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의 통합과 분열의 반복

 3)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평등계열은 2006년 최고위원회선거에 조승수 전 의원을 대표로 출마시키는 등 지도부 선거에 전면적으로 대응하였으나 자주계열은 자신이 추대한 문성현 경남도당위원장을 대표에 당선시키고 사무총장과 정책위원장 선거에서도 승리하였다.  2008년 총선을 앞두고 평등계열의 김형탁 등은 비례대표 선출방식을 소수파도 당선이 가능하도록 1인1표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을 추진하였으나 자주계열의 반대로 표결에서 패배하였다. 대선후보 경선에서도 1차 선거에서 노회찬 의원을 이겨 평등계열 다수의 지지를 받은 심상정 의원이 주로 자주계열의 지지를 받은 권영길 의원에게 패배하였다. 이즈음 평등계열은 각종 선거와 투표에서 자주계열에게 완전히 역전되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민주노동당은 주요 당직과 공직을 모두 당원 직선으로 뽑았는데, 인지도가 높은 후보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선거는 인물 중심보다는 정책 중심 혹은 노선 중심이었다. 따라서 각종 선거에서 정파의 지지를 받는 후보들이 정책 논쟁, 노선 논쟁을 통해 정파의 구성원들을 결집시키고 후보나 정파 구성원들이 일반 당원들에게 이념적 자극을 주면서 지지자로 포섭하였다. 민주노동당 당원 중 당권자만 선거권이 있고 실제로 선거에 임하는 당권자들은 많아야 3만 명 수준이었으며, 이들은 사회단체 소속이거나 과거 학생운동에 영향 받는 등 대부분 민주화운동과 민중운동에 관심이 있는 편이라서 정책 논쟁, 노선 논쟁에 거부감이 없었다. 일반 당원들도 몇 번의 선거를 통해 ‘자주파’니 ‘평등파’니 정파와 노선에 익숙해지고 그 결과 자신도 정파갈등의 당사자가 되었다. 

이러한 정파갈등은 대선기간 중 더욱 악화되었다. 대권영길 후보가 자주계열의 이용대 정책위원장이 주도한 ‘코리아연방공화국안’을 공약으로 채택하자 조승수 진보정치연구소 소장이 이에 공개적으로 반발하였으며, 선거본부의 인선, 재정 문제로 평등계열과 자주계열은 대립하곤 하였다. ‘자율과 연대’에 소속된 평등계열의 일부 네티즌과 ‘전진’에 소속된 민주노총 일부 조합원을 중심으로 2006년 최고위원회 선거가 끝난 후 당원게시판 등에서 탈당과 분당이 개별적으로 언급되다가 대선 직전 정파갈등이 심화되자 실제로 탈당이 일어났고 분당을 주장하는 글이 공개되었다(신윤동욱, 2015).

대선 직후 상당수 당원들이 대선 패배에 대한 실망감, 자주계열의 패권적 형태에 대한 반감을 당원게시판에 표출하였고 그 중 일부가 민주노동당이 북과 관련된 일심회 사건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면서 탈당하였다. 1월 7일 백현종 경기도 구리시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한 구리시위원회 운영위원 9명 전원이 “패권주의를 거부하고 민생을 생각하는 ‘진정한 진보정치의 길’에 동참하겠다며 당 간부로서 최초로 집단탈당하였다. 11일에는 부산에서 해운대지역위원회를 중심으로 집단탈당이 이어졌다. 

조승수 진보정치연구소 소장, 김형탁 전 대변인, 한석호 민주노총 소속의 중앙위원 등은 2008년 1월 14일 ‘새로운진보정당운동(새진보정당)’ 준비위원회를 결성하면서 상근체제와 광역별 지부 결성을 추진하는 등 신당추진을 기정사실화하였다. 준비위원회는 다음날 ‘민주노동당 비대위에 바라는 입장’을 통해 당해산과 창당준비위원회 체계로의 전환 등을 심상정 비대위원회가 수용할 것을 당 잔류의 전제조건으로 요구하였다. 이에 심상정 비대위원장은 15일 ‘당원 동지들께 드리는 글’을 통해 “대선 이후 탈당은 무효”라며 “신당 추진을 중단하고 당 혁신과 제2창당에 나서달라”고 호소하였다(이윤원, 2008). 심상정 비대위원회가 중앙위원회를 예정보다 앞당겨 2월 3일 열어 혁신안을 확정할 것을 천명하였지만 이미 중앙위원회 전에 전남 여수와 광주의 당원들이 집단탈당하였다.

‘새로운진보정당운동’ 준비위원회는 26일 '새로운진보정당운동' 출범식을 강행하였고 조승수 전 의원, 박승옥 '시민발전' 대표, 김석준 부산시당위원장을 공동대표로 선출하였으며, 홍세화 한겨레신문 기획위원, 조현연 성공회대 교수, 김형탁 전 당대변인 등 민주노동당 전현직 간부 50여명이 추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는 심상정 비대위원회가 제출한 민주노동당 혁신안을 2월 3일 논의하기로 하였으나 새로운 진보정당 창당을 주도하는 조승수와 김형탁 등이 2월 1일에 미리 탈당하는 등 분당은 가시화되고 있었다(이경태, 2008).

분당을 주도하는 세력들은 자주파 지도부의 대선 패배의 책임을 거론하는 것 이외에도 자주파의 종북주의와 패권주의 청산을 요구하였으며 특히 이 문제는 민주노동당 내에서 정파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밝혔으며, 또한 남북을 민족적 특수관계가 아닌 주권국가간의 관계로 재설정하고 민주노동당이 북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가질 것을 요구하였다. 

민주노동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하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농민회총연합,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한국청년단체협의회 등은 2008년 1월 31일 성명서를 내고 자신들이 계급투표를 조직하지 못한 것에 대해 반성하면서 민주노동당에게 대선패배에 대한 반성과 그에 따른 혁신을 요구하는 한편 분당을 추진하는 ‘새로운진보정당운동’출범식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또한 이들은 심상정 비대위가 혁신의 핵심내용으로 제출하고 있는 내용이 민중들이 수구보수의 반통일세력과 투쟁하면서 쌓아온 통일운동의 진정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였다(민주노총, 2008d). 이들은 민주노동당의 분당 여부를 사실상 확정짓는 2월 3일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를 앞두고 2월 1일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고, 민주노동당 내 다양한 인사들을 초청하여 토론회를 열어 분당을 막을 수 있는 절충지점을 모색하였다(민주노총, 2008b). 

2월 3일 중앙위원회에서 혁신안의 쟁점은 패권논쟁 보다는 종북논쟁이었고 그 핵심은 북에 각종 정보를 제공하였다는 소위 ‘일심회’에 소속되어 있던 당시 사무부총장에 대한 제명안이었다. 심상정 비대위원회가 제출한 원안은 대의원대회 결정으로 관련자들을 바로 제명하자는 것이었고, 주로 자주계열과 국가보안법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일부 평등계열은 이 제명안의 삭제를 요구하였다. 한편 민주노동당이 국가보안법 자체에 반대하고, 이들에 대한 유죄가 확정되지 않았고 제명은 당헌상 당기위원회의 전속권한이므로 대의원대회는 직접 제명을 할 권한이 없는 반면 이들이 당원의 정보를 북에 제공한 정황은 명백하니 일단 당기위원회에 제소하여 철저히 조사하여 엄중 조치할 것을 요구하자는 절충안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정파대결과 노선대립이 대의원대회를 지배하였고 절충안은 극히 소수만이 지지하였으며, 결국 표결 끝에 심상정 비대위원회 안이 부결되자, 심상정 비대위원장 등이 이에 반발하여 즉시 퇴장하여 대의원대회가 파탄되고 대규모 분당사태가 이어졌다. 

민주노동당의 분당은 노동자, 농민, 빈민, 학생 등 배타적 지지단체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당 상층과 일부 당원들에 의해 촉발되고 당원 일반으로 확대되었다. 분당을 주도하고 있는 일부 평등계열의 시각에서 보면 이들 대중조직의 지도부들 역시 진보진영을 좌지우지하는 자주계열의 정파구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민주노동당 대선후보경선 과정에서 주로 권영길 후보를 지지하여 대선패배에 책임이 있으며, 종북논쟁의 당사자로서 자주계열의 노선에 경도되어 있었다. 즉 이들 대중조직들은 민주노동당의 갈등구조에 편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민주노동당의 의회주의 경향이나 당 내 갈등을 긍정적으로 조정할 힘을 사실상 상실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대중조직은 민주노동당의 분당이 완료된 직후 각종 성명서를 발표하고, 토론회를 열면서 민주노동당의 혁신과 진보정치의 재통합을 주장하였지만 실질적인 성과는 없었고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수동적으로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민주노총, 2008c : 민주노총, 2008e).

한편 민주노동당에서 평등계열이 대거 탈당한 후 이제 자주계열 내에서 정파갈등이 증폭되었는데, 대부분 자주계열이 지도부를 장악하고 있던 대중조직들 역시 정파갈등에 휩싸였다. 즉 대중조직 내에서도 자주계열 대 평등계열, 이후 자주계열 내의 갈등과 같이 민주노동당의 갈등구조가 그대로 재현되었다. 당과 마찬가지로 대중조직 역시 스스로 정파의 폐해에 대해서는 인정하였지만 자신들도 정파구조의 당사자이기 때문에 특별한 묘책은 없었다.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2008년 2월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재확인하였다. 하지만 진보신당의 창당 이후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는 더욱 비판받았다. 민주노동당 창당에 관여했던 정파들은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잔존파는 배타적 지지의 유지를 주장하고 분당파는 해소를 주장하여 정치방침을 둘러싼 민주노총의 분열을 심화시켰다(김승호, 2012). 좌파정당의 분열은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전체 진보운동의 분열로 나타나 진보운동의 대중적 파급력이 급감하였고 이는 2008년 촛불정국에서 진보정당의 무기력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민주노동당 분열로 인해 민주노총 역시 내분에 휩싸였으며, 이러한 기류는 배타적 지지단체뿐만 아니라 진보연대 추진 실패에서 보듯이 상설연대체까지 파급되었다. 

민주노총은 2009년 1월 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재확인하고 동시에 진보정당의 분열을 극복하는 제2의 정치세력화를 선언하면서 진보대통합을 추진할 것을 결의하면서 이를 위해 민주노동당 세액공제에 참가했던 민주노총 20만 조합원의 재조직화와 2010년 지자체 선거까지 민주노동당의 노동자 10만 당원 운동을 선언하였다(민주노총, 2009c). 민주노총은 2009년 7차, 8차 중앙집행위원회를 통해 ‘진보정당세력의 단결과 통합을 위한 민주노총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활동할 것을 결의하였다. 민주노총은 2009년 9월 대의원대회에서 ‘진보정당 단결과 통합 촉구 민주노총 선언문’을 채택하고 이를 위해 조합원 10만 선언과 서명을 추진할 것을 결의하였다. 

민주노총은 2010년 대의원대회에서 “진보정치 대통합을 위한 대승적 차원에서 통합에 동의하는 진보정당에 대해 한시적으로 2010년 6.2지방선거에서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방침을 유예한다”는 결정을 함으로써 조합원이 민주노동당 이외의 진보정당을 지지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사회당은 민주노총의 제안에 동의하지 않았고 진보신당은 동의하였다. 그 결과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모두를 지지하는 선거방침을 정하고,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 대해 후보단일화를 요구하였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노총은 야권과 공조하여 진보교육감을 당선시켰고, 진보후보 단일화와 야권연대 성사에 성과를 냈다. 민주노총은 2010년 하반기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 대하여 “2011년 5월 1일 노동절기념행사까지 선 통합선언 및 수임기구 구성을 포함하는 추진계획을 제시하라”고 요구하였는데, 민주노총 내 일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선 통합의 대상에 사회당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 결과 12월 7일 대표 회동을 통해서 진보 양당이 중심이 되어서 광범위한 진보세력이 참여하는 ‘진보정치대통합과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에 뜻을 같이하고, 이에 동의하는 진보진영대표자들의 연석회의를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기류를 반영하여 2011년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는 ‘제2의 노동자정치세력화, 진보정치 대통합과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민주노총 정치선언’을 채택하였다. 

한편 민주노동당은 2009년 정책당대회에서 제2의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진보정치대연합 및 민주노동당 강화를 결의하였는데, 실제로는 아래로부터의 재창당, 대중과 함께하는 재창당, 단계적 재창당을 주장하면서 당분간 독자적인 성장론에 방점을 두었다. 다만 민주노동당은 진보대연합을 추진하기 위한 준비단계로서 진보정당과 시민사회단체가 포함된 진보원탁회의를 제기할 수 있음을 밝혔다(민주노총, 2009d).

하지만 분당 후 2008년과 2010년 민주노동당 최고위원회 선거에서 당의 혁신과 진보대통합을 내걸었던 후보들이 패배하고, “먼저 민주노동당을 강화하고 진보대통합은 그 이후 시간을 두고 추진하자”고 주장했던 경기도와 광주전남 및 울산 등 거대정파들의 후보가 지도부로 당선되었다.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2010년 지방선거에서 진보후보 단일화와 야권연대로 승리한 이후 민주노총의 진보대통합방침과 당 내외 여론을 수용하여 진보대통합에 적극 나섰다. 민주노동당은 2011년 4월 진보대통합 방안을 확정하는데, 이념과 가치의 차이를 인정하고 연북의 입장에서 사안에 따라 북을 비판하거나 칭찬할 수 있으며,  ‘묻지마 범야권연대’가 아니라 선택적 범야권연대를 추진하며, 특히 패권주의와 분파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공동대표제, 1인1표제, 합의 존중, 정책명부 할당제, 당원총투표제 등을 도입하기로 하였다(민주노동당, 2011a). 

드디어 2011년 1월 20일 ‘진보정치 대통합과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진보진영 대표자 1차 연석회의’를 시작으로 대표자 연석회의 6차례, 집행책임자 회의 15차례, 정책책임자 회의 7차례를 진행하여 5월 31일 ‘진보정치 대통합과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5.31최종합의문’이 도출되었다. 이러한 진보대통합 논의 과정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사회당, 진보적 시민사회단체 등이 참여한 것이었다. 하지만 최종합의 과정에서 사회당은 북에 대한 입장 차이 등을 이유로 합의 주체에서 빠졌다. 또한 국민참여당은 연석회의 논의 과정에 참여 의사를 밝혀왔지만 연석회의 내부에서 국민참여당이 먼저 지난 정부 시절에 대해 조직적 성찰과 반성을 해야 한다는 반론이 제기되어 국민참여당의 참여 문제는 이후 과제로 미루어졌다.


3) 민주노총의 진보대통합 실패

 2011년 6월 19일 민주노동당이 정책당대회에서 ‘5.31최종합의문’을 먼저 승인하였다. 진보신당은 3월 27일 정기당대회에서 대북문제, 총선과 대선 방침, 당 운영방안 등의 진보대통합 기준을 결정하였는데, 이는 통합에 소극적인 내용이었다. 6월 26일 진보신당은 대의원대회에서 3월 27일 결정에 미흡하다면서 ‘5.31최종합의문’ 승인을 유보하고 대신 조직진로에 대한 특별결의문을 채택하였다. 국민참여당은 5.31합의문 논의 과정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2011년 7월 10일 중앙위원회에서 과거에 대한 조직적 반성과 성찰을 통해 '새통추'에 참여의사를 밝혔으며, ‘5.31최종합의문’과 그 ‘부속합의서1’를 승인하고 합의문에 동의하는 새로운 진보정당 추진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이때부터 정당들 사이에서 국민참여당의 진보대통합 참여를 둘러싸고 찬반 논란이 거세졌다.

7월 15일 진보대통합 당사자들은 ‘5.31최종합의문’을 재확인하고 7월 말까지 ‘새로운 통합추진위원회(이하 '새통추')’를 구성하기로 했으나 국민참여당의 '새통추' 참여 문제와 당 운영과 관련된 세부방안(부속합의서 2)에 대한 이견 때문에 구성이 늦어졌다. 2011년 8월 27일 “새로운 통합진보정당추진위원회 구성 및 운영에 관한 합의문(부속합의서 2)”이 채택되었다. 마지막 남은 쟁점인 국민참여당의 '새통추' 참여 문제에 대해서도 민주노동당이 진보신당의 입장이었던 ‘선 진보통합 후 국민참여당 논의’를 전격 수용하였다.

다음날 8월 28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가장 핵심 쟁점이었던 국민참여당의 참여 문제에 대해서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은 국민참여당 참여 문제에 대하여 합의하기 위해 진지한 논의를 하되 합의가 되지 않더라도 '새통추'에 참가한 개인과 세력을 중심으로 9월 25일 창당대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8.28 새로운 통합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잠정)합의문’을 도출하였다.

진보신당은 9월 4일 임시당대회에서 ‘5.31최종합의문’과 ‘8.28 합의문’을 토론했으나 54%의 찬성에 그쳐서 부결되었다. 진보신당의 부결로 진보양당의 통합이라도 실현하고자 했던 민주노총의 노력은 무산되고 말았다.

2011년 9월 23일 민주노총은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통합안을 부결시킨 진보신당에 대한 한시적 지지를 철회하였다. 또한 이날 중앙집행위원회는 국민참여당이 진보대통합의 우선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했으며 다만 5.31최종합의문에 근거하여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에 참여할 수 있는 대상인지의 여부를 논의할 수 있으며, 그 판단의 주체는 5.31 합의와 8.27 합의에 따라 '새통추'가 되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민주노동당은 진보신당이 통합을 거부한 이후 9월 25일 임시당대회에서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허용하는 안건을 논의했으나 이 안건이 국민참여당과의 선통합을 허용하는 것이라는 당내 반발과 민주노총의 반대로 2/3의결정족수에서 2% 부족하여 부결되었다. 이 당대회에서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와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이 반대 발언을 하는 동안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일부 간부들이 강하게 항의하는 등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심각한 내분 양상을 보였다.

10월 7일 민주노동당 7차 수임기관 전체회의에서 1)진보대통합을 빠른 시일 안에 성사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한다. 2) 향후 진보대통합 방식, 시기 등에 대한 당원 의견수렴 및 관련 단위들과의 협의에 착수한다. 3) 위의 사항을 당대표와 최고위원회가 추진한다는 결정을 하고 당 내외 의견수렴에 들어갔다.

한편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당 대 당 통합은 무산되었으나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등 진보신당 통합파들이 진보신당을 탈당하여 ‘새진보통합연대’를 구성한 후 민주노동당과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11월 3일 ‘새진보통합연대’가 ‘12월 10일 이전에 모든 정당, 대중조직, 단체 개인 등의 참여를 광범위하게 열어놓고 진보대통합정당 창당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민주노동당, 새진보통합연대, 국민참여당이 통합을 위한 협상에 나섰으며 이들은 11월 20일 통합진보정당 건설 추진을 선언하였다.

11월 23일 먼저 새진보통합연대에서 공동대표단-지역대표자회의 통해 통합 방안을 승인하고, 이어서 민주노동당이 11월 27일 임시당대회에서 통합 방안을 90.1%로 가결시켰고, 국민참여당 역시 12월 4일 임시전국당원대회에서 통합 방안을 89.33%로 통과시켰다.

2011년 12월 5일 민주노동당, 새진보통합연대, 국민참여당이 수임기관 합동회의를 열고 당명을 ‘통합진보당’으로 정하고 이정희·유시민·심상정 공동대표 체제로 신설합당을 의결하였고 12월 11일 통합진보당 창당 선포식을 개최하였다.

하지만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통합연대 등 3자에 의한 통합진보당 창당은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가 2011년 9월 23일에 결정한 ‘새통추를 통한 통합’이 아니었다. 따라서 민주노총은 3자 통합에 참여하지 않았고 그 결과 민주노총은 국민참여당을 진보대통합의 주체로 인정하는 민주적 절차를 거칠 수 없었다. 민주노총이 '새통추'를 통해 국민참여당 문제를 논의하지 못한 이유는 새통추에 국민참여당을 포함한 통합을 주장했던 ‘진보통합시민회의’의 상당수가 거대야당 건설 쪽으로 방향을 틀어 새통추 안에서 국민참여당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실익이 없었고, 더구나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에 반대하는 ‘진보정치세력의 연대를 위한 교수·연구자 모임’이 있었기 때문에 총선을 겨냥한 신속한 논의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민주노동당, 2012b).

2012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총대의원대회는 통합진보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내용으로 하는 정치방침을 전국적으로 토론하기로 결정하였고 그 결과 민주노총은 2012년 4월 총선에서 통합진보당, 진보신당, 사회당의 후보를 지지하기로 결정하고 특히 통합진보당을 비례대표지지정당으로 선택하였다.

하지만 통합진보당은 총선직후 지역구후보 선출 부정 논란, 후보단일화 특혜 논란, 비례대표후보 선출 부정 논란에 휩싸이면서 심각한 내분에 빠졌다. 패권주의와 이념논쟁이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과 마찬가지로 국민참여당 계열까지 가세하여 재연되었으며, 부정선거와 부실선거에 책임 있는 당사자들이 서로를 공격하면서 중앙위원회 폭력사태를 초래하였고 결국 분당되었다.

2012년 5월 17일 민주노총은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42명 중 32명의 찬성으로 구당권파가 강기갑 혁신비대위의 혁신안을 수용할 때까지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기로 하는 '조건부 지지 철회'를 결정하였다. 이어 2012년 8월 14일 민주노총은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39명 중 27명의 찬성으로 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철회하였다(민주노총, 2012a).

결국 민주노총이 최종적인 진보대통합 과정에 참가하지 못하였다는 점, 진보신당과 사회당이 통합진보당에 결합하지 않아 반쪽짜리 진보대통합이 되었다는 점, 신자유주의 정책 도입에 책임이 있는 국민참여당이 진보대통합의 주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민주노총이 애초에 의도하였던 ‘노동중심의 진보대통합’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다만 국민파를 중심으로 한 민주노총 상층부 일부가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단계적으로 추진하려고 했고 통합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사실상 분당 이전까지 고수하였다는 점에서 결과론적으로 민주노총의 진보대통합이 완전히 실패하였다고 볼 수 없다. 국민파를 중심으로 한 민주노총 지도부가 반대한 것은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는 국민참여당과의 통합 자체보다는 국민참여당과의 선통합, 노동계를 배제한 통합절차 등에 반대한 것으로 판단된다. 노선의 문제로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던 중앙파 인사들도 이후에 새로운 진보대통합을 주장하면서 국민참여당 계열이 주요세력인 정의당에 결합하였다.

민주노동당이 국민참여당과 통합함으로써 중도보수정당과 조직적으로 함께 할 수 없다는 민주노동당 당원과 민주노총 조합원의 심리적 저지선이 무너졌다. 민주노총 국민파에 속하였던 정치위원장들 중 다수는 민주노동당 시절에 의회진출을 도모하다 결국에는 2012년 대선 직전에 보수야당의 대선 캠프에 결합하였고 특히 이석행 전 민주노총 위원장은 민주당에 입당하였고 민주노총 출신 문성현 전 민주노동당 대표는 문재인 민주당후보 캠프에 결합하였다.

결국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노동정치의 성공모델을 만들고 확산하여 국민들에게 노동정치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에 이르지 못하였고 특히 민주노총은 결과적으로 민주노총 소속으로 당선된 최고위원이나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에 대해서도 민주노총 차원에서 노동정치의 상을 제시하고 실현하도록 강제하는 것에 실패하였다. 

민주노총의 정치방침 평가와 교훈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평가

민주노총은 출범 당시부터 좌파정당 창당을 목표로 하였으며, 이러한 목표는 ‘국민승리21’과 ‘진보정당 창당준비위원회’, ‘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거쳐 민주노동당으로 실현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만을 통해 정치세력화를 한다는 ‘배타적지지’는 처음부터 예정된 것이었다.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 창당 직전 2000년 1월 대의원대회에서 당과 노조의 관계에 대한 포괄적인 입장을 천명하였는데, 이를 통해 민주노총이 지향하는 배타적 지지의 의미를 추측할 수 있었다. 이 대회에서 민주노총은 “정당과 노동조합은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한 조직체이면서도 상대적 독자성과 자율성을 가지로 있으므로 이에 대한 상호 존중과 이해, 긴밀한 협력관계가 요구 된다”고 밝히면서 동시에 민주노동당이 노동자 중심성과 투쟁성을 담보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할 것을 다짐하였다.

2008년 이후 좌파정당들 간의 경쟁과 대중투쟁전선 내부의 분열이 확연해지자,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점차 어려워졌다. 조합원들과 간부들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그리고 사회당 등에 혼재되어 있는 상황에서 민주노동당에 대한 일방적인 지지는 진보신당의 반발은 물론, 일부 조합원과 조합 간부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진보신당이나 사회당이 원내 의석을 지니지 못하고 민주노동당이 유일하게 원내에 진출한 좌파정당이었기 때문에 민주노동당에 대한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위협받지 않았다. 2011년 9월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의 공식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임시당대회에서 국민참여당과의 선통합을 시도하면서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로 상징되는 양자의 관계는 실질적으로 파탄되었다.

민주노동당을 계승한 통합진보당은 2012년 민주노총에 대한 할당제도를 폐지하고 당 지도부가 노동부문 대의원을 임명하도록 함으로써 민주노총과의 조직적 관계를 끊었지만 민주노총은 여전히 각종 선거를 앞두고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가 통합진보당에 계승되었음”을 확인하고 조합원들에게 통합진보당을 지지할 것을 호소하였다. 2012년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가 유지되었고, 사회당과 통합한 진보신당은 배타적 지지를 얻지 못한 채 단 한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였다. 하지만 2012년 총선 직후 통합진보당이 비례대표 국회의원후보 선출 부정선거 시비로 인해 정쟁에 휘말리고 그로 인해 중앙위원회 폭력사태가 발생하여 노동자와 국민으로부터 지탄을 받자, 민주노총은 통합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공식적으로 철회하였다. 그 이후 민주노동당의 후신인 통합진보당에서 정의당이 분당되어 나왔지만 민주노총과 공식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였다. 결국 민주노총은 어느 정당과도 공식적인 관계를 유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으며, 이는 민주노총의 1기 정치세력화가 민주노동당의 성과를 계승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실패하였음을 의미하였다.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로 인해 공식적으로 민주노동당 이외의 정당에 대한 민주노총 차원의 지원이 차단되고 간부들의 다른 당 후보 출마가 제한되었다. 하지만 일반 조합원 차원에서는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는 정치적 선언에 불과하여 조합원들의 투표 성향을 실질적으로 구속할 수 없었다. 조합원들이 실제 각종 선거에서 당선 가능한 후보를 찍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지역구 선거에서는 당선권에 있는 다른 정당 후보를 찍는 경우가 많았으며, 단지 비례대표 정당명부는 대부분 민주노동당을 찍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 창당을 의회주의로 비판해오던 민주노총 내 현장파는 독자적인 계급정당 건설을 지향하면서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지지 방침이 자신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2008년 진보신당 창당 이후에는 진보신당 지지자들도 배타적 지지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이후 진보신당에 결합한 민주노총 중앙파 일부 역시 과거의 주장과 달리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비판하였다. 이들은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가 없어지면 많은 조합원들이 자신들을 지지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하지만 통합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가 없어진 후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정치적 성향을 분석하면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가 여전히 상대적으로 높을 뿐, 다른 좌파정당의 지지율은 크게 증가하지 않았다. 상당한 부동층이 형성되고 그 일부가 거대야당에 대한 지지자로 전환되었다. 통합진보당 지지에서 이탈한 간부들과 조합원들은 계급정당 건설보다는 민주당이나 박원순 서울시장과 같은 유력한 정치인 쪽으로 이동하였다. 심지어 민주노총 전직 지도부 일부는 대통령선거에서 노동계를 대표하는 인사의 자격으로 거대 야당의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였다.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를 상징하는 배타적 지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첫째 배타적 지지로 구체화된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는 서유럽의 사례와 비교하더라도 애초부터 개량주의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으며, 이러한 태생적 개량주의는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영향력을 보장하는 배타적 지지를 통해 민주노동당에게 그대로 투영되었다. 

먼저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와 민주노동당 창당은 최상급노조가 강력한 산별노조를 기반으로 좌파정당과 조직적 연대를 한다는 양날개론에 근거하였으나 실제로는 노동자 조직화라는 객관적 토대가 취약한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산별노조가 먼저 건설되었다면 결합이 가능했던 지역의 일반노조나 노동운동단체가 민주노총에 결합하지 못했으며, 민주노총은 출범 이후에도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였다(김창우, 2007). 무엇보다 민주노총 건설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변혁적 노동운동을 지향하였던 전노협이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맹’, ‘대우그룹노동조합협의회’ 등과 ‘전국노조대표자회의’를 구성하면서 조기에 청산됨으로 민주노총은 사무전문직과 대기업노동자의 온건 노선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또한 노동조합의 형태가 아닌 다양한 변혁적 노동운동세력들은 민주노총 건설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에 민주노총은 출발부터 개량주의에 경도되었다. 

이러한 성급한 양날개론은 국민승리21의 급조와 민주노동당 창당이라는 선거주의, 의회주의로 나타났다. 민주노총 1기 집행부가 선언한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은 노동조합의 투쟁력을 기반으로 사회적 대타협과 의회에서 입법개선을 중요시하는 국민파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온건노선은 창당 시절부터 민주노동당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민주노동당의 전신은 ‘국민승리 21’이었는데, 이는 이름에서 보듯이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이 창당노선에 반영된 것이었다. ‘국민승리 21’이 1997년 대선에서 내걸었던 ‘일어서라 코리아’ 역시 ‘국민승리 21’이 ‘투쟁하는 노동자정당’으로 각인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온건노선이었는데, 김세균 교수 등 평등계열 일부는 이를 우경화로 비판하면서‘국민승리 21’에서 탈퇴하였다.

둘째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는 민주노총이 의무적으로 민주노동당에게 인적 지원, 조직적 지원, 재정적 지원을 하고 선거 때마다 표를 주는 경직적인 관계를 형성시켜 오히려 양자 모두에게 독이 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민주노동당의 입장에선 굳이 민주노총의 요구를 진지하게 실천하지 않더라도 일방적 지지를 얻었기 때문에 노동중심성의 강화라는 당의 과제를 기필코 달성하겠다는 절박성이 부족하였다. 즉 노동중심성 실현에 대한 압박요인 없었기 때문에 이는 강제성이 없는 선언적인 의미에 그쳤다. 이처럼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는 민주노총이 조합원의 정치활동을 민주노동당에 일임하는 대리주의로 변질되었으며, 그 결과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이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기도 전에 의회주의에 몰입하는 것을 차단할 수 있는 대중적인 정치기반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물론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 창당 당시 스스로 이러한 대리주의를 경계하였다. 민주노총은 2000년 1월 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동당을 통한 정치세력화와 별개로 “주요한 정치정세나 사업에 대해서 독자적 방침을 가지고 조합원에 대한 정치의식화와 교육, 활동 및 사업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하지만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에도 정치위원회를 통해 독자적인 정치활동을 하겠다는 애초의 목표는 거의 성과가 없었다. 민주노총이 추구하는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는 민주노동당 활동에 국한되어 당원확대사업으로 축소되었고, 노동자의 정치적 단결이라는 자기과제를 민주노동당으로 넘겨 버리는 결과로 나타났다(민주노동당, 2009b). 

민주노총이 일반 조합원을 상대로 하는 독자적인 정치활동을 포기함으로써 민주노총의 정치활동은 민주노동당 창당과 지원을 위한 상층간부들의 활동으로 축소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민주노총상임집행위원회는 1999년 7월 19일 ‘상임집행위원회 사업평가(안)을 통해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 창당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창당 추진주체들이 상층중심의 사업으로 인하여 노조 내의 광범위한 동의와 대중적 동력을 끌어내지 못하였다. 민주노총이 진보정당의 창당일정과 사업방침을 결정하는데 있어 대중조직의 발전과 역량에 맞게 조절, 추진하지 못하였다. 당건설의 과정에서 대중조직의 발전과 통일단결을 이루어내지 못하였다.>


2) 민주노총의 2007년 대선전략 실패

민주노총 정치위원회는 2007년 7월 대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 노동위원회와 합동수련회를 열어 정치실천본부 구성, 세액공제 활성화, 노동자 참정권 확대, 100만 민중총궐기 등의 사업을 논의하였다. 민주노총은 대중투쟁과 선거투쟁을 결합하고 노동공약과 진보의제를 발굴하여 이를 여론전을 통해 전파하기로 했으며 이를 위해 정치참여와 교육, 홍보로 조합원의 정치의식을 향상시켜 정치간부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실제로 대선기간동안 중앙 지도부만 무려 600회가 넘는 조합원 교육을 실시하였다. 전국에서 2,000명 이상의 정치실천단을 조직하고 ‘행복8010’에 총력을 기울였다(민주노총, 2007).

민주노총의 대선 전략을 살펴보면 먼저 민주노총은 계급투표전략의 일환으로서 배타적 지지단체인 민주노총, 전농, 전여농, 전빈련 등이 참여하는 100만 민중참여경선제로 민주노동당 대선후보를 선출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민주노총은 민중참여경선제에 사회당 등 진보진영의 후보를 참여시켜 진보진영 후보단일화를 성사시킨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2007년 3월 민주노동당대회에서 2/3 이상의 찬성을 얻지 못해 ‘개방형경선제’ 당헌개정이 부결되었다.

이에 민주노총은 계급투표를 조직하기 위해 민중참여 경선제 재추진을 위한 당대회를 소집 요구하였으나 6월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당대회 소집 자체가 과반수 동의를 얻지 못해 부결되었다. 민주노동당은 민중참여경선제가 부결된 조건에서 ‘진보대연합 실현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진보대연합 연석회의를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나 특별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독자후보 선출에 나섰다. 2007년 대선 직전에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한국사회당 금민 후보와 선거연합 및 후보단일화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협상에 착수하였으나 끝내 단일화에 성공하지 못하고 각각 출마하였다(이윤원, 2007).

대선 기간 중 민주노총은 정치기금을 마련하고 세액공제를 조직하여 민중참여 경선제가 도입되면 200억을 모금할 계획하였으나 민중참여 경선제 도입 실패 후 모금액을 39억으로 수정하였다. 민주노총은 비당권자의 당권을 회복하고 투쟁사업장 등에서 집단 입당을 조직하였으나 당원과 당권자는 크게 늘지 않았다.

2007년 대선에서 권영길 민주노총 초대위원장이 3번째 대선에 도전하였지만 득표율이 3.01%(712.121표)에 불과하여 민주노동당은 대선패배의 책임소재를 두고 분란을 거듭하여 아노미 상태에 빠졌다.

결국 민주노총이 2007년 대선 목표로 설정한 대통령후보 민중경선제를 통한 계급투표 전략, 진보대연합을 통한 후보단일화, 대선 300만 표 획득, 18대 총선 원내교섭단체 구성, 당원 30% 확대 등은 모두 실패하였다(민주노총, 2007).

대선패배 이후 구성된 심상정 비상대책위원회의 2008년 2월 임시당대회 평가안은 선거패배의 객관적인 요인으로서 노무현 심판론에 따른 보수세력 결집과 이에 따른 민주노동당의 여당과의 동반하락, 다자간 선거구도를 들었으며, 주체적인 요인으로서 진보적 대안 제시 실패와 계급투표의 실패, 대선과정에서 내부 갈등, 후보 이미지의 한계 등을 제시하였다.

반면 민주노동당 당원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2007년 대선패배의 원인으로서 객관적인 조건이 46.1%, 당 자체의 문제가 46.2%라고 답변하였다. 내부 원인으로서 공약과 당 이미지가 22.1%, 계급투표 실패가 20.3%, 후보이미지가 19.6%라고 답변했으며 외부 원인으로서는 노무현 심판여론이 44%, 유사세력 출마가 27.8%라고 답변하였다. 당 운영 혁신을 위해 어떤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보는지에 대한 질문에 응답자 중 42.7%가 정파갈등해소라고 답하였다. 지도부가 안정적인 집행을 할 수 있는 구조 확립이 시급하다고 본 당원은 21.7%, 지도부 교체 등 중앙당 인적쇄신이라고 답한 당원은 17.8%로 그 뒤를 이었고 의원단 및 지도부에 대한 당원 평가 시스템 마련이라고 답한 당원은 12.5%였다.

한편 비상대책위원회 평가안은 당의 노동정치가 대기업-정규직 중심의 민주노총 이미지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고 민주노총에 맡기는 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평가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안은 민주노동당이 민감한 사안을 함께 책임지지 않고 민주노총을 감싸 안기보다는 돈과 표밭으로 대상화하면서 보수언론의 이미지왜곡에 편승하려고 한다는 민주노총 조합원의 반발만 키웠다(이수봉, 2008).


3) 민주노총의 진보대통합 실패

2011년 6월 19일 민주노동당이 정책당대회에서 ‘5.31최종합의문’을 먼저 승인하였다. 진보신당은 3월 27일 정기당대회에서 대북문제, 총선과 대선 방침, 당 운영방안 등의 진보대통합 기준을 결정하였는데, 이는 통합에 소극적인 내용이었다. 6월 26일 진보신당은 대의원대회에서 3월 27일 결정에 미흡하다면서 ‘5.31최종합의문’ 승인을 유보하고 대신 조직진로에 대한 특별결의문을 채택하였다. 국민참여당은 5.31합의문 논의 과정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2011년 7월 10일 중앙위원회에서 과거에 대한 조직적 반성과 성찰을 통해 '새통추'에 참여의사를 밝혔으며, ‘5.31최종합의문’과 그 ‘부속합의서1’를 승인하고 합의문에 동의하는 새로운 진보정당 추진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이때부터 정당들 사이에서 국민참여당의 진보대통합 참여를 둘러싸고 찬반 논란이 거세졌다.

7월 15일 진보대통합 당사자들은 ‘5.31최종합의문’을 재확인하고 7월 말까지 ‘새로운 통합추진위원회(이하 '새통추')’를 구성하기로 했으나 국민참여당의 '새통추' 참여 문제와 당 운영과 관련된 세부방안(부속합의서 2)에 대한 이견 때문에 구성이 늦어졌다. 2011년 8월 27일 “새로운 통합진보정당추진위원회 구성 및 운영에 관한 합의문(부속합의서 2)”이 채택되었다. 마지막 남은 쟁점인 국민참여당의 '새통추' 참여 문제에 대해서도 민주노동당이 진보신당의 입장이었던 ‘선 진보통합 후 국민참여당 논의’를 전격 수용하였다. 

다음날 8월 28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가장 핵심 쟁점이었던 국민참여당의 참여 문제에 대해서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은 국민참여당 참여 문제에 대하여 합의하기 위해 진지한 논의를 하되 합의가 되지 않더라도 '새통추'에 참가한 개인과 세력을 중심으로 9월 25일 창당대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8.28 새로운 통합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잠정)합의문’을 도출하였다.

진보신당은 9월 4일 임시당대회에서 ‘5.31최종합의문’과 ‘8.28 합의문’을 토론했으나 54%의 찬성에 그쳐서 부결되었다. 진보신당의 부결로 진보양당의 통합이라도 실현하고자 했던 민주노총의 노력은 무산되고 말았다. 

2011년 9월 23일 민주노총은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통합안을 부결시킨 진보신당에 대한 한시적 지지를 철회하였다. 또한 이날 중앙집행위원회는 국민참여당이 진보대통합의 우선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했으며 다만 5.31최종합의문에 근거하여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에 참여할 수 있는 대상인지의 여부를 논의할 수 있으며, 그 판단의 주체는 5.31 합의와 8.27 합의에 따라 '새통추'가 되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민주노동당은 진보신당이 통합을 거부한 이후 9월 25일 임시당대회에서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허용하는 안건을 논의했으나 이 안건이 국민참여당과의 선통합을 허용하는 것이라는 당내 반발과 민주노총의 반대로 2/3의결정족수에서 2% 부족하여 부결되었다. 이 당대회에서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와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이 반대 발언을 하는 동안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일부 간부들이 강하게 항의하는 등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심각한 내분 양상을 보였다.

10월 7일 민주노동당 7차 수임기관 전체회의에서 1)진보대통합을 빠른 시일 안에 성사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한다. 2) 향후 진보대통합 방식, 시기 등에 대한 당원 의견수렴 및 관련 단위들과의 협의에 착수한다. 3) 위의 사항을 당대표와 최고위원회가 추진한다는 결정을 하고 당 내외 의견수렴에 들어갔다.

한편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당 대 당 통합은 무산되었으나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등 진보신당 통합파들이 진보신당을 탈당하여 ‘새진보통합연대’를 구성한 후 민주노동당과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11월 3일 ‘새진보통합연대’가 ‘12월 10일 이전에 모든 정당, 대중조직, 단체 개인 등의 참여를 광범위하게 열어놓고 진보대통합정당 창당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민주노동당, 새진보통합연대, 국민참여당이 통합을 위한 협상에 나섰으며 이들은 11월 20일 통합진보정당 건설 추진을 선언하였다.

11월 23일 먼저 새진보통합연대에서 공동대표단-지역대표자회의 통해 통합 방안을 승인하고, 이어서 민주노동당이 11월 27일 임시당대회에서 통합 방안을 90.1%로 가결시켰고, 국민참여당 역시 12월 4일 임시전국당원대회에서 통합 방안을 89.33%로 통과시켰다. 

2011년 12월 5일 민주노동당, 새진보통합연대, 국민참여당이 수임기관 합동회의를 열고 당명을 ‘통합진보당’으로 정하고 이정희·유시민·심상정 공동대표 체제로 신설합당을 의결하였고 12월 11일 통합진보당 창당 선포식을 개최하였다.

하지만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통합연대 등 3자에 의한 통합진보당 창당은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가 2011년 9월 23일에 결정한 ‘새통추를 통한 통합’이 아니었다. 따라서 민주노총은 3자 통합에 참여하지 않았고 그 결과 민주노총은 국민참여당을 진보대통합의 주체로 인정하는 민주적 절차를 거칠 수 없었다. 민주노총이 '새통추'를 통해 국민참여당 문제를 논의하지 못한 이유는 새통추에 국민참여당을 포함한 통합을 주장했던 ‘진보통합시민회의’의 상당수가 거대야당 건설 쪽으로 방향을 틀어 새통추 안에서 국민참여당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실익이 없었고, 더구나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에 반대하는 ‘진보정치세력의 연대를 위한 교수·연구자 모임’이 있었기 때문에 총선을 겨냥한 신속한 논의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민주노동당, 2012b).

2012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총대의원대회는 통합진보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내용으로 하는 정치방침을 전국적으로 토론하기로 결정하였고 그 결과 민주노총은 2012년 4월 총선에서 통합진보당, 진보신당, 사회당의 후보를 지지하기로 결정하고 특히 통합진보당을 비례대표지지정당으로 선택하였다. 

하지만 통합진보당은 총선직후 지역구후보 선출 부정 논란, 후보단일화 특혜 논란, 비례대표후보 선출 부정 논란에 휩싸이면서 심각한 내분에 빠졌다. 패권주의와 이념논쟁이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과 마찬가지로 국민참여당 계열까지 가세하여 재연되었으며, 부정선거와 부실선거에 책임 있는 당사자들이 서로를 공격하면서 중앙위원회 폭력사태를 초래하였고 결국 분당되었다. 

2012년 5월 17일 민주노총은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42명 중 32명의 찬성으로 구당권파가 강기갑 혁신비대위의 혁신안을 수용할 때까지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기로 하는 '조건부 지지 철회'를 결정하였다. 이어 2012년 8월 14일 민주노총은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39명 중 27명의 찬성으로 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철회하였다(민주노총, 2012a).

결국 민주노총이 최종적인 진보대통합 과정에 참가하지 못하였다는 점, 진보신당과 사회당이 통합진보당에 결합하지 않아 반쪽짜리 진보대통합이 되었다는 점, 신자유주의 정책 도입에 책임이 있는 국민참여당이 진보대통합의 주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민주노총이 애초에 의도하였던 ‘노동중심의 진보대통합’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다만 국민파를 중심으로 한 민주노총 상층부 일부가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단계적으로 추진하려고 했고 통합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사실상 분당 이전까지 고수하였다는 점에서 결과론적으로 민주노총의 진보대통합이 완전히 실패하였다고 볼 수 없다. 국민파를 중심으로 한 민주노총 지도부가 반대한 것은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는 국민참여당과의 통합 자체보다는 국민참여당과의 선통합, 노동계를 배제한 통합절차 등에 반대한 것으로 판단된다. 노선의 문제로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던 중앙파 인사들도 이후에 새로운 진보대통합을 주장하면서 국민참여당 계열이 주요세력인 정의당에 결합하였다. 

민주노동당이 국민참여당과 통합함으로써 중도보수정당과 조직적으로 함께 할 수 없다는 민주노동당 당원과 민주노총 조합원의 심리적 저지선이 무너졌다. 민주노총 국민파에 속하였던 정치위원장들 중 다수는 민주노동당 시절에 의회진출을 도모하다 결국에는 2012년 대선 직전에 보수야당의 대선 캠프에 결합하였고 특히 이석행 전 민주노총 위원장은 민주당에 입당하였고 민주노총 출신 문성현 전 민주노동당 대표는 문재인 민주당후보 캠프에 결합하였다.

결국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노동정치의 성공모델을 만들고 확산하여 국민들에게 노동정치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에 이르지 못하였고 특히 민주노총은 결과적으로 민주노총 소속으로 당선된 최고위원이나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에 대해서도 민주노총 차원에서 노동정치의 상을 제시하고 실현하도록 강제하는 것에 실패하였다. 


민주노동당의 조로화와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 실패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가 현상적으로 실패한 계기는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의 분열, 노동자정치세력화에 대한 민주노동당의 회피와 통합진보당의 외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좌파정당과 ‘긴장적 협력관계’를 유지할 역량이 부족했던 노동운동의 한계로 인해 실패하였다.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의 의회주의를,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의 기득권 경향을 견제하지 못하였다. 노동자정당과 노동조합의 결합은 상호의존성을 증대시켜 양자의 단점도 상호작용하였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양자는 의회주의 몰입, 정파지배구조 등 부정적 동조화로 인해 양자의 장점을 상승시키기는커녕 자신들의 조로화와 미성숙을 극복할 수 없었다. 민주노동당 조로화의 상징적인 사건은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과 다른 진보정당의 반대를 무릅쓰면서 ‘국민참여당과의 선통합’과 ‘민주당과의 획일적인 후보단일화’를 시도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민주노동당이 2009년 정책당대회에서 채택하여 통합진보당 이후에도 고수한 ‘진보대통합을 통한 야권연대’방침의 파행적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원래 이 방침은 보수양당 중심의 소선거구제 아래서 진보정당이 의회에 진출하려면 진보대통합이 불가피하다는 진보정당 내부의 필요와 2008년 촛불정국 이후 형성된 야권 단결에 의한 정권교체라는 외부의 필요를 접목한 것이다.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의 조로화를 견제하지 못해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관계가 파탄된 이유를 크게 보면 대표성, 자주성, 민주성, 변혁주체의 문제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민주노총은 전체 노동계급을 대표하거나 대변하려는 의지와 역량이 부족했으며 이로 인해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에 있어 사민주주의 모델에서의 양날개론은 그 전제조건을 형성하지 못하였고 민주노총은 정규직 대기업중심 노조운동, 노동운동의 연대성 약화,  분파주의 경향, 현장조직력 약화 등을 극복하지 못하였다(이상학, 2005). 물론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비정규직 노동자와 중소기업 노동자를 조직화하여 민주노총의 조직율을 높이고 당원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전체 비정규직 노동자 중 그나마 노동조건이 괜찮아 조직결성이 가능한 비율이 높지 않았다. 그렇다면 노조조직화 전략과 함께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사회의제 투쟁전략이 병행되어야 했는데, 당과 노조 안에서 조직투쟁과 의제화투쟁의 병행전략에 대한 혼선이 존재하여 효과적으로 추진되지 못하였다.

1997년 이후 신자유주의 파고에 대응한 민주노조운동의 전략은 산별노조와 좌파정당 건설이었으나 이러한 전략은 1987년 체제의 민주화대항헤게모니에 머물렀으며 특히 경제주의, 의회주의, 조합주의적 실천의 한계 속에 갇혀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노동자 헤게모니 연대로 확장되지 못하였다(노중기, 2012: 81). 민주노총 조합원은 기업별 노조 안에 갇혀 사회투쟁보다 기업 내 기득권에 안주하려고 하였다. 민주노총 역시 개별적인 노사관계를 둘러싼 단체협약개선투쟁에 경도되었고, 기업주와의 협상에 매몰되어 있는 조합간부들의 관료화를 저지하지 못하였다.

둘째 양자는 노동조합과 정당이라는 차이를 인정하는 속에서 상호 자주성을 존중하는 한편 노선과 활동에 있어서 조직적으로 제도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서로가 발전할 수 있는 공동운명이라는 측면을 고려하지 못하였다(민주노총, 2006a). 

선거 시기에만 정치에 개입하는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는 ‘노동자정권’ 수립과 관계없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민주노총은 당원가입, 세액공제, 후보발굴, 선거운동 등 당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동원부대로 대상화되었다. 극소수의 민주노총 조합원만이 국회나 지방의회에 진출하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조합원들은 대중투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민주노동당의 의회활동만 바라보았다. 그 결과 노동계급의 정치투쟁이 의회 내로 협소해졌다(김영수, 2007: 100).

이러한 노동정치의 대리주의는 노동조합의 약화로 더욱 심화되었다. 이를테면 노동조합이 강력하다면 노동조합 스스로 국가 단위의 정치적 행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지만 노동조합이 분산되고 조합원에 대한 동원력이 약화될수록 노동조합은 직접행동보다는 친노동자적인 정당을 통해 자신의 정책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조합원을 유권자로 동원하고자 한다(송태수, 2006: 30).

민주노총이 조합원의 정치활동을 민주노동당이 대리하도록 방치하였다면 민주노동당은 노동운동의 문제를 민주노총에 떠넘기고, 특히 국민이나 미조직노동자가 지적하는 민주노총의 한계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의하려는 의지가 부족하였다. 반대로 민주노동당은 정치문제에 있어 민주노총을 동등한 정치적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배타적 지지로 인해 어차피 자신의 결정을 따라 올 것이라고 보았고, 민주노총 역시 통합진보당에 대한 관성적 지지에서 보듯이 민주노동당의 결정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다. 

민주노총 일반 조합원 당원은 대부분 당의 지역조직 활동에 거의 결합하지 않았는데 특히 대도시의 경우 이런 현상이 일반적이었다. 당이 조합원 당원에 대한 정치사업은 민주노총에 일임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지만 정작 민주노총의 경우에 사업장 단위에서까지 정치사업을 추진할 조건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물론 민주노총은 조합원 정치교육을 통해 조합원들의 정치의식을 높여 자발적인 정치주체를 형성하고 그 결과 정치투쟁을 고양하고, 민주노동당 집단입당을 확대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 일환으로 민주노총은 중앙 교육사업과 현장 교육사업을 입체적으로 진행하고자 정치교육을 담당할 강사를 육성하고 교육교재를 개발하여 각 사업장별로 최소한 분기마다 전체 조합원에 대한 정치학교를 열고자 하였다. 하지만 사업장 차원의 독자적인 교육사업과 정치사업을 담당할 사업장의 정치위원회 자체가 제대로 구성되지 않았다. 그 결과 사업장의 정치사업은 선거지원에 머물렀으며, 그나마 상황이 좋은 단위노조에서는 당원확대사업이 진행되었다. 

 직장분회가 사업장에 있는 당원들에 대한 정치사업을 유일하게 할 수 있는 통로였지만 직장분회는 사실상 당 조직이 아니라 민주노총 조직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당의 지역조직이 직장분회를 통제하면서 사업장 조합원 당원들의 정치사업을 주도할 수 없었다. 민주노동당은 지역별 조직체계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업별 노조의 사업장에 갇혀 있는 민주노총 조합원 당원에 대한 정치사업을 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일부에서 조합원 집단가입, 현장분회 등의 활동이 있었지만 현장과 지역을 토대로 한 노동자정치활동의 모범을 창출하고 이를 전면화해내지 못하였다. 

총연맹 차원에서도 조합원 당원에 대한 교육사업과 정치사업을 추진할 예산이나 인력 등이 부족하였다. 총연맹은 정치위원장과 담당국장 1인 등 2명의 상근인력으로 전체 연맹의 정치사업을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이에 민주노총은 450여명에 달하는 민주노동당의 중앙과 지역 상근자의 30% 정도를 민주노총 조합원으로 순환근무할 것을 검토하기도 하였으나 실제로 집행되지 않았다. 다만 겸직이 가능한 지역 당 조직의 간부의 경우 민주노총 지역간부를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민주노총, 2006a).

민주노동당은 양자의 소통에 있어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고, 당으로서 대중조직에 대한 선도성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심지어 양자는 제도화의 성과를 분배하는 문제과정에서 서로를 견제하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양 조직 모두 의회주의에 경도되어감에 따라 민주노동당의 정파지도자와 민주노총의 지도부는 당직과 공직을 놓고 당내 선거에서 경쟁하였다. 이러한 쟁탈전은 자주계열 대 평등계열의 경쟁에서 자주계열 내의 경쟁으로, 다시 구 전국연합 계열 내의 경쟁으로 분화되는 등 민주노동당을 균열시키는 폐해를 초래하였다.

셋째 민주노총은 당원의 다수가 민주노총 조합원임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 내의 조합원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민주노동당 내의 당원 민주주의로 현실화시키지 못하였다. 오히려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의 의사결정과정에 미치는 영향력은 갈수록 쇠퇴해졌다. 

민주노동당뿐만 아니라 민주노총 역시 과두와 관료 및 정파의 폐해를 통제할 수 있는 민주주의 제도를 정착시키지 못했으며, 자신의 혁신을 담당할 자주적인 의식주체를 형성하지 못하였다. 민주노총 조합원은 물론 민주노동당 당원들조차 좌파정당에 걸 맞는 정치의식을 지니지 못하였다. 활동가의 정치간부화를 모색하고 관료제를 희석할 수 있는 윤번제, 호선제, 추천제, 등이 논의되었으나 실제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선출제는 절차적 민주주의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과두와 정파의 지배구조에 활용되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에서 당원교육과 조합원 교육에 있어 민주적이며, 자발적인 정치주체를 형성한다는 전략이 부족했으며, 오히려 산발적이고 개별화된 교육은 정파의 현장 선전과 침투 수단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활동가들은 명망가로부터 자주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대중조직과 당에서 관료로 변질되었다. 초기에는 민주노총의 정파 대립이 민주노동당에 투영되었지만 나중에는 민주노동당의 정파갈등이 민주노총 내에서 재생산되었다. 

넷째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내에서 그리고 이들 밖의 비제도권에서 양 조직의 성급한 제도화를 견제할 수 있는 급진적 주체의 형성이 미흡하였다. 민주노총 스스로 과도하게 제도화되었기 때문에 민주노동당의 의회주의 몰입을 지연시킬 제도권 밖의 역량을 구비하지 못하였다. 

민주노동당은 원내 진출 이후 자신의 우측에 민주노총, 전농, 전여농, 전빈련, 한국청년단체협의회, 한총련 등 배타적 지지의 대중단체를 포괄하였으며, 좌측에 정치투쟁전선으로서 민중연대를 포진시키고 있었다. 민주노동당은 의회에서 적극적인 제도정치 개입을 통해 대중투쟁을 지원하고 그 파급력을 최대화하면서 투쟁으로부터 얻은 제도적 성과를 다시 부문대중들과 공유하는 것을 자기활동의 방향으로 삼았다. 이러한 3자 동맹은 배타적 지지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진보적 대중정당은 대중조직과 전선체를 좌우 양날개로 삼는다”라는 자주계열 나름의 ‘양날개론’에 근거한 것이었고, 이러한 시도는 민중연대를 계승한 진보연대나 민중의 힘에서도 지속되었다.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자주계열은 민주노동당 초기에 전국연합과 통일연대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대신 평등계열과 함께 하는 대중투쟁조직으로서 민중연대 건설에 나섰지만 강령의 노선 문제, 중앙집권적 단일조직 문제, 민주노동당지지 문제 등으로 강력하고 상설적인 민중투쟁조직 즉 상설연대체로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이후 민중연대를 발전적으로 계승하려는 진보연대, 민중의 힘 등 상설연대체 시도가 있었지만 고질적인 노선 갈등과 정파적 주도권 문제로 인해 상설적인 민중투쟁조직은 갈수록 약화되었다. 이러한 제도권 밖의 대중투쟁조직의 약화는 노동자 농민 빈민 학생 등 부문조직, 당, 대중투쟁조직이라는 3자동맹의 정치투쟁의 약화로 이어졌으며, 이는 반대로 민주노동당이라는 제도권으로 대중투쟁조직이 동조화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그 결과 빠르게 제도화되는 민주노동당을 견제할 수 있는 비제도권의 역할은 실종되었다.


민주노동당 평가와 교훈

 1. 노동자당은 총연맹보다 더 빨리 우경화돼 양자의 동맹은 약화된다.

노동조합총연맹의 경우 원내 진보정당 보다 자본주의 체제 내로의 제도화가 더디게 진행되고 있어 양자의 제도화에 간격이 존재하지만 노동조합은 정당의 제도화 속도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 원내 진보정당의 우경화는 탈이념화, 탈계급화할 수 있지만 노동조합총연맹은 조합원의 이해관계가 제도화의 마지노선이기 때문에 노자대립과 친노동자성을 벗어날 수 없다. 

유럽의 경우 노동조합과 결합하고 있는 정당이 집권할 경우 보통 초기에는 소득정책이나 노동정책에 있어 공동보조를 취하지만 결국은 국제경제체제의 한계로 인해 혹은 노동계급 이외의 일반 유권자의 지지를 얻고자 노동조합과의 협약을 파기하여 긴장관계로 전환된다. 이 과정에서 정당이 노동조합으로 하여금 자본가 집단과 사회적 합의를 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노동조합의 지도부가 정당의 요구에 끌려갈 때는 노동조합 내부의 반발로 내분이 일어나기도 한다. 또한 집권한 진보정당이 다수 유권자의 지지를 얻으려고 할수록 노동조합의 요구를 부담스러워 한다. 결국 독일, 영국, 프랑스에서 보듯이 진보정당의 집권을 전후로 하여 양자의 관계는 더 이상 공식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2. 독일, 영국, 프랑스, 한국의 진보정당들은 제도화 이후 이념적으로 조직적으로 분화되며, 창당 강령을 포기하며, 의회주의에 경도돼 부르주아 정당과 연대를 강화한다. 

민주노동당으로의 통합은 합법정당노선(의회투쟁과 대중투쟁의 병행)의 수용이다. 국민참여당이 포함된 통합진보당으로의 통합은 의회주의 몰입이다. 민주노동당의 분열이나 통합진보당의 분열은 의회주의 몰입이 근본원인이며, 패권주의와 이념 논쟁은 하위 명분이다. 분당세력은 2008년 분당 이후 더욱 패권화되고 친북화된 민주노동당과의 통합,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에 동의한 것은 선거연합을 통한 총선 당선가능성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과거 역사를 보면 의석 확대 등 이해관계가 맞으면 진보정당들은 이념과 조직문화의 차이, 과거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연합할 수 있다. 


3. 민주노동당이 유럽의 진보정당 보다 더 빨리 우경화된 이유는 한반도 냉전과 분단 고착으로 인해 국민국가를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당이 아니라 농민, 민주주의, 통일운동 세력이 연합한 민중정당으로 출발하여 노동자당으로 출발한 유럽 진보정당보다 더 빨리 국민정당화 경향을 보이며 의회주의에 몰입했다. 또한 한반도 특성으로 인해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이라는 전근대적인 이념적 조직적 대립을 극복 못해 정파 간 대립이 과잉돼 있다. 국가는 국가보안법 등 냉전과 분단 유지 도구를 통해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에서 보듯이 제한적인 포섭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4. 사회주의 활동가는 총연맹과 진보정당의 우경화를 지연시키는 전략을 구사해야 하며 상대적으로 우경화 속도가 늦은 총연맹이 진보정당의 우경화를 지연시키도록 양자는 긴장적 협력관계에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는 민주노동당이 노동계급의 지지를 충분히 조직해 내지 못해 원내 진보정당으로서 충분히 성장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민주노총과의 전략적 결합이 여전히 필요한 조건에서 민주노동당이 성급하게 의회주의에 몰입하고 민주노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민참여당과의 선통합을 통해 국민정당화의 길을 재촉함으로서 양자의 관계가 파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초기에 설정하였던 양자의 동반성장은 그 방향이 옳았다고 볼 수 있다. 양자 모두 민주노동당의 조로화나 민주노총의 미성숙을 개선하여 양자의 조직적 관계를 더 연장시킬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다.

당과 노동조합은 사회변혁에 대한 공동의 이해관계가 전제되어야만 전략적인 동반자적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 또한 양자가 사회변혁에 대한 유사한 이해관계를 공유하려면 노동조합총연맹과 원내 진보정당의 제도화가 지연되거나 의식적으로 회피되어야 한다. 특히 제도화의 속도가 상대적으로 더딘 노동조합총연맹이 원내 진보정당의 제도화를 견제해야 한다. 

이를테면 민주노총은 집단입당제와 블록투표제를 통해 원내 진보정당의 국민정당화 경향을 지연시킬 수 있는 과도기적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민주노총은 단체협약 효력의 사회적 확장, 미조직노동자를 위한 사회적 의제 투쟁을 통해 전체 노동계급에 대한 대표성을 강화하고, 개별적인 단체협약에 얽매이지 않는 다양한 노동운동의 역량을 포괄하는 한편, 산별노조 건설과 총연맹의 강화를 통해 명실상부한 전국 노동운동센터로서의 위상을 확립하여 원내 의석을 확장하려는 진보정당의 강력한 동반세력이자, 비판적 견인세력이 되어야 한다.

사실 특정 노동조합의 특정 노동자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는 특수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과도적 현상이다. 영국 노동조합회의가 노동당을 창당하였듯이 특정한 경우에는 배타적 지지가 가능하다. 과거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복수의 노동자당이 병존하는 상황에서 노동조합이 특정 정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하거나 배제하면, 조합원의 다양한 정치적 성향이 충돌될 수 있으며 노동조합 내 정치적 균열을 심화시켜 대중조직의 통일성을 훼손할 수 있다.  

이러한 결론을 고려하건대 노동자자 농민 빈민의 대중조직의 강화, 이들 대중조직의 사회적 요구를 연대투쟁으로 담아내는 대중투쟁기구의 건설, 대중조직과 대중투쟁의 정치적 귀결로서 대중적인 진보정당, 그리고 그러한 당 안의 다양한 변혁주체의 형성이라는 고전적인 명제가 아직도 유효하다. 


5. 결론

부르주아민주주의가 보장된 발전된 민주주의국가에서 노동자대중의 지지를 받으려면 합법정당노선이 불가피하고 일단 제도화되면 의회주의와 우경화는 필연적이다. 따라서 총연맹과 노동자당의 우경화를 지연시키거나 최소화시켜야 한다. 총연맹은 자신의 문제를 일부 해결하기 위해 노동자당은 제3세력으로 성장할 때까지 양자는 동맹관계를 맺는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표를 흡수하기도 전에 우경화, 의회주의 몰입으로 나아갔다. 

노동자당은 민중정당, 일하는 사람의 정당, 노동자를 기반으로 하는 국민정당 순으로 우경화된다. 노동자당은 이념적 조직적으로 분열과 연합 및 통합을 반복하며 총연맹과 우경화된 노동자당 역시 동맹의 이완과 강화를 반복한다. 사회주의 세력은 총연맹과 노동자당의 우경화를 지연시켜야 한다. 또한 총연맹은 조합원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당의 우경화를 지연시켜야 한다. 

선거제도 본질은 거대양당 독점의 기득권을 고집 하냐가 핵심

김장민(정치경제학연구소 프닉스)




I. 수구보수의 집권을 보장하는 양당제를 유지할 것인가?

1. 수구보수가 주기적으로 집권하고 윤석열 같은 듣보잡 괴물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양당독점을 보장하는 선거제도 때문이다. 

집권할 수 있는 수준에서 두개의 정당만 있다면 각 정당은 30~40%의 고정층을 지니며 교차 투표하는 부동층 역시 30~40%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부동층은 책임정치와 선거심판 원리 때문에 특정정당의 독재를 용인하지 않는다. 두 정당이 괴물이라도 부동층은 번갈아가며 선택한다. 민주당 독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집권이 가능한 다른 정당은 수구보수인 국민의힘 밖에 없다. 반대로 국민의힘을 심판하려면 민주당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양당제에서는 미국과 한국에서 보듯이 두 당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돌아가면서 집권하도록 서로 협력하는 공생관계이다. 

2. 따라서 수구보수를 퇴출하려면 중도보수와 수구보수의 양당제를 다당제로 전환시켜야 한다. 하지만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주도하는 선거개혁은 어떠한 내용이라고 결론은 양당제 보장이다. 따라서 제3의 정치세력, 시민, 전문가들이 유권자운동으로서 양당제 개혁 운동을 할 때만 제대로 된 선거개혁이 가능하다.


II. 양당제 개혁의 두 가지 프로세스

1. 소선거구제를 유지하면서 양당제를 완화시키려면 이중당적을 허용하여 유럽 일부(이탈리아) 중남미 전역에서 실시하는 선거연합 즉 정당연합 제도를 보장해야 한다. 이를테면 노동당 녹색당 정의당 진보당 등 진보정당들과 제3의 대안정당을 원하는 시민정치세력이 선거연합인 정당연합을 통해 하나의 대안정당으로 뭉친다면 민주당의 한계도 드러나고 국민의힘의 한계도 드러난 후 유권자들이 이 정당을 집권가능한 제3의 정당으로 선택할 수 있다. 

2. 소선거구제를 유지하는 것과 무관하게 전면적인 비례대표제도 즉 독일식 정당명부제도를 도입한다면 정당연합을 허용하지 않아도 양당제를 완화할 수 있다. 현재 비례성을 보장하지 않는 양당제에서 특혜를 누리는 거대양당이 이제도를 도입할 리가 없다. 이 경우 정국난립을 회피하려는 적정한 진입장벽은 선택사항이다. 

3. 일부는 소선거구제, 일부는 비례성을 보장하는 현재 한국의 선거제도를 유지한다면 득표율보다 의석수가 적은 정당들의 불이익이 보상되도록 정당연합과 정당명부결합을 허용해야 한다. 정당명부결합제도가 허용된다면 3% 수준의 진입장벽이 있어도 무방하다. 프랑스처럼 광역 지방선거에서부터 정당명부결합제도를 시험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III. 현재 논의되는 선거개혁은 모로 가도 양당제 기득권 유지

1. 중대선거구제는 현재의 기초의원 선거구에서 보듯이 복수공천을 허용하면 양당제나 마찬가지이고, 복수공천을 허용하지 않으면 소수세력이 과다 대표된다. 거대양당이 선거개혁을 하라는 여론의 압력에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복수공천을 허용하는 중대선거구제를 검토하고 있다. 

정의당 현직 의원 중에서 거대양당이 복수공천을 한다면 2인 선거구에선 거대양당이 1명만 공천해 심상정 의원도 살아남기 힘들며, 3인 선거구에선 거대양당이 지역을 나눠 분할 투표를 하기 때문에 20%대의 득표율이 없는 의원은 당선될 수 없다. 그런데 과거 선거를 보면 정의당 현직 의원이 출마해 20%가 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선거구제를 한다면 복수공천하는 거대양당과 정의당 후보가 난투전을 하는 양상이 될 것이다. 설사 정의당 후보가 권역별로 당선된다고 해도 대선거구 숫자만큼의 적은 당선자가 나올 테니 결론은 역시 양당제이다. 

2. 권역별 비례대표는 1개 권역에서 비례의원이 20석(자연 진입장벽 5%) 이상 되지 않는한 결론은 양당제 유지이다. 현재대로 한다면 5대 대광역 비례대표를 하러라도 의석수가 평균 10석에 불과하므로 자연진입장벽이 10%가 된다. 10% 미만의 제3정당에게 한석 정도 적선하는 셈으로 하면 현 제도와 같은 결론이다. 

3. 문제는 비례대표의석 수를 늘리는 것과 득표율과 의석수를 어느 정도 일치하느냐이다. 현재 지역구 의원들이 비례의석수를 늘릴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결론은 양당제 유지이다. 거대양당이 득표율보다 의석수를 더 가져가는 현 제도를 고칠 의사가 없기 때문에 연동형을 거부하거나 유지한다면 어떤 형태이든 위성정당을 포기할 의사가 없다. 

4. 복수공천을 하더라도 수도권, 영남, 호남에서 5인 이상의 대선거구제를 유지하고 현 47석 비례대표 수준에서 연동율을 높이면 제3세력이 약간 숨통이 틀 수도 있다. 하지만 거대양당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이런 제도를 스스로 도입할 가능성은 매우 적다. 거대양당은 대선거구제를 하면 연동율을 최소화하여 지역구 의석 감소 이상으로 비례대표에서 의석수를 보상받으려고 할 것이다. 

사회진보연대의 노동절 유인물에 대한 비판

1. 사회진보연대는 민주노총안이 선거연합정당안이라면서 이 안이 ‘통합’만 강조했다고 하는 것은 모순된 주장이다. 한국에서 제일가는 엘리트 집단이 선거연합과 통합정당을 혼동하는 것은 미스테리다.

2. 민주노동당에서 1인 다표제를 도입한 것은 자주파가 아니라 평등파이다. 장석준 등 평등파가 주도한 당발전특위가 2003년 11월 임시대대에서 통과시킨 것이다. 

3.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 분당의 원인만 분석하고 재통합의 원인을 분석하지 않은 것은 반쪽짜리다. 아마도 사회진보연대는 서로 자주파와 평등파가 재통합한 것이 악몽이기 때문에 지우고 싶은 기억일 것이다. 

4. 자주파의 패권과 친북이 분당 원인이라면 평등파가 왜 2011년 더욱 자주파로 일색화된 민주노동당과 통합했는지 설명되지 않는다. 

5. 민주주의 원칙상 다수가 절차적 민주주의에 따라 권력을 독점하는 패권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이나 패권을 이유로 소수파인 평등파가 분당한 것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6. 소수파인 평등파는 자신의 분당을 대중에게 정당화하기 위해 패권주의와 친북을 활용했을 뿐이고 실제로 평등파 엘리트들이 분당한 이유는 소수로 전락해 국회의원이 될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7.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는 민주노동당을 패권 친북으로 낙인찍고 자신들이 분당하면 국민들이 자신들을 찍어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2008년 총선에서 참패했다. 

8. 자주파(민주노동당)나 평등파(진보신당 지도부)나 2009년 재보궐선거 이후 민주당과 선거연합을 통해 지방선거에서 대거 당선되자 민주당과의 선거연합에 동의했고, 양자는 통합 후 민주당과 선거연합을 통해 국회의원에 당선되고자 통합진보당으로 합쳤다. 민주당과의 선거연합은 자주파만의 문제가 아니다. 

9. 결국 자주파나 평등파나 분당과 통합을 되풀이하게 된 근본 원인은 국회의원 당선가능성 즉 의회주의 몰입이다. 패권주의 친북 등은 분당과 통합을 반복해 온 의회주의 몰입을 대중들에게 정당화하는 하위 명분이다. 

10. 하나의 강령을 갖는 단일정당이라면 대북문제 등 노선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지만 기존 정당을 유지한 채 합의되는 정책만을 공약을 내거는 선거연합만 한다면 북핵 문제 등 이념에 대해 합의할 필요가 없다. 

11. 선거연합당 건설을 민주노총이 대기업 정규직 노조라는 비판과 연결시키는 것은 억지이며, 최근 서비스, 민주일반연맹 등 신규 민주노총 조합원은 비정규직 중심이고 비정규직 출신 민주노총 위원장을 보듯이 이런 비난은 과장된 것이다. 

12. 민주노총 정치세력화에 대해 토론하지 말고 민주노총 혁신이나 하라는 것은 ‘어떻게 힘 있는 노동자정당을 만들 것이냐?’ 노동자대중의 진지하고 현명한 질문에 엘리트 집단의 어리석은 답변이다.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13. 정치세력화 토론의 자리에서 민주노총이 해야 할 산적한 과제를 나열하는 대목에서 어리석은 것인지 교활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경제투쟁선동으로 정치투쟁의 열기를 꺾는 반동적 선동이다. 

14. 뜬금없이 미국만 비판하지 말고 중국과 러시아도 비판하라든지, 별도의 기사에서 윤석열의 방미를 균형 있게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은 똑똑한 바보들의 판단력 혼란을 보여준다. 대중들과 동떨어진 엘리트들끼리의 지식 자랑이 얼마나 반민중적인지 알 수가 있다. 학자라면 미중러를 골고루 비판하겠지만 미국의 지배 아래 있는 분단한국의 민중이 어디를 집중 공격할지 너무나도 명백하다. 투쟁할 일도 많은데, 미국대사관 앞에서만 항의하지 말고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도 데모해야 한다는 부류들이다. 실천과 괴리된 엘리트들의 토론자랑을 민중투쟁에 관철하려는 태도이다. 

사회진보연대는 대중의 정서와 동떨어진 엘리트적 결론을 머릿속에서 미리 정해 놓는다. 이를테면 중도보수가 망해야 진보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고 본다. 민주당 비판에 열을 올리면서 윤석열과 국민의힘을 못 본 척한다. 진보가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첫째 보수양당제 때문이고 둘째 주체역량이 부족해서이지 민주당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사회진보연대는 자신들의 결론을 매우 논리적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사실과 그렇지 않은 것, 올바른 판단과 잘못된 판단을 짜깁기한다. 

사회진보연대는 민주노총을 비난하지만 수많은 활동가들이 민주노총에 생명줄을 대고 있다. 사회진보연대는 정당노선에 회의적인 단체이니 원래 노선대로 하면 민주노총의 정당건설 노선 자체에 대해 반대해야 한다. 그런데 힘 있는 노동자정당 건설에 대한 노동자대중의 정서와 자신들의 물적 토대 때문에 그럴 용기가 없다고 본다. 

4.5 재보궐선거 결과 및 평가

전주시을 강성희(진보당) 국회의원 후보가 39.07%로 7% 차이로, 진보성향의 천창수 울산교육감 후보가 61.94%로 압도적인 표 차이로, 창녕군수에 여권 후보가 난립하는 가운데 국민의힘 출신의 성낙인(무소속) 후보가 24.21%로 3% 차이로 당선됐다.

그밖에 구미와 창녕 도의원 선거에서 국민의힘 후보가 과반수 득표로 당선됐다. 기초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울산남구에서 1% 차이로, 군산에서 6% 차이로 승리했으며, 국민의 힘은 청주, 포항시에서 10% 이상 차이로 승리했다.

투표율을 보면 울산 교육감 선거는 26.5%, 전주 국회의원 선거는 26.8%, 창녕 군수선거는 57.5%이다. 도의원의 경우 창녕 59.3%, 구미 16.9%이며 기초의원의 경우 울산남구 33.8%, 충북 청주 21.3%, 전북 군산 16.4%, 경북 포항 41.8%이다.

 

1. 투표율과 득표율을 종합하여 총평하면 다음과 같다.

중간지대인 울산에서 보듯이 반윤석열 정서가 있지만 아직은 파괴력이 약하다. 반면 경남과 경북에서 보듯이 윤석열의 실책으로 인해 여권은 위기감을 느끼면서 결집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전주와 군산에서 보듯이 민주당 지지자들은 민주당에 실망해 투표장에 나오지 않거나 대안세력을 찾고 있으나 여의치 않다.

 

2. 진보정치 측면에서 평가하면 다음과 같다.

4.5재보궐선거에서 진보진영의 천창수, 강성희(진보당) 후보가 각각 울산교육감, 전주을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고 노옥희 교육감의 부군이 당선된 울산에서는 반윤석열 여론, 후보단일화, 노동자 표 결집이 승리요인이었으며, 전주에서는 진보진영의 후보단일화와 조직력 결집, 민주당 표의 분산이 승리요인이었다. 특히 전주에서 진보당 승리는 진보당 지지자를 중심으로 수개월 동안 평일 수백, 주말 천 단위 이상의 선거운동 및 선거운동 성격의 자원봉사에 힘입었다. 또한 최근 공안사건, 과거 통합진보당 해산사건을 진보당과 연결시키면서 엄청난 색깔공세를 진보당 후보에게 퍼부었지만 이를 돌파했다는 점도 유의미하다. 

이번 재보궐선거에서 진보정치가 단결한다면 비록 소선거구제라고 하더라도 양당제가 느슨해진 곳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내년 총선에서도 진보정치의 운명은 양당제를 완화시키고 연대연합을 강화하느냐에 달려 있다.

즉 비례성을 확대하는 선거법 개정 내용, 울산 북구와 동구 등 후보단일화, 정당명부 비례대표 선거연합 등에 의해 진보정당의 성적은 결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