부는 전국적으로 노병평의회를 유혈 진압했다.

좌익공산주의자들은 독일공산당(KPD)에서 제명당하자, 독일공산노동자당(KAPD)을 창당했으나 곧 쇠퇴횄다. 일부는 제3인터내셔널에 합류했다. 안토니 파네쿡 등 KAPD의 이론가들은 정당조직 반대에 기초한 새로운 사상들을 고안해 냈고, 그 결과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KAPD는 ‘세계자본주의는 쇠퇴기’에 들어섰으며 “독일에서의 경제ㆍ정치적 상황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발발할 만큼 무르익었다”고 파악하고 “독일 혁명의 문제는 독일 프롤레타리아트 의식 자체의 발전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의회에 참여는 개량주의적이고 기회주의적이라서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이라고 비판하며 평의회 체제를 주장한다. 또한 그들은 노동조합 역시 독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요장벽으로 노동조합의 반혁명적 성격은 노조의 구조와 작동방식 자체에서 나오는 것으로 노조의 파괴만이 독일에서 사회혁명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의 대안으로 “공장평의회”를 강조했다.

이탈리아의 좌익 공산주의자들은 1926년 이탈리아 공산당에서 축출됐다. 이후 이들은 의회를 통한 혁명이라는 혁명적 의회주의에 반대했다. 또한 이들은 소련이 부르주아국가로 변질됐다고 비판했다. 소련이 주도하는 코민테른이 국제주의를 포기했다고 비판했으며, 코민테른의 통일전선 방침에 반대했다. 특히 이들은 공산당들이 반파쇼민주주의 통일전선이라는 코민테른의 지침에 따라 제2차 대전에 참여하는 것에 반대했다. 다만 이들은 혁명적이라는 조건 아래 정당의 필요성을 인정했으며, 맑스 및 엥겔스와 마찬가지로 노동조합을 프롤레타리아트의식이 단련되는 “공산주의의 학교”로 파악했다. 다만 노조 내 투쟁을 통해 개량주의 지도부를 축출할 것을 강조했다. 반면 혁명당 국제서기국(International Bureau for the Revolutionary Party)은 노동과 자본의 중매기관인 노동조합을 혁명기관으로 변혁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각국의 평의회주의자 혹은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처한 상황에 따라 다양한 주장을 펼치나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레닌주의의 전위당론과 민주집중제가 공산당을 독재 집단으로 타락시킨다고 봤다. 로자의 주장을 수용해 혁명적 정당은 노동계급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선전 선동하는 역할만 하면 된다고 봤다. 이들에 따르면 노동자평의회는 혁명이 성숙할 때 등장하는 노동자계급의 자생적인 조직이고 노동자계급의 권력과 동일하므로 공산당의 지시에 복종할 필요가 없다. 

좌익공산주의자에 따르면 소련은 국가자본주의체제였다. 이들은 10월 혁명을 초창기 도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과 농촌 부르주아 혁명 즉 이중혁명으로 규정했으나 나중에 부르주아 혁명으로 변질됐다고 설명한다. 소련의 일당독재 체제에서 의회인 소비에트는 민주적으로 구성되지 않았고 1년에 한번 열리는 거수기였다. 결국 공산당 관료가 자본가처럼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10월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에 가깝다. 

영국의 일부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선거참여를 거부했으며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과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전술적인 협력을 하는 레닌의 공동전선 역시 거부했다. 영국의 좌익 공산주의자들은 의회참여와 노동당에 대한 입당 전술의 차이 때문에 분열되어 통합된 공산당을 건설하지 못하고 있었다. 레닌은 좌익소아병(1920)에서 의회 참여거부는 오류지만 그렇다고 그런 문제 때문에 소련을 지지하는 공산주의자들이 통합을 못하는 것은 더 큰 오류라고 봤다. 또한 레닌은 좌익공산주의자들이 전위와 대중의 관계, 당과 계급의 관계, 전위정당 건설과 당의 대중적 지도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레닌에 따르면 좌익공산주의자들이 오로지 곧은길만을 인정하고 우회와 협조와 타협을 거부하면 공산주의에 대하여 중대한 해독을 가져 올 수 있다.  레닌에 따르면 좌익공산주의자들은 경험과 이론 부족으로 인해 노조와 당과 같은 합법 활동을 활용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엥겔스 역시 이미 블랑키파 코뮌 망명자의 강령(1874)을 통해 당시의 급진적인 독일 공산주의자들을 비판했다. 엥겔스에 따르면 독일 공산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중간역이나 타협을 뛰어넘는 선량한 의지만 갖고 있으면 혁명이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그들은 혁명이 발생하여 자기들이 정권을 잡기 만하면 내일 혹은 모래에 ‘공산주의가 실현된다’고 낙관했다. 엥겔스는 이러한 좌익공산주의자에 대해 성급함을 하나의 설득력 있는 이론적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어린애다운 소박함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레닌 시기 독일사민당의 우경화

마르크스부터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자본주의 제국주의론 6

독일사민당은 이념에 있어 사회주의를 선언하였지만, 현실에 있어 자본주의 국가를 타도의 대상으로 설정하지 않고 오히려 자본주의 국가를 통한 개혁이라는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명확히 함으로써 선거를 통한 합법적 토대를 확충해왔다. 전국적으로 1913년까지 약 1만3천명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지자체 의원에 당선되었는데 이는 지역수준에서는 사민당이 다른 부르주아 정당과 선거협약을 맺은 효과이기도 하였다. 1910년까지 십만 명의 당 지지자가 사회보험과 고용정책 집행기구에 일하게 된다. 

베른쉬타인은 “프롤레타리아 궁핍화와 계급구조의 단순화가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았다”고 진단하면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점진적 변화를 주장하였다. 그는 “운동이란 국가 속에서의 모든 개량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사민당이 실질적인 민주개혁을 추진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회계급의 지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로자 룩셈부르크 등 좌파뿐만 아니라 베벨, 칼 카우츠키 등 정통파도 이러한 수정주의를 반대하였다. 

독일사민당의 지도부는 1899년과 1903년의 당 대회에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거부하였지만 “사민당이 계급투쟁을 강화하고 정치에 참여하여 혁명을 준비해야 하나 국가에 대한 직접행동으로 대결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카우츠키 역시 “사민당은 혁명적 정당이지만 혁명을 일으키는 정당은 아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혁명적 대기주의로 비판받았다.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발하자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는 정치적 총파업을 개시하여 사회주의혁명을 촉발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당 지도부는 당에 의한 총파업 투쟁은 노조의 생존과 조직 자율성에 대한 위협이라며 반대하였다.

한편 사민당은 1889년 발족한 제2 인터내셔널의 주도세력이었으며 열강들 간의 전쟁을 막기 위해 타국 노동자와의 연대파업을 지지하였다. 이 때문에 사민당은 독일 보수주의자나 민족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비애국적이며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사민당 의원들은 1880년대 이후 제국의회에서 예산편성 표결에 참가하지 않았는데 이는 예산에 독일군부의 군사비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13년 사민당은 당시 예산이 자신의 당론인 직접세 시행을 포함하자 그 동안의 전통을 깨고 예산에 동의하였다. 나아가 사민당은 1914년 1차 세계대전을 더욱 반동적인 러시아 정부에 대한 방어투쟁으로 인식하고 전쟁국채발행 법안에 만장일치로 동의하면서 제국정부를 지지하기에 이른다. 

1915년 12월 초기의 전쟁에 대한 흥분이 사라지면서 베른슈타인 같은 반전 수정주의자와 좌파 의원들이 전쟁에 반대하였지만 이들은 1916년에 다수결에 의해 사민당에서 축출되었다. 이들은 1917년 4월 ‘독립사회민주당’(USPD)을 창당하였다가 1922년 사민당과 다시 통합하였다. 또한 전쟁국채 발행에 반대했던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는 사민당을 탈퇴하여 1916년 스파르타쿠스단을 결성하였으며, 이는 1918년에 독일공산당으로 발전하였다. 독일공산당은 1920년 선거에서 2.09%에 4석, 1924년 5월 선거에서 12.61%에 62석, 1928년 선거에서 10.6%에 54석, 1930년 선거에서 13.13%에 77석, 1932년 선거에서 14.32%에 89석을 얻었다.

한편 러시아제국과 독일제국은 1차 대전에서 서로 적국이었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은 러시아가 독일에 항복하는 과정과 함께 진행됐다는 점에서 이미 전쟁에 대한 협조를 통해 애국주의 관점에 빠져 있던 독일 다수 정치인들에게 자국 패전과 내전이라는 러시아식 혁명을 대안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수파사민당 역시 이러한 입장을 견지했다.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또한 이를 통해 혁명을 실현하자는 레닌의 전략은 스파르타쿠스단에게만 수용됐다. 1차 대전 직후 혁명기간 중에 권력을 인수했던 사민당의 지도부들은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혼란을 회피하겠다는 의도 하에 국가의 전복을 방해했으며, 오히려 기존 권력이 유지되도록 기여했다(Freyberg, 1989; 86). 

독립사민당 역시 내전을 회피한다는 명분으로 독일제국의 지배층을 청산하는 것에 소극적이었다. 사민당 지도부들은 오히려 제국 군대와 연합하여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진압하였다. 집권세력이 된 다수파사민당은 새로운 헌법에 에르푸르트 강령이 포함되었다고 주장했으나 애초에 주장한 대기업의 사회화와 대토지소유의 폐지, 토지개혁 등은 실현되지 못했다. 다수파사민당은 국가재건을 위해 지배세력과 타협하였고 그 결과 대자본과 대지주가 군대, 정치, 사법부, 행정기관 등에 대해 영향을 미쳤던 권력의 사회적 토대는 유지되었다(Freyberg, 1989; 85). 


레닌 시기 홉슨의 제국주의론

마르크스부터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자본주의 제국주의론 5

유럽에서 제국주의 시작은 상품의 지리적 가격 차이를 이용해 돈을 버는 원거리 무역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상대적으로 값싼 향신료, 담배, 은 등을 사와 유럽에서 비싸게 파는 것이다. 가격 차이를 이용한 이윤은 거래량뿐만 아니라 거래회수에 좌우된다. 따라서 연쇄적 상품 거래를 하는 3각 무역이 발전했다. 영국의 공산품(소총)을 싣고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사서 아메리카의 농장에서 담배와 바꾼 다음 영국에서 이를 팔아 다시 공산품을 싣고 아프리카로 가는 방식이다. 

이런 원거리 무역은 거대한 투기자본에 의해 진행됐으며, 엄청난 이익을 남기기 때문에 독점적 무역특권을 국가권력으로부터 부여받았다. 또한 항해 중 해적 퇴치, 아프리카나 아메리카의 현지 권력과의 충돌에 대비하여 무역상인들은 무장을 했고 경우에 따라 신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용병 혹은 정규군을 대동했다. 아메리카를 비롯하여 많은 미개척지가 원거리 상업자본, 투기자본에 의해 식민지로 변했다. 

즉 산업자본이 주도하는 제국주의 이전에 상업자본이 주도하는 제국주의가 선행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발전하여 대량생산이 가능해지자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와 상품시장을 찾기 위한 목적의 새로운 제국주의가 대두됐다. 특히 과잉생산으로 인해 상품이 남아돌자, 19세기 유럽에서 한 국가가 원자재와 소비시장을 얻기 위해 다른 국가를 침략하고 지배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홉슨의 <제국주의론>(1902)에 따르면 제국주의란 사유재산제 아래 이윤 획득을 목적으로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는 경제체제가 과잉생산으로 인한 위기를 극복하려는 정책이다. 홉슨은 제국주의의 경제적 동기를 강조한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소득분배가 불균형하게 되어 부자들의 과잉저축이, 빈민들의 과소소비가 발생하고, 생산물은 다 소비되지 못한다. 그에 따라 국내에서 소비, 투자가 어려워지므로 해외시장을 찾는다. 

새로운 시장의 획득은 정치적, 군사적 수단에 의해 추진되고 이것이 바로 제국주의의 원동력이 된다. 홉슨에 따르면 각국의 국내 불평등이 투자자에게 시장과 투자의 기회를 해외에서 찾도록 하고 이런 각국 투자자의 경쟁이 국제 분쟁의 요인으로 되었다.

홉스에 따르면 독점은 이익을 소수에게 집중시키고 경쟁을 약화시킨다. 소수의 독점은 과잉저축을 하고 과소소비를 하므로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감소하여 저임금을 형성하여 다시 구매능력을 감소시키는 악순환에 빠져 국내 투자기회는 점차 줄어든다. 따라서 제국주의의 근원은 해외 투자를 필요로 하는 과잉생산물이나 과잉자본이다. 제국주의의 외교정책은 해외투자를 보장하기 위한 지배와 종속이다. 홉스에 따르면 금융자본의 끝없는 무한 욕망이 제국주의를 탄생시키는 중요한 동인이 되었다.

홉슨은 제국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위기 단계로 설정하고 있다. 홉스에 따르면 독점세력들은 국내외적인 분파를 형성하여 서로 경쟁하고 전쟁에 돌입한다. 홉스는 이러한 전쟁에 반대하면서 최저임금 및 누진 과세와 같은 정책으로 새로운 국내 소비를 창출할 수 있도록 부를 재분배할 것을 주장한다. 즉 그는 독점세력이 국내에서 제한적 범위나마 이익을 실현할 수 있는 개혁을 주장했다. 요즘말로 빈자가 부자에게 혜택을 받는 낙수효과와 같은 재분배정책을 주장한 것이다. 

홉스 이후 힐퍼딩은 과잉저축이나 독점세력을 금융자본으로 더 구체화했다. 레닌 역시 힐퍼딩의 금융축적론의 내용을 참조하여 독점적인 은행자본과 독점적인 산업자본의 융합 또는 유착에 의하여 성립되는 자본형태인 금융자본의 성장과 발전이 제국주의의 주요한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레닌은 힐퍼딩의 견해를 수용해 이러한 독점세력의 증가와 발전이 은행의 성장과 경제적 우위로 이어졌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레닌에 따르면 은행과 경제적 독점세력이 새롭게 공존하는 지배체제는, 새로운 자본의 합병을 가져와 이동 가능한 금융 자본을 창출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은 농업을 후진 단계의 산업으로 만듦과 동시에 부의 불평등한 분배를 야기하였으며, 최종적으로 자본주의를 지나치게 무르익게 만들었다. 결국 과잉자본의 불가피한 몰락을 유발하는 단계이다.

홉슨과 레닌은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결과로서 설명하는 점, 그리고 이러한 현상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며 해결되어야 한다고 보는 점에서 통한다. 양자의 차이는 과잉 저축 대 금융자본, 둘째, 과소 소비 대 자본주의의 과잉 숙성, 셋째, 국내와 국제적 분파 형성 대 글로벌 분단, 넷째, 사회 개혁 대 국내 혁명 등이다. 레닌은 제국주의가 단순한 정책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자연스러운 발전과 함께 가장 높은 단계에 도달한 것이며 마르크스가 예측한 자본주의의 붕괴를 필연적으로 초래할 것이라고 보았다.

체제변혁에 있어 러시아 경로와 유럽 경로

마르크스부터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자본주의 제국주의론 4

마르크스가 참여했던 1848년 유럽혁명은 대중투쟁에 의한 무장혁명이었다. 하지만 1848년 혁명의 결과 각국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가 점차 도입되면서 무장혁명보다는 의회를 통한 사회개혁이 더 부각됐다. 마르크스는 영국의 민주주의 사례를 들며 의회를 통한 혁명의 가능성을 인정하였다. 

1871년 파리코뮌이 붕괴된 이후 프랑스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 완료되고 의회주의가 발전했다. 독일도 1870년 프로이센 중심으로 통일된 이후 보통선거가 도입됐고, 독일사민당은 1891년 독일제국 의회에서 득표율로 제1당으로 부상했다. 마르크스 사후 엥겔스는 독일사민당의 성공을 보면서 선거를 통한 혁명이 독일에서도 가능함을 인정하였다. 

1860년대 라쌀은 독일에서 보통선거를 도입하여 의회를 통한 혁명이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마르크스 그룹은 라쌀의 독일국가를 통한 사회주의혁명 노선에 대한 이론적 조직적 투쟁을 전개하여 1890년 에어푸르트 강령 시기에 종국적으로 승리하였다. 따라서 의회주의라는 사민당의 수정주의는 라쌀주의의 계승이 아니라 마르크스와 엥겔스, 리프크네히트와 베벨,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으로 이어지는 마르크스주의 자체의 변질과정이다.

마르크스의 1차 계승자인 리프크네히트와 베벨은 평생 동안 독일제국의 사민당 의원으로서 의회주의의 부정으로부터 긍정으로 점차 입장을 변화시켰다. 역시 런던으로 가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2차 계승자인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은 처음부터 의회주의자로서 러시아의 방식의 무장혁명을 독일에 적용하기를 거부하였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독일제국의 1차 대전 패전 직후 독일사민당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러시아식 무장혁명을 독일에 적용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러시아와 달리 독일 황제가 이미 의회주의를 신봉하는 사민당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등 독일사민당의 당 내외 조건이 러시아와 달라 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자본주의는 1873년부터 1890년대 초에 이르는 대불황을 거치면서 독점자본주의로 전환됐다. 특히 1900년~1903년의 공황을 거치면서 해외시장을 획득하려는 산업자본과 은행자본이 국제적 독점자본으로 융합됐으며, 각국의 독점자본은 해외시장을 쟁탈하기 위해 군비경쟁에 힘을 쏟았다. 이처럼 세계대전이 임박한 가운데 제2인터내셔널은 1907년 스투트가르트 대회와 1912년 바젤 대회에서 임박한 세계전쟁을 제국주의적 반동적 노예제적 전쟁이라고 규정하고 전쟁에 반대했으며, 전쟁이 발생할 경우 종전에 노력하고 전쟁이 초래한 경제적 정치적 위기를 이용하여 자본주의를 타도할 것을 결의했다. 

하지만 독일의 사민당, 프랑스 사회당, 영국의 노동당 등 대부분의 유럽의 원내 사회주의 정당들은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자, 전쟁에 협력했다. 이들 사회주의 정당과 동맹적 관계를 맺고 있던 독일, 프랑스, 영국의 총연맹들은 정당들보다 먼저 전쟁에 협력했으며, 이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동맹적 관계에 있던 사회주의 정당들에게 전쟁에 협조할 것을 압박했다. 

1차 대전 당시 유럽의 총연맹과 원내 사회주의 정당들은 이미 부르주아 국가에 편입돼 엄청난 특혜를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 반대할 경우 자본주의 국가로부터의 온갖 특혜가 중단될 처지였다. 나아가 이들 노조와 정당들은 애국주의 열풍과 공권력의 탄압을 이겨 낼 수 있는 역량과 의지가 없었다.

반면 러시아의 경우 폭압적인 차르 체제에서 19세기 중반 이후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기운이 높았다. 특히 19세기 후반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노동자계급이 성장하면서 자본과 폭압적인 차르체제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마치 1848년 독일 혁명과 같은 정세였다. 더구나 1905년 러시아가 일본에게 전쟁에 패하면서 전쟁과 폭정에 지친 민중들이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1차 유혈 혁명에 나섰다. 

러시아가 발칸 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독일과 1차 대전을 치르고 있었을 당시 러시아의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정당은 국가로부터 특혜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탄압을 받고 있었다. 민심은 황제로부터 멀어져갔고, 전쟁에서 패배를 거듭해 애국주의 열풍이 없었다. 러시아의 노조와 사회주의 정당은 전쟁에 협조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전쟁을 기회로 차르체제를 전복하고 부르주아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을 연달아 달성하고자 했다.

세계체제와 제국주의에 관한 마르크스의 시각

마르크스부터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자본주의 제국주의론 3


마르크스는 원래 자신의 정치경제학비판 저작을 6개의 부로구성하려고 계획했다. 1857년 정치경제학비판요강에 대한 서설에서의 첫 번째 플랜 초안 이래 마르크스는 곧 자신의 경제학 저작을 제1부 자본, 제2부 토지소유, 제3부 임노동, 제4부 국가, 제5부 외국무역, 제6부 세계시장의 체계로 구상했다(Marx, 1858a: 551; 1961: 7). 또한 제1부 자본은 정치경제학비판요강에서의 자본에 관한 처음 두 개의 초안 이후에 곧 제1편 자본일반, 제2편 자본들의 경쟁, 제3편 신용, 제4편 주식자본으로 구성할 것을 명확히 했다(Marx, 1858c: 312). 나아가 라살레 앞으로 보낸 편지(1858년 3월 11일)에서 마르크스는 제1편 자본일반을 자본의 생산과정, 자본의 유통과정, 양자의 통일 또는 자본과 이윤이라는 3부분으로 구성할 계획을 밝혔다(Marx, 1858b: 554). 1858년부터 1862년에 계획된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비판 플랜은 6부작이었다(비고츠키 체푸렌코, 1993: 331).

1860년대 중반에 이르면 마르크스는 6부작 플랜의 실현을 최종적으로 포기했고, 자본을 전 3권 4부의 구성으로 발간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중 완결판은 제1권뿐이며, 2권과 3권은 마르크스의 초고를 엥겔스가 편집한 것이다. 다만 마르크스의 필사본 전집인 메가판에서 2권과 3권의 초고를 확인할 수 있다. 

자본 전 3권은 플랜의 제1부 제1편 자본일반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 제1부 제2편 자본들의 경쟁, 제3편 신용, 제4편 주식자본과 나아가 제2부 토지소유, 제3부 임노동의 요소들을 자본의 일반적 분석이라는 이념적 평균의 수준에서 포괄했다. 그러나 자본의 성립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제1부 제2편 이하 6부에 이르는 특수연구를 포기하지 않았고, 따라서 원래의 플랜은 변경되지 않았다. 6부 플랜은 자본주의 세계경제를 이론적으로 영유하기 위한 상향의 체계를 반영하는 것이고, 따라서 정치경제학비판 6부 플랜과 단절해서 자본을 해석하면 안 된다. 마르크스가 제6부 세계시장체제를 저술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제국주의 이론을 온전하게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여러 저술과 편지를 통해 단편적인 인식들을 종합할 수 있다. 

간과해선 안 될 지점은 마르크스가 참여했던 1848년 혁명은 1815년에 성립된 빈체제를 전복하는 것이었는데, 이 빈체제는 나폴레옹제국을 해체하고 과거의 유럽 제국주의 국가의 세력권 즉 구 제국주의 세력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메테르니히 재상이 주도한 빈체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투쟁은 한편으로 반제국주의 투쟁이었지만 마르크스주의 연구에서 이 부분이 경시되고 있다.

첫째 마르크스는 자신의 세계가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 지역이 하나의 지구촌 즉 연결되고 있음을 파악했다. 중심인 영국 자본주의와 그 주변으로 중층화됐다고 봤다. 즉 세계체제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막연하나마 존재했다. 

둘째 마르크스는 원시제에서 자본주의에 선행하는 생산양식(아시아적, 게르만적, 로마적 생산양식), 자본제, 공산제까지 역사단계를 발전적으로 봤기 때문에 인도와 아메리카 대륙에 자본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문명의 확산 즉 발전으로 봤다. 

셋째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 인도에서 식민지 경영, 유럽 강국의 폴란드 분할 점령에 대한 마르크스의 언급에서 보듯이 제국주의 국가와 식민지 민중의 대립에 주목했다. 공산당 선언에서 폴란드의 크라쿠프 반란에 대한 언급과 인도의 세포이 반란에 대한 기사에서 보듯이 마르크스는 식민지 민중의 봉기를 지지했다. 

넷째 마르크스는 식민지에서 자본주의 지배계급에 대한 봉기가 식민지 모국인 제국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촉발시킬 수 있다고 봤다.  

다섯째 마르크스는 말년에 러시아와 같은 전근대적인 비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즉 부르주아혁명을 거치지 않고 사회주의혁명으로 비약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다. 이러한 러시아혁명이 유럽의 혁명으로 파급될 수 있음을 지적했다. 

마르크스의 세계체제에 대한 한계는 첫째 자본주의 전파를 발전으로 봤기 때문에 전 자본주의 세계가 자본주의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발전 과정을 거쳐야 하고 그것이 자본주의 자체의 몰락을 가져 올 수 있다는 로자의 자본축적론이나 아민의 종속이론과 같은 주변부혁명론이 구체화되지 못했다. 

둘째 마르크스는 레닌의 제국주의혁명이나 코민테른의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과 달리 식민지혁명을 식민지 민중의 관점보다는 모국의 혁명 관점에서 파악했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식민지가 세계혁명의 약한 고리라는 레닌의 문제의식, 그리고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은 사회주의혁명이 가능하다는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의 문제의식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사회구성체로서 제국주의

마르크스부터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자본주의 제국주의론 2

마르크스는 1846년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토대' 및 '상부 구조', '사회 형태'(Gesellschaftsform)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등 사적 유물론을 정식화했다. 특히 사회적 의식은 사회적 존재를 반영한다면서 사회적 존재 중심의 변증법을 전개한다. 마르크스는 1852년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사회구성체'(Gesellschaftsformation)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마르크스는 1857년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에서 토대 및 상부 구조로 구성된 '사회 구성체' 또는 '경제적 사회 구성체'라는 개념을 정립시켰다. '서문'에 따르면, 생산양식은 역사적 형성물인 사회의 경제구조, 즉 실재적 토대이며, 그 상층의 사회적 심급(사회적 의식 형태들)과 정치 · 법 등의 이데올로기 심급으로 이루어지는 상부구조를 조건 짓는다. 이러한 토대와 상부구조의 복합체가 '사회구성체'이다. 이 개념은 자본가적 생산양식의 경제적 심급의 규정성을 중시한 경우에는 "경제적 사회구성체"라고 말해진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경제적 사회구성체 개념에는 두 가지 규정이 있다. 첫째로,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를 포함한 전체, 즉 경제적 사회구성체와 생산양식을 동일시하는 견해이다. 사회구성체의 토대는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포함한 생산양식, 물질적 토대로서 시민사회(경제생활) 등이다. 토대를 반영한 상부구조는 사회적 의식, 법과 국가 등을 포함한 사회제도 등이다. 마르크스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관계를 생산양식으로 파악했으며,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아시아(고대), 로마, 게르만적 생산양식을 소개하고 있다. 생산양식 안에서 생산력 중심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이 발전한다. 생산력은 자연적 구속과 자연법칙에 맞선 과학의 역사이자, 생산을 위한 분업과 협업 등 인적 결합의 고도화 과정이다. 사회구성체의 발전단계는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잉여생산물에 대한 사적 소유가 발생하는 원시공동체가 출발점이다. 이후 과학기술 등 생산정의 발전에 따라 생산력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인간의 노동력, 토지의 지력, 기계(자본)의 생산력으로 변화 발전해왔다. 원시공동체, 고대노예제, 중세봉건(농노제), 근대자본제(노동자), 공산주의(무계급사회) 등 사회구성체 5단계는 소련시절에 정식화됐다. 

둘째로, 지배적 생산양식과 종속적 생산양식들의 중층적인 접합관계로 이루어진 전체를 경제적 사회구성체라고 부르는 견해이다. 하나의 사회구성체에는 주된 생산양식 이외에도 낡은 생산양식과 새로운 생산양식이존재할 수 있다. 마르크스 시대에도 중심에는 영국의 자본제가 주변에는 동유럽의 농노제, 미국의 노예제, 심지어 아프리카의 원시공산제가 혼재돼 있었다. 인도와 아메리카 등 주변 사회는 중심의 자본에 의해 세계자본주의 체계로 편입되기 이전에는 몇몇 기존의 생산양식(공동체, 지주제, 수공업, 자영업 등)이 자연스러운 사회적 분업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영국 자본은 증권투자 형태의 직접투자를 통해 주변사회를 자신의 대공업을 위한 원료공급지 및 세계시장으로서 복속시켰고 그 결과 주변 사회의 분업관계는 파괴됐다. 이제 세계자본주의는 영국 자본에 의한 식민지 인도로 대표되는 아시아적 생산양식, 미국의 노예제 면화 플랜테이션 생산양식, 기타 지역의 봉건적, 영주제적 생산양식이 새로운 분업체제라는 중층적 구조를 지니게 됐다. 

마르크스는 1848년 『공산당선언』에서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투쟁의 역사로 보았으며, 이는 민중 중심의 역사관이다.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에 따르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따라 주로 소유관계를 둘러 싼 계급들 사이의 투쟁이 전개되고 그 결과에 따라 원시공동체부터 시작하여 고대노예제 및 아시아적 생산양식, 봉건제, 자본제 등 다양한 생산양식이 출현하였다. 그 이후 인류의 역사는 노예, 농노, 노동자의 해방의 역사이며 이는 주로 소유와 계급 관계 등 각 계급의 경제적 이해관계의 대립으로 인한 투쟁의 역사이다. 이러한 생산양식에 부응한 상부구조가 결합하여 사회구성체도 발전해왔다. 

『자본론』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분적 관계는 소멸하고 사회적 관계는 생산력과 생산수단의 소유관계로 결정되기 때문에 인간관계는 물화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사회에 이르러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와 그로 인한 임노동이라는 생산관계가 공동체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생산력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사회적 생산력에 부응하는 사회적 집단적 소유관계를 실현해야 한다는 사회다수의 동의 아래 임노동을 폐지하려는 노동자들이 생산수단과 생산과정, 생산관계, 이에 부응하는 국가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사회주의혁명이 시작된다. 국가권력을 장악한 노동계급이 부르주아국가를 해체하고 노동자국가를 세워 법과 제도 등 상부구조에 남아 있는 낡은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의 흔적을 지우고 사회적 생산력을 증대시키면서 노동자국가마저 소멸해가는 공산주의단계를 준비하게 된다. 

낡은 사회구성체는 자신의 성숙함을 만개한 후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불은 소재, 산소, 불씨, 혁명은 내부 모순, 외부적 조건, 인간의 행동). 각국에서 사회주의혁명이 발생하려면 그 나라에서 새로운 사회적 생산력이 낡은 사적 생산관계를 전복하고 그에 부응하는 권력관계를 창출하려는 사회구성체 내의 모순이 첨예화되어야 한다. 따라서 사회구성체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이 각국에서 혁명 전략을 수립하는데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모든 자본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른 자본을 흡수해 집중하거나 자신의 이윤을 재투자해 집적(축적)하려는 성향을 지닌다.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는 이윤창출능력에 의해 지배되며 상업자본, 공장자본, 금융자본의 순서대로 그 비중이 높아졌다. 자본의 집중과 집적의 수준도 금융자본에 이르러 가장 고도화됐다. 오늘날 금융자본이야 말로 진정한 독점자본이라고 볼 수 있다. 레닌에 따르면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최고단계, 최종단계로서 그 실체는 독점자본주의이다. 제국주의는 사회구성체로서 자본주의의 한 유형이다. 제국주의의 생산양식은 세계적 분업, 상부구조는 세계분업을 강제하는 군사적 정치적 사회문화적 세계질서이다. 

서론 : 제국과 제국주의

마르크스부터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자본주의 제국주의론 1

제국(帝國, 영어: Empire)은 알렉산더, 페르시아, 이슬람, 몽고, 나폴레옹 제국처럼 다른 민족이나 나라를 통치하는 국가이다. 따라서 제국에는 통치 주체인 중심 민족이나 국가가 있고 통치대상인 비지배 민족이나 국가가 있다. 일방적인 지배관계가 없는 스위스와 같은 다민족국가는 제국이 아니다. 

통치하는 힘은 군사적 패권으로 시작하나 정치적 패권, 문화적 패권으로 발전한다. 즉 처음에는 힘으로 지배하나 점차 권위의 비중이 높아진다. 

알렉산더 모틸(Alexander J. Motyl)에 따르면 중국과 러시아처럼 인접국들을 연속적으로 지배하는 영토가 연속적인 제국이 있다. 미국이나 로마제국처럼 인접하지 않은 먼 민족이나 나라까지 지배하는 영토가 연속하지 않는 제국이 있다. 

제국 중에는 로마나 영국처럼 본국이 왜소한 경우가 있고, 러시아, 미국, 중국처럼 본국이 거대한 경우가 있다. 본국이 왜소한 경우 로마처럼 피지배 민족들이 본국을 차지하여 제국이 멸망할 수 있다.

제국주의는 제국 즉 다른 민족이나 나라를 지배하는 것을 국가정책으로 삼는 것이다. 지배의 목적은 중국처럼 변방민족을 굴복시켜 국경을 안정시키려는 정치적 목적, 경작지와 노예를 획득하려는 경제적 목적, 이슬람교를 전파하려는 종교적 목적이 있다. 근세에는 사회주의를 확장하는 소련 제국이 있다. 보통은 하나의 목적이 아니라 복합적인 목적으로 다른 민족이나 국가를 지배한다. 

자본주의 제국주의는 상품수출과 자본수출을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제국주의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제국주의는 상품수출과 자본수출과 같은 경제적 목적이 기본이다. 따라서 본국의 영토 보호나 확장, 종교 전파, 사회주의 이념 전파와 같이 경제적 목적이 아닌 경우는 자본주의 제국주의가 아니다. 

자본주의 제국주의의 기본요소가 상품수출과 자본수출이지만 특정국가가 특정국가에게 독점적으로 상품과 자본을 수출하려면 그 나라의 산업정책을 지배해야 한다. 정책결정권에 대한 지배는 과거에는 주로 식민지 점령으로 나타났지만 오늘날에는 자신에게 복종하는 대리정권(괴뢰정권)을 조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특정 나라에 대한 상품수출과 자본수출을 독점하려면 거대한 자본이 필요하고 이러한 자본은 과거 여러 종류의 산업자본에 불과하였지만 오늘날에서는 다양한 산업자본을 지배하는 금융독점자본으로 나타난다. 

자본주의 제국주의에 주목하는 이유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요한 지배관계는 자본주의적 착취관계이고, 국가 간의 지배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개인이나 집단의 해방투쟁도 반자본주의 투쟁에 집중되고 있고, 민족 간 국가 간 해방투쟁도 자본주의 제국주의 반대 투쟁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즉 단순히 미국, 러시아, 중국, 유럽, 인도와 같은 강대국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유럽 및 미국과 같은 자본주의 강대국에 투쟁으로 집중된다. 

임금인상발 물가잡겠다고 고금리 고집하는 미국

소수의 금융자본가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선진국

거대한 미국 경제의 운명이 몇 명에 불과한 연방준비제도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물론 다른 자본주의 선진국도 마찬가지이니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자본독점과 함께 정책독점도 경제의 불안정성을 악화시킨다.  연준이 굳이 금리를 인상하지 않아도 파월 의장의 말 한마디에 증권시장을 비롯한 미국 경제가 들썩인다. 

지난 28일 파월의장이 미국 금리인상 행진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엄포를 놓았다. 인력난으로 임금이 오르고 물가가 오르니 물가를 잡기 위해 두 차례 정도 더 금리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5.25%인 금리가 6%에 근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낮은 경제성장율에도 구인난 때문에 임금인상발 물가인상 이어져

코로나 전후 미국의 경제성장률, 물가인상률, 실업률을 살펴보면 수요회복으로 인한 경제성장률은 급감하는데 물가가 여전히 높고 실업률도 낮아 구인난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금리를 활용해 달러 패권을 연장시키려는 의도

물가를 잡겠다는 미국의 고금리정책은 전 세계 민중의 피땀과 눈물을 죄어 짜고 있다. 미국이 고금리정책을 고집하는 이유는 경제적으로 국내 물가를 잡겠다는 것이다. 물론 달러에 의존하고 있는 수많은 나라들에게 채찍을 휘둘러 더욱 미국의 족쇄에 채우려는 의도도 숨어 있다. 


미국이 금리를 올리면 해외 자본이 미국에 몰리면서 다른 나라들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쩔 수 없이 다른 나라들이 금리를 올리면 고금리에 가계대출자들이 희생된다. 결국 미국의 금리정책에 따라 미국에 애걸복걸할 수밖에 없다. 

이는 중국 및 러시아와 손절하라고 협박을 하는 셈이다. 연준의 논리는 물가인상의 원인이 높은 임금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 세계 자본가들이 외우는 주문이다. 


물가인상 주 원인은 중러에 대한 공급망 전쟁, 우크라이나 자원 전쟁 때문

임금인상으로 인한 물가인상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코로나 종료 이후 미국 물가인상의 원인은 첫째 미국이 중국의 고부가가치 산업을 접근을 막고, 러시아의 원자재 수출에 타격을 주고자 공급망 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둘째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식량과 에너지 가격이 폭등했기 때문이다. 셋째 코로나 종료 이후 여행의 폭증에서 보듯이 수요가 갑자기 회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노동력부족으로 구인난을 겪고 있는 미국의 기업들이 임금을 인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저효과로 수요 증가, 원자재 가격 상승 계속 되기 어려워

미국이 물가를 잡으려면 중러와 분업체제를 복원하여 최소비용의 최대효과라는 경제원칙에 충실하고 우크라이나 전쟁을 중단하면 된다. 수요 폭증은 코로나 이전 수준으로 수요가 회복되면 더 이상 크게 증가하기 힘들게 된다. 

이미 여러 번 폭증했으면 갈수록 증가하기 어렵다. 원자재 가격 상승도 이러한 기저효과 때문에 가속도가 낮아진다. 3-4년 전인 코로나 이전에 비하면 가격이 매우 높지만 물가상승률을 계산하는 1년 단위로 보면 물가상승은 둔화된다. 


코로나 끝나도 노동자가 돌아오지 않아 구인난 심각

문제는 미국의 노동시장의 취약함으로 인해 임금인상으로 인한 물가상승은 좀처럼 수그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제가 활성화돼 새로운 일손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임금이 오른다면 큰 문제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미국 경제는 코로나 직후 잠깐 반짝했다가 지난해 불황의 징조를 보였고 2023년 1분기 겨우 1.1%의 성장률을 보였다. 경제가 안 좋은데, 임금이 오르는 것은 코로나 직후 급감한 노동력이 회복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즉 노동력 부족은 수요 증가가 원인이 아니라 공급 감소가 원인이다. 


여유 돈, 조기은퇴, 외국인 노동자 부족이 구인난 심화시켜

먼저 통계에 잡히는 공식적인 노동자들이 구직을 포기하고 일터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즉 경제활동참가율이 코로나 전으로 회복되지 않고 있다. 미국 상공회의소 주장에 따르면 첫째 코로나 기간 정부의 보조금은 늘었지만 소비는 오히려 줄어 노동자들이 여유 돈이 많아 노동을 기피한다는 것이다. 

둘째 여유 돈이 생긴 고령노동자가 코로나 여파로 조기에 은퇴한다는 것이다. 셋째 코로나 기간 보육원, 양로원 등 돌봄기관이 폐쇄되면서 가정 내 돌봄을 위해 맞벌이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구인난 심각한 농업과  대면 서비스에서 임금인상 이어져

그런데 미국 자본가들이 숨기고 싶은 미국 노동시장의 그늘이 임금인상의 원인이다. 바로 합법 및 비합법 외국인 노동자들이 과거 수준으로 회복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수년 동안 미국 산업에서 외국인 노동자의 비중을 보면 농업 73%, 건설업 24%, 접객업 21.8%, 전문 서비스업 19.8%로 상대적으로 높다. 

하지만 코로나 기간 동안 합법적인 외국인 노동자들은 미국을 떠났고 국경폐쇄로 불법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이 차단돼왔다. 체포되는 불법체류자 규모를 보면 트럼프 대통령 시절 연평균 14만 8천 명이었지만 코로나 기간 동안 국경폐쇄로 불법체류자 자체가 급감하면서 7만 명 수준으로 급감했다. 


저임금 노동을 담당했던 외국인 노동자들이 돌아오지 않아

그런데 외국인 노동자와 저임금 경쟁을 해왔던 미국의 백인노동자들은 외국인 노동자 유입정책에 반대해왔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국경폐쇄 등 국수주의적인 노동시장 정책을 취하면서 합법 및 불법 외국인 노동자 유입에 반대해왔다. 

이러한 국수주의 정책은 미국노동자에게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바이든 대통령 역시 이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 코로나 이후 미국 정부는 노동력 부족에도 불구하고 고학력 전문직이 아니면 외국인 노동자 유입에 소극적이다. 

외국인 노동자 비중이 높은 농업을 물론, 저임금의 단순 서비스 직종도 구인난에 아우성이다. 판매, 운송과 같은 대면직종은 코로나여파도 미국인들이 여전히 취업을 주저하고 있다. 운전기사 부족으로 2/3 이상의 항만에서 정체가 발생하고 있으며 임금을 인상할 수 없는 소규모 운송업체의 인력난은 더 심각하다. 


구인난 완화하려면 외국인 노동자를 적극 수용해야

따라서 임금을 인상하고 운송비를 인상할 수밖에 없다. 맥도날드, 아마존 등 저임금 노동자를 주로 쓰는 대기업은 외국인 노동자를 늘려달라고 정부에 탄원하고 있다. 사실상 불법체류자라도 늘려주고 눈감아 달라는 것이다. 

결국 전 세계 민중을 고통에 몰아넣고 있는 미국 고금리사태가 종지부를 찍으려면 먼저 값싼 자원 공급을 확대하기 위해 미국이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로 한 경제전쟁과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야 한다. 그리고 노동력 공급 증가로 임금인상발 물가상승을 막기 위해 먹고 살기 힘들어 미국으로 유입되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적대적인 정책을 중단해야 한다. 


3일 전국결집 정치방침 토론회 발표 요지

1. 민주노동당 평가와 민주노총 정치방침

원내 진보정당이 우경화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어쨌든 노동자민중을 대변하는 제도정치가 필요하므로 노동자는 정당과 의회 공간을 포기할 수 없다. 당과 노조는 관료주의, 의회주의, 대리정치를 견제하려면 서로 긴장적 협력관계에 있어야 한다. 

민주노동당 교훈은 노동정치가 단결해야 하나 단일정당은 당분간 어렵고 정당연합이 현실적이다. 다만 이중당적이 금지되는 조건에서 정당의 지도자들이 탈당하여 선거연합 정당을 만들자는 방안을 진보정당의 대의기구들이 결정하기 어렵다.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는 민주노총의 규약에서 보듯이 자기사업이다. 현재는 민주노총의 지지정당만 존재하기 때문에 정당연합 형태의 민주노총당이 필요하다. 그런데 진보정당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정당 건설)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 

진보정당이 민주노총 중심의 정당건설을 동의하지 않는다고 민주노총이 정치세력화를 포기한다는 것은 자기 사업을 진보정당 때문에 포기하는 것이다. 진보정당 동의 없이 민주노총이 정치세력화를 못한다는 것은 정당정치는 정당만 해야 한다는, 또 다른 대리정치이다. 노동자(민주노총)은 정치를 정당에게 맡기는 과거의 대리정치를 극복해야 한다. 

노동자(민주노총)은 정당이 협력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독자적인 정당건설에 나서야 한다. 현재의 민주노총은 다양한 정치지형으로 균열돼 있지만 이것을 극복하고 압도적 다수의 힘으로 민주노총의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한 민주노총의 정당이 기존 정당들을 선거연합정당으로 견인하는 기관차 역할을 해야 한다. 

문제는 현재의 양경수 지도부가 정파적 구도에 갇혀 있어 민주노총의 힘을 모아 정치세력화를 할 수 있는 통합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2. 사회주의세력(노동당)의 선택

이런 조건에서 사회주의 세력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사회주의 세력은 하나가 되라는 노동자민중의 요구를 받아들여 진보정치의 연합, 공동투쟁에 적극 결합해야 한다. 또한 그런 연합과 공동투쟁에서 사회주의 세력의 주도권을 확대강화하기 위해 정의당(우경화된 사민주주의), 진보당(전국회의)들과 경쟁해야 한다. 

현재 정치방침은 의회 의석(노동자표)을 차지하기 위한 정의당과 진보당의 2자 대결장이다. 사회주의세력 혹은 노동당은 과거나 현재나 의석을 가질 가능성이 없고 왜소화 주변화돼 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세력은 우경화된 사민주의와 전국회의와 대등한 정치적 지분을 획득하고 나아가 진보정치 내 양강구도의 주도자로 부각하겠다는 전략이 필요하다. 

사회주의세력(노동당)이 정치방침이 전국회의의(진보당) 패권 프로젝트라면서 우경화된 사민주주의 세력(정의당)과 공동보조를 하는 것은 과거 경험에 따른 조건반사에 불과하다. 

전체 운동적 관점에서 볼 때 사회주의세력의 경쟁적 파트너는 끝없는 우경화로 나아가는 정의당이 아니라 비록 패권을 포기할 가능성이 없더라도 운동에 복무하는 진보당(전국회의)이 돼야 한다. 정치방침을 통해 정의당을 운동으로 다시 견인하고 정의당이 끝내 노동정치에 미련이 없다면 진보정치는 노동당과 진보당으로 재편돼야 한다. 

정의당은 지난 대선 민중경선 논의 때도 지지율과 엘리트 정치인에 기대 하나가 되라는 노동자민중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 결과 지난 대선에서 진보정치는 참패했고 노동자민중에게 실망만 주었다. 

그런 면에서 사회주의 세력, 노동당은 민주노총 내 우경화 세력인 정의당에 경종을 주기 위해 민주노총 중심의 정치방침에 적극적인 입장을 가져야 한다. 총선 이후 진보정치를 사회주의 대 자민통으로 재편하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3. 전국결집에 대한 의견

현장조직 전국결집은 어떤 정치방침을 가져야 하는가? 범사회주의 현장조직으로서 제도정치에 소극적인 입장을 포함해야 다양한 입장들 존재한다. 전국결집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전국회의와의 경쟁을 통한 현장의 민주화, 현장투쟁 강화이다. 

즉 정당건설 문제는 당면한 과제가 아니다. 특히 논란이 많은 정치방침은 현장조직이 사활을 걸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밑으로부터 진지하고 충분한 토론을 하되 압도적 다수를 확보할 때 비로소 정치방침을 신중하게 결정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