⓺ 개신교 내 극우세력 한기총과 전광훈 목사

한국과 미국의 신구 극우세력 비교


개신교 교단, 진보에서 극우까지 포진했으나 보수가 지배적


에큐메니컬 운동은 모든 기독교 교회를 통합하자는 것으로서 1924년 발족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에서 시작되었으며, 1946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 NCCK)로 이어졌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8개의 개신교와 한국 정교회(동방기독교) 등 총 9개 교단이 가입해 있다. NCCK는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운동에 참여해 상대적으로 진보적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광복절, 제주4.3, 광주5.18 등을 기념해 대규모 합동기도회를 열고 있다. 


NCCK가 1988년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의 선언'을 통해 기독교의 반공주의를 비판하고 평화통일 운동에 기독교가 기여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보수적인 개신교 교회들이 NCCK에 반발해 1989년 월남한 개신교들을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를 출범시켰다.


한기총은 개신교 최대 규모의 연합체였으나 2012년 부정선거 등 내분이 발생하여 일부가 탈퇴해 보수적인 한국교회연합(한교연)을 창설했다. 한교연은 2017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의 통합 문제로 분규가 발생하여 한교연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탈퇴해 중도보수 성향의 한국교회총연합을 만들었다. 현재 한교총은 예장 통합, 합동, 백석, 고신, 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등 30여개 교단으로 구성돼 있으며 전체 개신교 교인의 95%가 가입돼 있다.


한기총은 전광훈이 2019년 1월부터 2020년 5월까지 회장을 맡으면서 극우화됐다. 전광훈이 극우정치에 참여하고 이단 교회를 자의적으로 이단에서 해제하자. 주요 교단들이 탈퇴했다. 이후 전광훈은 선거절차 문제로 법원에 의해 직무정지를 당했고 2022년 12월 이단으로 규정돼 제명이 추진되기도 했다. 현재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서 예장합동, 예장통합,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기독교대한감리회, 예장백석,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예장개혁, 예장고신, 예장합신, 한국기독교장로회에 이르는 교인 수 1위부터 10위까지 대규모 교단이 모두 탈퇴한 상황이다. 


한국 개신교는 진보적인 NCCK, 중도보수적인 한교총, 보수적인 한교연, 극우적인 한기총으로 분할돼 있으나 한교연과 한기총의 규모는 유명무실한 정도이다. 2023년 한기총과 한교총의 통합이 논의되기도 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개신교의 뿌리는 보수적인 미국 개신교의 선교활동


가톨릭과 달리 개신교는 19세기 말에 미국의 선교사들에 의해 전파됐다. 선교사들은 미국 개신교 중에서도 금주법 운동을 주도한 보수적인 교단에 속했다. 일제하에서 미국 선교사들은 서울과 평양에서 의료기관과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선교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등 교세를 확대했다. 평양에서 1907년 대부흥운동이 성공하면서 개신교가 널리 퍼졌으며, 이들 청년운동의 일부가 해방 후 월남하면서 서북청년단으로 발전한다. 


일본이 청나라를 조선에서 내쫓고 동학군도 진압하면서 조선 침략이 노골화되고 있을 때인 1901년 조선예수교장로교공의회가 '교회의 정부 사이에 교제할 몇 가지 조건'이라는 결의안을 통해 “교회는 나랏일을 하는 곳이 아니니, 정부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의해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기로 양측이 합의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할 때 다른 나라보다 가장 먼저 서울의 공사관을 철수하는 등 일본의 조선점령에 사실상 협력했다. 미국 선교사들도 미국 정부의 지침에 따라 정교분리, 내정불간섭이라는 미명 아래 일본의 조선 지배에 협력했다. 그나마 조선에 우호적인 선교사들도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조선인들이 미개하기 때문이고 그래서 기독교 선교와 교육으로 계몽운동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친미 이승만과 군사독재 시절에 개신교가 폭발적으로 증가


미국 개신교가 한국에서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된 것은 한국전쟁을 전후로 미국이 한국을 정치경제적으로 지배하면서부터이다. 해방 직후 미군청이 남한을 지배하면서 새로운 선교사들이 대거 입국했으며 기존의 선교사들이 조선의 실정을 잘 알고 있어 미군정에 참여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미국의 원조물자 중 상당수는 개신교 교단에 기부됐으며, 개신교는 이 물자들을 배급하면서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 또한 원조물자 일부는 교회 운영비 등 교세 확장에 사용됐다. 


미국의 지원으로 미국에서 돌아 온 감리교인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개신교도들이 주요부처를 장악했고 미국은 이들을 후원했다. 배덕만 교수에 따르면 제1공화국이 만들어질 때까지, 한국 기독교는 인구의 5%도 되지 않았지만 장관급 40%가 기독교인이었다. 미국의 원조물자가 한국경제를 지탱해주면서 미국의 국교인 기독교 역시 마치 한국의 국교인양 대접받았다. 이때 크리스마스가 공휴일로 지정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의 딱지도 떼고 미국의 환심도 살 겸 개신교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펼쳤다. 이때 이미 미국의 온갖 개신교 교단들이 한국에서 자리를 잡았다. 집회를 금지하던 유신헌법 시절인 1973년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여의도에서 100만 명을 모아놓고 한국전도대회를 열도록 허용했다. 박정희 정권은 집회 참여자에게 통행금지령을 면제해주었으며, 예배 때 경찰 군악대가 와서 연주까지 해주었다. 한국대학생선교회(CCC)를 창립한 보수적인 김준곤 목사가 주도한 '엑스플로74'에 10일간 100만 명가량이 모였다. 이 시절 개신교는 5%에서 20%로 성장했다.



개신교는 이승만, 김영삼, 이명박 등 세 명의 장로 대통령을 배출하는 등 한국의 지배집단이다. 2004년 10월 2일 방영된 KBS의 ‘한국사회를 말한다’의 내용에 따르면 상장사 기업 임원의 43%, 국회의원 중 120명이 기독교인이다.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 선교대국이다. 총 신자 수는 1200만 명이고, 교회 규모로 볼 때 세계 1 위(80만명), 2위의 교회가 모두 한국의 교회이다. 



개신교와 보수단체가 자발적인 보수 집회 개최 


2002년 당시 기독교 재단은 사립학교의 80%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을 전후로 사학재단의 부패와 특혜를 개혁하자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개신교 교단들은 거리로 뛰쳐나오고 목사들은 삭발투쟁을 감행했다. 한기총이 보수단체와 연대해 처음 대규모 집회를 한 것은 2003년 6.25 대회 때부터이다. 과거 군사정부 때 반공적인 관제데모와 달리 이들의 집회를 어느 정도 자발적이라고 봐야 한다. 


한기총이 최초로 대규모 집회를 개최한 것은 2002년 1월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평화기도회‘이다. 한기총은 2003년 1월에도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평화기도회’를 열었으나 반공, 주한미군 철수반대, 반미반대 등 보수적인 주장을 내걸었다. 이러한 대규모 집회는 2003년 3.1절 국민대회로 연결되었다. 이때 한기총은 여의도 한강 시민공원에서 10만 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구국 금식기도회’를 가졌다. 


개신교와 보수단체의 대규모 국민대회 개최 비용은 한 회당 2억~3억 수준이다. 이들은 신문광고를 통해 비용을 모금했다고 하나 실제로는 기업과 경제단체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2003년 6.25 대회 때 삼성 이 1억 원, 전경련이 4천만 원, 대한상공회의소가 3천만 원, 대한무역협회가 3천만 원을 지원하였다. 대회비용이 적자가 나자 당시 재정위원장 봉두완이 삼성의 이학수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8.15 대회 때는 경제단체들로부터 1억3천만 원을 지원 받았다. 경제단체들은 보수집회 지원뿐만 아니라 대학에 보수적이고 친자본적인 강좌를 위한 재정을 후원하고 있다. 


보수 개신교 집회 때 태극기와 성조기가 거리를 뒤덮고 이스라엘 국기도 흔히 보인다. 집회 참여자들은 한국이 이스라엘, 미국처럼 선민이라고 생각하고 반공국가, 기독교 국가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최근에는 미국의 반중국 정책에 동조하는 구호도 등장한다. 이들은 코로나를 ‘중국 우한 폐렴’이라고 부르며 중국의 실험실을 코로나의 진원지로 지적하고 중국 공산주의 정권과 거리를 두라고 정부에 요구한다. 



극단적인 행동과 주장으로 개신교 보수 집회가 분열돼


2003년 한기총과 보수집단의 공동집회에서 반공 극우세력들이 인공기를 소각하는 등 과격한 포퍼먼스를 감행하자, 자유총연맹, 대한민국재향군인회 등 관변단체들이 노무현 정권의 눈치를 보면서 8.15  ‘건국 55주년 반핵반김 국민대회’에 불참했다. 한기총 역시 교단 내부의 반발로 대회에 불참했다. 


보수집회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활발했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자 극우세력들은 활동의 동기가 약해지면서 쇠퇴해졌다. 박근혜 대통령의 집권으로 보수진영들은 거리에 나올 일이 별로 없었지만 박근혜 탄핵 이후 다시 보수진영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태극기 집회는 친박진영이 주도했는데, 보수적인 개신교 목사들은 박근혜 탄핵 반대에 직접 신도들을 이끌고 참여하지 않았지만 개별적인 참여를 독려하기도 했다. 


2016년 11월부터 박근혜 탄핵 추진에 반대하는 보수진영의 집회가 본격화됐다. 이들 태극기 집회는 박근혜가 탄핵된 이후에도 계속됐다. 이들은 박근혜 탄핵에 반대하며 2017년 대선에 조원진 후보를 내세웠으나 0.1% 득표에 그쳤다. 

2017년 대선 이후 친박진영은 정치적으로 파산되고 태극기 부대도 힘을 잃었다. 전광훈 목사 역시 기독자유당의 후원회장에 나서는 등 극우정치를 지원했으나 선거에서 참패했다. 2020년 코로나 직후 교회 예배를 통한 집단감염이 이어지자 정부는 예배를 제한했고 이에 대해 일부 교회가 반발했다. 예배를 하지 않으면 성금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전광훈 목사는 2020년 광복절에 태극기 부대와 함께 집회를 강행했다. 사랑제일교회에 대한 압수수색 결과에 따르면 전광훈 목사 측은 126만 명을 대상으로 총, 1천 3백만 건이 넘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서 광화문 집회 참석을 독려했다. 전광훈 목사는 교회 건물이 있는 재개발조합 측에 500억 원을 요구하며 건물철거에 저항하는 폭력시위를 배후조종하기도 했다. 


2020년 전광훈 목사는 한기총 회장직을 직무정지를 당했으며, 결국 사퇴했다. 한기총은 2022년 전광훈 목사에 대한 이단여부를 조사한 후 임원회의에서 제명하기로 결정했으나 여러 차례 논란 끝에 제명 조치가 완료되지 못한 상태이다. 

전쟁과 생활고에 시달린 유럽 유권자, 탈미 강조하는 극우 선택

김장민(정치경제학연구소 프닉스)


중동과 우크라이나에서 난민 양산하는 미국과 나토의 전쟁정책에 반발


유럽연합(EU) 선거에서 기존 좌우정당과 녹색당이 패배하고 극우 진영이 약진했다. 녹색당-유럽자유동맹(Greens/EFA)은 2019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71석을 얻었으나, 이번 선거에선 53석 확보에 그쳤다. 반면 유럽보수와개혁(ECR)과 극우인 정체성과민주주의(ID)는 각각 73석, 58석으로 2019년보다 총 12석 늘었다. 


각국 극우정당들이 공통적으로 내건 슬로건이 반이민이지만, 그 본질은 전쟁으로 인한 생활고이다. 극우는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난민 유입, 극단주의 테러 증가 등으로 인한 사회불안을 아젠다로 활용했다. 좌파는 생활고가 미국의 전쟁 정책으로 인한 것임을 각인시키는 것에 실패함으로써 유권자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결국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한 본질적인 원인은 경제난에 대한 각 정당의 정책에 대한 심판이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유럽에서 난민 증가, 물가인상, 고금리 등 생활고가 높아지자, 집권당에 대한 불만이 표로 나타난 것이다. 


실제로 이번 선거 직전 설문조사에서 독일의 30대 미만 젊은이들은 인플레이션(65%), 비싼 집값(54%), 노후 빈곤(48%), 사회 분열(49%), 불법이민 및 난민 증가(41%)을 현안으로 선택했다. 이밖에 고금리와 연금도 표심에 영향을 미쳤다. 생활고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좌우 정당들이 우크라이나 전쟁, 친환경 정책에 예산을 배정하는 것에 유권자들이 불만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일반 유권자들은 생활고 해결, 금리인하, 전쟁반대, 난민 유입을 막는 국경폐쇄 등을 요구하고 있다. 실제로 유럽중앙은행(ECB)이 선거 직전 6일 기준금리를 1년 11개월 만에 0.25%포인트 내렸다.



경제난 겪는 서민들 “친환경 정책은 한가로운 소리”


녹색당의 부진 역시 전쟁으로 먹고 살기 힘든데, 기후 문제, 산업전환 문제가 너무 한가롭다고 여기는 유권자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유럽 각국은 재생에너지 확대와 2035년까지 신규 내연차 판매 금지 등 친환경정책이 속도를 조절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 중단으로 가격이 치솟은 가스발전소를 폐쇄하고 원자력발전소를 늘려 대체하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농민들은 유럽연합(EU)의 친환경 규제에 항의해왔다. 경제성장 둔화, 물가 상승에 따른 생활비 위기 등으로 재정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친환경 규제, 세금 부담까지 농민의 불만이 크다.


유럽의회 선거결과가 국내 선거에 반영되면 이탈리아에 이어 프랑스와 독일에도 극우세력이 집권할 수 있다. 프랑스 집권정당인 중도우파가 패배의 충격으로 조기총선을 선언했다.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이번 선거에서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이끄는 사회민주당(SPD)을 누르고 제2정당으로 발돋움했다. AfD는 2017년 총선에서 제3정당으로 부상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극우정당이 최초로 원내에 진출했다. 



미국에 종속된 유럽공동체, 해체냐 독자노선이냐


유럽의 민심은 미국의 중동과 동유럽에서 전쟁정책 반대, 미국으로부터 거리두기, 미국을 따르는 나토와 유럽연합에 대한 실망 등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런 기조에서 프랑스의 RN이나 독일의 AfD가 이탈리아 극우정당인 이탈리아형제들(FdI) 등 전 유럽에서 독자노선이 강화될 수 있다. 


프랑스 국민연합(RN)을 이끄는 마린 르펜은 물론 극우 당선자들 중 일부는 러시아, 중국과 밀접한 사이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반대하고, EU의 국방비를 증가시키려는 미국의 정책에 저항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유럽 각국은 미중 경제전쟁에서 미국 편에 서기보다는 사안별로 중국과 협력하는 등 유럽의 이익을 추구하는 독자노선을 걷을 수 있다. 미국이 유럽연합과 나토에 계속 미국을 위한 경제정책과 안보정책을 강요할 경우 유럽공동체가 이완되거나 독자노선을  걷을 수 있다. 미국의 전쟁 정책이 유럽공동체를 위기로 몰고 가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미국의 전쟁정책 반대, 난민 유입반대라는 민중들의 주장이 극우로 평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전쟁정책으로 인한 난민 증가 반대가 극우로 볼 수 없다. 유럽의 좌파들도 일반적인 이주반대와 전쟁으로 인한 난민 폭증 반대를 구별하지 못하고 극우로 폄하하면서 유권자의 정서를 읽지 못했다. 결국 이러한 전통적인 우파와 좌파의 한계로 인해 극우가 민심을 얻은 것이라고 봐야 한다.

중국이 제국주의라는 맑스주의자, 레닌주의자에게

김장민(정치경제학연구소 프닉스 연구위원)


사상논쟁의 실천적 의의


오늘날 사회주의는 맑스주의자, 레닌주의자 이외에도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다양한 흐름을 포함합니다. 맑스주의자, 레닌주의자들은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사회주의자들과 불필요한 사상논쟁을 하지 않습니다. 실천적인 의미가 없는 사상논쟁은 반자본주의전선을 약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국제국주의자들이 동유럽에서 우크라이나 파쇼를 도구로 삼아 러시아와 대리전쟁을 하는 한편 동북아에서 대만과 한국의 도구로 삼아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전쟁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80여 년 동안 전쟁을 조성하고 있는 미국제국주의에 대한 집중적인 투쟁을  해야 하는 엄중한 시기에 자칭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제국주의의 범위를 자의적으로 확대하여 자본주의 괴수인 미국에 대한 투쟁을 분산시키고 있습니다. 


모든 사회주의혁명의 성과를 부정하고 진정한 사회주의를 구호로서 외치는 신좌파들과, 트로츠키보다 더 악의적으로 러시아혁명을 모욕하는 잡다한 트로추키주의자들이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맑스주의, 레닌주의의 개념을 멋대로 파괴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그리스공산당처럼 자칭 맑스주의자, 레닌주의자를 자칭하면서 러시아공포, 중국공포라는 제국주의 프로파겐다에 젖어 있는 서구 여론을 편승하고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집중타격을 분산시키는 것은 심각한 실천적 오류를 낳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맑스와 레닌의 기본 개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와 같은 사회구성체는 <생산양식과 경제생활이라는 토대와 그에 조응하는 상부구조>라고 규정했습니다. 즉 경제구조와 이에 조응하는 정치구조의 총합체가 사회구성체입니다. 


레닌 이전의 홉스의 제국주의론, 힐퍼딩의 금융자본론,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 로자의 자본축적론은 제국주의가 추상적인 자본주의의 구체적 형태이나 자본주의의 보편적 형태에 더해진 특수한 형태라는 점을 명확히 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반해 레닌은 제국주의가 정책이 아니라 시스템이라고 기존의 이론을 비판했습니다. 홉스나 카우츠키처럼 제국주의가 정책이라고 본다면 제국주의간의 전쟁은 정책을 변경함으로써 피할 수 있지만 시스템이라면 제국주의전쟁은 필연적이라는 것이 레닌의 요지입니다. 


레닌은 제국주의는 경제구조(상품과 자본수출, 금융자본의 우위)와 거기에 조응하는 정치구조(시장에 대한 독점적 지배, 영토식민지, 반식민지, 대리정권)의 총합체라고 규정했습니다. 이는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특수한 형태 즉 경제구조와 정치구조의 통합인 사회구성체라는 점을 명확하게 지적한 것입니다.


중국이 제국주의라는 주장의 모순


그리스공산당을 포함하여 중국이 제국주의라는 주장들은 그 근거로서 중국의 상품 수출과 자본수출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금융자본의 산업자본에 대한 우위, 금융자본의 정치 장악력, 특정 국가의 시장에 대한 독점적 지배, 경제적 착취를 강요하는 영토식민지, 반식민지, 대리정권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즉 제국주의를 금융자본과 상품자본의 수출을 통한 경제적 착취라는 경제적 측면으로만 규정합니다. 이들은 식민지적 지배에 대한 증거가 없자, 차관 등에 의한 정치적 영향력, 혹은 정치적 상호의존을 제시합니다. 


이들의 주장은 제국주의 사회구성체를 경제구조로만 보는 것입니다. 또한 식민지적 종속을 정치외교적 영향력으로 완화시키고 있습니다. 사회구성체인 제국주의를 이처럼 정책으로 보는 것은 맑스주의, 레닌주의와 인연이 없습니다.


수정주의와 기회주의에 대한 자의적 선동


수정주의란 맑스와 레닌의 기본 이론을 수정하는 것이니 그리스공산당과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기회주의란 이론 측면이 아니라 행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미국제국주의에 대한 집중 투쟁이 부담스러울 때 중국과 러시아도 제국주의라고 하면서 양비론을 취하는 그리스공산당의 형태입니다.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반공주의에 기생하면서 “나는 소련, 중국, 북한 같은 현실 사회주의국가를 진정한 사회주의라고 보지 않는다.” 고 자랑하는 우경화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전형적인 기회주의자들입니다. 반공좌파, 반북좌파라는 해괴한 단어가 나오는 것이 이런 기회주의자들 때문입니다. 


그리스공산당 기회주의의 사회적 기반과 정치적 기반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선진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들은 러시아 제국이 자신들의 체제를 전복할 것이라고 우려해왔습니다. 러시아제국, 독일제국, 일본제국과 같은 전제국가들이 합세해 서구를 점령할 것으로 걱정했습니다. 독일과 일본이 패전한 후 부르주아민주주의를 수용한 이후에는 소련에 대한 공포가 지배했습니다. 


러시아와 중국이 부흥한 이후에는 이 양국이 서구 체제를 전복할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유럽에선 이런 공포가 폭넓게 퍼져 있어 러시아와 중국을 옹호하는 정당은 부르주아선거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한국에서 북을 비판하지 않는 진보정당은 빨갱이 정당으로 찍혀 유권자에게 외면당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그리스공산당 역시 그리스에서 10% 이상, 유럽의회에서 자국의 1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기득권정당입니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각 진보정당들에게 <십자가 밟기, 러시아 밟기>가 강요되는 상황에서 양비론을 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공산당의 이론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바로 반북좌파, 반공좌파, 반증좌파, 반러좌파의 기회주의적 속성 때문입니다. 맑스는 공산당선언에서 프랑스에서 유행하는 사회주의를 상황이 다른 독일에 적용하려고한 자들에 대해 <진정한 사회주의>라고 조롱한 바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있어 미국대사관과 러시아대사관을 똑같이 항의방문하는 등 균형을 가져야 한다는 양비론자들의 태도는 러시아가 우리와 실천적인 대립이 없다는 점에서도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조롱받을 일입니다.


철학의 기본 개념과 맑스주의를 왜곡하는 양비론자들


제국주의라는 사회구성체 개념은 5가지의 정치적 경제적 표지(속성)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중 한두가지 표지만 지녔다면 제국주의적 속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지만 제국주의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개념과 표지, 존재와 속성을 혼동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양비론자들은 철학의 기본개념도 왜곡하고 있습니다.


맑스와 레닌은 자신의 이론이 경제주의, 경제결정론으로 환원되는 것에 결사코 반대했습니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경제구조로만 파악하여 사회구성체를 경제개념으로 축소시키는 것은 맑스나 레닌과 무관한 이론입니다. 하지만 이런 양비론자들이 항상 맑스와 레닌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이론이 정통인 것처럼 대중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동유럽과 중동의 열전, 동북아의 저강도 전쟁, 3차 대전의 가능성은?

김장민(정치경제학연구 프닉스 연구위원)


1. 3차 대전이 시작됐나?




1) 미국을 정점으로 유럽의 나토, 중동의 이스라엘, 아시아의 한일과 호주 등이 한미일, 오커스, 쿼드 등으로 제국주의 동맹이 사실상 완성됐다. 이에 대항하는 북러, 북중을 중심으로 북중러와 이란이 대항동맹을 형성하고 있다. 




2) 동유럽과 중동에서 열전이 시작됐고 대만과 한반도에서 저강도 전쟁이 진행 중이다. 미러는 냉전이 아니라 우크라이나에서 열전의 대리전쟁을 하고 있으며, 나토개입에 따라 러시아는 전술핵 발사 훈련을 하고 있다. 미중은 경제전쟁 중이며, 대만과 남중국해에서 저강도 전쟁 중이다.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의 지시에 따라 토머스 파고 태평양 사령관과 미 국방부 작전 담당관들이 ‘작전계획 5030’을 수립했다. 작계 5030’은 저강도 전쟁계획으로서 전쟁 상황을 수시로 조성하여 적국의 자원을 고갈시키는 내용이다. 사전예고 없는 대규모 군사훈련 역시 북의 전면적인 대응태세를 유도하여 체제 피로도를 증가시키는 방법이다. 




또한 비공식적으로 영해와 영공을 침범하여 적국을 자극하여 우발적인 충돌을 유도한다. 공식적으로 미군이 정찰기와 전략무기를 적국에 근접시켜 레이더, 전투기 등 전쟁자원을 소모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베트남 통킹만 총격 사건,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정찰기 EC-121 격추 사건., 고고도정찰기 SR-71 격추 실패 사건, 스텔스기 F-117과 F-22의 북 영공 침범 사건 등 전쟁을 유발하는 침략행위를 포함한다. 




최근에는 금융시스템 등 해킹. 반체제 정보 살포, 사회불안 조장 등이 추가되고 있다. 쿠바 출신 미국인을 동원하여 주요시설 파괴, 유원지에서 무차별 테러 등을 자행한 사보타지가 쿠바 요원 르네 곤잘레스에 의해 발각됐다. 




3) 죠티브라가 지적했듯이 2차 세계대전은 1938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과 체코 점령 및 폴란드 분할 이전에 이미 1936년 스페인 내전, 1931년 일본의 만주 점령에서 시작됐다(20231105). 대만, 남중국해, 코리아반도에서 열전이 발생해 제3차 대전이 본격화되면 역사는 그 시발점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기록할 것이다. 




2. 냉전인가 열전인가?




미러는 열전 중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미중러의 글로벌 분업은 파탄나고 있다.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은 상대방의 국경에서 전쟁을 일으킨 적이 없다. 중동에서 미국의 대리정권과 반미이슬람 진영이 열전 중이다. 미중은 경제전쟁을 매듭짓지 못했으며, 대만과 남중국해에서 군사대치 즉 저강도 전쟁 중이다. 




코리아반도는 한미일의 대규모 침공훈련으로 재래식 전쟁의 위험이 높아지고 있으며, 이에 대응하여 북이 한미일을 겨냥하는 다양하고 고도화된 전략핵, 전술핵 미사일을 대량으로 공탄 발사하고 있다. 북은 미국 본토, 괌과 하와이, 주일미군기지, 용산, 계룡대, 미군기지, 항만과 공항, 항공모함을 모의 타격하고 있다. 한미는 이러한 공탄에 대해 즉각 발사원점을 타격하는 보복훈련을 하고 있다. 






현재 상태는 동유럽에서 열전이 시작하여 중동으로 파급됐고 동북아에서 저강도 전쟁 중이므로 미소의 냉전보다 훨씬 심각하다. 






1. 3차 대전이 시작됐나?




1) 우크라이나 전쟁은 핵무기 시대에 핵을 사용하지 않는 세계대전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핵무기 시대에 세계대전은 섬멸전이 아니라 소모전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미국을 정점으로 유럽의 나토, 중동의 이스라엘, 아시아의 한일과 호주 등이 한미일, 오커스, 쿼드 등으로 제국주의 동맹이 사실상 완성됐다. 이에 대항하는 북러동맹, 북중동맹을 중심으로 북중러와 이란이 대항동맹을 형성하고 있다. 




2) 동유럽과 중동에서 열전이 시작됐고 대만과 한반도에서 저강도 전쟁이 진행 중이다. 미러는 냉전이 아니라 우크라이나에서 열전의 대리전쟁을 하고 있으며, 나토개입에 따라 러시아는 전술핵 발사 훈련을 하고 있다. 미중은 경제전쟁 중이며, 대만과 남중국해에서 저강도 전쟁 중이다. 작계 5030’은 저강도 전쟁계획으로서 전쟁 상황을 수시로 조성하여 적국의 자원을 고갈시키는 내용이다. 사전예고 없는 대규모 군사훈련 역시 북의 전면적인 대응태세를 유도한다. 또한 베트남 통킹만 총격 사건,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정찰기 EC-121 격추 사건., 고고도정찰기 SR-71 격추 실패 사건, 스텔스기 F-117과 F-22의 북 영공 침범 사건 등 전쟁을 유발하는 침략행위를 포함한다. 




3) 죠티브라가 지적했듯이 2차 세계대전은 1938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과 체코 점령 및 폴란드 분할 이전에 이미 1936년 스페인 내전, 1931년 일본의 만주 점령에서 시작됐다(20231105). 대만, 남중국해, 코리아반도에서 열전이 발생해 제3차 대전이 본격화되면 역사는 그 시발점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기록할 것이다. 




2. 냉전인가 열전인가?




현재 상태는 동유럽에서 열전이 시작하여 중동으로 파급됐고 동북아에서 저강도 전쟁 중이므로 미소의 냉전보다 훨씬 심각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핵무기 시대에 핵을 사용하지 않는 세계대전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러는 열전 중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미중러의 글로벌 분업은 파탄나고 있다.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은 상대방의 국경에서 전쟁을 일으킨 적이 없다. 중동에서 미국의 대리정권과 반미이슬람 진영이 열전 중이다. 미중은 경제전쟁을 매듭짓지 못했으며, 대만과 남중국해에서 군사대치 즉 저강도 전쟁 중이다. 




코리아반도는 한미일의 대규모 침공훈련으로 재래식 전쟁의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 이에 대응하여 북이 한미일을 겨냥하는 다양하고 고도화된 전략핵, 전술핵 미사일을 대량으로 공탄 발사하고 있다. 북은 미국 본토, 괌과 하와이, 주일미군기지, 용산, 계룡대, 미군기지, 항만과 공항, 항공모함을 모의 타격하고 있다. 한미는 이러한 공탄발사에 대해 즉각 발사원점을 타격하는 보복훈련을 하고 있다. 


가자 전쟁과 세계대전의 위험

김장민(정치경제학연구소 프닉스)



I. 중동문제


1. 오늘날 중동의 탄생


오스만 제국(1299년~1922년)은 튀르키예의 전신으로 중동은 물론 스페인, 헝가리, 그리스, 알바니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 중부유럽까지 지배해왔다.  이에 오스만 제국은 제1차 대전에서 독일을 도와 1853년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에게 빼앗긴 지역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1차 대전 당시 중동을 점령한 영국은 오스만 제국을 분열시키기 위해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여러 민족들에게 “영국에 협력하면 전쟁 후에 독립시켜 주겠다”고 약속하고 이들 민족의 반란을 유도하였다. 이슬람의 성지인 아라비아 반도의 왕족들은 자신들이 술탄이 되어야 한다고 봤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갈구하였다. 

영국은 무함마드의 고향인 아라비아의 이븐 사우드를 오스만제국의 술탄에 대항하는 종교적 지도자인 칼리프로 만들고자 하였다. 1916년 메카의 샤리프는 영국군의 지원 아래 아라비아 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을 몰아내고, 자기 자신을 헤자즈의 왕으로 선포하였다. 헤자즈 왕국은 1920년 세브르조약에 의해 독립을 인정받았다. ‘네지드 술탄국’을 세운 이븐사우드는 1925년 헤자즈 왕국까지 정복하고 1926년 ‘네지드-헤자즈 왕국’을 세웠다. 이븐사우드는 1927년 제다 조약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승인받았는데 이 나라가 사우디아라비아이다. 

1920년 세브르 조약에 따라 오스만 제국은 해체되어 소아시아와 유럽의 일부를 포함하는 지금의 터키로 축소되었다. 아라비아와 이집트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고 모로코와 튀니지는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다. 지중해 동쪽 지역은 영국과 프랑스가 분할하여 점령하였다. 영국 위임통치령은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에 설치되고 프랑스 위임통치령은 시리아 및 레바논에 설치되었다. 이밖에도 프랑스는 마라슈, 우르파, 안테플 등을, 이탈리아는 아나톨리아 남서부를 차지하였고 아르메니아는 독립하였지만 터키의 침공을 받은 후 소련에 복속되었다.

오늘날의 터키 ·이라크 ·이란에 걸친 쿠르디스탄 지역에 거주하던 쿠르드족은 세브르조약으로 자치정권이 약속되었으나 로잔조약으로 자치권이 취소되었다. 쿠르드족에 대한 독립 약속이 이행되지 않자 쿠르드족은 독립을 요구해왔다. 

그리스는 세브르 조약에 반대하면서 터키를 침공하였지만 1922년 케말 파샤가 그리스 군대를 격파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1923년 영국과 터키가 로잔 조약을 통해 오늘날의 터키 영토를 확정함으로써 세브르 조약의 효력이 다시 인정되었다.



2. 영미의 중동석유 장악


20세기 동안 석유자원을 지배해 온 British Petroleum의 모태는 1886년 인도의 유전을 개발하기 위해 설립된 영국의 랑군오일(Rangoon Oil)이다. 1908년 영국의 지질학자가 이란에서 유전을 발견하자 이란 군주 모하메드 알리 샤는 영국에 개발권을 주었다. 영국은 1919년 이란을 러시아혁명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보호령으로 삼았다. 영국은 1920년대 이후 이란의 원유를 100% 독점하는 대신 수익의 14%를 이란에게 주었다.

마이클 오렌(Michae Oren, 2007)에 따르면 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오스만 제국과 무역을 해왔다. 또한 미국은 선교사를 파견하여 병원을 건설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왔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윌슨대통령은 1차 대전 당시 의회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동맹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에 대해서는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 

1928년 사우디에서 석유탐사가 시작됐을 때 압둘 아지즈 알사우드 국왕은 석유개발권을 미국 회사들에게 주었다. 알사우드 국왕은 1933년에는 미국의 석유 회사에게 전국의 석유 개발권을 부여하였다. 루스벨트대통령은 1945년 2월 얄타회담을 끝내고 수에즈 운하 근처의 미국 호위함 쿤시호에서 압둘 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국왕과 정상회담을 열었다. 이 회담에서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영국에서 완전히 독립하도록 지원하기로 하였고, 그 대가로 영국 대신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유를 제공받기로 하였다. 미국은 사우디에게 45%의 수익을 주었다. 알사우드의 후임자들도 이러한 노선을 계승하여 이집트의 사다트와 함께 친미, 친이스라엘노선을 따랐다.  

1949년 미국 연방통상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카르텔 기업들 일곱 자매가 미국과 공산권을 제외한 세계 석유 자원의 82%, 생산의 80%, 시설의 76%를 장악하였다. 이들 석유 대기업은 1960년대에 원유가격을 좌지우지하면서 세계 석유의 85%를 장악하였다. 



3. 이슬람에 대한 분열정책


미국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제국은 유라시아제국이다. 서방은 유라시아 제국을 건설한 흉노족, 몽고족, 이슬람의 침략을 받아왔다. 서방의 최대 목표는 중국, 러시아, 이슬람 세력이 유라시아 제국을 건설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중동에서 자신들에게 도전할 수 있는 거대한 이슬람제국의 탄생을 막는 것이었다. 서방과 백인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은 수니파(Sunni)와 시아파(Shia)의 대립을 격화시켜 이슬람을 분열시키고 있다. 

시아파가 집권한 이란, 시리아는 러시아와 가깝다, 시리아 내전, 리비아 내전, 예멘 내전은 미국과 러시아의 대리전, 사우디와 이란의 대리전 양상을 띠고 있다. 미국은 시리아 사태에서 보듯이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뿐만 아니라 중동 각국에 산재해 있는 쿠르드족의 독립 문제를 중동의 분열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미국은 종파갈등 이외에도 이슬람의 세속주의와 근본주의의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 미국은 사회주의나 세속적 민주주의에 대응하고자 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을 지원하는 등 이슬람근본주의를 활용하였다. 터키와 사우디는 오스만제국 시절부터 대립관계에 있었으며, 수니파 내부의 주도권 싸움을 하고 있다. 같은 근본주의 국가이자, 신정국가인 수니파 사우디 왕정과 시아파 이란 공화국의 대립 역시 중동을 분열시키는 중요한 이유이다. 

최초의 이슬람 테러조직은 미국에 의해 양성되었다. 카터 대통령은 CIA의 아프가니스탄 공작을 승인하였다. 미국은 반군들에게 월급을 주고 스팅어 미사일 등 중무기의 훈련까지 시켰다. 이때의 이슬람반군들이 무자헤딘이고 탈레반이다. 오사마 빈라덴은 사우디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가서 CIA의 지원을 받으며 내전에 참전하였다. 

1989년 소련이 물러난 후 친소정권이 붕괴하자 이슬람 세력들은 내전에 빠졌고 결국 1996년 탈레반이 정권을 잡았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끝난 후 자신들이 반군에게 준 중무기들을 다시 사들였지만 그 일부는 이슬람 무장조직에게 넘어갔다. 현재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통해 이슬람국가에 대한 자신의 개입을 정당화하고 있다. 미국은 이슬람 국가들로 하여금 이슬람 테러조직을 소탕하게 함으로써 이슬람간의 대립을 구조화시키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이 새롭게 네이션 빌딩을 한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정부 역시 이슬람 테러조직 소탕에 참여하고 있다. 

오사마 빈라덴 등 사우디의 급진 이슬람세력이 아프가니스탄의 내전이 끝난 후 사우디아라비아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당시 미군은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사우디에 주둔하고 있었다. 사우디의 급진 이슬람세력의 입장에선 이슬람의 성지인 사우디에 미군이 주둔하는 것은 아프가니스탄에 소련군이 주둔하는 것보다 더 큰 치욕이다. 결국 이들은 사우디에서 미군을 상대로 테러를 하기 시작하였다. 오사마 빈라덴 역시 미군에게 월급과 무기를 받던 전사들을 다시 모아 전 세계에서 미국을 상대로 하는 성전을 전개하였다. 



4. 중동 친미 국가들의 유래 


이란 왕조는 1차 대전에 이어 2차 대전에도 중립을 선언했으나 연합국에 점령됐다. 왕조를 간신히 유지한 이란의 팔레비는 1950년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였다. 1953년 미국은 전제군주제를 원하는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Mohammed Reza Pahlevi) 왕을 회유하여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이란의 모사데그 정부를 전복했다. 1958년 군주제를 타도하고 집권한 이라크의 카심은 이란, 터키, 파키스탄 등과 함께 참여했던 반소동맹에서 탈퇴하고, 소련으로부터 무기를 도입하였다. 카심이 원유 국유화를 추진하자 CIA가 1963년 이슬람 사회주의 정당인 바트(Baath)당의 친미쿠데타를 지원하여 카심을 몰아냈다.

바트당 출신의 수니파였던 후세인은 이란의 이슬람혁명이 국내의 시아파에게 확산되는 것을 막고자 미국의 지원 아래 1980년 이란을 공격하였다. 미국, 영국, 프랑스가 이라크에게 지원한 무기 중 생화학무기의 원료도 포함되었다. 1991년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점령하고 사우디를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 후세인이 친미국가들을 무력화시키고 석유를 통제하는 한편 자신을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적하는 이슬람 지도자로 부상시키고자 하였다. 미국은 후세인의 의지를 꺾기 위해 이라크를 침공하여 걸프 전쟁이 발생하였다. 미국은 시아파가 다수인 이라크에 이란의 시아파 회교혁명이 확산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따라서 미국은 수니파인 후세인이 이란을 계속 견제해주길 원하였기 때문에 후세인과 협상하여 전쟁을 중단하였다. 

2003년 미국은 대량살상무기의 개발을 저지한다는 명분으로 이라크를 다시 침공하였다. 미국은 2006년 후세인을 교수형시키고 시아파 친미정권을 세웠다. 미국은 2011년 철군하였으나 이후 이라크 정부가 쇠약해져 IS가 득세하자 2014년 다시 파병하였다. 그런데 시아파 이라크 정부는 미국의 직접적인 지배에서 벗어나자, 같은 시아파인 이란과 관계개선에 나서고 있다. 

1956년 쿠데타로 대통령이 된 나세르는 미소 등거리정책을 하고 알제리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등 독자노선을 걸었다. 1970년 나세르가 갑자기 사망한 이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사다트 대통령은 1976년 소련과의 우호조약을 파기하고 소련 기술자들을 추방하였으며 친미노선으로 전환하였다. 그는 1977년 이스라엘을 방문하였으며 카터 대통령의 중재를 받아들여 시나이 반도를 돌려받고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었다. 1977년 사다트는 IMF의 요구대로 빵 보조금을 폐지하였으나, 폭동이 발생하였다. 사다트는 혼란 끝에 이슬람 극단주의자에 의해 암살되었다. 1981년 대통령이 된 무바라크는 2011년 민중봉기로 퇴임할 때까지 사다트의 노선을 승계하여 친미, 친이스라엘 정책을 추진하였다.

사우디는 한편으로는 미국의 압력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이란을 견제하려는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는 등 이중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5. 테러와의 전쟁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문명충돌


수백 년이라는 미래를 놓고 보면 인종간의 경제적 차이는 줄어들고 패권은 인구의 규모로 정해질 가능성이 높다.  2015년 미국의 여론조사기관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가 발표한 보고서 「세계 종교의 미래」에 따르면 기독교인에 대한 무슬림의 비중은 20세기 초에 1/3, 1970년대에 1/2이었지만 2010년에 76%까지 따라왔다. 지금과 같은 속도라면 무슬림과 기독교인은 2050년 28억과 29억으로 비슷해지지만, 2100년 전 세계 인구 중 무슬림이 35%로 기독교인보다 1% 더 많아진다. 

또한 기독교인 중 사하라 사막 남쪽의 아프리카인의 비중은 2010년 24%에서 2050년 38%로 높아진다. 반면, 20세기 초반 세계 기독교 인구의 과반을 차지했던 유럽인의 비중은 2010년 26%로 떨어진 데 이어, 2050년에는 16%까지 하락한다. 호주, 프랑스, 영국에서 기독교인의 비율이 50% 아래로 떨어질 전망이다. 반면 무슬림이 절반 이상인 나라는 2010년 49개국에서 2050년 51개국으로 늘어난다. 

유럽에서 무슬림 인구 비중은 2010년 5.9%에서 2050년 10.2%로 예상된다. 이런 속도로 간다면 몇 백 년 안에 유럽도 무슬림이 다수가 된다. 더구나 기독교인이 압도적인 유럽과 미국에서 무종교인이 다른 지역보다 빨리 늘게 된다. 그나마 미국인의 기독교인 비율이 2010년 78%에서 2050년 66% 수준을 유지하나 인구학적으로 보면 유색인종 기독교인의 증가에 따라 이 정도 수준을 유지하게 된다. 

기독교는 개종인구에 있어서도 무슬림을 따라 잡을 수 없다. 무슬림은 자신의 종교에 대한 충성심이 높기 때문에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 경우가 드문 반면, 기독교인은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2010년부터 2050년 사이에 전 세계에 걸쳐 약 4천만 명이 기독교로 종교를 바꾸는 반면, 1억600만 명이 기독교를 떠날 것으로 예상됐다. 

기독교의 운명은 인구가 증가하는 아프리카와 무종교인이 많은 중국의 종교 판도에 따라 결정된다. 특히 무슬림과 기독교인은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에서 충돌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지역은 인구변화, 종교변화가 가장 큰 지역이지만 종족갈등 역시 심각하기 때문에 종교와 종족 문제가 얽혀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인구학적으로 본다면 백인의 패권은 불가능해지고, 기독교의 패권은 아프리카와 중국에 대한 선교에 의해 그 운명이 정해진다. 현재 조건이 유지된다면 세계는 무슬림이 지배하게 되는 셈이다. 같은 연장선에서 백인들의 출산율이 낮기 때문에 인구학적으로 백인의 지배도 종식될 것으로 보인다.



II. 팔레스타인 문제


1. 이스라엘은 왜 미국의 보배인가?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의 충돌을 일으켜 서방이 중동에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고 있다. 즉 이슬람제국이 건설되지 못하도록 서방이 중동의 중앙에 ‘알박기’를 함 셈이다.

유대인은 유럽에서 차별받고 있었으나 상공업의 발전으로 유대인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유대인 문제가 주목받았다. 나폴레옹은 1799년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들을 위한 나라를 건국하자는 제안을 했다. 1894년 프랑스에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으로 유대인들이 이상향 건설을 염원하게 됐다. 오스트리아 태생 유대인 작가 테오도어 헤르츨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의 국가를 세운다는 기치 아래 1897년 바젤에서 제 1차 시온주의 세계 대회를 열었다. 

빅토리아 여왕과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 역시 시온주의를 지지한 적이 있다. 오스만 제국 말기 팔레스타인 인구 50만 명 중 유대인들은 2만 명에 불과했다. 러시아 제국에서 포그롬(유대인 박해)이 일어나자 유대계 러시아인들 소수가 이스라엘로 귀화하면서 첫 알리야(가나안으로의 귀환)가 시작되었다.

1차 대전 중 중동을 점령한 영국의 처칠은 남시리아 지역을 요르단을 기준으로 분할하였는데 그 서쪽 지역이 오늘날 팔레스타인이다. 그런데 영국은 1915년 맥마흔 선언을 통해 이 지역을 아랍인에게 돌려줄 것을 약속하였는데, 동시에 1917년 벨푸어 선언을 통해 유대인들이 이 지역에서 국가를 건설하도록 허용하는 약속을 하였다. 

1922년 팔레스타인 지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유대인은 약 8만 명으로 무슬림의 1/7에 불과하였으나 점자 유대인의 이민이 증가하였다. 2차 대전 직후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날 때까지 이 지역에서 아랍인의 반란이 자주 발생하였다. 영국은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유대인을 2만 명 이상의 하가나(Hahagana)라는 방위조직으로 무장시켜주었다. 따라서 아랍인과 유대인 간에 무력충돌이 발생하였다. 

1947년 유엔은 이 지역을 아랍인 지역, 중간지대, 유대인 지역으로 분할하였으나 아랍인들이 반발하였다. 유엔의 결정 이후 전 세계의 유대인들이 시온주의에 근거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에 공동체 사회를 건설하려고 몰려들었다. 홀로코스트가 세상에 알려진 후 반유대주의는 약화되었는데,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건국과정에서 이를 적극 활용하였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이로 인한 팔레스타인 문제로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5개국 아랍 연합군과 이스라엘 간에 벌어졌다. 미국은 전쟁 초반에 유대인의 정착촌이 소비에트와 유사하다고 보아 이스라엘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련이 이스라엘을 반영국 국가로 만들 수 있다는 희망에서 체코를 통해 이스라엘에 무기를 지원하였다. 초기에는 이스라엘이 고전하였으나 스웨덴의 중재가 있는 동안 미국이 입장을 바꿔 이스라엘에 무기를 지원함으로써 전세가 역전되었다. 

1956년 제2차 중동전쟁은 수에즈운하를 지배하려는 영국과 프랑스의 사주를 받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수에즈운하를 점령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은 프랑스에게 핵무기 기술을 전수받는 대가를 얻었다. 이어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를 침공하였지만 미국이 이집트의 편을 들면서 중재하였다. 수에즈 전쟁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미국에 종속됐다. 1979년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국교를 정상화함으로써 수에즈 운하에 대한 이집트의 소유권은 확립되었다.

제3차 중동전쟁 중인 1967년 6월 8일 미 해군 6함대 소속 정보수집함 리버티호가 이집트 연안 공해상에서 1시간 이상 이스라엘 전투기의 폭격과 어뢰정의 공격을 받고 침몰, 34명이 죽고 172명이 다쳤다. 비행기로 10분 거리에 있는 항공모함 사라토가호와 아메리카호가 이스라엘의 전투기와 함정에 보복공격을 하려고 하였으나 존슨 대통령이 중단 명령을 내렸다. 1977년 비밀 해제된 CIA보고서에 따르면 다이얀 이스라엘 국방장관이 다른 장군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리버티호를 침몰시키라고 명령하였다. 미국 선박임을 알고 공격을 거부하였던 이스라엘 전투기 조종사는 명령불복종으로 구금되었다.

이 사건은 미국이 이스라엘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잘 보여주었다. 미국은 우방국인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또한 그 당시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수출 금지를 해제할 예정이었는데, 미국 정부는 이 사건으로 무기 수출이 무산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카터 대통령 시절에 미국과 유가족에게 600만 달러를 보상하기로 합의하였다. 

사다트 대통령은 1973년 시리아 등 아랍국들과 연합군을 구성하여 이스라엘이 점령한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을 침공하여 4차 중동전쟁이 발생하였다. 초기에 이스라엘이 밀렸지만 미국이 포위된 이스라엘을 도우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소련은 이집트를 지원하였다. 미국은 봉쇄된 이스라엘을 위해 5,000번이 넘는 항공운송 작전을 폈다. 이스라엘군이 수에즈 운하까지 점령하려고 하자, 미소는 직접적인 전쟁 위기에 직면하였다. 전면전을 우려한 미소가 유엔을 통해 중재안을 관철시켜 전쟁은 중단되었다.



2. 팔레스타인 문제


팔레스타인은 요르단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로 구성됐다. 1848년 이스라엘 독립전쟁 직후 아랍연맹에 의해 팔레스타인 정부가 수립됐으나 1967년 6일 전쟁 당시 이스라엘은 서안 지구 및 가자 지구를 병합했다. 1988년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야세르 아라파트가 알제에서 팔레스타인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안에는 아라파트가 주도한 파타(팔레스타인 민족해방운동)와 하마스 등 여러 정당과 단체들이 있다. 아라파트 이후 하마스가 PLO에서 다수파가 됐다.

1993년 오슬로 협정(Oslo Accords)에 따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5년 내 팔레스타인 국가를 수립하기로 양측이 합의했다. 1995년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극우파에 의해 암살되고 1996년 하마스의 자살폭탄 공격이 발생하면서 추가적인 이행협상이 진행되지 못했다. 1996년 이스라엘 총선에서 베냐민 네타냐후가 총리로 당선되면서 미국의 압력에 의해서 평화협정에 서명하였으며, 이 때문에 그는 총리직을 사임하게 된다. 2009년 네타냐후가 다시 총리로 복귀하며, 평화협정 이행을 사실상 거부했다. 

2012년 11월 29일,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의 지위를 표결권 없는 옵서버 `단체(entity)'에서 옵서버 `국가(state)'로 격상하는 결의안을 표결에 부쳐 통과시켰다. 2024년 4월 19일 유엔에서 알제리에 의해 '옵서버 국가' 지위에 있는 팔레스타인에 대해, 정식 회원국 가입을 권고하는 결의안이 안보리에 제출돼 이사국 15개국 중 일본을 포함한 12개국이 찬성했으나 영국과 스위스가 기권하고 미국이 거부권을 행사해 부결됐다. 미국은 헤즈볼라뿐만 아니라 하마스에 대해서도 테러조직으로 규정해 제재하고 있다. 미국은 유엔이 결정한 2개의 국가방안을 형식적으로 지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우위가 확보된 이후 2개의 국가안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 미국의 태도 변화가 없는 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할 가능성이 없다. 

팔레스타인은 현재 유엔 회원국 136개국으로부터 승인받았다. 팔레스타인국은 대통령과 수상의 이원집정부를 채택하고 있다. 2005년 대통령선거에서 파타당 후보가 67%를 얻으며 압승했다. 하지만 2006년 총선에서 하마스당이 44%를 얻으며 파타당을 3% 차이로 승리했으며, 특히 가자지구에서 압승했다.

파타는 2개 국가안을 찬성하는 온건파로서 정교분리의 세속주의 노선이다. 반면 하마스는 수니파 이슬람주의 및 민족주의 정당이자자 준군사조직이다. 하마스는 양국안에 반대하고 이스라엘을 축출하고자 하며 이슬람국가로서 정교일치를 주장한다. 하마스는 1987년 결성돼 이스라엘에 대한 무장투쟁을 전개한 결과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PLO와 이스라엘은 206년 총선을 무효로 선언했고 팔레스타인 국가가 파타가 지배하는 서안지구와 하마스가 지배하는 가자지구로 분단됐다. 분단 이후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에 대해서는 정착촌을 철수시키고 장벽을 설치해 봉쇄했다. 이후 무력충돌이 계속되고 있다. 



3. 가자 전쟁의 배경과 제5차 중동전쟁가능성


하마스 특공대 500여명이 공중침투해 이스라엘의 방벽을 무력화하였으며 인질 220명을 가자지구로 압송했다. 이스라엘이 공식 발표한 하마스의 공격으로 사망자는 1200명이며 민간인이 대부분이다. 하마스는 지금까지 가장 큰 피해를 주면서 이스라엘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하마스는 상비군 2만, 예비군 2만 수준이다. 이스라엘은 예비군까지 35만명을 동원했다. 2024년 1월 말 기준으로 개전 이후 팔레스타인은 2만8천여명이 사망했으며 이스라엘 군인이 219명 사망했다. 4차 중동전쟁에서 2600명의 이스라엘 군인들이 사망했다. 

가자 전쟁의 근원은 미국의 중동지배전략과 그에 기생하는 이스라엘 때문이다. 현상적인 배경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고사 작전에 대한 저항, 미국 - 이스라엘 - 파타 등 지배질서에 대한 도전과 하마스 위상 강화, 이스라엘 감옥에 갇혀 있는 5천5백명의 팔레스타인 정치범(아동 수감자 113명 포함)과 인질의 교환 등이다. 

미국이 주도하여 2020년 에이브람 협정을 통해 이스라엘이 아랍에미리트(UAE) 및 바레인과 외교관계 정상화를 위한 협정에 서명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와도  같은 협정을 추진 중이다. 이스라엘이 중동국가와 관계정상화를 하면 이란, 하마스가 더 외교적으로 고립되므로 중동에서 반이스라엘 전선을 재구축해야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미국이 강경 대응할 수 없고 미국과 대립 중인 러시아와 중국의 측면 지원을 기대한 부분도 있다. 

전쟁이 확전된 것은 현재 이스라엘의 파시스트이자, 시온니스트 네타냐후 정권이 사법부를 탄압함으로서 사상 최대의 반정부집회로 실각할 우려가 높자 내부 단결을 위해 강경책을 쓰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의회 120석 중 네타냐후 집권당은 32석에 불과하여 극우정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여론은 초기 하마스 응징을 지지했으나 인질 석방이 늦어지고, 팔레스타인 측 피해가 커지면서 국제사회의 비난이 거세지자 기습공격을 막지 못한 정부의 책임을 규탄하고 전쟁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는 정권유지를 위해 전쟁을 유지할 필요가 있으나 국내외 여론과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국과의 경쟁에 주력하고자 하는 미국의 반대로 중강도의 전쟁을 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보복 수준이 아닌 하마스 섬멸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적군과 민간인이 섞여 있을 때 적으로 간주해 공급할 수 있도록 교전규칙을 완화시켰다. 하마스는 가자지구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집권세력이며, 이슬람 근본주의와 반 이스라엘 정서를 토대를 한다. 따라서 하마스 근절은 이스라엘이 실현할 수 없는 목적이다. 극우파들은 가자지구의 마지막 하마스 근거지인 라파지역을 공격하길 원한다. 

확전은 서안지구, 레바논, 이란, 타 중동국가로 나눠 볼 수 있다. 가자전쟁은 비국가단체인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으로 시작됐고 역시 비국가단체인 레바논의 헤즈볼라와의 전쟁으로 확대됐다. 헤즈볼라는 레바논 정규군을 능가하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의회 30석 중 11석을 차지하고 있다.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이란은 드론 185기, 순항미사일 36시, 지대지미사일 110기를 동원해 이스라엘을 공습했다. 이란은 탄도미사일을 3천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2천 킬로가 넘는 사거리로 인해 중동전역을 사정권으로 하고 있다. 이란은 친이란 무장세력에게 드론과 미사일을 제공하고 있으며, 러시아 및 중국과 합법적인 미사일 부품 및 기술 거래를 하고 있다. 이란과 이스라엘이 서로 본토를 공격함에 따라 중동에서 그림자 전쟁, 대리전쟁에서 국가 간 전쟁으로 비화됐으나 양측 모두 확전하지 않고 있다.

이란은 경제 제재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고 장기적으로 핵개발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지금 당장 이스라엘과 전면전을 할 생각이 없다. 다만 레바논와 시리아, 예맨의 친이란 무장단체를 통해 이스라엘과 대리전쟁을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 이란이 서방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기 위해 직접 혹은 예멘의 무장단체를 통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면 유가 폭등이 예상된다. 

서안지구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가자지구에서 전쟁이 발발한 뒤 여러 차례 파업에 나선 바 있다. 4월 21일 총파업으로 서안지구 내 상점과 은행, 학교 등이 문을 닫고 대중교통 운행도 전면 중단됐다. 이스라엘 정부는 1993년 오슬로 협정에 따라 서안지구 점령지 반환과 이스라엘군 철수를 약속했지만, 그 이후에도 ‘이스라엘 정착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대를 철수하지 않았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정착촌을 잇는 8m 높이의 콘크리트 분리 장벽을 세워 불법적으로 자국 영토를 확장해 왔다. 서안지구 내 유대인 정착촌 건설은 국제법 위반이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2016년 이스라엘에 정착촌 건설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네타냐후는 정착촌을 확대, 서안지구 내 유대인 인구는 50만명을 넘어섰다. 서안지구의 팔레스타인 인구는 270만명이다. 이타마르 벤그비르 이스라엘 국가안보부 장관 등 내각 내 극우 인사들은 서안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며 유대인 정착민들을 무장시키는 등 폭력을 부추기고 있다. 

이스라엘 인질의 다수는 이중국적자이므로 각국은 가자전쟁의 당사자이다. 각국은 코로나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피로감이 높기 때문에 가자전쟁이 멈추길 바라고 있다. 서방은 일단 우크라이나 전쟁에 집중해서 러시아에 타격을 주고자 한다. 

이집트와 시리아가 최근 4차 중동전쟁의 주역이다. 하지만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1979년 평화조약을 맺고 공식적인 외교관계에 있다. 하마스나 헤즈볼라 모두 테러집단으로 규정돼 있어 이들을 지원하기 힘들다. 시리아는 오랜 내전으로 인해 이스라엘과 전쟁을 수행하기 힘들다. 중동 이슬람 국가들은 전쟁에 소극적이나 이에 반발하는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면 이스라엘에 대해 강경책을 쓸 수 있다. 따라서 중동국가들은 난처한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미국과 함께 전쟁을 중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4. 가자전쟁과 세계대전의 위험


세계대전은 동맹국들 간의 전쟁이다. 미국은 유럽의 나토 아시아에서 쿼드 등 군사동맹을 강화하고 있으며 양자를 결합시키고 있다. 반면 러시아, 중국, 북, 이란 등은 서로 동병상련과 협력을 확대하나 낮은 수준의 반미전선에 불과하고 동맹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또한 세계대전은 복수의 지역 전선을 필요로 하는데, 우크라이나 전쟁, 가자 전쟁은 이미 진행형이고, 대만과 코리아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미국의 작전계획에 따르면 대만과 북 등 적국 인접에서 치러지는 군사훈련은 저강도전쟁이다. 경제제재와 봉쇄 역시 저강도 전쟁이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와 대리전쟁을 치루고 있고, 중국, 북, 이란과는 경제전쟁과 대만 저강도 전쟁을 치르고 있다. 가자 전쟁의 본질 역시 이슬람 세력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세력의 대리전쟁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세계는 이미 저강도 세계전쟁에 돌입했으며, 대만과 코리아반도에서 냉전이 열전으로 돌변한다면 제3차 대전의 위험성도 존재한다. 다만 핵무기 존재와 상호의존성의 세계체제를 볼 때 미중러의 전면적인 열전의 가능성은 낮다고 볼 수 있다. 미중러의 전면전의 가능성이 낮다고 해도 코리아반도와 대만에서 열전이 발생할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미국 본토에서 전면전이 일어날 가능성과 코리아반도에서 전면전이 일어날 가능성은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전쟁의 가능성은 단 1%라도 통제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코리아반도에서 군사적 대립은 매우 높은 전쟁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⓹ 뉴라이트 정치세력의 형성과 몰락

한국과 미국의 신구 극우 비교


김장민(정치경제학연구소 프닉스 연구위원)


뉴라이트전국연합은 2005년 창립선언문에서 연이은 좌파의 집권을 지적하면서 "우파는 지난 60년간 성과를 좌파에게 강탈당한 채 침묵해야 하는가?"라고 탄식했다. 실제로 노무현 정부시절부터 뉴라이트 인사들이 보수정권 출범을 위해 보수정당에 적극적으로 결합했다. 


김영삼 정부 시절 정책기획수석을 지낸 박세일 전 서울대 교수는 노무현 정부 초대 총리를 제안 받았으나 햇볕정책에 반발하여 한나라당에 영입돼 여의도연구소 소장과 정책위 의장을 역임했다. 박세일은 세종시 행정수도 추진에 반발하며 의원직을 사직했다. 박세일은 2012년 총선에서 국민생각당 대표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뉴라이트전국연합 창립을 주도한 김진홍 목사는 이명박 전 대통령과 동갑내기 친구이다. 2007년 12월 25일 자 <중앙일보> 기사 '이명박이란 대통령감 있어 2년 전 뉴라이트 운동 시작'에 따르면 뉴라이트전국연합이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환이었음을 알 수 있고 김진홍 스스로 이를 시인했다. 


뉴라이트전국연합은 이명박 후보에 대한 지지선언을 했다. 뉴라이트전국연합의 제성호 공동상임대표는 외교통상부 인권대사, 이석연 변호사는 법제처장, 박영모 조직국장과 한오섭 기획실장은 청와대 행정관이 됐다. 장제원 부산연합 공동대표 등은 2012년 총선에서 당선됐다. 뉴라이트전국연합은 이명박  당선이라는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자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특히 2008년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가 퇴조하자 뉴라이트전국연합의 친기업적인 노선도 대중에게 외면당했다.



이명박, 박근혜 당선 이후 조직 목표가 애매해져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은 노사모를 흉내 내면서 박근혜 의원이 한나라당 대표로 선출되던 2004년 3월 정광용 전직 CF 감독 겸 광고회사 사장에 의해 생겼다. 박사모는 처음부터 팬클럽보다는 정치조직의 성격을 지녔으며 2008년 총선 때 이재오, 이방호 등 친이명박계 '5적 낙선운동'을 벌여 4명을 낙선시켰다. 2008년 총선에서 한나라당 공천을 받지 못한 친박연대 소속 14명이 당선됐다. 2008년 6월 3일 박사모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집회에 가세했다.


2011년 4월 박사모 7주년 창립기념식에 한나라당 전·현직 최고위원 등 6천여 명이 참석했다. 박사모는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전국은 물론 해외지부까지 구성하고 선거운동에 참여했다. 하지만 박사모 역시 박근혜 당선이라는 목적을 달성한 후 쇠퇴해졌다. 특히 박사모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다수가 흩어지고 나머지는 탄핵에 반발하면서 과격한 행태를 보였다. 



박근혜 탄핵 이후 대규모 과격시위로 외면당해


여당인 새누리당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대한 입장 차이로 분당한 끝에 자유한국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에 정광용 등 친박세력들이 새누리당 당명을 사용했다. 자유한국당을 탈당한 조원진 의원이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 확정됐다. 새누리당 당권을 장악한 정광용의 친박사모계는 대선 이후 조원진을 제명했다. 조원진 의원 등이 탈당해 대한애국당을 창당하자 새누리당은 원외 정당이 되었다. 정광용은 2017년 12월 폭력집회 혐의로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으나 3개월 뒤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홍문종 의원은 대한애국당에 결합했다가 탈당하여 친박신당을 창당했으나 2020년 총선에서 원외정당이 됐다. 조원진의 대한애국당은 우리공화당으로 개명한 후 김문수와 함께 자유공화당을 창당했다가 김문수가 이탈하자 우리공화당으로 당명을 환원했다. 우리공화당은 2020년 총선에서 지역구 후보 41명, 비례대표 후보 15명이 출마하였으나 전원 낙선하여 원외정당이 되었다. 2022년 지방선거에서 기초의원도 당선시키지 못했다. 


정리하면 뉴라이트 정치세력은 이명박, 박근혜가 당선되자 조직목표가 애매해져 쇠퇴했으며,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사회적 영향력을 상실했다. 2020년 총선에서 이들이 만든 새누리당, 친박신당, 우리공화당 모두 양당제의 벽을 넘지 못하고 몰락했다.